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현은 대충 대답하고 건방진 걸음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려고 하다가 이훈의 걸상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훈은 갑작스럽게 전해진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쿵 하고 박았다. 이내 이훈은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이훈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전재현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전재현, 너 미쳤어?"전재현은 이훈의 손을 밀치며 말했다."쌤, 얘 좀 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저번에도 이랬다니까요. 쌤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이러는 데 없을 땐 어떻겠어요? 고아들이 이렇게 교양이 없다니까요. 쌤은 왜 내 말을 안 믿어요."그는 시뻘건 눈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그 손 놔, 뭐 하러 왔는지 잊었어?"이훈은 여전히 떨리는 입술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정 선생님도 이훈을 말려보았지만 이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찻잔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차 식었어. 가서 뜨거운 물 좀 따라와."이훈은 이를 악물고 두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강한서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다시 강한서에게 가져다 놓고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았다.유현진은 눈을 씰룩거렸다.'강한서 한 마디가 내 열 마디보다 나은 거야?'말없이 자리에 앉는 이훈을 전재현은 실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입을 삐죽이더니 코를 만지며 강한서와 유현진을 살펴보았다."두 사람은 고아원 직원이에요?"전재현은 이훈의 새 옷을 보며 말했다."새 옷 입었네. 돈 많은 바보들이 고아원에 돈이라도 던져줬나 봐?"'이 자식, 말이 거치네!'정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전재현, 너 말조심해! 두 분은 이훈의 대리 보호자야. 오늘 특별히 너희 둘 일로 오셨어.""쌤, 우리는 단순 트러블이 아니에요. 엄격히 말하면 이건 고의 상해죄로 신고해도 된다고요."정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교감 선생님은 정 선생님에게 전재현 집안은 건들면 안 되니 조심
문이 열리더니 보기에도 막돼먹은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씩씩거리며 걸어들어왔다.고개를 돌린 유현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검은색 스타깅, 그리고 진한 메이크업.여자는 가죽 미니스커트에 짧은 재킷의 패셔너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키도 길쭉하고 몸매도 좋았으며 얼굴도 요염하니 보기에는 대략 30대 후반으로 꽤 젊어 보였다. 유현진은 어딘가 모르게 이 여자가 낯익었다.유현진이 여자를 훑어보고 있을 때, 여자도 그들을 유심히 훑어보며 생각했다.'보아하니 어려 보이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이내 여자는 시선을 유현진에서 강한서로 옮겼다. 여자는 발걸음을 멈칫하다가 다시 강한서를 유심히 바라보며 걸어들어왔다. 여자 뒤로는 말라 보이는 중년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근시 안경에 2대8 가르마, 정갈한 정장 차림.유현진이 그 남자가 누굴지 유추하고 있을 때 정 선생님이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교감 선생님."교감 선생님은 정 선생님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굽신거리며 달려와 의자를 빼며 말했다."정 선생, 뭐 하고 있어요. 어서 전 여사님한테 차 따라드리지 않고. 저기 위에서 제일 비싼 거로 가져와요."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또 전 여사야? 전씨네 사모님은 다 이래?'진 여사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내가 차 마시러 여기 왔겠어요? 교감 선생님. 이번 일 반드시 제대로 해결해야 할 거예요.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결과가 없어요? 사람을 오라 가라 해서 해결된 줄 알았더니 도리어 나한테 보상을 요구해요? 이게 해결 방식인가요?"교감 선생님은 굽신거리며 사과했다."진정하세요. 꼭 만족스러운 결과 보여드릴게요."말을 끝낸 교감 선생님은 정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려 말했다."정 선생,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잘 해결한다고 안 했어요? 이게 며칠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요? 왜 아직도 이렇게 야단법석이에요?"정 선생님은 어쩔 바를 몰라 말했다."교감 선생님, 이 두 분은 이훈 학생의 보호자예요. 오늘 이 일로 학교에 상담하러
순간 교감 선생님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뭐… 뭐라고요?"유현진이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요? 싸워서 지는 사람이 맞는 거예요? 이 학교 첫 번째 모토가 공정 아닌가요? 교감 선생님은 모토대로 하셨어요?""들어오면서부터 전 여사님한테 쩔쩔매시면서 전 여사님의 결정만 궁금했죠? 그럼 우리는요? 교감 선생님 쇼를 도우러 온 광대인가요? 교감 선생님은 학생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전 여사님의 개인 비서인가요? 만약 전 여사님을 위해 일한다면 학교 그만두세요. 전 여사님 댁에 개가 필요하지 않은지 알아보시는 게 좋겠네요."유현진은 빙빙 돌릴 것도 없이 바로 짚어 말했다. 듣기 거북스러운 말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다른 사람 역시 교감 선생님의 편애를 지적한 적 있었지만 이토록 콕 집어 말한 사람은 유현진이 처음이다.이훈은 유현진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교감 선생님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속물이다. 집안 부모님이 세력이 있으면 학생에게 잘해주었고 보통 집안의 아이들은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문제를 일삼았다. 게다가 아부하는 실력도 단연 최고이다.비록 학생들한테는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학교 상사들은 그의 그런 성격을 오히려 아주 만족스러워했다.유현진은 교감 선생님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놓았다. 그녀는 모두가 하고 싶어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교감 선생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유현진에게 삿대질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교양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유현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교양이 없어요? 그럼 당신은 인품이 없겠네요. 이익을 위해 양심도 버린 주제에 어디서 교양 타령이에요?"여자는 유현진의 심상치 않은 눈빛과 말 빨에 유현진이 무조건 시설에서 고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입만 잘 놀리는…여자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어쩐지 애새끼가 싸가지 없다 했더니 고아원 사람의 공통점이었네. 나 참,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단 말이야. 교감 선생님. 이런 질 나쁜 학생을 자
'xxx, 남자랑 같이 오면 다야?'여자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욕했다.유현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루하게 생각했다. 문뜩 그녀는 강한서의 소매에서 밝고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녀는 강박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뜯기 시작했다.강한서는 힐끗 보기만 할 뿐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그것은 마치 소매에 박히기라도 한 듯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유현진은 한참 낑낑거려서야 그것을 뜯을 수 있었다. 다 뜯고 난 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의 뒤 면에는 접착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옷에 달린 물건이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강한서의 다른 소매를 보았다. 역시나 반대쪽에도 똑같은 큐빅이 박혀 있었다.유현진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유현진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큐빅을 소매에 다시 붙이려고 시도했다.하지만 아무리 붙여보아도 붙어나지 않았다. 바로 이때, 교육실 문이 열렸다. 유현진은 큐빅을 손에 쥐고 머리를 들었다.아직 상대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여자가 울며불며 뛰어가 말했다."왜 이제야 왔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 모자 여기서 죽었을지도 몰라!"교감 선생님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전 의원님, 이런 일로 직접 오게 만들어서 송구스럽네요."정작 상대는 교감 선생님을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대체 또 무슨 사고 친 거야?"남자는 이 모자를 보기만 해도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자기 왜 말 그렇게 해! 사고라니? 자기 아들 머리 좀 봐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왔는데 저 인간들이 나 이 꼴로 만들었어. 내 얼굴 좀 봐. 여기 좀 봐봐!"비록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은 아니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데다가 옷도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체면을 구기는 상황이다.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저요."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웃음을 지으며
이 여자는 확실히 관능미가 넘쳤지만 오관이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유현진은 그녀의 입가의 점을 보고 낯이 익었다.전태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유현진은 아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유현진은 이제야 완전히 기억났다.진짜 전 여사가 20억을 주고 보낸 무명 배우는 결국 한주시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뻔뻔스럽게 "전씨 가문 부인"으로 살고 있었으며 게다가 전태평의 아이까지 낳아서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전 여사가 그 무병 배우에게 돈을 주고 떠나라 했을 때, 이들의 아이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 유현진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전 여사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속았고 전태평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전 여사가 그렇게 악을 쓰고 가정을 지키려 했건만 결국 사생아는 태어났다.마침 그녀는 전 여사가 임차한 용호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생겼다.전태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강씨 가문 사람들과 마주칠 줄 생각도 못 했다.가짜 "전 여사"는 눈치 없이 전태평에게 자기의 체면을 찾아달라고 떼를 썼다. 그녀는 유현진의 말을 흘려듣고는 전태평을 팔을 부둥켜안고 말했다."저년이야! 저년이 내 얼굴에 뜨거운 물 뿌렸어. 우리 아들 이마에 상처는 저 여자 옆에 앉은 애새끼가 한 짓이야! 당장 저 자식 강제 퇴학시켜. 그리고 고아원도 한주시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이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전태평이 권리 남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할까 봐 감히 고아원을 사라지게 만들라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전태평은 굳은 얼굴로 강한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눈치 없이 입을 나불거리자 전태평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그 입 다물어! 학교 내가 열었어?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당신은 왜 여기서 막돼먹은 아줌마처럼 싸우고 있어.
전태평의 부인과 강씨 가문은 각별한 사이라 전태평 역시 강씨 가문에 자주 들렸다. 게다가 한성 그룹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으니 전태평은 강한서에 대해 잘 알고 있다.전 여사가 형제들과 사이가 틀어진 후, 신미정은 전 여사를 안쓰럽게 여겨 더 마음을 주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고 전태평의 사업에도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오늘 일이 전태평의 본처인 전 여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승진을 앞에 두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전태평은 좋은 결과가 없다.'모자란 것들, 그렇게 눈치를 줬건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러고 있어!왜 이런 껍데기만 반반한 여자에게 빠져서 이런 모자란 자식까지 낳았을까?'전태평은 비서에게 말했다."두 사람 집으로 데리고 가, 며칠 동안 집에 박혀서 반성해!"하지만 유현진은 그들을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다.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전 의원님. 사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보내셨다가 만약 교감 선생님께서 제 동생 퇴학이라도 시키면 어떡해요? 일은 마무리 짓고 가는 게 좋겠죠?"전태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는 늘 강씨 집안에 체면을 구기는 모자란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모자란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교감 선생님은 전태평의 행동에 깜짝 놀라 머리를 굴려 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설마 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이 일에 개입하기 곤란하여 그러시는 걸까? 조용히 처리하시려고?이런 장면을 모두에게 보여주면서 공정한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게 아닐까?만약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굳이 학교까지 오실 필요 없었을 텐데.'교감 선생님은 자기의 생각이 정확하다고 생각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이훈 학생의 퇴학 처리는 학교 측에서 심사숙고하여 얻은 결과인데 전 의원님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오늘 당장 퇴학 절차 밟으세요."전태평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모자란 놈이 하나 더 있군.'전태평은 정서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도서관? 강 대표님?이 교장이 강한서에게 굽신굽신하는 것을 보고 교감 선생님은 입을 쩍하고 벌렸다.'설마 학교에 도서관을 후원했다던 한성 그룹 대표, 강 대표님?'교감 선생님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전태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전 의원님… 이거…..."전태평은 이 모자란 사람과 말을 섞기도 싫었다."아니요."강한서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집안의 아이가 학교에서 폭행당했는데 학교 측에서 다짜고짜 아이를 퇴학시킨다고 하길래 집사람과 함께 상황 요해하러 왔어요."이 교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교감 선생님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퇴학까지 시켜야 해요?"이훈은 입술을 오므렸다.'이 부부, 거짓말 진짜 잘하네.'폭행을 가한 건 바로 이훈인데 그들의 입에서 이훈은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버렸다.교감 선생님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그저… 두 학생에게 작은 트러블이 생겼어요."유현진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작은 트러블이요? 교감 선생님. 아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거로 기억하는데요. 우리 훈이가 학교 모토를 어겨서 학교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으니 학교 측의 결정으로 퇴학 처리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작은 트러블로 퇴학 처리까지 가나요?"이 교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학교 측의 결정인데 난 왜 모르는 일이죠?"퇴학은 작은 일이 아니라 신고와 심사가 필요한 일이라 교감 선생님이 아니라 이 교장에게도 단독으로 결정할 권리가 없다.비록 학교 위원회에 교감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몇몇 있기는 하다. 그들도 평소 교감 선생님의 행실에 대해 알고 있지만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다들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해 단독적으로 한 학생의 퇴학을 결정했으며 게다가 강씨 가문의 사람을 건드렸다.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이 교장에게 이 사태를 알렸다. 만약 이대로 놔뒀다면 앞으로 한성 그룹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바로 이런 것을 뜻한다.먼저 주먹을 휘두른 이훈도 미안한 마음에 병원비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거늘 오히려 유현진이 뻔뻔하게 요구했다.하지만 강한서는 무덤덤했다.'100만 원, 유현진 성격에 적당히 했네.'이 일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콧대를 눌러주는 게 목적이다.전태평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아무리 그래도 신분이 있는 사람인데 젊은 여자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도 자리에 있으니 전태평은 억울함을 꾹꾹 눌러 삼켰다.그리고 비서더러 얼른 돈을 결제하라고 시켰다.전태평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입금 내역을 확인한 유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의원님은 사모님처럼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네요."전태평은 어이가 없었다."전 의원님. 이참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전태평은 유현진을 쌀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말씀하시죠.""우리 할머니가 다다음 주에 팔순 잔치를 열려고 하는데 용호에서 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전 여사님이 이미 렌트 주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전 의원님께서 전 여사님한테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전태평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다. 전태평은 강씨 가문의 힘이 필요했고 그 속에는 전 여사와 신미정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전 여사는 신미정의 말이라면 끔뻑 죽었다. 그런데도 거절한 거로 보아 이건 분명 신미정의 뜻이다.전태평은 신미정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됐다."용호는 우리 집사람의 소유라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그렇군요."유현진은 느슨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주 여사님한테는 결정권 있어요? 전 여사님과 오랫동안 얼굴 못 보셨겠죠?"주 여사는 전 여사를 사칭하던 아까 그 여자다.전태평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협박하시는 건가요?""거래라고 해두죠."유현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전 여사님이 20억으로 아들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웃으실까요, 아니면 우실까요. 전
말을 하며 차미주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에 세정제를 좀 묻히고 힘껏 팔에 끼워넣었다. 차미주는 손목을 돌리며 이 팔찌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이전에 옥이 별로라고 말한 게 너무 과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팔찌, 진짜 너무 아름다워. 말 그대로 예술이잖아.’ 그녀가 팔찌를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강한서가 내 손목 둘레를 재었다고 하는데, 이 팔찌는...?” 한현진이 눈을 살짝 좁히며 웃었다. “이건 너를 위한 신혼 선물이야.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미리 즐겨봐. 나한테 며칠 더 두면 내가 못 참고 껴버릴까 봐 그래.” 차미주는 그 말을 듣고 팔찌를 빼려고 했다. “너 미쳤어? 이거 얼마나 비싼데. 너 결혼할 때 내가 500만 원밖에 안 줬는데 이건 너무 과하지 않냐고.” 처음 끼울 땐 힘들었는데 이제 빼려니 더 어려웠다.한현진이 차미주를 막았다. “미주야, 그건 다르지. 그렇게 비교하면 안 돼. 내가 결혼할 때 너는 한 달 월급이 300만 원도 안 됐잖아. 그런데도 500만 원을 선물로 줬고 그 마음이 그 선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중요한 거야. 지금은 내가 능력이 생겨서 너 결혼할 때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게 된 거고 그건 내 마음이야. 가치가 높고 낮고로 그 마음의 소중함이 달라지지 않아.”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팔찌는 강한서가 고른 건 맞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너도 이걸 좋아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마음에 들어?” 차미주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좋으면 됐어. 앞으로도 우리 둘 다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때 가면 팔찌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건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너한테 줄 수 있어.” 차미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됐어. 건물은 너무 비싸. 너랑 강한서가 또 이혼하고 나한테 재산 반환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 한현진은 혀를 차며 이빨을 간 채 말했다. “우리 둘한테
한현진이 그녀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떠들고 가만히 서 있어 봐.” 차미주는 바로 허리를 펴고 자세를 잡았다. 한현진이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뭔가 하나가 부족한데...” 차미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한현진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려 봐.”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차미주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한서였다. 그는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차미주는 놀라서 물었다. “너 여기 웬일이야?” “너희 집에서는 현관문 열고 얘기하면 몇 년 받냐?” 차미주는 말문이 막혔다. 차미주는 멋쩍게 길을 비켜주며 그 귀한 분을 집 안으로 들였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눈짓에 따라 손에 든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한현진이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상자를 열자 차미주는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는 투명한 광택을 띠는 옥 팔찌가 들어 있었다. 차미주는 옥 팔찌에 대해 잘 몰랐다. 엄마가 몇 개 가지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짙은 녹색이라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늘 옥 팔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팔찌는 달랐다. 맑고 투명한 빛에 가장자리엔 은은한 황금빛이 스며들어 있었고 자연광 아래에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마치 물기를 머금은 꽃잎 같았다. 차미주는 눈앞에 옥 팔찌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미주야, 이리 와.” 한현진이 불렀다. 차미주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한현진은 차미주의 손목을 잡고 팔찌를 들어올렸다.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안 들어갔다. 다시 시도했다. 또 안 들어갔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차미주의 손목은 붉게 달아올랐고 팔찌는 손목 중간쯤에서 멈춰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차미주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안 정했어. 그의 생일에 맞춰서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은 양쪽 부모님이 서로 만나고 만족하면 우리 엄마가 사람을 불러서 날짜를 정해줄 거야. 우리한테 맞는 날을 고르기만 하면 돼.”한현진은 놀라서 물었다. “너희 둘 진도가 언제 이렇게 빨라졌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청혼할 때 내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받아 줬어. 후에 웃으면서 말하더라구. 내가 너무 급하게 받아줬다고. 좀 더 밀당했어야 한다고. 근데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 내 머릿속엔 오직 ‘그래. 나도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어. 하하.”한현진은 웃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를 자극한 거야?”“자극이라기보단...” 차미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기억나? 내가 말했던 그 큰 이모. 그 이모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둘째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우리 할머니는 그 집안을 아주 좋게 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집에 편애가 심했지. 내가 사촌오빠랑 싸우면 그 오빠가 나를 이기지 못하고 항상 고자질을 했거든.”“그 큰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어.” ‘너처럼 덩치 크고 성격도 안 좋으면 커서 누가 너랑 결혼해주냐?’ “사실 그 말이 나한텐 꽤 큰 걱정거리였어. 물론 자라면서 그 이모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그때는 정말 결혼 못할까 봐 불안했어. 아니면 왜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겠어.”한현진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한테 남자가 없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했던 사람들을 네가 죄다 친구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사실 그녀가 알기로만 해도 대학 시절 차미주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는 둘이나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어떻게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두 번째 남자는 차미주에게 농구 경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직접 데이트 신청까지 했었다. 차미주는 선뜻 따라갔지만 농구장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한현진은 그녀의 호적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이시연은 오래 기다렸고 그 사이 네 명이 더 끼어든 후에야 은서하가 비로소 돌아왔다. 그녀는 땀에 젖어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고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이시연은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거예요? 의사한테 같이 가줄까요?”은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장실 갔다 오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이시연은 결과지를 건네며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면 승진하고 나 좀 잘 챙겨줘요.”은서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자리만 지킬 수 있어도 감사하죠. 승진은 꿈도 안 꿔요.”잠시 멈추고선 덧붙였다. “대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그냥 그럭저럭이죠. 서 대표님이 이번에 강력한 카드를 데려왔으니까 우리는 그저 배경일 뿐이죠.” 이시연의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친선 경기라고 보면 되죠 뭐.”은서하는 향료 조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도 좀 더 열심히 해봐야죠. 안 그러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요.”이시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클라우드 아파트 902.“현진아, 이건 어때?”차미주는 흰 티에 청바지 오버롤을 입고 한현진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어때?”한현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그럼 아까 그 꽃무늬 원피스는?”“그것도 괜찮아.”차미주는 눈꺼플이 살짝 뛰었다. “그럼 이 노란 운동복은?”“비슷해.”차미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너 지금 뭐야? 그냥 대충 말하는 거지? 다 비슷하면 난 도대체 뭘 입어야 해?”한현진은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너 대충 대하는 게 아니야. 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너한테 좀 더 격식을 차린 옷을 입힐지 아니면 너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힐지 말이야. 평소에 이렇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갑자기 정장 스타일을 입으면 길도 제대로 못 걸을 거고 스
한현진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서해금 옆에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벌써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법을 배우셨군요.”은서하의 얼굴이 잠시 창백해졌지만 이내 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 대표님, 저를 싫어하시든 미워하시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주혁이라는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에요.”“주혁 씨가 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운전기사일 뿐인데? 당신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정말로 걱정해서 경고해 주는 건지 아니면 고의로 우리 사이를 흔들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은서하는 더 조급해졌다. “저는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만큼은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세요. 한 대표님, 당신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예요.”초조해하는 은서하와는 달리 한현진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도와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죠? 갑자기 등을 돌리지 않았나요? 은서하 씨,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은서하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 대표님, 저는 겁이 많고 피할 줄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최소한 저를 도와주셨던 대표님을 해칠 수 없다는거요.” 그녀의 진지한 말투에 한현진은 마음이 흔들렸다.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다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주혁 씨를 멀리하라는 이유라고 말해보세요.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 될 만한 이유요.”은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움켜잡은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한현진은 지칠 대로 지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여기서 나를 걱정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은서하는 급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서해금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 만약 네가 은서하고 우연히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걸 이용해서 서대금이 나를 잠시라도 회사에서 밀어낼 수 있게 할 수 있어. 그리고 넌 그 기회를 통해 승진하고 월급도 올리고 사장 앞에서 좋은 이미지도 쌓을 수 있어. 그 상황에서 너라면 그걸 참을 수 있겠어?]차미주는 그 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임신한 채로도 이렇게 계산적이네? 너 아이 낳으면 두 명의 도깨비가 나올까 봐 걱정돼.]한현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 없을 거야. 강한서가 매일 내 옆에서 를 읽어주고 있어. 맨날 애들한테도 읽어주니까 조금은 성품이 좋을 거야.][강한서 진짜 대단하다. 넌 그걸 듣고 있어?][안 듣지.] 한현진이 대답했다. [난 이어폰 끼고 드라마 봐. 강한서가 애들한테 읽어주고.]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국 는 아무 소용없다는 거네.][왜?] 한현진이 물었다.차미주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엄마가 항상 그러셨어. 아이는 유전이 중요하다고.]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용은 용을 낳고 봉항은 봉황이 낳는다고. 네가 도덕이 없다면 강한서이 아무리 를 많이 읽어줘도 소용없어.”[너 진짜!] 한현진이 이빨을 갈며 말했다. [한성우 씨랑 있더닌 이제는 입만 잘 돌아가네.][오래 배운 거 이럴 때 써먹어야지.]한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나랑 연습하면 뭐 해. 능력 있으면 너희 사장한테 가서 연습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사장한테서 월급 받아야 해.]차미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있잖아.그 사람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자고 하는데 네가 봤을 때 첫 만남에 뭘 입고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까? 정말 고민돼.]한현진은 답했다. [내가 경험이 많아 보여?][두 번이나 결혼했잖아. 너가 없으면 누가 경험 있겠어.]한현진은 담담하게
은서하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건강검진표를 꽉 쥔 채 한현진의 뒤로 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현진의 배로 향했다. 한현진은 회사에 와서부터 항상 허리 라인이 보이지 않는 넉넉한 옷만 입었다. 뒷모습으로 보면 여전히 날씬해 보였고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특정 동작을 할 때 배가 살짝 불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한현진의 차에 탔을 때 그 모습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이 찐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임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은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한현진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혹시 서해금 때문일까?’은서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한현진은 마치 그녀의 발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받고 몇 마디를 나누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줄을 빠져나갔다.은서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한 대표님, 검사 안 하세요?”한현진은 천천히 돌아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올려구요.”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한현진이 떠난 뒤 이시연이 나타났다. “한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이시연은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은서하가 대답했다. “전화를 받으시더니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가셨어요.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어요.”“그렇군요.” 이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대표님과 얘기 해봤어요? 예전에 그 분의 옷을 받고 따돌림 당하고 급여도 깎였다고 했을 때 한 대표님이 굉장히 마음 아파했어요.” “그때 한 대표님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후에 그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 대표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 잘 사과하면 한 대표님이 이해해줄 거예요.”은서하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는 그런 얘길 꺼낼 입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냥 작은 직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이시연과 은서하가 진단서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시연이 은서하의 손을 이끌고 다가오며 말했다. “한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 건강검진 받으러 오신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은서하를 가볍게 훑어본 뒤 다시 이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도 오늘입니까?” 이시연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어제가 제 날짜였는데 어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른 분이랑 바꿨어요. 서하 씨랑 같이 오려고요.” “가족은 안 데리고 왔어요?” 이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직장에서 추가 의료보험을 들어두셔서 제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서하 씨 외할머니의 병은 보험으로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서요.”은서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이시연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주혁에게로 흘러갔다. 주혁은 예민하게 그 시선을 포착했다. 둘의 눈이 맞닿자 은서하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건강검진 순서가 불리기 시작했다.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얘기 나누세요. 전 애들 데리고 먼저 검진 받으러 가겠습니다.” 그가 주상욱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시연이 한현진에게 조용히 제안했다. “한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먼저 채혈하고 나서 초음파 검사하면 순서가 빨라요. 그러면 금방 검사 끝내고 식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채혈은 이미 했어요. 먼저 가요. 난 초음파실 앞에서 번호표 뽑아둘게요.” 한현진은 애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주혁이 진짜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난 뒤부터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심한 척 주혁을 은근히 살폈다. 주혁의 외모는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얼굴이었다.
주혁이 설명했다. “상욱이가 자신이 보낸 그림 잘 받았는지 물어봐요.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해요.”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주혁에게 물었다. “마음에 든다는 걸 수화로 어떻게 하면 돼요?”주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말하면 돼요. 상욱이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는 게 서툴러요.”사실 주상욱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납치 사건에서 구출된 후 청력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는 청각장애인처럼 생활했으며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지만 또한 납치 당시 겪은 충격 때문에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 능력도 점차 떨어졌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후 보청기를 장착한 뒤 청력은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언어 능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한현진은 주상욱에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주상욱은 눈이 반짝이며 수화를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글을 한 문장 써서 한현진에게 건넸다.“나 보라고?”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주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현진은 고개를 숙여서 화면을 읽었다. [누나, 아빠에게 휴가를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빠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제 누나 옆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와 엄마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가 아빠를 힘들게 한 거예요. 아빠 대신 사과하고 싶어요. 아빠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한현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아이의 말은 서툴고 순수했지만 그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은 ‘아빠’가 진짜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핸드폰에 글 한 줄을 적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네 아빠를 탓하지 않아.]주혁은 이제 그녀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