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전부 그런 말투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다른 남자는 어쩌면 좋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한서는 절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할 때면 강한서는 말했다. “혀가 문에 끼이기라도 한 거야?”그는 좋아하는 사람의 애교 섞인 말투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애교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 기억 잃은 척하느라 고생 좀 하셨겠네.’민경하가 말했다. “대표님 지금 회의 중이라 전화 받기 어려우니 말씀하시면 제가 전달해 드릴게요.”“회의는 언제쯤 끝나요?”“글쎄요. 회의 내용에 따라 시간이 다르겠지만, 짧게는 30분, 길면 3, 4시간 정도—”이런 쓸데없는 말이나 들으려 전화한 것이 아니었기에 송가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면 올라가서 기다릴게요. 민 실장님, 내려와서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강한서의 얼굴이 민경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능력하기는.”민경하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눈치가 빠를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공장에 가셨다고 얘기할걸.’전화를 끊은 민경하가 휴대폰을 강한서에게 돌려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게요.”강한서가 민경하를 사무실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바리바리 물건을 들고 온 송가람은 민경하를 보자마자 그에게 물건을 들어달라고 했다. 같은 인간이었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현진은 수도 없이 회사에 왔었지만 단 한 번도 직원에게 짐을 들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송가람은 마치 그것이 당연한 듯 행동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송가람은 민경하에게 며칠 동안 강한서의 행적을 묻기 시작했다. 민경하는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출근, 헬스 그리고 가족을 만났다는 것이 전부였다. 송가람은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당황하던 송가람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얼른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민서야, 내가 민 실장님께 도와달라고 한 거야.”송가람은 비록 민경하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가 강한서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 민경하와 척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민서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은 채 말했다. “가람 언니, 실장님 편을 들지 말아요. 이 인간은 아부하는 게 일상이에요. 로비에 경비원도 있는데 비서 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짐을 들고 있어요. 언니에게 빌붙으려는 게 분명해요.”민경하가 빌붙길 바라는 건 오히려 송가람이었다. 그녀는 얼른 민경하에 손에 들린 짐을 가져가며 말했다. “민서야, 이런 일로 그러지 마. 민 실장님도 좋은 마음으로 그러신 건데. 내가 들면 돼. 네 사무실은 어디야?”강민서는 그제야 비난을 멈추고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같이 가요.”말하며 앞장서 사무실로 향했다. 치마를 입고 있어 큰 행동을 하기엔 조금 불편했던 송가람은 강민서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민서는 먼저 획 그녀를 지나쳐 사무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강민서가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언니, 차 드시겠어요, 아니면 커피?”그 모습에 송가람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저런 게 무슨 강씨 가문 딸이라고. 눈치도 없어.’송가람은 어설픈 자세로 짐을 바리바리 손에 들고 대답했다. “다 좋아.”제자리에 서서 피식 웃던 민경하가 몸을 돌려 강한서의 사무실로 향했다. 곧이어 그는 강한서의 불만 가득한 눈빛을 가득 받으며 강한서의 사무실에 있는 한현진과 아이에 관련된 모든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곤 송가람이 선물했던 마이크로 풍경 유리 글로브를 박스의 제일 밑에서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강한서는 턱을 괴고 민경하를 쳐다보았다. “촬영장 연출팀에서 일해야 할 것 같네요.”민경하가 말했다. “전 다만 능력으로 증명하고 싶을 뿐이에요. 제가 그 연봉을 받는 건 당연한 노력의
민경하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고생은요. 그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이 선물은 제게 너무 과분해요.”송가람이 말했다. “제가 한서 오빠 대신 실장님께 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새해 인사 겸 드리는 작은 선물이에요.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요.”민경하와 가까워지려는 송가람의 속셈을 알아차린 강민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가람 언니가 주면 그저 받아요. 고상한 척하기는. 왜요, 지금은 기개가 밥 먹여주나 보죠?”“...”조금 전 일로 복수하는 것이 분명했다. 강민서의 말에 민경하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선물을 건네받았다. “송가람 씨, 대표님께서 회의가 끝나셨어요. 안내해 드릴게요.”“저도 갈래요.”강민서가 몸을 일으켰다. “마침 저도 오빠에게 볼 일이 있었거든요. 가요, 언니.”송가람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리웠다. ‘강민서, 역시 눈치가 없어.’사무실에 들어서자 보이는 마이크로 풍경 유리 글로브에 송가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강민서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하기는 껄끄러웠던 터라 송가람은 수줍어하며 별것 아닌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강민서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겁쟁이네. 나도 비록 강운 오빠를 꼬시는데 실패했지만 최소한 난 당당하게 고백했었다고.’이것저것 신경 쓰며 겁에 질린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얘기를 꺼내지 않으니 내가 먼저 말해야지.’강민서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빠. 퇴근하고 바빠? 안 바쁘면 나랑 실장님이랑 같이 영화 보러 가.”송가람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한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영화?”“아무거나. 할머니가 실장님과 데이트하라는데 도무지 뻘쭘해서 견딜 수가 없어. 오빠가 같이 가줘. 혹시 실장님이 나 괴롭히면 월급 좀 깎아.”강민서가 애교 부리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녀의 투정에 귀찮아진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씨, 별일 없으면 오늘은 일단 돌아가요.”
‘안 넘어졌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한현진이 막 몸을 일으켜 사과하려는데 귓가에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컴컴한데 날 유혹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순간 으스스 소름이 돋은 한현진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명석은 등받이 기대앉아 입꼬리를 씩 올린 채 여유로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다른 사람 시야 다 가리셨네요.”뒷좌석의 관객도 입을 열었다.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요. 영화 시작했잖아요.”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좌석을 확인했다. ‘젠장, 지지리 운도 없지.’정명석의 옆자리였다. 은서가 한현진의 손을 잡아당기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안 앉냐는 눈빛이었다. 심호흡을 내쉰 한현진이 은서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은서를 가운데 앉히며 정명석과 떨어졌다. 타이틀이 지나가고 본영화도 이미 시작되었다. 한현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자기를 쳐다보는 정명석의 뜨거운 눈빛이 느껴졌다. 한현진은 내색하지 않고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옆에서 풉하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한현진은 모른 척 영화에 집중했다. ‘정명석 이 자식은 귀신처럼 따라붙네. 제일 좋은 전 애인은 죽은 것처럼 지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얜 왜 이렇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거야?’특히 강한서가 행방불명됐을 때, 정명석은 가짜 연애로 강한서를 나타나게 하라는 제안을 했었다. 사심이 없지 않고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 한현진의 생각이었다. “살의”는 개봉 후 지금까지 9일 사이 총 400만 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했다. 설 연휴 기간 개봉한 영화 중 누적 관객수 5위를 차지했고 1위는 오늘까지 이미 1500만 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해 그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다행히도 연휴가 끝난 후로는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던 영화의 관객수는 점차 줄어드는 반면, “살의”는 오히려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영화 편성률도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건 좋은 현상이었
무대 위의 쨍한 조명은 그녀의 얼굴로 비춰졌지만 그녀의 온 몸은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마치 무언의 암시를 하는 것 같아보였다. 장면은 30년 전으로 돌아가 독을 탄 그 손을 자세히 보여줬다. 그 손은 꽤나 크기가 컸고 손등에는 혈관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손목에는 여성의 머리끈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끼워져 있었고 그 머리끈은 옅은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옅은 노란색의 머리끈, 그것은 그녀들이 마지막에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출 때 끼는 머리끈과 일치했다. 화면은 거기서 뚝 멈춰버려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 독을 탔는지에 대해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었다. 관중들은 이미 마지막에 독을 탄 사람에 대해 토론 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손의 주인이 진상현이라는 역할을 맡은 한열이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사라 역을 맡은 한현진이라는 주장을 했다. 왜냐하면 한현진의 손은 여자에 비해 꽤나 큰 크기였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의 주장에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보며 갸우뚱했다. ‘내 손이 크다고? 이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지만 마지막 그 손은 사실 감독의 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손이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을 하든지 다 비슷하게 보이는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창수는 미스터리 영화계에서 상을 수도 없이 받은 사람이라 관중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관중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지만 한현진은 그들이 다 떠나기를 기다려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러면 사람들이랑 마주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채 나가기도 전, 정명석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오랜 친구가 우연히 만났으면 인사라도 해야지. 너는 왜 이렇게 양심도 없냐?”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명석에게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 시비 걸지 말고.” “쯧.” 정명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너한테 준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 실시하다니, 강을 건너 다리까지 해체할 수 있는 자식이 왜 이러지? 지금 혹시 찔리는게 있어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한현진의 당황스러운 표정은 정명석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대체품은 아니었나 보네.’ 정명석이 입을 떼기도 전, 한현진은 먼저 말을 꺼냈다. “도대체 누가 너한테 이런 자신감을 불어넣은 거지? 넌 진짜로 네가 강한서 씨만큼 잘생겼다고 생각해?” 그녀의 정명석은 또 다시 표정이 굳더니 언성이 높아졌다. “너 눈이 어디 잘못 됐어? 내가 왜 강한서 씨보다 못생긴 건데? 잘생긴건 둘째 치고 난 그 사람보다 젊어! 나 좋다는 여자들이 줄을 서있다고.” 한현진은 그의 말에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사람이 왜 지금 내 앞에서 강한서 씨랑 비교하는 거지? 내 마음속에는 강한서가 제일 잘생겼어. 나랑 장난해 지금? 네 여자 친구한테도 물어봐. 네가 잘생겼는지 아니면 한서 씨가 잘생겼는지, 당연히 너를 고를걸? 똑같은 도리 아니야?” 정명석은 얼굴이 벌개진 채로 대답했다. “그냥 내가 졌다는게 어이가 없어 그런다! 그런 늙은이한테 지다니.” 한현진은 그의 말에 펄쩍 뛰며 물었다. “늙은이라니? 너는 30살도 채 못 돼서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이런 시*!” 정명석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소리 질렀다.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는 순간에도 너는 가만히 있었어. 강한서 씨랑 나 둘 다 너랑 연애를 하고 사랑을 했는데 왜 우리 둘은 이렇게 대우가 다른 거야?” “말을 그런 식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너를 욕하는건 아주 정상적인 일 아니야? 그때 나는 유현아 때문에 가뜩이나 인간관계가 바닥을 칠 때였어. 근데 나한테 다른 사람 욕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지 네가? 네가 보기에 그때 내가 따돌림을 덜 당하는 것 같아 보였나보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그런 자식들을 상대나 했을 것 같아?” 한현진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정명석은 한현진을 나무라는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역시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
한현진은 은서가 낯선 사람도 살갑게 대하는 모습에 조용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정명석도 어린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지 한현진과 인사도 없이 은서의 손을 잡고 나가려고 했고 은서를 말리지 못한 한현진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영화관이 있는 층에는 어린 아이들이 놀만한 인형 뽑기와 각종 오락기기 그리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은서는 이런 곳에 많이 와본 적이 없어 무엇을 봐도 신기해했고 다 놀고싶어 했다. 한현진은 핸드폰을 들고 오락기기에 쓸 동전을 뽑으러 향했고 큐알 코드를 스캔하려는 순간, 정명석이 스캔하는 카메라를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손짓을 하고 다가오라고 하더니 직원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을 했다. 직원은 전혀 당황하거나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많은 양들의 동전을 들고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한현진이 어리둥절해하며 정명석에게 물었다. “너희 집에서 연 가게야?” 정명석은 묻는 한현진을 쳐다보며 콧방귀를 끼더니 대답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을 때도 너한테 계산하라고 한 적은 없었어. 지금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어떻게 너한테 계산을 하라고 하겠냐? 내가 그렇게 능력 없는 놈으로 보여?” 한현진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난 남편이 있어서.”“닥쳐.” 정명석은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한현진은 그의 말에 입을 꾹 닫아버렸고 조금 잇다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돌려줄지 고민했다. 은서는 아주 신나서 폴짝폴짝 뛰며 인형 뽑기 기계로 꽤나 많은 인형을 쉽게 뽑았다. 그리고는 정명석의 손을 잡아 끌면서 각종 오락기기를 놀러 떠났다. 한현진은 은서의 손에 이끌려 이러 저리 끌려 다니는 정명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명석이는 아직 젊어서 은서랑 놀아줘도 정력이 넘치는 구나. 하지만 은서가 나중에 크면 강한서 씨는 40이 거의 되는 나이겠네? 애랑 놀아줄 수 있겠어?’ 한현진은 나중에 강한서에게 꼭 열심히 헬스를 하고 체력을 키우라는 잔소리를 매일 하겠노라고 다짐했
오전에 금방 결혼서류를 떼고 저녁에 전 남자친구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니. 한현진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져 죽고만 싶었다. ‘매번 정명석이랑 만나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이 새*가 나한테 안 좋은 기운을 넘기는게 확실해.’ 한현진이 필사적으로 정명석의 품에서 벗어났고 강한서를 부르려는 순간, 송가람이 그에게로 다가가 물을 건네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 오전에 결혼서류를 떼고 저녁에 한현진 몰래 의붓언니와 나와서 영화를 보다니? 지금 보니 변명을 하고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한현진이 아닌 강한서였다. 송가람은 강한서가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보았고 한현진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잘생긴 남자와 친밀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현진 씨?” 송가람은 깜짝 놀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한서 오빠, 저거 한현지 씨 아니에요?” 그녀는 물으며 강한서의 눈치를 살폈다. 강한서는 생각보다 아주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눈빛에는 분노와 당황함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송가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한서 오빠, 우리 가서 인사라도 해요.” 정명석은 한현진의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가보았고 당연하게도 가만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한현진을 잡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정명석은 전에 몇 번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전에는 아주 선명하게 강한서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고 강하게 싫어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현재는 마치 자신이 안았던 여자가 강한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냥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들었는데... 저 정도라고?’ “현진 씨!” 송가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다 만나고 정말 반갑네요. 친구 분이랑 영화 보러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