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의 입술은 바로 유현진의 귓가에 있었다. 말할 때마다 내뱉는 숨결은 유현진의 볼과 귀 뒤에 닿았다. 유현진의 귀는 열이 올랐고, 그녀는 강한서의 턱을 밀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 마.”강한서는 그녀의 저항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 또 다가와 그녀의 귓불에 입맞추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지.”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언제부터 의사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네가 아플 땐, 의사가 처방해 준 약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마치 자기가 그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는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의사 말대로 하려고.”그는 말하며 유현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가로부터 입술까지, 가볍게 뽀뽀했다. 시험하듯 그녀의 입술을 핥던 강한서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그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왜 그래?”유현진은 강한서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한서는 꽤 주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 “너한테서 왜 이렇게 안 좋은 냄새가 나?”“너야말로 냄새나!”말을 마친 유현진이 순간 강한서가 말하는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구운 마늘을 먹었던 것이다!강한서는 마늘 냄새를 제일 싫어했다. 특히 생마늘을 가장 싫어했는데, 유현진은 고기를 먹을 때면 늘 마늘을 곁들여 먹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구운 마늘도 겉에만 살짝 익고 안은 익지 않은 것을 좋아했다. 예전엔 마늘만 먹으면 강한서는 역신을 피하는 사람처럼 유현진을 피해 다녔다. 잠도 손님방이나 서재에서 잤다. 마늘 냄새에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냄새나?”그녀는 입안의 마늘 냄새가 그에게 닿지 않을까, 일부러 강한서의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난 왜 모르겠지?”마늘
그의 말에 유현진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곧 강한서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강한서의 얼굴을 꼬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나랑 자려고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구나.”강한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헛소리 아니야. 정말 수술했어. 작년에 이미 했다고.”유현진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수술했으면, 흉터는? 작년에 했다면서, 우리 그땐 이혼도 하지 않았는데, 난 왜 네 몸에서 흉터를 본 적이 없는 거야? 요즘 정관수술 기술이 그렇게 많이 발전했어? 복강경 수술이 가능한 거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흉터 있어.”“뭐?”강한서가 유현진을 놓아주더니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강한서를 보며 볼을 붉게 물들였다. 벨트를 푸는 모습에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유현진은 늘 자기가 여왕처럼 소파에 앉아 강한서가 그녀 앞에서 옷을 벗는 꿈을 꾸었다. 전엔 매번 그녀가 먼저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도 강한서는 단정한 차림이었던지라 그녀의 수치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언젠가 두 사람이 입장을 바꾸어 강한서도 수치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강한서의 모습은 섹시하기 그지없었다. 간신히 붙어있는 이성이 그녀를 잡아주고 있었다. 유현진은 담요를 가져와 강한서의 몸을 가렸다. “술에 좀 취했다고 변태 짓 하지 마, 신고할 거야.”강한서는 그녀의 손에 있는 담요를 꺼내며 속삭였다. “흉터 여기 있어. 봐봐.”유현진은 ‘퍽이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강한서가 말한 흉터를 보았다. 2 센티미터 정도 되는, 은밀한 위치에 있는 흉터였다. 다른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뚫어지게 살펴볼 사람은 없으니,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도 그녀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현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정말 수술한 거야?”강한서가 어
유현진은 어깨에 기댄 인간을 힐끔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유혹했다. “나랑 안 잘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움찔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유현진은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의사 선생님 말씀 안 들을 거야?”강한서의 눈꺼풀이 또 움직였다. 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턴 기간 끝났어. 넌 해고야.”강한서가 바로 눈을 떴다. “방금 잠들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유현진: ...그녀는 가끔 강한서가 술에 취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멍청하다고 하기엔 잔머리를 잘 굴렸고, 똑똑하다고 하기엔 정신이 맑을 때면 절대 하지 않을 두서없는 말을 했다. “정관 수술 그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냐고?”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네가 자꾸 물으니까.”유현진: ?“내가 물어보면 어때서? 안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넌 매번 끝까지 캐묻잖아. 왜 그랬는지, 누구를 위해 그랬는지. 뻔히 알면서, 왜 꼭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해? 넌 한 번도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난 먼저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그는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넌 내 돈을 더 좋아하면서, 내가 만약 널 위해 한 일들이라고 인정했는데 넌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난 내가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아.”유현진이 당황스러워했다. “누가 너한테 내가 네 돈을 더 좋아한댔어?”강한서가 바로 고발했다. “네가 그랬어.”유현진: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왜 하나도 기억이 없지?’유현진은 자신이 모함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나한테 겉모습만 빼면 머리는 텅텅 빈 인간이라고 했잖아.”강한서가 말했다. “싸울 때 화가 나서 한 말은 무효야. 넌 다른 사람한테 푸념한 거였어. 그건 네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잖아.”유현진은 강한서와 제대로 시시비비를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말했다. “내가 누구한테 푸념했는데. 내 기억력 안 좋다고 아무렇게나 모함하지 마.”“차
‘그 여자?’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가 누군데?”강한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현진이 이제는 그가 잠든 게 아닌지 생각할 때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유현진은 잠시 멍해졌다. 정신이 맑은 강한서는, 절대 그녀 앞에서 신미정에 대한 나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 관념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이었고 어른은 어른이기에,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신미정의 편애는 생판 남인 유현진도 느낄 정도였다. 당사자인 강한서가 어떻게 못 느낄 수 있겠는가?신미정이 작년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일도 그랬다. 그녀는 친구들과 한 달 남짓 여행하면서 강한서의 카드를 사용했다. 강한서는 은행에게는 큰 고객이었다. 그의 카드 사용 내역서는 은행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가져다주었다. 내역서는 보통 유현진이 받았다. 그녀가 두 사람의 지출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품은 얼마를 샀는지, 식비는 얼마나 들었는지, 생활용품 비용은 얼마인지,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얼마를 냈는지, 그녀는 하나하나 전부 기록했다. 이렇게 하면 어느 달, 어떤 부분의 지출이 많아졌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러면 다음 달 지출을 조금 줄여 전체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신미정이 여행을 간 그달, 강한서의 지출 내용은 폭발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한 달 사이, 유럽 여행으로 신미정은 20억이 넘는 돈을 소비했다. 은행에서 보내온 내역서는 명확했다. 그녀는 절반 이상의 돈을 면세점이나 해외의 명품 가게에 썼다. 게다가 많은 물건들은 심지어 여러 개를 구매했다. 기본 200만 원이 넘는 화장품, 두세 병만 사면 1년은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에 2, 30세트를 구매했다. 마치 도매라도 하는 듯이. 유현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강한서와 직접 얘기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일은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시어머니가 남편 돈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며느리로 보일 수
강한서가 아플 때도, 누군가와 시비로 경찰서에 가게 되었을 때도 매번 신미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었다.신미정은 돈이 필요할 때만 그제야 가족 간의 정을 들먹이며 강한서를 찾아가 부모 노릇을 했다.유현진은 번마다 강한서 앞에서 참지 못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삼키곤 했다.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이런 신경을 긁는 말을 한다면 두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강한서는 항상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평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한서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을 몰랐다.유현진은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그러니까 네 말은, 너희 엄마는 돈을 좋아하고 너를 안 좋아한단 말이야?”강한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누구도 사랑 안 하셔. 그게 우리 아버지일지라도.”유현진은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말했다.“그래도 동생한테는 잘해주시잖아. 민서한테 사준 카르티에 주얼리 세트도 내 스와로브스키보다 몇천 배가 비싸다고.”강한서가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유현진은 그의 얼굴을 쭉 잡아당겼다.“뭐야, 왜 웃어?”강한서가 답했다.“그래서 그때 내가 선물한 목걸이를 끼고 민서를 자극한 거야?”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생신 연회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유현진도 그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녀는 분명 그때 당시의 신미정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코끝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네가 굳이 그날에 선물한 거잖아. 설마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선물한 거야?”강한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아니, 내 계획이었어.”유현진은 나직하게 말했다.“유치하긴.”강한서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또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날 안 좋아하고, 나
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다시 팔을 들어 빙빙 돌려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그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엔 그의 팔을 베고 아직도 한창 꿈나라에 있는 유현진이 들어왔다.강한서는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유현진은 그런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손을 올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강한서는 익숙한 듯 그녀의 손을 피해버리고 다시 잠잠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곤 계속 쓰다듬었다.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강한서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순간 두 사람은 서로 민망해하면서도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연출했다.유현진은 마른 입술을 할짝대며 급히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네가 술에 취해 나 끝까지 안 놔줘서 여기서 잤던 거야.”“응.”강한서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믿는 듯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웃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마치 그녀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민 실장님한테 물어보든가.”“응.”강한서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고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유현진은 그런 강한서의 눈빛에 제일 약했고 얼른 손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강한서가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혹시 내가 잠결에 구토라도 해서 숨이 막혀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거야?”그가 눈을 뜨자마자 발견했던 건 바로 침대 옆에 놓인 각종 물건이었다. 유현진이 침대 옆에 물건을 가져다 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가 협력 업체를 접대하며 만취 상태로 집으로 오는 날이면 유현진은 항상 투덜투덜하면서도 강한서를 엄청 세심하게 신경 써주곤 했었다.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난 아직 너랑 결혼하지 않았잖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갑자기 이건 뭐지?'그녀는 너무나도 뜬금없다고 생각되어 바로 클릭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어젯밤 방이진은 과도한 약물 투여로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고 아직도 혼수상태라는 기사였다.‘방이진은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갑자기 약물 과다 투여로 응급실로 가게 된 거지?'‘어제 귀가한 건가?'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강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강한서는 아직도 아침에 유현진이 어젯밤 그가 바지를 벗고 돌아다녔고 민경하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에 심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옆에서 뜬금없이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그가 물었다.유현진이 답했다.“방이진 씨가 약물 과다 투여로 지금 응급실에 있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나 봐.”“그래.”강한서가 건성으로 대답했고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유현진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누가 일부러 방이진 씨를 끌어내리려고 한 거 아닐까? 탈세 혐의가 밝혀지자마자 바로 마약 투약 혐의가 밝혀졌잖아. 고작 이틀 사이에 또 바로 이렇게 약물 과다 투여로 응급실에 있다고 했으니 이젠 완벽히 망한 거 아니야?”방이진에게는 스폰서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스폰서는 전혀 그녀를 지켜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이건 분명 스폰서에게 버림을 받았다거나, 스폰서도 그녀를 도울 상황이 아니란 의미였다.스폰서도 도와주지 않고 있고 그녀의 회사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으니 아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밉보인 게 틀림없었다.강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 여자, 유명해?”유현진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인지도가 살짝 있긴 해. 그렇다고 너무 유명한 건 아니야.”“누가 그런 유명하지도 않은 연예인한테 굳이 손을 써?”강한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오히려 손해 아니야? 그냥 그 여자 평소 행실이 그 정도였다는 거야. 그러니까 들키게 된 거고.”민경하의 눈썹이 꿈
민경하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강한서가 잊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어젯밤 술에 취한 강한서가 차에서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어제 강한서는 말을 살짝 직설적으로 하긴 했었다.민경하는 헛기침을 하면서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부부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잖아요. 저도 다 알아요.”“...”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알긴 뭘 알아!'자신이 바지를 벗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두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니 강한서는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한참이나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갈며 물었다.“어제 하라고 한 회의 기록 정리는 했어요?”민경하가 답했다.“점심 12시 전에 올려드리겠습니다.”강한서는 이때다 싶어 바로 그를 흘겨보며 차갑게 말했다.“전에는 그날 바로 올리지 않았어요? 이젠 나이가 드셨나 봐요? 아니면 업무 능력이 떨어진 건가? 노력 안 하면 곧 민 실장 후배한테 밀리겠네요. 노력 좀 하세요. 제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잖아요.”“...”민경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어젯밤에 나한테 고아원에 함께 가자고 해서 늦게 올린다고 말하지 않았었나?'‘그곳만 가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까지 미뤄두진 않았을 거야!'강한서의 기억력으로 절대 그 일을 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일부러 그를 자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어제 그건 그냥 사모님 앞에서 함께 밤을 보내자고 애교를 부린 게 아닌가? 전에 사모님이 외출하셨을 때도 술에 취해 사모님을 찾아대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잖아. 고작 그 일로 지금 이러는 거야?'민경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사실 어젯밤 그 일은 정말 별거 아니에요. 사모님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실걸요? 게다가 두 사람은 부부 사이이니 전 정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그의 말을 들은 강한서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10시에 올리세요!”“...”민경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이진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