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를 알 수 없는 송민준의 호의는, 사실 유현진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주강운도 그녀를 챙겨주기는 했지만, 그녀가 주강운에게 답례를 하거나, 보상을 하면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주강운과 송민준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주강운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업계의 좋은 친구 같은 사이라면, 송민준은 조건 없이 선물과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누구든 감히 마음 놓고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녀가 송민준의 호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을까 봐서였다. 유현진은 송민준에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송 대표님.”송 대표님...이제 겨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송 대표님이라니?' 그는 유현진이 말하는 송 대표가 되고 싶지 않았다!송민준은 어두운 분위기를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죄송하긴요. 볼일 봐요. 시간 약속은 제가 다시 잡을게요.”마음이 놓인 유현진은 뒤돌아 강한서의 차에 올라탔다. 송민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벤츠가 시야에서 사라져서야 불퉁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쟤는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그 말을 들은 박해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딱 그렇다고 말 할 수도 없어요. 조강지처가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보기엔 강 대표님과 현진 씨,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송민준은 멈칫하더니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언제부터 눈이 먼 거야? 뭐가 어울려? 강한서 그 개자식이 현진이한테 가당키나 해?”박해서: ...참고 참던 박해서가 끝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제가 계속 드리지 못한 말이 있는데요. 그렇게 많은 좋은 여성분들 놔두고 왜 하필 강 대표님 전 와이프한테 그러세요? 거절 당하고 뒷담화나 하시고, 이렇게 속 좁은 분 아니셨잖아요.”송민준: ...그는 자신의 멍청한 비서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휴대폰을 꺼내던 유현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강한서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바보가, 내가 송민준을 짝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야?’눈을 굴리던 유현진이 연기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조금도 설레지 않는다면, 당연히 거짓말이지. 진심으로 짝사랑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한순간에 그 감정이 다 사라지겠어?”강한서: ...그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럼 왜 송민준을 거절하고 내 차에 탄 거야?”“왜냐면...”유현진이 말을 길게 늘어뜨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가 자기랑 같이 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불쌍하고 섭섭한 얼굴을 하고 있길래, 마음이 아파서.”그녀의 말에 움찔한 강한서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는 유현진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그녀의 턱을 잡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누가 울 것 같았다고 그래?”유현진이 작게 웃으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면 넌, 내가 민준 오빠한테 갈까 봐 두렵지 않아?”강한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정말 송민준이랑 가버린다고 해도, 그건 일 때문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잠시 말을 멈추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간다고 하면 날 기다리던 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갑자기 이해됐어.” 유현진이 그의 말에 놀라워했다. “무슨 기분인데?”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설레고 행복하다가 의기소침해져. 마음도 식었다가 뜨거워지고, 또 뜨거웠다가 다시 식고.”“감성적이 됐네.”유현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리는 건 무섭지 않아. 결과가 없는 기다림이 무서울 뿐이지.”유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곧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젠 너 기다리게 안 해.”유현진이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야지. 어차피 인턴 기간이잖아. 별로면 환불하면 돼.”강한서: ...“뭐 먹고 싶어?”강한서가 유현진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유현진이 말했다
유현진은 사실 욕심이 났지만 겉으로는 계속 아닌 척했다. “너 얼마 전에도 나한테 옷 많이 보냈었잖아. 아직 별로 입지도 못했는데, 새 옷 사는 건 좀 그렇잖아?”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난 나 말하는 건데.”유현진: ...말을 마친 강한서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옷 가게로 들어섰다. 유현진은 이를 악물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인턴 기간인데 이런 태도라니, 벌점이야!’가게에 들어서자 유현진은 바로 벌점에 대한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가가에는 신상이 잔뜩 걸려있었는데, 새로운 스타일의 옷에 그녀는 눈이 부시는 것 같았다. 유현진은 만지는 것마다 전부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가격을 확인하고는 다시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강한서가 그녀와 함께 쇼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바쁘기도 했지만, 유현진이 물건을 굉장히 오래 고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싼 것은 과감하게 지르고, 싼 물건에는 고민하는 스타일이었다. 일상복을 살 때도 하나하나 비교하며 가성비가 제일 좋은 옷으로 골랐다. 하지만 강한서는 적은 돈을 소비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면 몇백, 몇천 배의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그는 그런 유현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유현진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신선처럼 놀 수만은 없으니, 먹고 입는 것이야말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사는 명품들은 중요한 장소에서 입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여자의 겉모습이 남자의 체면을 세워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결국 강한서의 기를 살려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유현진은 오히려 알뜰살뜰하게 살기를 원했다. 2층의 베란다에 있는 화분 선반이 바로 그녀의 그런 면을 증명해 줄 수 있었다. 그 화분 선반는 그녀가 인터넷으로 구매한 뒤, 그것을 설치하는 인건비가 똑같은 화분 선반를 하나 더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비싸자 직접 설치 도구들을 구매하
“이거랑 이거, 어떤 게 예뻐?”유현진은 양손에 치마를 하나씩 들고 강한서에게 물었다. 강한서는 유현진 손에 들린 원피스를 확인했다. 둘 다 셔츠 칼라에 꽃무늬가 있는 스타일이었다. 컬러가 하나는 진하고 하나는 어두운 것 빼고는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옅은 거.”유현진은 강한서가 어쩌다 보는 눈이 있네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나도 이게 더 예쁜 것 같아. 하지만 이게 어두운 것보다 가격이 배나 더 비싸. 재질도 같은데.”“그럼 진한 컬러 사.”유현진이 강한서의 말에 멈칫했다. “난 싸구려나 입으라는 거야?”강한서: ...그는 자신의 장난꾸러기 여친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넌 마대자루를 뒤집어쓰고 서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 마대자루가 2억 정도의 가치를 한다고 생각할 거야. 옷은 뭘 입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입느냐가 중요한 거지.”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민 실장님이 수강료는 받았어?”강한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보너스에 포함되어 있어.”유현진은 가방을 강한서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사이즈 있는지 보고 피팅해 볼게.”유현진은 점원에게 자기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점원은 손톱을 뜯으며 유현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정말 사실 거예요?”유현진은 상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피팅하고 어울리는지 봐야 살지 말지 결정하지 않겠어요?”점원이 말했다. “꼭 구매하실 게 아니라면, 제가 굳이 창고에 다녀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보시다시피 가게에 손님도 많고, 다른 손님에게 가봐야 해서요.”유현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렇게 밥맛 떨어지게 하는 점원은 오랜만에 보았다. “점장 어딨어요? 점장님 나오라고 해요. 구매한다고 확답을 줘야만 피팅할 수 있는 건지 확인 좀 해봐야겠는데요?”점원과 유현진의 기 싸움은 곧 점장을 불러오게 했다. 점장은 나오자마자 계속 유현진에게
점장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 피부가 하얘서 이 컬러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떠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얼마예요?”“76만 원입니다. 회원이시면 50% 할인할 수 있으세요.”유현진은 옷에 있던 택을 확인했다. “폴리에스터네요. 품질에 비해 가격이 별로네요.”옆에 있던 점원은 유현진을 헐뜯을 기회를 찾은 듯 빈정댔다. “비싸면 비싸다고 해요. 살 형편이 안되면 안되는 거지, 핑계는 왜 대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는데, 유현진에게 손목을 잡혔다. 몇 년간 함께한 눈치로, 유현진이 그의 손을 잡자 강한서는 바로 나서지 말라는 유현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강한서는 굳은 얼굴을 하고 점원을 슥 훑고는 입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장은 점원에게 몇 마디 지적하고는 웃는 얼굴로 유현진에게 말했다. “모든 가게에서 전부 이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어요. 만약 생각하셨던 금액을 초과하셨다면 입구 쪽에 할인 중인 옷을 보세요. 가격이 더 저렴해요.”점원은 더욱 직접적으로 유현진을 다그쳤다. “살 형편이 안 되면 빨리 옷 벗어요. 다른 고객님도 받아야 하는데, 시간 낭비 좀 안 하면 안 돼요?”강한서가 점원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누가 살 형편이 안 된다는 거죠? 전부 포장해요.”점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전... 전부 말씀이세요?”유현진이 말했다. “네. 제가 피팅했던 옷들 전부 포장해줘요.”점원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점장이 그녀를 다그쳤다. “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결제 도와드려!”점원은 반 박자 늦게 반응하더니 허둥지둥 옷을 가지러 갔다. 유현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시만요.”점장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점원 바꿔드릴까요?”잠시 멈칫하던 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뇨, 저분으로 하죠.”유현진은 말하며 진열대 위의 박스에서 양말을 꺼내 물었다. “이건 얼마예요?”점원이 말했다. “두 켤레에 14000원이요.”그러자
하지만 입 밖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유현진이 건네는 양말을 받아 쇼핑백 안에 넣고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물었다. “연기인 줄 어떻게 알았어?”유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확실하지 않았어. 쇼핑하다 보면 가끔 손님 겉모습만 보고 태도가 바뀌는 점원들을 만나거든. 하지만 이 점원은 너무 나댔어. 점장이 왔는데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점장 앞에서 계속 날 자극하잖아. 내가 살 수 없다는 걸 계속 강조하면서.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점장 반응도 이상했어. 겉으로는 혼내는 척하면서 실질적인 벌은 주지 않았잖아. 그리고 너 봤어? 그 두 사람 아까 계속 네 손목만 주시하는 거. 네 몸에서 제일 비싼 게 바로 그 시계잖아. 그 사람들, 아마 널 졸부라고 생각하고 날 네 스폰이나 받는 얼굴만 반반한 멍청한 년인 줄 알고 우리를 자극해서 물건을 전부 다 사게 만들려고 했을 거야.”유현진은 말하며 잘난체하기 시작했다. “네가 졸부인 건 맞지만, 이 멍청한 년은 하나도 멍청하지 않지. 내가 순순히 걔들 생각대로 당해줄 것 같아?”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장난질을 했다. ‘장사를 하려면 착실하게 해야지, 어디서 잔머리를 굴리고 있어.’강한서는 유현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음에 들면 사. 그런데 신경 쓸 필요 없어. 그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는 것도 손실이잖아.”“손해 볼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저녁에 할 일도 없는데.”강한서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말했다. “나한테 손해야. 안 그래도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 없는데, 넌 그 시간을 몇십분 씩 다른 사람한테 썼잖아. 다음에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강한서의 말에 유현진은 멈칫하더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녀는 강한서의 팔뚝을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오늘 늦게 들어가면 되지. 좀 더 같이 있자.”유현진의 말에 강한서의 기분은 바로 풀어졌다. 이훈은 한주 대학에 붙었다. 학교는 고담시에 있었고 다음 주 목요일
강한서가 흠칫 몸을 굳히더니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키가 작고 아담한 남자였어요. 4, 50대쯤 되어보였고요. 계속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눈가에서 조금 세월이 느껴졌어요. 기부하러 왔다고 하는데, 계속 현주 아주머니랑 현진 누나에 대해서 물었어요. 현주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고 나서 조금 애틋해 하셨고요. 나중에 몇백 만 원을 기부했어요. 가시면서 원장님께 현주 아주머니를 모신 곳 주소를 물었는데 현주 아주머니를 아시는 분 같았어요. 하지만 원장님께서 물으시니 그저 들은 적이 있다고만 대답했대요. 꽤 이상한 사람이었어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키가 작고 아담한 중년의 남자?’그는 머릿속으로 그에 해당하는, 하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또 다른 얘기는 없었어?”이훈이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 그저 현주 아주머니랑 현진 누나 사진을 보셨고, 가실 때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갑자기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강한서가 멈칫했다. ‘혹시... 현진이 친 아버지는 아닐까?’강한서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유현진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너희 둘, 얼른 나와서 도와, 손이 부족해!”정신을 차린 강한서가 이훈의 팔뚝을 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하자.”유현진은 선물로 고아원의 아이들과 장난을 하고 있었다. 먼저 장기 자랑을 보고 잘 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처음엔 부끄러워하더니 점점 긴장을 풀고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장기 자랑을 했다. 강한서는 옆에 앉아 어색하게 장기 자랑을 하고는 아이들에게 트릭을 들키고도 억지를 쓰며 인정하지 않는 유현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옅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강 대표님.”노원장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술을 한잔 들고 오며 자애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노원장이 보였다. “술 한
강한서는 말 없이 술잔을 들더니 잔을 비웠다. 노원장도 강한서를 따라 술잔을 비우더니 또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세 번째 잔은, 현진의 비밀에 관한 건데, 강 대표님한테 부탁드려도 될까요?”강한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말씀하세요.”노원장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이는 현주 친딸이 아니에요. 혼외 자식도 아니죠.”깜짝 놀란 강한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아셨어요?”노원장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현진이와 현주 친자 검사, 제가 현주와 함께 가서 한 거예요. 이 일, 제가 현주한테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젠 세상에 없으니 현주가 유일하게 미련을 남길 만한 것은 현진이 뿐이잖아요. 현진이가 믿고 의지하는 파트너로서 능력에 한계가 있어 일이든 결혼이든, 많이 도와줄 수가 없어서요. 부잣집은 지켜야 할 규칙도 많고, 집안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 알아요. 제가 이 사실을 강 대표님께 얘기하는 건, ‘혼외 자식’이라는 출신이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으면 바라기 때문이에요. 미래에 현진이와 결혼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혼외 자식’이 그 이유는 아니었으면 해서요. 그 일에, 현진이는 애초부터 잘못이 없으니까요.”강한서의 머리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산부인과 진료기록, 출생증명서,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유현진이 어떻게 하현주의 친딸이 아닐 수 있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현진이 친부모님은 누구예요?”노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현주는 누군가의 분만실을 착각한 거였어요. 당시 현주가 아이를 낳고 몸에 많이 상해있었던 터라 다시 임신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현주는 모든 정력을 현진이한테 쏟아부었죠. 그러니 사실을 알고 나서 현진이를 친부모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아 했어요. 혈연관계는 가짜였지만, 감정은 진짜였으니까요. 자기가 직접 먹여 키운 아이를 보내기 아쉬웠겠죠. 그리고 이렇게 넓은 세상에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