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말 없이 술잔을 들더니 잔을 비웠다. 노원장도 강한서를 따라 술잔을 비우더니 또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세 번째 잔은, 현진의 비밀에 관한 건데, 강 대표님한테 부탁드려도 될까요?”강한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말씀하세요.”노원장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이는 현주 친딸이 아니에요. 혼외 자식도 아니죠.”깜짝 놀란 강한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아셨어요?”노원장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현진이와 현주 친자 검사, 제가 현주와 함께 가서 한 거예요. 이 일, 제가 현주한테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젠 세상에 없으니 현주가 유일하게 미련을 남길 만한 것은 현진이 뿐이잖아요. 현진이가 믿고 의지하는 파트너로서 능력에 한계가 있어 일이든 결혼이든, 많이 도와줄 수가 없어서요. 부잣집은 지켜야 할 규칙도 많고, 집안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 알아요. 제가 이 사실을 강 대표님께 얘기하는 건, ‘혼외 자식’이라는 출신이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으면 바라기 때문이에요. 미래에 현진이와 결혼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혼외 자식’이 그 이유는 아니었으면 해서요. 그 일에, 현진이는 애초부터 잘못이 없으니까요.”강한서의 머리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산부인과 진료기록, 출생증명서,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유현진이 어떻게 하현주의 친딸이 아닐 수 있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현진이 친부모님은 누구예요?”노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현주는 누군가의 분만실을 착각한 거였어요. 당시 현주가 아이를 낳고 몸에 많이 상해있었던 터라 다시 임신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현주는 모든 정력을 현진이한테 쏟아부었죠. 그러니 사실을 알고 나서 현진이를 친부모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아 했어요. 혈연관계는 가짜였지만, 감정은 진짜였으니까요. 자기가 직접 먹여 키운 아이를 보내기 아쉬웠겠죠. 그리고 이렇게 넓은 세상에
유현진의 눈꺼풀이 움찔하며 떨렸다. 그녀는 팔꿈치로 강한서를 찔렀다. “너 취한 척하는 거야?!”찔끔 고통이 전해지자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사 선생님 말씀 어기면 안 돼. 빨리 해야—”강한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깜짝 놀라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이나 거침없이 내뱉는 남자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 매번 정상적으로 얘기하다가 갑자기 취하는 거야?!’유현진이 그의 입을 빨리 막지 않았다면,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강한서는 입이 막히자 조금 불만스럽다는 듯 손을 뻗어 유현진의 손등을 잡아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놓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현진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한서의 입을 막은 채 이훈에게 민경하를 부르라고 했다. 민경하가 차를 가져오자 유현진은 얼른 강한서를 끌고 차에 태우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새 나라의 어린이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현진은 차에 올라타서야 손을 내리고 좌석에 기대어 앉았다. 민경하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대표님,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유현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가 말했다. “집에 가서 해야— 읍—”유현진이 새빨개진 얼굴로 강한서의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름드리로 가요.”뒷좌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보는 민경하의 눈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사모님, 약국에 들러서 콘돔 사실래요?”유현진: ...‘강한서는 대체 어떤 인간들을 키운 거야!’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뇨, 필요 없어요!”강한서 이 멍청이가 이렇게 취했는데, 산다고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유현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민경하는 두 사람 사이가 이토록 빨리, 벌써 아무런 보호조치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것에 놀라워했다. 입이 막혀 숨쉬기가 어려웠던 강한서가 몸부림 치자 유현진이 그에게 경고를 날렸다.
강한서의 입술은 바로 유현진의 귓가에 있었다. 말할 때마다 내뱉는 숨결은 유현진의 볼과 귀 뒤에 닿았다. 유현진의 귀는 열이 올랐고, 그녀는 강한서의 턱을 밀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 마.”강한서는 그녀의 저항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 또 다가와 그녀의 귓불에 입맞추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지.”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언제부터 의사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네가 아플 땐, 의사가 처방해 준 약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마치 자기가 그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는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의사 말대로 하려고.”그는 말하며 유현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가로부터 입술까지, 가볍게 뽀뽀했다. 시험하듯 그녀의 입술을 핥던 강한서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그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왜 그래?”유현진은 강한서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한서는 꽤 주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 “너한테서 왜 이렇게 안 좋은 냄새가 나?”“너야말로 냄새나!”말을 마친 유현진이 순간 강한서가 말하는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구운 마늘을 먹었던 것이다!강한서는 마늘 냄새를 제일 싫어했다. 특히 생마늘을 가장 싫어했는데, 유현진은 고기를 먹을 때면 늘 마늘을 곁들여 먹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구운 마늘도 겉에만 살짝 익고 안은 익지 않은 것을 좋아했다. 예전엔 마늘만 먹으면 강한서는 역신을 피하는 사람처럼 유현진을 피해 다녔다. 잠도 손님방이나 서재에서 잤다. 마늘 냄새에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냄새나?”그녀는 입안의 마늘 냄새가 그에게 닿지 않을까, 일부러 강한서의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난 왜 모르겠지?”마늘
그의 말에 유현진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곧 강한서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강한서의 얼굴을 꼬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나랑 자려고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구나.”강한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헛소리 아니야. 정말 수술했어. 작년에 이미 했다고.”유현진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수술했으면, 흉터는? 작년에 했다면서, 우리 그땐 이혼도 하지 않았는데, 난 왜 네 몸에서 흉터를 본 적이 없는 거야? 요즘 정관수술 기술이 그렇게 많이 발전했어? 복강경 수술이 가능한 거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흉터 있어.”“뭐?”강한서가 유현진을 놓아주더니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강한서를 보며 볼을 붉게 물들였다. 벨트를 푸는 모습에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유현진은 늘 자기가 여왕처럼 소파에 앉아 강한서가 그녀 앞에서 옷을 벗는 꿈을 꾸었다. 전엔 매번 그녀가 먼저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도 강한서는 단정한 차림이었던지라 그녀의 수치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언젠가 두 사람이 입장을 바꾸어 강한서도 수치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강한서의 모습은 섹시하기 그지없었다. 간신히 붙어있는 이성이 그녀를 잡아주고 있었다. 유현진은 담요를 가져와 강한서의 몸을 가렸다. “술에 좀 취했다고 변태 짓 하지 마, 신고할 거야.”강한서는 그녀의 손에 있는 담요를 꺼내며 속삭였다. “흉터 여기 있어. 봐봐.”유현진은 ‘퍽이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강한서가 말한 흉터를 보았다. 2 센티미터 정도 되는, 은밀한 위치에 있는 흉터였다. 다른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뚫어지게 살펴볼 사람은 없으니,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도 그녀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현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정말 수술한 거야?”강한서가 어
유현진은 어깨에 기댄 인간을 힐끔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유혹했다. “나랑 안 잘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움찔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유현진은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의사 선생님 말씀 안 들을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또 움직였다. 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턴 기간 끝났어. 넌 해고야.”강한서가 바로 눈을 떴다. “방금 잠들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유현진: ...그녀는 가끔 강한서가 술에 취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멍청하다고 하기엔 잔머리를 잘 굴렸고, 똑똑하다고 하기엔 정신이 맑을 때면 절대 하지 않을 두서없는 말을 했다. “정관 수술 그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냐고?”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네가 자꾸 물으니까.”유현진: ?“내가 물어보면 어때서? 안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넌 매번 끝까지 캐묻잖아. 왜 그랬는지, 누구를 위해 그랬는지. 뻔히 알면서, 왜 꼭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해? 넌 한 번도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난 먼저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그는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넌 내 돈을 더 좋아하면서, 내가 만약 널 위해 한 일들이라고 인정했는데 넌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난 내가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아.”유현진이 당황스러워했다. “누가 너한테 내가 네 돈을 더 좋아한댔어?”강한서가 바로 고발했다. “네가 그랬어.”유현진: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왜 하나도 기억이 없지?’유현진은 자신이 모함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나한테 겉모습만 빼면 머리는 텅텅 빈 인간이라고 했잖아.”강한서가 말했다. “싸울 때 화가 나서 한 말은 무효야. 넌 다른 사람한테 푸념한 거였어. 그건 네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잖아.”유현진은 강한서와 제대로 시시비비를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말했다. “내가 누구한테 푸념했는데. 내 기억력 안 좋다고 아무렇게나 모함하지 마.”“차
‘그 여자?’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가 누군데?”강한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현진이 이제는 그가 잠든 게 아닌지 생각할 때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유현진은 잠시 멍해졌다. 정신이 맑은 강한서는, 절대 그녀 앞에서 신미정에 대한 나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 관념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이었고 어른은 어른이기에,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신미정의 편애는 생판 남인 유현진도 느낄 정도였다. 당사자인 강한서가 어떻게 못 느낄 수 있겠는가?신미정이 작년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일도 그랬다. 그녀는 친구들과 한 달 남짓 여행하면서 강한서의 카드를 사용했다. 강한서는 은행에게는 큰 고객이었다. 그의 카드 사용 내역서는 은행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가져다주었다. 내역서는 보통 유현진이 받았다. 그녀가 두 사람의 지출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품은 얼마를 샀는지, 식비는 얼마나 들었는지, 생활용품 비용은 얼마인지,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얼마를 냈는지, 그녀는 하나하나 전부 기록했다. 이렇게 하면 어느 달, 어떤 부분의 지출이 많아졌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러면 다음 달 지출을 조금 줄여 전체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신미정이 여행을 간 그달, 강한서의 지출 내용은 폭발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한 달 사이, 유럽 여행으로 신미정은 20억이 넘는 돈을 소비했다. 은행에서 보내온 내역서는 명확했다. 그녀는 절반 이상의 돈을 면세점이나 해외의 명품 가게에 썼다. 게다가 많은 물건들은 심지어 여러 개를 구매했다. 기본 200만 원이 넘는 화장품, 두세 병만 사면 1년은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에 2, 30세트를 구매했다. 마치 도매라도 하는 듯이. 유현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강한서와 직접 얘기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일은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시어머니가 남편 돈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며느리로 보일 수
강한서가 아플 때도, 누군가와 시비로 경찰서에 가게 되었을 때도 매번 신미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었다.신미정은 돈이 필요할 때만 그제야 가족 간의 정을 들먹이며 강한서를 찾아가 부모 노릇을 했다.유현진은 번마다 강한서 앞에서 참지 못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삼키곤 했다.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이런 신경을 긁는 말을 한다면 두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강한서는 항상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평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한서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을 몰랐다.유현진은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그러니까 네 말은, 너희 엄마는 돈을 좋아하고 너를 안 좋아한단 말이야?”강한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누구도 사랑 안 하셔. 그게 우리 아버지일지라도.”유현진은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말했다.“그래도 동생한테는 잘해주시잖아. 민서한테 사준 카르티에 주얼리 세트도 내 스와로브스키보다 몇천 배가 비싸다고.”강한서가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유현진은 그의 얼굴을 쭉 잡아당겼다.“뭐야, 왜 웃어?”강한서가 답했다.“그래서 그때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끼고 민서를 자극한 거야?”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생신 연회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유현진도 그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녀는 분명 그때 당시의 신미정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코끝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네가 굳이 그날에 선물한 거잖아. 설마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선물한 거야?”강한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아니, 내 계획이었어.”유현진은 나직하게 말했다.“유치하긴.”강한서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또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날 안 좋아하고, 나
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다시 팔을 들어 빙빙 돌려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그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엔 그의 팔을 베고 아직도 한창 꿈나라에 있는 유현진이 들어왔다.강한서는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유현진은 그런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손을 올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강한서는 익숙한 듯 그녀의 손을 피해버리고 다시 잠잠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곤 계속 쓰다듬었다.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강한서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순간 두 사람은 서로 민망해하면서도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연출했다.유현진은 마른 입술을 할짝대며 급히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네가 술에 취해 나 끝까지 안 놔줘서 여기서 잤던 거야.”“응.”강한서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믿는 듯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웃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마치 그녀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민 실장님한테 물어보든가.”“응.”강한서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고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유현진은 그런 강한서의 눈빛에 제일 약했고 얼른 손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강한서가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혹시 내가 잠결에 구토라도 해서 숨이 막혀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거야?”그가 눈을 뜨자마자 발견했던 건 바로 침대 옆에 놓인 각종 물건이었다. 유현진이 침대 옆에 물건을 가져다 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가 협력 업체를 접대하며 만취 상태로 집으로 오는 날이면 유현진은 항상 투덜투덜하면서도 강한서를 엄청 세심하게 신경 써주곤 했었다.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난 아직 너랑 결혼하지 않았잖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