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어깨에 기댄 인간을 힐끔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유혹했다. “나랑 안 잘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움찔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유현진은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의사 선생님 말씀 안 들을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또 움직였다. 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턴 기간 끝났어. 넌 해고야.”강한서가 바로 눈을 떴다. “방금 잠들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유현진: ...그녀는 가끔 강한서가 술에 취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멍청하다고 하기엔 잔머리를 잘 굴렸고, 똑똑하다고 하기엔 정신이 맑을 때면 절대 하지 않을 두서없는 말을 했다. “정관 수술 그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냐고?”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네가 자꾸 물으니까.”유현진: ?“내가 물어보면 어때서? 안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넌 매번 끝까지 캐묻잖아. 왜 그랬는지, 누구를 위해 그랬는지. 뻔히 알면서, 왜 꼭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해? 넌 한 번도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난 먼저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그는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넌 내 돈을 더 좋아하면서, 내가 만약 널 위해 한 일들이라고 인정했는데 넌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난 내가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아.”유현진이 당황스러워했다. “누가 너한테 내가 네 돈을 더 좋아한댔어?”강한서가 바로 고발했다. “네가 그랬어.”유현진: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왜 하나도 기억이 없지?’유현진은 자신이 모함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나한테 겉모습만 빼면 머리는 텅텅 빈 인간이라고 했잖아.”강한서가 말했다. “싸울 때 화가 나서 한 말은 무효야. 넌 다른 사람한테 푸념한 거였어. 그건 네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잖아.”유현진은 강한서와 제대로 시시비비를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말했다. “내가 누구한테 푸념했는데. 내 기억력 안 좋다고 아무렇게나 모함하지 마.”“차
‘그 여자?’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가 누군데?”강한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현진이 이제는 그가 잠든 게 아닌지 생각할 때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유현진은 잠시 멍해졌다. 정신이 맑은 강한서는, 절대 그녀 앞에서 신미정에 대한 나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 관념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이었고 어른은 어른이기에,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신미정의 편애는 생판 남인 유현진도 느낄 정도였다. 당사자인 강한서가 어떻게 못 느낄 수 있겠는가?신미정이 작년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일도 그랬다. 그녀는 친구들과 한 달 남짓 여행하면서 강한서의 카드를 사용했다. 강한서는 은행에게는 큰 고객이었다. 그의 카드 사용 내역서는 은행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가져다주었다. 내역서는 보통 유현진이 받았다. 그녀가 두 사람의 지출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품은 얼마를 샀는지, 식비는 얼마나 들었는지, 생활용품 비용은 얼마인지,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얼마를 냈는지, 그녀는 하나하나 전부 기록했다. 이렇게 하면 어느 달, 어떤 부분의 지출이 많아졌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러면 다음 달 지출을 조금 줄여 전체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신미정이 여행을 간 그달, 강한서의 지출 내용은 폭발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한 달 사이, 유럽 여행으로 신미정은 20억이 넘는 돈을 소비했다. 은행에서 보내온 내역서는 명확했다. 그녀는 절반 이상의 돈을 면세점이나 해외의 명품 가게에 썼다. 게다가 많은 물건들은 심지어 여러 개를 구매했다. 기본 200만 원이 넘는 화장품, 두세 병만 사면 1년은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에 2, 30세트를 구매했다. 마치 도매라도 하는 듯이. 유현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강한서와 직접 얘기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일은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시어머니가 남편 돈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며느리로 보일 수
강한서가 아플 때도, 누군가와 시비로 경찰서에 가게 되었을 때도 매번 신미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었다.신미정은 돈이 필요할 때만 그제야 가족 간의 정을 들먹이며 강한서를 찾아가 부모 노릇을 했다.유현진은 번마다 강한서 앞에서 참지 못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삼키곤 했다.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이런 신경을 긁는 말을 한다면 두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강한서는 항상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평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한서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을 몰랐다.유현진은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그러니까 네 말은, 너희 엄마는 돈을 좋아하고 너를 안 좋아한단 말이야?”강한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누구도 사랑 안 하셔. 그게 우리 아버지일지라도.”유현진은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말했다.“그래도 동생한테는 잘해주시잖아. 민서한테 사준 카르티에 주얼리 세트도 내 스와로브스키보다 몇천 배가 비싸다고.”강한서가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유현진은 그의 얼굴을 쭉 잡아당겼다.“뭐야, 왜 웃어?”강한서가 답했다.“그래서 그때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끼고 민서를 자극한 거야?”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생신 연회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유현진도 그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녀는 분명 그때 당시의 신미정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코끝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네가 굳이 그날에 선물한 거잖아. 설마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선물한 거야?”강한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아니, 내 계획이었어.”유현진은 나직하게 말했다.“유치하긴.”강한서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또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날 안 좋아하고, 나
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다시 팔을 들어 빙빙 돌려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그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엔 그의 팔을 베고 아직도 한창 꿈나라에 있는 유현진이 들어왔다.강한서는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유현진은 그런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손을 올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강한서는 익숙한 듯 그녀의 손을 피해버리고 다시 잠잠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곤 계속 쓰다듬었다.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강한서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순간 두 사람은 서로 민망해하면서도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연출했다.유현진은 마른 입술을 할짝대며 급히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네가 술에 취해 나 끝까지 안 놔줘서 여기서 잤던 거야.”“응.”강한서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믿는 듯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웃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마치 그녀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민 실장님한테 물어보든가.”“응.”강한서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고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유현진은 그런 강한서의 눈빛에 제일 약했고 얼른 손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강한서가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혹시 내가 잠결에 구토라도 해서 숨이 막혀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거야?”그가 눈을 뜨자마자 발견했던 건 바로 침대 옆에 놓인 각종 물건이었다. 유현진이 침대 옆에 물건을 가져다 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가 협력 업체를 접대하며 만취 상태로 집으로 오는 날이면 유현진은 항상 투덜투덜하면서도 강한서를 엄청 세심하게 신경 써주곤 했었다.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난 아직 너랑 결혼하지 않았잖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갑자기 이건 뭐지?'그녀는 너무나도 뜬금없다고 생각되어 바로 클릭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어젯밤 방이진은 과도한 약물 투여로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고 아직도 혼수상태라는 기사였다.‘방이진은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갑자기 약물 과다 투여로 응급실로 가게 된 거지?'‘어제 귀가한 건가?'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강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강한서는 아직도 아침에 유현진이 어젯밤 그가 바지를 벗고 돌아다녔고 민경하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에 심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옆에서 뜬금없이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그가 물었다.유현진이 답했다.“방이진 씨가 약물 과다 투여로 지금 응급실에 있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나 봐.”“그래.”강한서가 건성으로 대답했고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유현진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누가 일부러 방이진 씨를 끌어내리려고 한 거 아닐까? 탈세 혐의가 밝혀지자마자 바로 마약 투약 혐의가 밝혀졌잖아. 고작 이틀 사이에 또 바로 이렇게 약물 과다 투여로 응급실에 있다고 했으니 이젠 완벽히 망한 거 아니야?”방이진에게는 스폰서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스폰서는 전혀 그녀를 지켜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이건 분명 스폰서에게 버림을 받았다거나, 스폰서도 그녀를 도울 상황이 아니란 의미였다.스폰서도 도와주지 않고 있고 그녀의 회사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으니 아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밉보인 게 틀림없었다.강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 여자, 유명해?”유현진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인지도가 살짝 있긴 해. 그렇다고 너무 유명한 건 아니야.”“누가 그런 유명하지도 않은 연예인한테 굳이 손을 써?”강한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오히려 손해 아니야? 그냥 그 여자 평소 행실이 그 정도였다는 거야. 그러니까 들키게 된 거고.”민경하의 눈썹이 꿈
민경하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강한서가 잊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어젯밤 술에 취한 강한서가 차에서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어제 강한서는 말을 살짝 직설적으로 하긴 했었다.민경하는 헛기침을 하면서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부부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잖아요. 저도 다 알아요.”“...”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알긴 뭘 알아!'자신이 바지를 벗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두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니 강한서는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한참이나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갈며 물었다.“어제 하라고 한 회의 기록 정리는 했어요?”민경하가 답했다.“점심 12시 전에 올려드리겠습니다.”강한서는 이때다 싶어 바로 그를 흘겨보며 차갑게 말했다.“전에는 그날 바로 올리지 않았어요? 이젠 나이가 드셨나 봐요? 아니면 업무 능력이 떨어진 건가? 노력 안 하면 곧 민 실장 후배한테 밀리겠네요. 노력 좀 하세요. 제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잖아요.”“...”민경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어젯밤에 나한테 고아원에 함께 가자고 해서 늦게 올린다고 말하지 않았었나?'‘그곳만 가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까지 미뤄두진 않았을 거야!'강한서의 기억력으로 절대 그 일을 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일부러 그를 자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어제 그건 그냥 사모님 앞에서 함께 밤을 보내자고 애교를 부린 게 아닌가? 전에 사모님이 외출하셨을 때도 술에 취해 사모님을 찾아대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잖아. 고작 그 일로 지금 이러는 거야?'민경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사실 어젯밤 그 일은 정말 별거 아니에요. 사모님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실걸요? 게다가 두 사람은 부부 사이이니 전 정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그의 말을 들은 강한서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10시에 올리세요!”“...”민경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이진은
“아닐 거예요. 방이진 씨는 저희와 같은 일개 스태프에겐 그리 좋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명한 연예인 앞에서는 잘 보이려고 애를 썼잖아요.”“지난번에도 보세요. 송민영 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바로 비싼 선물을 들고 병문안을 하러 갔잖아요. 송민영 씨가 프로그램에 나가기만 하면 방이진 씨가 엄청 홍보도 하긴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방이진 씨가 그렇게 되고 나고 송민영 씨는 오히려 제 한 몸 피하기 바쁘신 것 같던데. 지금 송민영 씨 앞에서 방이진 씨 이름만 언급해도 아주 안색이 확 변한다니까요. 아주 처음부터 방이진 씨와 아예 아무런 친분이 없는 사람처럼 굴더군요.”“물론 이런 상황엔 피하는 게 상책이긴 해요. 지금 방이진과 연관된 사람들도 언론사에서 다 끄집어내서 안 좋은 쪽으로 여론을 몰잖아요.”“굳이 여론을 몰아갈 필요 있어요? 방이진 씨는 이미 장례식까지 치렀고 안창수 감독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장례식에 참석하셨잖아요. 송민영 씨는 촬영 때 방이진 씨와 바지도 같이 사서 입을 정도로 친했는데 결국엔 근조화환 하나도 안 보내셨잖아요. 그동안 그렇게 온갖 친한 척을 다 해대더니 두 사람도 그저 그런 사이였나 보네요.”금방 막 휴식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송민영은 스태프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방이진의 사건이 터진 후, 사람들 입속에 오르내리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그녀였다. 전부터 방이진과 이것저것 친분을 과시했던 터라 이번 방이진 사건에서도 바로 그녀와 방이진을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엮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녀를 경찰에 신고하여 납세 여부와 마약 검사를 요구했다.송민영의 페이스북은 현재 그녀를 욕하는 메시지로 가득했고 그녀는 이미 댓글 달기 기능을 꺼버린 상태였다.‘방이진, 이 멍청한 년!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서 나까지 휘말리게 만들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어!'송민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앉아
송민영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방이진 사건, 강한서 외에는 누가 그런 수단을 쓸 수 있겠어요? 방이진 씨는 그저 유현진 씨에게 장난 좀 쳤던 것뿐인데, 당신은 방이진 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네요. 정말로 언젠가 방이진 씨의 죽은 혼이 원귀가 되어 밤중에 찾아와 당신의 목숨을 앗아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유현진은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장난 좀 쳤던 것뿐'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을 자극하기엔 아주 충분했다.그녀는 대본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송민영의 멱살을 잡아 올렸고 시선을 내리깐 채 송민영을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강한서의 마음을 얻지 못하니까 이젠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탈덕도 당신처럼 이렇게 빨리 안 해요. 그동안 강한서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작품을 가져다줬는지 알아요? 강한서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실력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유현진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방이진 씨의 사건은 경찰 측에서 직접 조사하고 결론을 내린 거예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경찰서로 찾아가서 방이진 씨의 억울함을 호소하세요. 하지만 계속 이 자리에서 개소리를 하며 강한서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면, 다음으로 이 드라마에서 쫓겨나게 될 사람은 당신이 될 거예요.”그녀의 눈빛엔 독기가 서려 있었고 송민영은 겁에 질려 안색이 창백해졌다.바로 이때, 촬영장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진 씨.”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손을 놓았다. 그녀는 바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놀란 어투로 말했다.“강운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주강운이 두 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흰 셔츠에 카키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웠고, 언제나처럼 지적이고 금욕적인 느낌을 주었다.“촬영장 구경하러 왔어요.”말을 마친 그는 유현진 코앞까지 걸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