유현아를 예뻐하던 그가, 결국엔 한 푼의 유산도 그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유현진은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딸을 아끼면서도 재산을 나눠주기는 싫어했다. 그 말을 들은 유현아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물었다. “너도 재산은 아들한테만 물려주고 딸에게는 주지 않을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너한테 줄 거야. 네가 날 데리고 다니면서 즐겁게 살면 돼. 돈이 필요하면 자기들이 벌어야지.”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네 아버지한테서 유산 물려받은 거잖아. 왜 네 자식한테는 그렇게 엄격하게 굴어?”강한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집안 덕분에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한 건 맞아. 하지만 그냥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어.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렸겠지. 아버지 유산은 할머니가 계속 관리하고 계셨고, 난 그 유산을 건드린 적이 없어. 만약 내가 능력 없이 그 자리에 올랐다면, 한성을 나에게 물려줬어도 지켜내지는 못했을 거야.”그는 말이 잠시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맥락이야. 나한테서 뭔가를 가지려면,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보여줘야 해.”강한서의 이런 교육 이념은 아마 정인월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유현진은 생각했다. 왜냐면 정인월이 바로 이렇게 그를 교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민서는 반대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신미정의 얄팍한 사상과 좁은 시야의 영향을 받았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현진 같은 얼빠가 한 눈에 강한서를 찜했으니, 꽤 안목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왜 웃어?”강한서가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유현진이 고개를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재산을 나한테 다 물려주면, 네가 늙고 쇠약해졌을 때, 내가 널 차버리고 네 돈으로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살까 봐 걱정은 안 돼?”강한서: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 여자
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후원 딱 한 번 했어. 라이브로 추첨하길래 10명, 일 인당 2000만 원, 그냥 한 번 해볼까 하고 몇만 원만 후원한 거야.”결과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어떤 스트리머가 밑지는 장사를 하겠는가. 2억을 쓸 수 있다는 건, 20억, 심지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한 번 해볼까’하는 그 마음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써서 만약 추첨에 걸린다면 그거야말로 자전거가 마세라티로 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트리머도 계속 참여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추첨이 될 확률이 높다고 부추겼다. 이슈가 되면 될수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수십, 수백 명에 달하는 시청자가 참여했으니 추첨 될 확률은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뻔했다. 팬들은 돈을 퍼부으며 이슈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런 데 속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유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가방 하나도 2000만 원은 훨씬 넘는 가격이었다. 그는 유현진이 늘 공짜로 주어지는 일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렸다. 전에도 매번 놀러 가서 돌아올 때면, 꼭 백화점 부근의 로또 가게에서 로또를 샀다. 도우미가 옷을 씻을 때면 늘 그녀의 주머니에서 로또를 몇 장 발견하곤 했다. 한 번은 6만 원이 당첨되었는데 그녀는 기뻐 춤이라도 출 지경이었고, 그를 끌고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갔다. 6만 원에 당첨이 되고 60만 원이 넘는 돈을 소비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얼마나 큰 돈이 당첨되는가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짜로 무언가를 얻었다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잣집 딸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쪼잔하고 세속적이었고, 말을 독하게 하면서 마음은 또 여렸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에 그는 푹 빠져버렸다. 병실에서는 여전히 싸우는 중이었다. 백혜주는 유상수의 남녀 차별적인 발언에 분노를 터뜨렸다. “딸이 어때서요? 딸은 오빠 자식 아니
유상수가 그녀를 또 잡으려고 했지만 백현석이 그의 손을 막으며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매형, 누나가 이런 꼴을 당하고도 매형한테 심한 소리 한 번 한 적 없어요. 대체 누나를 어떤 지경까지 내몰려고 그러시는 거예요?”유상수는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현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제일 좋은 변호사를 모셔서 누나의 소송을 도울 거예요. 현아랑, 서훈이 우리가 꼭 데려갈 겁니다. 매형도 매형 변호사에게 준비하라고 하세요.”그에 유상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백현석은 이미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주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니, 어떻게 되든 그에겐 유리했다. 게다가 그와 백혜주의 결혼이 끝나기만 하면, 그때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믿을 수 없어졌다.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유상수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백혜주를 막아섰다. 그는 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혜주야. 화내지 마. 내가 잠시 미쳐서, 정신이 나갔어.”“네가 17살 때부터 나를 만나서 오랜 세월을 명분도 없이 내 옆에 있었는데, 난 너한테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 해주고, 이런 일까지 겪게 했어.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백혜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내가 이젠 나이도 먹고 갓 스물이 된 여자애랑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알아요. 이게 아마 제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벌이겠죠. 받아들일게요.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는데, 좋게 끝내요.”유상수는 비통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이혼 안 해. 현아, 서훈이랑 너,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누구도 없어서는 안 돼. 넌 걱정하지 말고 태교에만 신경 써. 다시는 지우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이 애가 우리한테 온 이상, 모두 운명이라고 생각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아. 그리고 연서는, 돈을 줘서 애를 지우라고 할게. 다신 걔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백혜주가 쉰 소리로 말했다. “날 속이려
최연서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아이로 대표님을 협박할 생각이 아니에요. 전 그저 이 아이와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비록 처음 아기의 존재를 알았을 땐 많이 당황했지만, 요즘엔, 이 아이로 인해 욕심이 생겼어요. 제 것이 아닌 사람을 원하게 만들었어요…”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울먹거림이 더해졌다. “대표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대표님 말씀대로 아이도 지울게요. 하지만, 오늘은 안 하면 안 돼요? 의사 선생님이 방금 저에게 아기 심장 소리를 들려주셨어요. 이미 아이가 듣고 있을지도 몰라요.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요. 아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최연서의 눈물이 유상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하현주와 너무 똑같았다. 게다가 그의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더 하현주와 비슷해졌다. 그녀가 울면서 자신에게 말할 때면, 그는 마치 농구하다 다친 그가 마음이 아파서 눈시울을 붉히던 이십 대의 하현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유상수는 순간 넋을 잃었고 그의 마음도 약해져 버렸다. 그는 여전히 하현주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늘 하현주와 지긋지긋한 사이가 된 이유가, 하현주가 너무 강압적으로 그를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자신이 이런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쁘고, 능력 있고, 게다가 당시 같은 반 남자들의 여신이었던 여자였으니까. 볼품없는 동창들이 가질 수 없는 여신이, 자신을 선택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의 비열한 허영심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하현주는 언제나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고, 접대 자리가 아니면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오는 시간까지 제한하려고 했고 10시가 넘으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랬기에 그는 가끔, 하현주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다루기 좋은 사람을 골라 그녀의 통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런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을 유현진에게 들킨 두 사람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진아, 네가 병원엔 어쩐 일이야?”그래도 유상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현진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강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 대표랑 같이 온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문안 온 건데, 아래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요.”그녀는 유상수와 백혜주를 번갈아 보더니 유상수가 품에 안아 보호하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이 사람은—”유상수가 막 대답하려는데, 백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사 비서.”그러자 유상수는 입을 다물었다. 불륜녀였던 백혜주가 하현주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땐 기세가 등등했지만, 혼인신고를 한 지 일년이 채 안 되는 사이, 유상수는 벌써 백혜주에게 질려 더 어린 여자를 찾았다. 그야말로 벌을 받은 셈이었다. 백혜주는 유상수가 밖에서 바람이 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제일 먼저 최연서의 신분을 감추었다. 유현진은 말없이 최연서를 훑어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비서분, 낯이 익네요.”하현주에 대한 유현진의 마음이 얼마나 큰데, 버젓이 보이는 그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그녀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백혜주는 부아가 치밀었다. 유상수 이 개자식은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하필 하현주랑 비슷하게 생긴 걸 찾아서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유현진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나도 처음 쟤를 봤을 때 낯이 익다고 생각했어요. 눈매 좀 봐요, 현주 언니랑 정말 비슷하죠.”백혜주는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언니가 명이 짧아서 일찍 가버려서 그렇지, 만약 나란히 서 있었으면 모녀 같았을 거예요. 낯이 익지만 않았어도 고용하지 않았을 텐데. 애가 착하고 부지런해서, 평소 심부름하는 것도 사람들 눈치를 잘 살펴요.”낯짝도 두껍게 내뱉는 말들,
유상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자네가 현진이와 이혼했지만, 내 마음속에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일세. 게다가 오랫동안 불러서 습관도 되었고.”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습관, 고치셔야 할 것 같네요. 현진이 아버지도 아니고, 이론적으로 저와 유 대표님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까요. 습관이 되셨다고 계속 그렇게 부르시면, 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설명해야 해요. 그러니, 대표님께서 고치시죠.”유상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또 “현진이”라고 부르는 강한서의 말에, 그는 유현진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진과 강한서의 관계는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에 유현진을 양녀로 삼으려는 유상수의 결정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동안 강씨 집안이 그에게 준 혜택이 너무 컸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쉽게 포기하겠는가?유상수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더니 말했다. “내가 비록 현진이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키우지 않았는가. 전에도 현진이한테 양녀로 들이는 것에 대해 말했었고, 현진이도 마음속으로는 그걸 원하는 것 같았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래도 명의상 내가 아버지 아닌가.”그의 말에 백혜주가 화를 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오빠가 유현진 씨를 양녀로 들인다고요?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유상수는 그에 바로 표정을 굳혔다. “남자끼리 얘기하는데, 끼어들지 마!” 백혜주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다.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시켰으면 되었지, 이젠 또 유현진을 양녀로 들이겠다니, 유상수가 미친 게 아닐까? 유현진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원한을 품고 있는데 이런 독사 같은 애를 곁에 두겠다니, 유상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그녀는 화가 나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유상수를 잡으려고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나 배가 아파요.”유상수는 백혜주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려고 괜히 연기를 한다고 생각
‘남자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다니!’유현진은 강한서가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연기하는 티가 너무 많이 나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완전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강한서는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 태연하고 진지한 모습은, 그녀마저도 그의 헛소리를 믿게 만들었다. 유상수는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흥미를 가졌지만, 곧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아들딸이라는 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 아닌가?”강한서가 말했다. “지금은 기술이 굉장히 발전했고, 유전 공학, 유전자 변형은 더 이상 말뿐인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죠.”그의 말에 유상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그럼 그 의사 연락처 좀 보내주게.”강한서가 바로 대답했다. “네. 연락하실 때, 제 이름을 말씀하시면 돼요.”유상수는 강한서에게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퍽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많은 말들을 할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는 유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내가 한 말은 언제나 유효해. 여자애가 혼자 밖에서 힘들 거야. 너만 원한다면, 유씨 가문은 언제나 네 그늘이 되어줄 거야.”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유상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상수는 어쩌다 아버지다운 면모를 보이며 강한서에게 당부했다. “강 대표, 현진이 잘 부탁하네.”강한서를 입술을 짓이기며 “네”라고 대답했다. 유상수는 그제야 빠른 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최연서를 끌고 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 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니? 눈치챌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강한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저 확률이 높다고 했을 뿐이야. 확신하지 않았다고. 만약 아니라면, 낮은 확률에 걸렸을 뿐이야. 이런 걸 여지를 남겼다고 하는 거지.”말하며 그는 유현진의 손가락을 잡았다. “가자
“다른 얘기도 나눴어. 그 작은 고모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만 강운 씨도 잘 모르는 것 같아.”강한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면 이상한 거지. 강운이 아버지와 주시윤은 사이가 그저 그렇거든. 평소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게다가 주시윤의 남편을 그 집안에서는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혼인 신고만 했고, 결혼식도 못 하게 하거든. 주강운도 그 고모부를 몇 번 보지 못했어.”그에 유현진은 의아해했다. “지난번 주얼리 전시회에서 강운 씨 어머니와 강운 씨 고모의 사이가 꽤 좋은 것 같았는데. 왜 사이가 별로라고 하는 거야?”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니 당연히 예의는 지켜야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강운이한테 두 살 어린 동생이 있었어. 한 살 때 장난감 안에 있는 작은 부품에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떠났거든.”당시 주시윤이 유학에서 돌아왔고, 주진철은 굉장히 기뻐했다. 그랬기에 환영식을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다. 굳이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했었기에 주진철과 함께 살고 있던 주강운의 부모님이 파티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날도 그의 부모님은 파티 준비를 위해 밖에 물건을 사러 나갔었다. 그 결과, 그들 부부는 주시윤의 환영식을 위해 불려 다녔고 온 가족이 주시윤을 중심으로 맴돌았다. 집에 있는 두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사고가 생겼다. 곁에 어른이 없었으니, 아이의 식도에 물건이 걸려도 아무도 몰랐다. 주강운도 고작 3, 4살이었으니, 동생이 숨을 쉬지 못하는 원인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도, 그들은 그저 그가 떼를 쓴다고 생각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우미가 확인하러 갔을 때는 이미,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심장 박동이 멈추었었다. 병원으로 옮겨지자 의사는 바로 뒷일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주강운의 어머니는 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실 파티 준비는 도우미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하지만 주진철이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