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가 말했다.“머리가 지끈거려서.”유현진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말했다.“이리 와.”강한서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뭐 하려고?”유현진은 그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로 눕혔고 머리 마사지를 해주었다.“마사지해 주려고.”강한서는 그녀의 체향을 맡으며 얼굴을 허벅지에 묻어버리곤 눈을 감았다.유현진은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마시지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는 두통이 많이 사라짐을 느꼈다.“나 아까 너랑 성서원 씨가 나눈 대화를 들었어.”유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 그래? 걘 무시해.”강한서가 대충 답했다.유현진은 그의 턱을 만졌다. 무언가 손가락을 찌르는 것이 아마도 수염인 것 같았다.“혹시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야?”강한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살짝 웃음소리를 내었다.유현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웃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혹시 내가 그 여자를 걱정하고, 그 여자와 너 사이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아니야?”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너 정말 그 여자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그건 연기야. 일부러 내가 데려갈 수밖에 없게끔 연기하는 거라고. 오늘은 성서원의 어머니를 찾아갔겠지만, 내일은 어쩌면 강운이, 아니면 성우네 집으로 찾아가 연기를 했을 거야. 그 여자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건드려 일부러 불쌍한 척 동정심 유발할 거고 집안일을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닐 거야. 물론 좋지 않은 얘기로만. 그 여자는 지금 내 명예를 떨어뜨려 내가 스스로 그 여자를 다시 데려가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고.”신미정은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강한서가 그녀를 강씨 가문에서 쫓아냈으니 그녀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강한서를 찾아와 빌지는 않았다. 신미정은 강한서가 자존심을 굽혀 자신을 다시 데려가길 원했다.강한서는 신미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예전에도 그의 아버지가 신씨 가문의 사업을 도와주지
유현진은 오히려 그의 반응이 재밌게 느껴졌고 이내 다시 말을 걸었다.“그 사람이 대체 뭘 했다고 욕까지 하는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틀어 물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유현진은 그의 횡설수설 속에서 포인트를 캐치했다.원인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 본인 때문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다시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웃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그녀가 금방 강한서와 결혼했을 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강한서의 친구에게 접근했었다.그러나 강한서의 친구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녀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쿠키를 만들어 ‘뇌물'을 그들에게 주었고 강한서의 취향을 알아내려 했다.강한서의 친구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강한서의 취향을 하나둘씩 알려주곤 했었다.강한서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고 그녀와 그 일로 다투게 되었었다. 그녀는 줄곧 강한서가 그녀가 ‘뇌물'로 그의 취향을 알아낸 것에 대해 창피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녀는 강한서가 그때 그녀와 싸운 이유가 동창회에서 우연히 성서원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껍데기만 화려하다든가, 이리저리 흘리고 다닌다든가, 허영심으로 가득하다든가, 아부를 떤다든가, 머리가 꽃밭이라든가 등 말을 했었다고 했다...강한서는 그저 일부분만 그녀에게 말해줬을 뿐 사실 그 내용은 더 심각했다. 성서원이 했던 말들은 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가 결혼할 때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그런 얘기를 듣게 된 강한서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음식으로 좋은 대접을 해주었는데 결국 그들은 그녀를 껍데기만 화려한 허영심 가득한 사람 취급했고 모든 불쾌한 언어들을 총동원하여 유현진을 깎아내리고 있었기에 강한서는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화를
그랬다, 강한서는 연애를 정말로 한 번도 못 해봤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초에 강한서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신경 쓰긴 뭘 신경 써!'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그래서, 나한테 네 친구에게 쿠키 주지 말라 한 것도 성서원 씨의 말 때문이었어?”강한서는 이마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면서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진아, 난 종종 어떻게 말을 해야 네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잘 몰라. 사실 그날도 네가 걔들한테 선물을 줘서 화가 난 게 아니야. 내가 화가 난 건 네가 정성스럽게 만든 쿠키를 진심을 담아 선물한 건데 뒤에서 그런 말이나 듣게 되고, 게다가 손까지 다친 네 모습을 보니까 화가 났던 거야. 너한테 화낸 것도 아니었어. 내가 화상연고를 사서 메모까지 적어뒀는데 네가 보지도 않고 버린 거잖아.”“... 난 화상연고를 본 적이 없어.”강한서가 말했다.“난 분명 샀어.”강한서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억울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이야.”유현진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었다. 왜냐하면, 강한서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솔직해졌으니까.강한서가 사 온 걸 그녀가 아닌, 전에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버린 것이었다.가정부는 신미정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신미정이 가정부에게 시켜 버리라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흡사 신미정이 일부러 피임약을 정인월의 시야에 닿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이다.신미정은 처음부터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가 틀어지길 바랐다.강한서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원을 만나자마자 불쾌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강한서는 바로 기분이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도 이렇게 솔직했다면 우리한테 이미 유치원을 다닐 아이가 있었을 거야.”민경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유현진 또한 강한서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끙끙 앓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을 달래다 강한서는 결국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유현진은 고른 그의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이튿날 아침, 의사가 다시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땐 강한서가 이미 깨어있었다. 다만 유현진이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강한서는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의사는 조용히 그의 상태를 확인하곤 나가버렸다.유현진은 그렇게 오전 9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한서의 수려한 얼굴이었다. 유현진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주물럭거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엔 왜 날 힘들게 했어?”아침부터 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강한서는 그녀가 어제 말한 “의사가 한 말을 들어.”라는 말을 떠올리곤 기쁜 듯 웃었다.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어제 말한 보상 아직 못 받았는데, 언제 줄 거야?”부스스 깨난 유현진은 아직도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보상이라니?”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를 보며 강한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유현진은 순간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치워냈고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여긴 병원이야! 정신 차려!”강한서는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장난을 그만두기로 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일어나. 얼른 정리하고 집으로 데려다줄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을 벗겨 확인했다. 피부발진이 많이 사라진 그의 몸을 보며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일어나 정리하였다. 강한서는 병원비를 내러 갔고 유현진은 그런 그를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에서 깨어났던 터라 그녀는 머리도 빗지 않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만약 지인이 아니라면 절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최연서에게 연락해 어떻게든 유상수를 병원으로 오게 할 생각이었고 백혜주가 절대 아이를 지울 수 없게 방해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최연서에게 자세하게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었고 강한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왜 그래?”강한서가 말했다.“난 네가 유상수를 불러와 불륜 현장을 잡게 하려는 줄 알았거든.”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백혜주는 조심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그 여자가 백현석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었으니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한 유상수는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 백혜주가 지금 급하게 아이를 없애려고 하니 이것이 제일 증거가 될 거야. 난 절대 백혜주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생각이거든. 아이를 지운다고 해도 난 반드시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온 백혜주가 유상수에 의해 유산하는 꼴을 볼 거야!”“백혜주는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유상수랑 붙어먹은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한테 자식을 맡긴 거고. 결국엔 우리 엄마 목숨까지 앗아갔지. 모든 건 그 여자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까 그 여자에게도 내가 느낀 고통을 느끼게 해줄 거야!”강한서는 그녀가 꽉 쥔 주먹을 풀어주면서 손깍지를 꼈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복수해도 되는데, 저런 사람 때문에 네 손을 더럽히지는 마.”유현진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혹시 너도 이런 내가 두려워?”생각을 마친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제일 심하게 대했던 건 기껏해야 뺨 때리는 게 전부였잖아. 내가 이걸 나에 대한 너의 편애라고 봐도 돼?”“...”유현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넌 요구가 너무 낮아. 정말로 내가 나중에 너한테도 이럴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강한서가 눈이 휘어지게 웃더니 이내 다시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 아니까. 넌 나한테 손을 대지 못할 거잖아.”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렸다.“혹시 모르지. 네가 만약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한편, 연락을 받은 최연서는 바로 다시 유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이 넘어져 그만 피가 흘러나왔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유산의 징조임을 알게 된 유상수는 아들 학교도 뒤로하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유상수는 그녀를 데리고 제일 좋은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연서는 한주병원으로 가자며 한주병원의 산부인과가 한주시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말했다.유상수는 초조해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녀가 말하는 대로 따랐다.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나고 유상수는 최연서를 부축한 채 한주병원으로 오게 되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유현진과 강한서는 바로 반대편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탔다.이때의 백혜주는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젊은 여자를 부축하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유상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상수는 급하게 걸으면서 나직하게 젊은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괜찮아,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백혜주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왔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까맣게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유상수 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유상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백혜주를 보더니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엄청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혜주야, 네가 여긴 왜 온 거냐?”유상수의 품에 있던 여자는 백혜주가 유상수의 이름을 부르자 바로 몸을 움찔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백혜주는 차가워진 얼굴로 이를 갈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오빠가 여긴 왜 온 거예요? 이 여자는 또 누구고요?”유상수가 우물쭈물하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회사 직원이야. 몸이 안 좋다길래 데리고 와 본 거야.”“어디가 안 좋길래 산부인과를 다 찾아와요? 게다가 오빠가 왜 데리고 오는데요?”백혜주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만큼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탐내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유상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이런 곳에서 백
백혜주는 치밀어오르는 화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배가 서서히 아파져 오기 시작했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마침 진단서를 들고 오던 백현석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누나, 왜 그래요?”백혜주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지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유상수는 백현석의 목소리를 듣곤 바로 고개를 들었다. 백혜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치맛자락이 서서히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유상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두 명의 임산부는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가게 되었다.강한서는 한주병원에 아는 지인이 있었기에 미리 지인에게 얘기해 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최연서가 가짜 임신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의사는 그저 최연서의 태아가 불안정하다며 약을 처방해주곤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했다.그 말을 들은 유상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한편 백혜주 쪽은 다행히 유산이 되지 않았고 의사는 그저 나이도 많은 데다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출혈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게다가 아이는 무척 건강한 상태라고 했고 태아의 심박수 등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유상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간호사가 진단서를 들고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들어왔다.백현석이 받으려는 순간 유상수가 먼저 가로챘다. 그것이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게 뭐죠?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니요? 누가 수술을 한다는 거죠? 잘못 가져오신 게 아니에요?”간호사도 행여나 잘못 가지고 왔을까 봐 얼른 확인해 보았다.“백혜주 님이 아니신가요? 주민등록증 확인해 보니 백혜주 님이 맞는데요?”유상수는 미간을 확 구겼다.“저희는 임신중절수술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간호사가 말했다.“하지만 본인께서 이미 임신중절수술을 하겠다고 이곳에 직접 사인하셨습니다.”간호사가 낮은 소리로 이어서 물었다.“혹시 보호자와 상의가 되지 않은 건가요?”유상수는 백혜주의 사인을 발견하곤 안색이 더욱 안 좋아지게
“나한텐 사찰로 간다고 해놓고 지금 여기 와서 수술받으려고 했던 거냐?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해?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냐?!”백혜주의 머릿속엔 온통 최연서의 얼굴이 떠올랐고 유상수를 보자마자 그녀는 속이 메슥거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백현석은 얼른 쓰레기통을 들고 와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백혜주는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했고 그저 안색만 더욱 창백해져만 갔다.안쓰러운 백혜주의 모습에 유상수의 표정도 많이 누그러졌다.그는 침대 끝에 앉아 백혜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낳기로 약속했잖아. 대체 왜 지우려고 하는 거야?”백혜주가 싸늘해진 얼굴로 손을 빼내면서 따져 들었다.“그 여자랑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예요? 그 여자 배 속에 있는 그 잡종, 몇 개월이나 된 거죠?”자신의 아이를 잡종 취급하는 백혜주에 유상수는 바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나 백혜주도 임산부였고 게다가 피까지 흘린 적이 있었기에 그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설명했다.“걔는 우리 회사 인턴이야. 전에 협력 업체랑 몇 번 미팅 간 적이 있었어. 그러다 우연히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그는 뒷말을 삼켰다.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도 그땐 죄책감이 들었어. 너한테 말하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는데,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걔를 그냥 회사에서 자르려고 했는데 그날의 사고로 임신을 하게 되었대.”추악한 변명에 백혜주는 매 순간이 역겹게 느껴졌지만, 분노를 꾹 참으면서 계속 따져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게 내버려 두려고요? 그리고 하현주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저를 내쫓으려고요?”“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유상수는 기분이 언짢았다.“나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어. 난 걔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 나라고 뻔뻔하게 다니는 줄 알아? 그 어린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한테 당황한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