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속에 숨긴 뜻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송민영은 인기가 아주 많았고 팬도 아주 많았다. 그랬기에 보통의 무명 배우들은 감히 그녀에게 대꾸조차 하지 못했고 모두 그녀를 피하기 바빴다.물론 어떤 배우들은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발닦개를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다. 연예계에서 이런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송민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방이진이라는 여배우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민영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마사지 샵에서 배운 것 같네요. 제가 전에 받았던 마사지보다 더 전문적으로 보이네요.”방이진은 작은 기획사인 스타라이트 엔터 소속의 연예인이었다. 그녀의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농염한 이미지 콘셉트로 밀고 나가니 인기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그녀가 원래 오디션 보려 했던 역할이 바로 이사라 역할이었다. 하지만 중도에 유현진에게 빼앗겼고 결국 그녀는 유설희라는 작은 조연으로 오디션을 보는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역할은 바로 연습실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여주를 도와주는 여학생 역할이었다.이사라 역할 오디션을 볼 수 없었던 방이진은 화가나 드라마를 그만두려고 했었지만, 회사에서 그녀를 잘 타이른 덕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게다가 안창수 감독의 작품이니 반드시 연기상을 노리고 해야 했다. 비록 그녀가 맡은 역할은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녀가 상을 받게 된다면 아주 화려한 이력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그녀는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유현진만 보면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래서 그녀는 송민영이 입을 열어 유현진을 공격하자마자 맞장구를 쳤다.유현진은 두 사람을 눈으로 스캔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두 분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네요. 전 정말로 배웠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배운 기술은 근육통을 완화하는 기술이라 두 분처럼 아픈 배까지 완화하는 기술은 배우지 못했네요.”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대박, 이 여자도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비록 송민영의 스캔
말을 마친 강한서는 회의실에서 벗어났다.직원들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서로 눈빛 교환하고 있었고 이내 민경하에게 물었다.“민 실장님, 도대체 어떤 천사가 우리 대표님을 저렇게 만드신 거죠? 천사님 정보 좀 알려주세요.” 민경하는 직원들을 쓱 한번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비밀입니다.”‘사모님 라인은 내가 먼저 탈 거야.’회사에서 벗어난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지시를 내렸다.“한세 한식당에 연락해서 각종 요리들을 만들어 오라고 하세요.”강한서는 다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보탰다.“느끼한 요리는 빼주시라고 해주세요. 현진이는 내일도 연습해야 하거든요.”“알겠습니다.”민경하는 바로 한세 한식당의 사장님에게 연락을 넣었다.사실 지금, 이 시각은 한세 한식당도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심지어 한세 한식당의 자리도 예약하기 어려웠고 배달도 하지 않았다.물론, 누가 배달을 원하는지에 따라 달랐다.강한서가 배달을 원하면 그들은 아무리 영업이 끝난 깊은 밤이라도 바로 주방장을 깨워 요리시킬 것이었다.강한서가 탄 차는 곧바로 유현진이 합숙 훈련을 하는 장소에 도착했다.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그녀에게 2000만 원을 계좌 이체하였다.「내려와.」마침 일어나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로 돌아가 휴대폰에 뜬 계좌이체 문자를 보고 하마터면 입안의 물을 뿜어낼 뻔하였다.그녀는 강한서에게 100원을 계좌 이체하였다.「?」강한서는 다시 2000만 원을 그녀에게 돌려보냈다.「안 받으면 내가 들어갈 거야.」유현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그녀는 또다시 100원을 계좌 이체하였다.「밤중에 또 왜 난리야?」강한서는 계속 2000만 원을 그녀에게 보냈다.「3분 줄게.」유현진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다시 또 100원을 보냈다.「미친놈!」강한서는 또 그녀에게 같은 금액을 보냈다.「10초 남았어.」‘젠장!’유현진은 침대에서 몸을 확 일으키더니 쿵 소리가 났다. 2층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천장에 머리를 박
유현진이 숙소에서 나올 때 경비 아저씨가 그녀를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비 아저씨는 자리에 없었고 그녀도 수월하게 나올 수 있었다.그녀가 막 대문에서 벗어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깜빡이를 켜고 있는 차량을 발견했다.곧이어 그 차량은 천천히 그녀의 앞까지 왔고 차창이 열리면서 강한서의 얼굴이 보였다.“타.”유현진은 움직이지 않았다.“난 그냥 나와서 너한테 말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얼른 돌아가! 여기까지 와서 방해하지 말고!”강한서는 민경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경하는 바로 빠방 소리를 냈다.소리는 아주 컸고 텅 빈 도로에 크게 울려 퍼졌다.경비실에 있던 아저씨도 얼른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큰 소리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 왜 아직도 숙소로 안 돌아가는 거예요!”경비 아저씨는 이내 손전등을 들고 유현진 쪽으로 비췄다. 유현진은 창피함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민경하는 얼른 차 문을 잠갔다.한편,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방이진이 휴대폰을 들고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그래, 우리한테는 깨끗한 척 굴더니, 너도 다를 바 없구나? 한밤중에 몰래 남자 만나러 달려오고 말이야!’그녀는 벤츠 차량을 연속 몇 장이나 찍었다. 원래 그녀는 차량 번호를 찍고 싶었지만 차가 이내 시동을 걸고 떠나는 바람에 찍지 못했다.유현진은 차 안에서 강한서를 노려보고 있었다.“도대체 이 밤중에 또 왜 난리인 거야?”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점점 다가갔다.깜짝 놀란 유현진은 서둘러 밀어내려고 했지만, 알고 보니 강한서는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려는 것이었고 이내 민경하에게 말했다.“출발해요.”정신을 차린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일 아침 점호한단 말이야. 지금 도대체 어디 가려는 건데?”강한서가 말했다.“지난번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오늘 같이 다시 먹으려고. 안 그러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아.”유현진은 눈썹을 치켜떴다.‘이 자식 설마 내가 저번에 집 밖으로 쫓아냈다고 이러는 거야?
사실 그녀는 그때 이미 화가 풀린 상태였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을 집에 두고 나갔던 강민서가 돌아오고 그녀를 비꼬자 순간 욱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자기 힘으로도 살 수 있다며 받지 않았었다.그리고 강민서는 그 선물 상자를 가져갔다. 그랬기에 그녀는 선물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의 기억력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유현진은 멋쩍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른 다른 일을 생각해 내려 애를 썼다.“아, 그래. 내가 실수로 네 포크로 화분에 꽃 심었을 때 내가 바로 새것으로 사줬는데 네가 아무 말도 없이 버렸잖아.”포크 얘기가 나오자 강한서는 혀끝이 아파지기 시작했다.“그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네가 싸구려 포크를 사 오는 바람에 내 혀끝에서 피가 났었잖아. 그건 기억 안 나?”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찔린 구석이 있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건 괜찮던데.”강한서는 코웃음을 쳤다.“네 몫까지 내가 피를 흘렸으니까.”“...”“그, 그러면 아가씨가 예전에 우리 집으로 왔을 때, 난 너랑 같이 식구들과 식사하러 가려고 했었어. 그런데 넌 돌아오는 길에 날 길에다 버렸잖아. 내가 고작 이혼하자고 했다고 날 길에다 버렸잖아!”유현진은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그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었다!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녀를 흘겨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할 말 없지? 넌 그냥 무조건 복수하는 사람인 거야!”“사모님.”민경하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사실 그날, 대표님께서는 사모님께 기사님을 불러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가방을 꼭 안으면서 혹시라도 운전 기사님이 사모님의 가방이라도 가져갈까 봐 타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날, 강한서는 그녀의 가방도 그녀와 함께 길가에 버리자마자 민경하에게 연락해 운전기사를 보내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지시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6억 원의 가방을 꼭 끌어안으면서 혹여
캠핑카에 들어선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안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중간엔 심지어 촛대도 있었고 촛대 옆 흰색 꽃병엔 흰색 장미꽃들이 꽂혀 있었다. 유현진은 마치 토할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으엑, 너무 촌스러워. 누가 이런 촛대도 준비한 거야?”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배가 먼저 꼬르륵 소리를 내었다.강한서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면서 말했다.“너의 배가 입보다 더 성실한 것 같군.”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머리커락을 한 움큼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그녀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강한서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냈고 심지어 그녀는 강한서에게 로맨스 세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강한서의 어느 생일날, 그녀는 강한서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줄 생각으로 버니걸 세트를 샀었다.당시 그녀는 이미 바니걸 세트를 이미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강한서는 오히려 그녀가 입은 옷이 토끼를 모티브로 한 옷인가, 아니면 여우를 모티브로한 옷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었다.그녀가 머리 위에 하고 있던 동물 귀 모양의 머리띠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강한서는 여우걸 세트가 아니냐고 물었었다.유현진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에 달린 꼬리만 보아도 여우가 아닌 버니걸 세트라고 말했다.그러자 그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에서 대량의 자료들을 찾아 그녀의 앞에 내밀면서 아무리 봐도 그 귀는 여우 귀라고 말했다.그리고 엉덩이에 달린 꼬리가 왜 토끼 꼬리인지는 아마도 업체에서 잘못 보내준 것이라고 판단했다.증거들을 잔뜩 내민 강한서의 추측이 맞았고 옷과 머리띠는 확실히 한 세트가 아니었다.하지만!누가 그 상황에서 아이패드를 끌어안고 도대체 버니걸인가, 여우걸인가 연구를 하겠는가?강한서는 원래부터 로맨스가 체질이 아닌 사람이었다. 강한서와 전생과 현생에 관해
하지만 항상 그를 피할 수는 없었다.이런 이유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유현진은 끊임없이 음식을 입속에 넣었다.강한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먹어.”유현진은 순간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녀는 입속의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네가 마음대로 준비해 놓고, 이젠 나보고 그만 먹으라고?”강한서는 보리차를 그녀에게 따라주면서 말했다.“넌 이미 많이 먹었잖아. 더 먹으면 이따 잠들기 힘들 거야.”강한서는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랑 대화하기 싫어서 일부러 꾸역꾸역 먹고 있는 거잖아.”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티가 나?’식탁만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컵을 들고 차를 마셨다.사실 그녀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다. 만약 강한서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체하게 될 것이었다. “현진아.”강한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미련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나랑 송민영 씨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가 그 여자를 띄워주고 있는 건 그 여자가 나한테 아주 중요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어서야. 그리고 난 나중에 너에게 그 사람을 소개 해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미 그 일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너까지 연루되게 하고 싶지 않아.”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들고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이내 살짝 손등 키스를 하였고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남편으로서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나도 누군가의 남편은 처음이었어. 내 인생에서도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거고… 나도 좋은 남편으로 참고할 만한 좋은 자료를 찾지 못했어. 그러니까 나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유현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너무나도 울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그녀와 강한서의 사이는 이미 용서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
강한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고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유현진은 마치 모래 같았다. 그가 손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후로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고 불안하고, 또 무서웠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께 너도 물어봤잖아. 할머니께서도 신경 안 쓰셔.”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그냥 떠본 거였잖아. 할머니께서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셨을 거야. 너도 생각해 봐. 너의 가문에서는 절대 아이가 없을 수는 없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다른 사람들도 널 이상한 눈빛으로 보게 될 거라는걸.”강한서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넌 처음부터 끝까지 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할지만 말하고 있잖아.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뭐가 중요해? 그럼 넌? 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데?”“그래, 네 말이 맞아. 난 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가 중요해. 하지만 난, 나랑 평생을 같이 살아갈 사람은 너야. 그래서 네 대답이 제일 중요해. 아이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네가 갖고 싶다면 나도 같이 병원에서 노력해 볼 수도 있어. 네가 낳는 걸 원치 않으면 입양해도 돼. 네가 복수하고 싶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해. 나랑 앞으로 평생 함께 있어 줄래?”민경하는 캠핑카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대표님도 참… 뭐, 그래도 진보는 있네. 적어도 핵심을 파악했으니까.’아이가 있든 말든 자신의 아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강한서의 말에 유현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강한서는 부족한 점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세심하지 못하고, 다정하지도 못하다. 심지어 직설적으로 말하는 탓에 아무리 좋은 짓을 해도 말 한마디 때문에 망치기 일쑤였다.하지만 그에게도 많은 장점이 있었다. 강민서가 그녀를 괴롭히면 그는 남몰래 뒤에서 꼭 복수를 해줬다. 비록 그녀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는 자신이 유현진
강한서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었다. “주강운? 아니면 송민준?”한성우가 유현진에게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 강한서는 온몸이 굳어졌다. “설마, 한성우?”유현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 곁에 있는 모든 남자를 다 의심하려고 이러는 걸까?“대체 누구야?”유현진을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걸 묻는 게 의미가 있어? 그게 누구든, 너는 아닐 텐데.”“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게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강한서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대체 왜 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유현진이 짜증을 내며 머리를 흩트렸다. 강한서는 왜 상식선에서 행동하지 않을까?그의 성격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런 말들을 하다 거절을 당했으니, 원래대로라면 화를 내며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녀에게 그게 누군지 따지고 있는 걸까?강한서는 유현진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송민준이지. 네가 나랑 이혼하자마자 송민준이 너랑 계약했어. 그리고 너랑 관계되는 모든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고. 너랑 내가 재결합이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지?"유현진: …강한서의 상상력은 과하게 풍부했다. 어딜 봐서 송민준이 유현진을 좋아한다는 말인가?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송민준을 방패로 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유현진이 대답했다. “맞아. 송 대표님은 성격도 좋으시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도 아셔. 내가 제일 힘들 때 날 도와주셨고. 게다가 잘생겼잖아. 여자라면 누구든 흔들려.”그녀의 말에 강한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거짓말! 그건 네 스타일이 아니잖아!”“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내가 몰라?”유현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넌 나랑 이렇게 오래 지냈으면서, 아직도 몰라? 나 원래 잘생긴 사람 좋아해. 그때 내가 널 선택했던 것처럼.”강한서의 눈빛에 우울함이 가득 찼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송민준에게 전화해서 말해. 네가 송민준 좋아한다고.”강한서의 말에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
한현진의 말에 성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성월은 한현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해금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CCTV를 확인할 자신 있어? 만약 정말 세은이가 한 짓이면 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경찰에 신고해야죠.”한현진이 똑바로 서해금을 직시했다. “만약 정말 세은이가 깨뜨린 거라면 비싼 물건이니 경찰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야겠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현진 씨, 세은이의 입사를 강력 추진한 건 현진 씨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의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 현진 씨는 이렇게 큰 문제를 생기자 모든 책임을 세은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정말 현진 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건가요?”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가람 언니, 그런 얘기는 저희끼리 있을 때 해도 되잖아요. 왜 굳이 이곳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한현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송가람이 일부러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넘버 S 오일이 깨졌으니 회사 전체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도 직원에게 제대로 된 사건의 진위를 알려야 해요. 그러니 굳이 저희끼리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한현진이 시선을 올렸다. “여기서 얘기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언니가 계속 제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제가 세은이를 입사시켰기 때문인 거잖아요. 세은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도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가 물을게요. 언니의 업무 실수로 인해 저희는 하마터면 홍혜림 씨라는 고객을 잃을 뻔했어요. 그럼 왜 당시 언니를 회사로 불러들인 서 대표님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신 거예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심지어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요. 언니도 서 대표님 추천으로 입사하신 거잖아요. 왜 그 일에 관해선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부끄러움에 송가람은 버럭 화를 냈다. “저와 세은이는 달라요. 깔린느는
역시나 성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엔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님이 호언장담해서 데려온 사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소문이긴 한데. 나도 그냥 들은 거야. 주세은 씨 경력으론 우리 회사에 입사할 수 없대. 하지만 한 대표님이 세은 씨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취직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서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한 대표님이 만약 주세은 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 대표님이 책임지고 물러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했어.”“세상에. 하지만 이번 일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우리가 입사할 땐 면접만 4차까지 있었어. 면접도 없이 입사하기에 대단한 실력자인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입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 실력을 보지 못했어.”“넘버 S 오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한 대표님이 어떻게 지켜주겠어.”“지키긴 뭘 지켜. 한 대표님 본인도 책임을 면치 못할 텐데. 자신이 꽂은 사람이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어?”...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송가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음모를 달성한 비열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송가람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월을 직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셨다면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세은 씨 혼자 보내신 거죠?”성월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땐 다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일손이 부족한 데다 저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세은 씨를 보낸 거예요. 저장실은 제가 세은 씨와 함께 간 적이 있었어요. 세은 씨도 저장실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물었다. “다들 식사 중이었다는 건 그리 급한 업무도 아니었단 얘기겠네요. 왜 하필 사람 없는 점심시간에 세은 씨를 불러서 오일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한현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성월이 결국
구내식당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록 한현진은 넘버 S 오일이 뭔지 몰랐지만 깔린느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넘버 S 오일은 혼합 오일이었다. [인 드림] 같은 고급 향수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료 중 하나였다. 넘버 S 오일의 재고는 100mL 밖에 없었다. 서해금이 우연히 제조해 낸 오일이라 각 오일의 성분과 비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게 넘버 S 오일은 한정판이 되어버렸다. 이 오일은 줄곧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고급 향수를 제작할 때만 사용되었다. 넘버 S 오일은 깔린느 전체에 단 한 병뿐이었다. 그것이 깨진다면 넘버 S 오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성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서해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따라가려는 한현진을 은서하가 불러 세웠다. “대표님, 제 일은 됐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한현진이 은서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나가지 않을 거예요. 서하 씨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 사람들은 점점 더 서하 씨를 만만하다고 여기고 더 심하게 굴 거예요. 서하 씨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들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서하 씨를 괴롭히려고 할 땐 한 번쯤은 고민해 볼 거예요.”은서하가 멍해졌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주세은은 덜렁대는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귀중한 원료는 보통 일반 직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은이 그 오일을 깨뜨렸을 리가 없었다. 한현진이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일 보관실에 모여있었다. 주세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범인을 심문하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세은은 하얗게 질린 얼굴
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송가람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제 사무실에 있던 금전수 기억해요?”움찔하는 송가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승인하실래요, 아니면 다들 들을 수 있게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송가람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현진이 그 도청 장치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현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송가람의 사무실에도 도청 장치를 달았다. 송가람과 주현은 사무실에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얘기를 했었다. 게다가 한현진이 대체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송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가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쯤 멀리서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가람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하마터면 자신이 한 일을 승인할 뻔한 송가람은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입가까지 흘러나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좋게 찾아왔네.’한현진은 몸을 돌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서해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한현진 앞으로 다가온 서해금이 몸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소 지으며 물었다. “밥도 안 먹고 두 사람 여기서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만 가람 언니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원의 보너스를 삭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있었어요.”한현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한현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송가람이 자신의 구역에서 한현진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서해금이 알게 된다면 또 그녀를 한바탕 꾸짖을지도 몰랐다. “그래?”서해금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현진이 말이 사실이야?”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비웃음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안규리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한현진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송 팀장님, 여긴 회사예요. 호칭 주의하시죠.”말문이 막힌 송가람은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다들 그저 장난 좀 한 건데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네요.”“제 말이 좀 지나쳤나요?”한현진이 차가운 눈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규리 씨가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놀릴 때는 왜 규리 씨 말이 심하다고 하지 않은 거죠? 이해 능력이 형편없어서 규리 씨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송가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하 씨 형편이 어려우면 회사에 복지 신청해도 된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한현진이 흥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송 팀장님은 이해력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서하 씨가 2개월간 감봉 당한 건 송 팀장님 작품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겠다는 건가요?”표정이 굳어진 송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서하 씨 보너스가 삭감된 건 인사팀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헛소리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전 서하 씨가 보너스를 삭감당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조향팀의 일개 팀장에 불과한 송 팀장님이 어떻게 재무팀 직원의 월급 삭감 정황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인사팀 부장이 꿈에서 알려주기라도 했어요?”송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한현진에게 말꼬투리를 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화가 치민 송가람이 말했다. “대충 제 추측으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감봉은 보너스를 삭감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하지만 보너스를 전부 삭감당했다는 건 저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회사에도 징계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게 있어요. 설사 서하 씨가 진행한 업무가 전부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은서하는 송가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현진과 가깝게 지내다 또다시 송가람에게 당할까 두렵지는 않은 걸까?한현진은 도무지 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은서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은서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하 씨, 외할머니도 아직 퇴원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은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진작 회사에서 먹어야 했어요. 도시락도 매일 구정물 같은 것만 싸 오던데 식욕이 있겠어요? 서하 씨. 구내식당은 직원 할인도 있잖아요. 매달 6만 원만 내면 돼요. 그 정도 돈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 도시락, 서하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 이제 못 봐주겠어요.”그 말에 은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규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구내식당을 이용하든 도시락을 싸든 그건 다른 사람 마음이에요. 6만 원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뭐 그리 고상한 일 같아요?”안규리라고 불린 사람은 송가람 옆에 앉아 있었다. 한현진도 전에 본 적 있는 재무팀 직원이었다. 안규리가 눈썹을 씰룩였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고상하다는 얘기는 전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매일 죽 같은 도시락을 싸 와 식당에서 데워 먹는 모습은 사실 저희 식욕을 떨어뜨리거든요. 다들 안 그래도 일하느라 힘든데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입맛이 떨어져서야 저희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죠?”주현도 안규리의 말을 거들었다. “서하 씨도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전에 한 대표님이 옷 선물을 하셨을 때도 제일 비싼 옷을 가져갔잖아요. 딱 봐도 그런 걸 처음 본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자마자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갔는데.”“2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사람이 식비 6만 원을 아낀다고요?”“그게 어떻게 같아요? 몇백만 원짜리 옷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