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현은 대충 대답하고 건방진 걸음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려고 하다가 이훈의 걸상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훈은 갑작스럽게 전해진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쿵 하고 박았다. 이내 이훈은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이훈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전재현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전재현, 너 미쳤어?"전재현은 이훈의 손을 밀치며 말했다."쌤, 얘 좀 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저번에도 이랬다니까요. 쌤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이러는 데 없을 땐 어떻겠어요? 고아들이 이렇게 교양이 없다니까요. 쌤은 왜 내 말을 안 믿어요."그는 시뻘건 눈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그 손 놔, 뭐 하러 왔는지 잊었어?"이훈은 여전히 떨리는 입술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정 선생님도 이훈을 말려보았지만 이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찻잔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차 식었어. 가서 뜨거운 물 좀 따라와."이훈은 이를 악물고 두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강한서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다시 강한서에게 가져다 놓고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았다.유현진은 눈을 씰룩거렸다.'강한서 한 마디가 내 열 마디보다 나은 거야?'말없이 자리에 앉는 이훈을 전재현은 실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입을 삐죽이더니 코를 만지며 강한서와 유현진을 살펴보았다."두 사람은 고아원 직원이에요?"전재현은 이훈의 새 옷을 보며 말했다."새 옷 입었네. 돈 많은 바보들이 고아원에 돈이라도 던져줬나 봐?"'이 자식, 말이 거치네!'정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전재현, 너 말조심해! 두 분은 이훈의 대리 보호자야. 오늘 특별히 너희 둘 일로 오셨어.""쌤, 우리는 단순 트러블이 아니에요. 엄격히 말하면 이건 고의 상해죄로 신고해도 된다고요."정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교감 선생님은 정 선생님에게 전재현 집안은 건들면 안 되니 조심
문이 열리더니 보기에도 막돼먹은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씩씩거리며 걸어들어왔다.고개를 돌린 유현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검은색 스타깅, 그리고 진한 메이크업.여자는 가죽 미니스커트에 짧은 재킷의 패셔너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키도 길쭉하고 몸매도 좋았으며 얼굴도 요염하니 보기에는 대략 30대 후반으로 꽤 젊어 보였다. 유현진은 어딘가 모르게 이 여자가 낯익었다.유현진이 여자를 훑어보고 있을 때, 여자도 그들을 유심히 훑어보며 생각했다.'보아하니 어려 보이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이내 여자는 시선을 유현진에서 강한서로 옮겼다. 여자는 발걸음을 멈칫하다가 다시 강한서를 유심히 바라보며 걸어들어왔다. 여자 뒤로는 말라 보이는 중년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근시 안경에 2대8 가르마, 정갈한 정장 차림.유현진이 그 남자가 누굴지 유추하고 있을 때 정 선생님이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교감 선생님."교감 선생님은 정 선생님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굽신거리며 달려와 의자를 빼며 말했다."정 선생, 뭐 하고 있어요. 어서 전 여사님한테 차 따라드리지 않고. 저기 위에서 제일 비싼 거로 가져와요."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또 전 여사야? 전씨네 사모님은 다 이래?'진 여사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내가 차 마시러 여기 왔겠어요? 교감 선생님. 이번 일 반드시 제대로 해결해야 할 거예요.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결과가 없어요? 사람을 오라 가라 해서 해결된 줄 알았더니 도리어 나한테 보상을 요구해요? 이게 해결 방식인가요?"교감 선생님은 굽신거리며 사과했다."진정하세요. 꼭 만족스러운 결과 보여드릴게요."말을 끝낸 교감 선생님은 정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려 말했다."정 선생,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잘 해결한다고 안 했어요? 이게 며칠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요? 왜 아직도 이렇게 야단법석이에요?"정 선생님은 어쩔 바를 몰라 말했다."교감 선생님, 이 두 분은 이훈 학생의 보호자예요. 오늘 이 일로 학교에 상담하러
순간 교감 선생님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뭐… 뭐라고요?"유현진이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요? 싸워서 지는 사람이 맞는 거예요? 이 학교 첫 번째 모토가 공정 아닌가요? 교감 선생님은 모토대로 하셨어요?""들어오면서부터 전 여사님한테 쩔쩔매시면서 전 여사님의 결정만 궁금했죠? 그럼 우리는요? 교감 선생님 쇼를 도우러 온 광대인가요? 교감 선생님은 학생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전 여사님의 개인 비서인가요? 만약 전 여사님을 위해 일한다면 학교 그만두세요. 전 여사님 댁에 개가 필요하지 않은지 알아보시는 게 좋겠네요."유현진은 빙빙 돌릴 것도 없이 바로 짚어 말했다. 듣기 거북스러운 말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다른 사람 역시 교감 선생님의 편애를 지적한 적 있었지만 이토록 콕 집어 말한 사람은 유현진이 처음이다.이훈은 유현진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교감 선생님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속물이다. 집안 부모님이 세력이 있으면 학생에게 잘해주었고 보통 집안의 아이들은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문제를 일삼았다. 게다가 아부하는 실력도 단연 최고이다.비록 학생들한테는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학교 상사들은 그의 그런 성격을 오히려 아주 만족스러워했다.유현진은 교감 선생님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놓았다. 그녀는 모두가 하고 싶어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교감 선생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유현진에게 삿대질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교양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유현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교양이 없어요? 그럼 당신은 인품이 없겠네요. 이익을 위해 양심도 버린 주제에 어디서 교양 타령이에요?"여자는 유현진의 심상치 않은 눈빛과 말 빨에 유현진이 무조건 시설에서 고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입만 잘 놀리는…여자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어쩐지 애새끼가 싸가지 없다 했더니 고아원 사람의 공통점이었네. 나 참,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단 말이야. 교감 선생님. 이런 질 나쁜 학생을 자
'xxx, 남자랑 같이 오면 다야?'여자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욕했다.유현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루하게 생각했다. 문뜩 그녀는 강한서의 소매에서 밝고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녀는 강박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뜯기 시작했다.강한서는 힐끗 보기만 할 뿐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그것은 마치 소매에 박히기라도 한 듯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유현진은 한참 낑낑거려서야 그것을 뜯을 수 있었다. 다 뜯고 난 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의 뒤 면에는 접착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옷에 달린 물건이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강한서의 다른 소매를 보았다. 역시나 반대쪽에도 똑같은 큐빅이 박혀 있었다.유현진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유현진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큐빅을 소매에 다시 붙이려고 시도했다.하지만 아무리 붙여보아도 붙어나지 않았다. 바로 이때, 교육실 문이 열렸다. 유현진은 큐빅을 손에 쥐고 머리를 들었다.아직 상대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여자가 울며불며 뛰어가 말했다."왜 이제야 왔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 모자 여기서 죽었을지도 몰라!"교감 선생님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전 의원님, 이런 일로 직접 오게 만들어서 송구스럽네요."정작 상대는 교감 선생님을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대체 또 무슨 사고 친 거야?"남자는 이 모자를 보기만 해도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자기 왜 말 그렇게 해! 사고라니? 자기 아들 머리 좀 봐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왔는데 저 인간들이 나 이 꼴로 만들었어. 내 얼굴 좀 봐. 여기 좀 봐봐!"비록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은 아니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데다가 옷도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체면을 구기는 상황이다.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저요."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웃음을 지으며
이 여자는 확실히 관능미가 넘쳤지만 오관이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유현진은 그녀의 입가의 점을 보고 낯이 익었다.전태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유현진은 아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유현진은 이제야 완전히 기억났다.진짜 전 여사가 20억을 주고 보낸 무명 배우는 결국 한주시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뻔뻔스럽게 "전씨 가문 부인"으로 살고 있었으며 게다가 전태평의 아이까지 낳아서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전 여사가 그 무병 배우에게 돈을 주고 떠나라 했을 때, 이들의 아이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 유현진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전 여사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속았고 전태평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전 여사가 그렇게 악을 쓰고 가정을 지키려 했건만 결국 사생아는 태어났다.마침 그녀는 전 여사가 임차한 용호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생겼다.전태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강씨 가문 사람들과 마주칠 줄 생각도 못 했다.가짜 "전 여사"는 눈치 없이 전태평에게 자기의 체면을 찾아달라고 떼를 썼다. 그녀는 유현진의 말을 흘려듣고는 전태평을 팔을 부둥켜안고 말했다."저년이야! 저년이 내 얼굴에 뜨거운 물 뿌렸어. 우리 아들 이마에 상처는 저 여자 옆에 앉은 애새끼가 한 짓이야! 당장 저 자식 강제 퇴학시켜. 그리고 고아원도 한주시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이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전태평이 권리 남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할까 봐 감히 고아원을 사라지게 만들라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전태평은 굳은 얼굴로 강한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눈치 없이 입을 나불거리자 전태평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그 입 다물어! 학교 내가 열었어?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당신은 왜 여기서 막돼먹은 아줌마처럼 싸우고 있어.
전태평의 부인과 강씨 가문은 각별한 사이라 전태평 역시 강씨 가문에 자주 들렸다. 게다가 한성 그룹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으니 전태평은 강한서에 대해 잘 알고 있다.전 여사가 형제들과 사이가 틀어진 후, 신미정은 전 여사를 안쓰럽게 여겨 더 마음을 주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고 전태평의 사업에도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오늘 일이 전태평의 본처인 전 여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승진을 앞에 두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전태평은 좋은 결과가 없다.'모자란 것들, 그렇게 눈치를 줬건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러고 있어!왜 이런 껍데기만 반반한 여자에게 빠져서 이런 모자란 자식까지 낳았을까?'전태평은 비서에게 말했다."두 사람 집으로 데리고 가, 며칠 동안 집에 박혀서 반성해!"하지만 유현진은 그들을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다.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전 의원님. 사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보내셨다가 만약 교감 선생님께서 제 동생 퇴학이라도 시키면 어떡해요? 일은 마무리 짓고 가는 게 좋겠죠?"전태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는 늘 강씨 집안에 체면을 구기는 모자란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모자란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교감 선생님은 전태평의 행동에 깜짝 놀라 머리를 굴려 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설마 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이 일에 개입하기 곤란하여 그러시는 걸까? 조용히 처리하시려고?이런 장면을 모두에게 보여주면서 공정한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게 아닐까?만약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굳이 학교까지 오실 필요 없었을 텐데.'교감 선생님은 자기의 생각이 정확하다고 생각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이훈 학생의 퇴학 처리는 학교 측에서 심사숙고하여 얻은 결과인데 전 의원님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오늘 당장 퇴학 절차 밟으세요."전태평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모자란 놈이 하나 더 있군.'전태평은 정서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도서관? 강 대표님?이 교장이 강한서에게 굽신굽신하는 것을 보고 교감 선생님은 입을 쩍하고 벌렸다.'설마 학교에 도서관을 후원했다던 한성 그룹 대표, 강 대표님?'교감 선생님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전태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전 의원님… 이거…..."전태평은 이 모자란 사람과 말을 섞기도 싫었다."아니요."강한서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집안의 아이가 학교에서 폭행당했는데 학교 측에서 다짜고짜 아이를 퇴학시킨다고 하길래 집사람과 함께 상황 요해하러 왔어요."이 교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교감 선생님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퇴학까지 시켜야 해요?"이훈은 입술을 오므렸다.'이 부부, 거짓말 진짜 잘하네.'폭행을 가한 건 바로 이훈인데 그들의 입에서 이훈은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버렸다.교감 선생님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그저… 두 학생에게 작은 트러블이 생겼어요."유현진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작은 트러블이요? 교감 선생님. 아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거로 기억하는데요. 우리 훈이가 학교 모토를 어겨서 학교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으니 학교 측의 결정으로 퇴학 처리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작은 트러블로 퇴학 처리까지 가나요?"이 교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학교 측의 결정인데 난 왜 모르는 일이죠?"퇴학은 작은 일이 아니라 신고와 심사가 필요한 일이라 교감 선생님이 아니라 이 교장에게도 단독으로 결정할 권리가 없다.비록 학교 위원회에 교감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몇몇 있기는 하다. 그들도 평소 교감 선생님의 행실에 대해 알고 있지만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다들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해 단독적으로 한 학생의 퇴학을 결정했으며 게다가 강씨 가문의 사람을 건드렸다.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이 교장에게 이 사태를 알렸다. 만약 이대로 놔뒀다면 앞으로 한성 그룹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바로 이런 것을 뜻한다.먼저 주먹을 휘두른 이훈도 미안한 마음에 병원비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거늘 오히려 유현진이 뻔뻔하게 요구했다.하지만 강한서는 무덤덤했다.'100만 원, 유현진 성격에 적당히 했네.'이 일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콧대를 눌러주는 게 목적이다.전태평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아무리 그래도 신분이 있는 사람인데 젊은 여자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도 자리에 있으니 전태평은 억울함을 꾹꾹 눌러 삼켰다.그리고 비서더러 얼른 돈을 결제하라고 시켰다.전태평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입금 내역을 확인한 유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의원님은 사모님처럼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네요."전태평은 어이가 없었다."전 의원님. 이참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전태평은 유현진을 쌀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말씀하시죠.""우리 할머니가 다다음 주에 팔순 잔치를 열려고 하는데 용호에서 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전 여사님이 이미 렌트 주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전 의원님께서 전 여사님한테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전태평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다. 전태평은 강씨 가문의 힘이 필요했고 그 속에는 전 여사와 신미정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전 여사는 신미정의 말이라면 끔뻑 죽었다. 그런데도 거절한 거로 보아 이건 분명 신미정의 뜻이다.전태평은 신미정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됐다."용호는 우리 집사람의 소유라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그렇군요."유현진은 느슨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주 여사님한테는 결정권 있어요? 전 여사님과 오랫동안 얼굴 못 보셨겠죠?"주 여사는 전 여사를 사칭하던 아까 그 여자다.전태평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협박하시는 건가요?""거래라고 해두죠."유현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전 여사님이 20억으로 아들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웃으실까요, 아니면 우실까요. 전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