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수가 그녀를 또 잡으려고 했지만 백현석이 그의 손을 막으며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매형, 누나가 이런 꼴을 당하고도 매형한테 심한 소리 한 번 한 적 없어요. 대체 누나를 어떤 지경까지 내몰려고 그러시는 거예요?”유상수는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현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제일 좋은 변호사를 모셔서 누나의 소송을 도울 거예요. 현아랑, 서훈이 우리가 꼭 데려갈 겁니다. 매형도 매형 변호사에게 준비하라고 하세요.”그에 유상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백현석은 이미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주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니, 어떻게 되든 그에겐 유리했다. 게다가 그와 백혜주의 결혼이 끝나기만 하면, 그때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믿을 수 없어졌다.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유상수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백혜주를 막아섰다. 그는 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혜주야. 화내지 마. 내가 잠시 미쳐서, 정신이 나갔어.”“네가 17살 때부터 나를 만나서 오랜 세월을 명분도 없이 내 옆에 있었는데, 난 너한테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 해주고, 이런 일까지 겪게 했어.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백혜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내가 이젠 나이도 먹고 갓 스물이 된 여자애랑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알아요. 이게 아마 제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벌이겠죠. 받아들일게요.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는데, 좋게 끝내요.”유상수는 비통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이혼 안 해. 현아, 서훈이랑 너,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누구도 없어서는 안 돼. 넌 걱정하지 말고 태교에만 신경 써. 다시는 지우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이 애가 우리한테 온 이상, 모두 운명이라고 생각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아. 그리고 연서는, 돈을 줘서 애를 지우라고 할게. 다신 걔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백혜주가 쉰 소리로 말했다. “날 속이려
최연서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아이로 대표님을 협박할 생각이 아니에요. 전 그저 이 아이와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비록 처음 아기의 존재를 알았을 땐 많이 당황했지만, 요즘엔, 이 아이로 인해 욕심이 생겼어요. 제 것이 아닌 사람을 원하게 만들었어요…”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울먹거림이 더해졌다. “대표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대표님 말씀대로 아이도 지울게요. 하지만, 오늘은 안 하면 안 돼요? 의사 선생님이 방금 저에게 아기 심장 소리를 들려주셨어요. 이미 아이가 듣고 있을지도 몰라요.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요. 아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최연서의 눈물이 유상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하현주와 너무 똑같았다. 게다가 그의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더 하현주와 비슷해졌다. 그녀가 울면서 자신에게 말할 때면, 그는 마치 농구하다 다친 그가 마음이 아파서 눈시울을 붉히던 이십 대의 하현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유상수는 순간 넋을 잃었고 그의 마음도 약해져 버렸다. 그는 여전히 하현주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늘 하현주와 지긋지긋한 사이가 된 이유가, 하현주가 너무 강압적으로 그를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자신이 이런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쁘고, 능력 있고, 게다가 당시 같은 반 남자들의 여신이었던 여자였으니까. 볼품없는 동창들이 가질 수 없는 여신이, 자신을 선택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의 비열한 허영심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하현주는 언제나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고, 접대 자리가 아니면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오는 시간까지 제한하려고 했고 10시가 넘으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랬기에 그는 가끔, 하현주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다루기 좋은 사람을 골라 그녀의 통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런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을 유현진에게 들킨 두 사람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진아, 네가 병원엔 어쩐 일이야?”그래도 유상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현진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강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 대표랑 같이 온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문안 온 건데, 아래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요.”그녀는 유상수와 백혜주를 번갈아 보더니 유상수가 품에 안아 보호하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이 사람은—”유상수가 막 대답하려는데, 백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사 비서.”그러자 유상수는 입을 다물었다. 불륜녀였던 백혜주가 하현주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땐 기세가 등등했지만, 혼인신고를 한 지 일년이 채 안 되는 사이, 유상수는 벌써 백혜주에게 질려 더 어린 여자를 찾았다. 그야말로 벌을 받은 셈이었다. 백혜주는 유상수가 밖에서 바람이 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제일 먼저 최연서의 신분을 감추었다. 유현진은 말없이 최연서를 훑어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비서분, 낯이 익네요.”하현주에 대한 유현진의 마음이 얼마나 큰데, 버젓이 보이는 그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그녀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백혜주는 부아가 치밀었다. 유상수 이 개자식은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하필 하현주랑 비슷하게 생긴 걸 찾아서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유현진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나도 처음 쟤를 봤을 때 낯이 익다고 생각했어요. 눈매 좀 봐요, 현주 언니랑 정말 비슷하죠.”백혜주는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언니가 명이 짧아서 일찍 가버려서 그렇지, 만약 나란히 서 있었으면 모녀 같았을 거예요. 낯이 익지만 않았어도 고용하지 않았을 텐데. 애가 착하고 부지런해서, 평소 심부름하는 것도 사람들 눈치를 잘 살펴요.”낯짝도 두껍게 내뱉는 말들,
유상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자네가 현진이와 이혼했지만, 내 마음속에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일세. 게다가 오랫동안 불러서 습관도 되었고.”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습관, 고치셔야 할 것 같네요. 현진이 아버지도 아니고, 이론적으로 저와 유 대표님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까요. 습관이 되셨다고 계속 그렇게 부르시면, 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설명해야 해요. 그러니, 대표님께서 고치시죠.”유상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또 “현진이”라고 부르는 강한서의 말에, 그는 유현진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진과 강한서의 관계는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에 유현진을 양녀로 삼으려는 유상수의 결정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동안 강씨 집안이 그에게 준 혜택이 너무 컸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쉽게 포기하겠는가?유상수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더니 말했다. “내가 비록 현진이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키우지 않았는가. 전에도 현진이한테 양녀로 들이는 것에 대해 말했었고, 현진이도 마음속으로는 그걸 원하는 것 같았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래도 명의상 내가 아버지 아닌가.”그의 말에 백혜주가 화를 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오빠가 유현진 씨를 양녀로 들인다고요?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유상수는 그에 바로 표정을 굳혔다. “남자끼리 얘기하는데, 끼어들지 마!” 백혜주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다.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시켰으면 되었지, 이젠 또 유현진을 양녀로 들이겠다니, 유상수가 미친 게 아닐까? 유현진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원한을 품고 있는데 이런 독사 같은 애를 곁에 두겠다니, 유상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그녀는 화가 나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유상수를 잡으려고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나 배가 아파요.”유상수는 백혜주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려고 괜히 연기를 한다고 생각
‘남자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다니!’유현진은 강한서가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연기하는 티가 너무 많이 나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완전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강한서는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 태연하고 진지한 모습은, 그녀마저도 그의 헛소리를 믿게 만들었다. 유상수는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흥미를 가졌지만, 곧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아들딸이라는 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 아닌가?”강한서가 말했다. “지금은 기술이 굉장히 발전했고, 유전 공학, 유전자 변형은 더 이상 말뿐인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죠.”그의 말에 유상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그럼 그 의사 연락처 좀 보내주게.”강한서가 바로 대답했다. “네. 연락하실 때, 제 이름을 말씀하시면 돼요.”유상수는 강한서에게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퍽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많은 말들을 할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는 유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내가 한 말은 언제나 유효해. 여자애가 혼자 밖에서 힘들 거야. 너만 원한다면, 유씨 가문은 언제나 네 그늘이 되어줄 거야.”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유상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상수는 어쩌다 아버지다운 면모를 보이며 강한서에게 당부했다. “강 대표, 현진이 잘 부탁하네.”강한서를 입술을 짓이기며 “네”라고 대답했다. 유상수는 그제야 빠른 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최연서를 끌고 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 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니? 눈치챌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강한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저 확률이 높다고 했을 뿐이야. 확신하지 않았다고. 만약 아니라면, 낮은 확률에 걸렸을 뿐이야. 이런 걸 여지를 남겼다고 하는 거지.”말하며 그는 유현진의 손가락을 잡았다. “가자
“다른 얘기도 나눴어. 그 작은 고모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만 강운 씨도 잘 모르는 것 같아.”강한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면 이상한 거지. 강운이 아버지와 주시윤은 사이가 그저 그렇거든. 평소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게다가 주시윤의 남편을 그 집안에서는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혼인 신고만 했고, 결혼식도 못 하게 하거든. 주강운도 그 고모부를 몇 번 보지 못했어.”그에 유현진은 의아해했다. “지난번 주얼리 전시회에서 강운 씨 어머니와 강운 씨 고모의 사이가 꽤 좋은 것 같았는데. 왜 사이가 별로라고 하는 거야?”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니 당연히 예의는 지켜야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강운이한테 두 살 어린 동생이 있었어. 한 살 때 장난감 안에 있는 작은 부품에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떠났거든.”당시 주시윤이 유학에서 돌아왔고, 주진철은 굉장히 기뻐했다. 그랬기에 환영식을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다. 굳이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했었기에 주진철과 함께 살고 있던 주강운의 부모님이 파티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날도 그의 부모님은 파티 준비를 위해 밖에 물건을 사러 나갔었다. 그 결과, 그들 부부는 주시윤의 환영식을 위해 불려 다녔고 온 가족이 주시윤을 중심으로 맴돌았다. 집에 있는 두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사고가 생겼다. 곁에 어른이 없었으니, 아이의 식도에 물건이 걸려도 아무도 몰랐다. 주강운도 고작 3, 4살이었으니, 동생이 숨을 쉬지 못하는 원인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도, 그들은 그저 그가 떼를 쓴다고 생각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우미가 확인하러 갔을 때는 이미,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심장 박동이 멈추었었다. 병원으로 옮겨지자 의사는 바로 뒷일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주강운의 어머니는 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실 파티 준비는 도우미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하지만 주진철이
유현진이 파일을 펼쳐 보았다. 백현석에 관한 자료였다. 백현석... 아니, 손태오라고 부르는 것이 맞았다. 그의 출신은 신기하리만치 백혜주와 비슷했다. 그 역시도 작은 도시 출신이었고, 10대 때 한주시로 상경했다. 종업원, 누드모델, 이발소 직원, 자동차 수리...아무튼 생계를 위해서 거의 모든 일을 해봤었다. 제일 오래 한 일 중 하나는 모델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업원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의 가족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했었다. 그의 두 형들도. 많은 사람은 그가 밖에서 사고로 죽은 줄 알고 몇 년 전, 사망 신고를 해버렸다. 그런 이유로 백혜주는 완벽하게 그를 백현석으로 둔갑시켰다. 애초부터 신분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유괴되어 오랫동안 실종된 사람으로 둔갑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와 백혜주는 10년 전에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다만 백혜주는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라,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손태오가 백혜주의 돈으로 미술 학원을 다녔으니, 그 증거는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손태오는 성형을 한 적이 있어서, 그는 원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현진은 그의 성형 전 사진을 확인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 유서훈이 이 사람을 닮았잖아!”강한서는 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예측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조사를 한 것은 단지 그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정신을 차린 유현진이 서류를 덮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재밌지. 3 개월... 아마 그 정도도 필요 없을 거야. 백혜주가 우리보다 더 급할 테니까.”손태오는 그녀가 자기 아이의 앞날을 위해 주시윤에게 준비해 둔 카드였다. 이 시점에 그녀가 아이를 더 낳을 리가 없었다. 정력도 없었고, 들킬까 봐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손태오는 백혜주에게 일편단심인 것 같았다. 백혜주는 머리가 굉장히
강한서는 눈을 움찔거리더니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남자 옷이 있다고?”유현진이 말했다. “전에 국내 의류 브랜드 광고 촬영할 때 디자인이 예뻐서 너 주려고 두 벌 가져왔었어. 원단도 부드럽고. 하지만 가격이 비싼 건 아니라서, 네가 싫으면 됐어.”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멈칫거렸다. “너 나한테 비싼 옷 사준 적이 별로 없잖아? 왜 그렇게 격식 차리면서 말하는 거야?”유현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언제 너한테 비싼 옷을 사준 적이 없어? 네 양말은 한 켤레에 몇만 원씩 했지만 내가 신는 건 한 켤레에 몇백 원짜리였어!”강한서가 말했다.“양말 빼고.”“속옷은? 속옷도 한 벌에 몇만 원씩 하는 거잖아. 어떤 건 몇십만 원씩 하는 거야!”강한서: ...“속옷 빼고.”유현진은 입을 뻐금거리더니 결국 변명했다. “비싼 옷을 안 사는 건 아까워서가 아니라, 가성비 때문인 거 알잖아. 유명 브랜드 옷은 브랜드 프리미엄이 붙어 있어서 몇백만 원짜리 옷도 원가는 몇만 원밖에 안 하잖아. 일상복으로 입을 건데, 왜 그런 돈을 쓰겠어?”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마지막엔 오히려 당당해졌다. “매번 여러 군데 비교하면서 사는 나는 안 힘들겠어? 다 네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거잖아. 속 좁은 사람처럼 왜 네가 그러는 거야?”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여러 군데 비교하면서 사는데, 색이 빠지는 수영복으로 고른 거야?”유현진: ...민경하가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강한서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끔 어떤 바이어들은 클럽에서 비지니스 하기를 좋아했다. 골프를 치거나 수영을 하면서, 놀면서 미팅하는 것을 즐겼다. 강한서도 당연히 모든 과정에 동행해야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물을 좋아하는 바이어를 만나면 강한서가 수영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 꼭 그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러면서 강한서가 수영을 할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