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한현진의 당황스러운 표정은 정명석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대체품은 아니었나 보네.’ 정명석이 입을 떼기도 전, 한현진은 먼저 말을 꺼냈다. “도대체 누가 너한테 이런 자신감을 불어넣은 거지? 넌 진짜로 네가 강한서 씨만큼 잘생겼다고 생각해?” 그녀의 정명석은 또 다시 표정이 굳더니 언성이 높아졌다. “너 눈이 어디 잘못 됐어? 내가 왜 강한서 씨보다 못생긴 건데? 잘생긴건 둘째 치고 난 그 사람보다 젊어! 나 좋다는 여자들이 줄을 서있다고.” 한현진은 그의 말에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사람이 왜 지금 내 앞에서 강한서 씨랑 비교하는 거지? 내 마음속에는 강한서가 제일 잘생겼어. 나랑 장난해 지금? 네 여자 친구한테도 물어봐. 네가 잘생겼는지 아니면 한서 씨가 잘생겼는지, 당연히 너를 고를걸? 똑같은 도리 아니야?” 정명석은 얼굴이 벌개진 채로 대답했다. “그냥 내가 졌다는게 어이가 없어 그런다! 그런 늙은이한테 지다니.” 한현진은 그의 말에 펄쩍 뛰며 물었다. “늙은이라니? 너는 30살도 채 못 돼서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이런 시*!” 정명석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소리 질렀다.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는 순간에도 너는 가만히 있었어. 강한서 씨랑 나 둘 다 너랑 연애를 하고 사랑을 했는데 왜 우리 둘은 이렇게 대우가 다른 거야?” “말을 그런 식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너를 욕하는건 아주 정상적인 일 아니야? 그때 나는 유현아 때문에 가뜩이나 인간관계가 바닥을 칠 때였어. 근데 나한테 다른 사람 욕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지 네가? 네가 보기에 그때 내가 따돌림을 덜 당하는 것 같아 보였나보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그런 자식들을 상대나 했을 것 같아?” 한현진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정명석은 한현진을 나무라는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역시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
한현진은 은서가 낯선 사람도 살갑게 대하는 모습에 조용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정명석도 어린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지 한현진과 인사도 없이 은서의 손을 잡고 나가려고 했고 은서를 말리지 못한 한현진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영화관이 있는 층에는 어린 아이들이 놀만한 인형 뽑기와 각종 오락기기 그리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은서는 이런 곳에 많이 와본 적이 없어 무엇을 봐도 신기해했고 다 놀고싶어 했다. 한현진은 핸드폰을 들고 오락기기에 쓸 동전을 뽑으러 향했고 큐알 코드를 스캔하려는 순간, 정명석이 스캔하는 카메라를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손짓을 하고 다가오라고 하더니 직원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을 했다. 직원은 전혀 당황하거나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많은 양들의 동전을 들고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한현진이 어리둥절해하며 정명석에게 물었다. “너희 집에서 연 가게야?” 정명석은 묻는 한현진을 쳐다보며 콧방귀를 끼더니 대답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을 때도 너한테 계산하라고 한 적은 없었어. 지금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어떻게 너한테 계산을 하라고 하겠냐? 내가 그렇게 능력 없는 놈으로 보여?” 한현진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난 남편이 있어서.”“닥쳐.” 정명석은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한현진은 그의 말에 입을 꾹 닫아버렸고 조금 잇다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돌려줄지 고민했다. 은서는 아주 신나서 폴짝폴짝 뛰며 인형 뽑기 기계로 꽤나 많은 인형을 쉽게 뽑았다. 그리고는 정명석의 손을 잡아 끌면서 각종 오락기기를 놀러 떠났다. 한현진은 은서의 손에 이끌려 이러 저리 끌려 다니는 정명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명석이는 아직 젊어서 은서랑 놀아줘도 정력이 넘치는 구나. 하지만 은서가 나중에 크면 강한서 씨는 40이 거의 되는 나이겠네? 애랑 놀아줄 수 있겠어?’ 한현진은 나중에 강한서에게 꼭 열심히 헬스를 하고 체력을 키우라는 잔소리를 매일 하겠노라고 다짐했
오전에 금방 결혼서류를 떼고 저녁에 전 남자친구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니. 한현진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져 죽고만 싶었다. ‘매번 정명석이랑 만나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이 새*가 나한테 안 좋은 기운을 넘기는게 확실해.’ 한현진이 필사적으로 정명석의 품에서 벗어났고 강한서를 부르려는 순간, 송가람이 그에게로 다가가 물을 건네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 오전에 결혼서류를 떼고 저녁에 한현진 몰래 의붓언니와 나와서 영화를 보다니? 지금 보니 변명을 하고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한현진이 아닌 강한서였다. 송가람은 강한서가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보았고 한현진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잘생긴 남자와 친밀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현진 씨?” 송가람은 깜짝 놀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한서 오빠, 저거 한현지 씨 아니에요?” 그녀는 물으며 강한서의 눈치를 살폈다. 강한서는 생각보다 아주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눈빛에는 분노와 당황함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송가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한서 오빠, 우리 가서 인사라도 해요.” 정명석은 한현진의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가보았고 당연하게도 가만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한현진을 잡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정명석은 전에 몇 번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전에는 아주 선명하게 강한서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고 강하게 싫어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현재는 마치 자신이 안았던 여자가 강한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냥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들었는데... 저 정도라고?’ “현진 씨!” 송가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다 만나고 정말 반갑네요. 친구 분이랑 영화 보러 오셨어요?”
한현진은 송가람을 슥 훑어보았고 속으로 내심 그녀의 참을성을 감탄했다. 저번에 송씨 가문에서 그녀의 뺨을 두 번이나 쳤었지만 강한서의 앞에서 자신과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에 조금 놀란 것은 사실이다. 강한서는 잘생긴 얼굴을 이용을 해 매력은 넘치고 넘쳤다. 하지만 속도는 아주 느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송가람의 입에서 관건적인 소식 하나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송가람의 말에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좋고요. 마침 저희도 밥을 먹으러 가려고 했어요.” 그러자 가만히 있는 강한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사에 일이 더 있어서 바빠. 그럴 필요 없어.” 한현진과 송가람은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다 물음표 하나가 쳐져있는 것 같았다. 이내 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강한서에게 말을 했다. “일이 있으면 먼저 가보세요. 저랑 제 동창은 가람 언니랑 밥 먹으로 갈 거예요.” 강한서는 침묵했다. ‘정 씨 동창?’ 그는 한성우가 전에 고중시절 사귀었던 여자에게도 친구 혹은 동창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학창시절 때 그들 사이에서 이성 지간이 동창, 혹은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면 애매하고도 뭔가 낌새가 이상한 티가 났었다. 송가람은 이 기회를 놓칠 세라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강한서에게 말했다. “한서 오빠, 온 오후 돌아다니느라 배고플 텐데 뭐 좀 드시고 가셔아죠. 몸도 아직 성하지 않은데 잘 먹어야 영양도 보충되고 그러는거 아니겠어요?” 강한서는 한현진을 슬쩍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가람은 강한서가 자신을 거절할 수가 없어 수락을 했다고 생각해 얼굴에는 더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명석은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숙여 한현진에게 물었다. “네 전 남편이랑 의붓언니라는 사람은 무슨 사이야?”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해줬다. “묻지 말아야 할 문제는 묻지마. 모르는게 약이고 알면 독이야.” “...” 강민서는 화장실에 나오고 나서 민경하의
한현진은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고 차마 고개를 들어 송가람의 얼굴을 볼 용기도 안 났다. 그녀는 강한서의 행동이 참 어이가 없다고 생각을 해야 할지 아니면 송가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해야 할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한주 강씨 가문의 저택으로 갔었던 한현진이라 강한서가 은서의 의견을 얼마나 잘 따라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애를 써가며 강한서와 그의 가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송가람이었지만 한주 강씨 가문에서 은서의 지위도 낮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이랑 다른 의견을 내며 다투려 하다니, 한현진은 송가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송가람의 입은 옷을 쭉 훑어보았고 오늘 왜 그녀가 일식을 먹고 싶어 하는지 대충 눈치를 챘다. 송가람은 늘 강한서의 앞에서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어 했고 추한 모습들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평생 동안 완벽하게만 살아가겠는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 사랑해줘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사실을 송가람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보고 만나봤었기에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정명석은 매번 고기가 다 구워지면 은서의 접시에 놓아주며 아이를 살갑게 챙겼고 은서 다음은 한현진에게 먼저 놓아주었다. 그리고 불판에 남겨진 다른 고기는 당연하게도 정명석 본인과 강한서의 몫이었다. 강한서는 이런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은 건지 정명석과 신나게 대화도 나누었다. 그는 정씨 가문과 일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많이 서먹하지는 않았다. 강한서는 밥을 먹는 동안 정명석에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물었고 덕분에 그들의 식사 자리는 아주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송가람은 밥을 먹는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현진과 정명석도 함께 밥을 먹자고 요청을 한 이유는 바로 한현
정명석은 갑작스레 술을 찾는 한현진의 말에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 술까지 찾는거 보면.” 한현진은 그런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쓸데없는 말 참 많다.” 하지만 송가람은 강한서의 몸이 무척이나 걱정되는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서 오빠, 오빠는 마시지마요. 가뜩이나 몸도 천천히 회복중인데 술이나 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야 더 빨리 건강한 몸이 되죠.” 강한서는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괜찮아. 명석 씨랑 좀 같이 마셔보지 뭐.” 장명석은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잠간 당황을 헀다. ‘명석 씨?’ “한서 오빠, 몸이 중요하지 술이 문제예요 지금? 왜 이래요. 걱정되게?” 송가람은 걱정돼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보며 다시 말렸다. 그러자 강한서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다정해진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조금만 마실게. 네가 나 대신 명석 씨랑 좀 마셔줘. 나랑 명석 씨 아버지 사이가 꽤나 좋거든? 나한테 그 일이 생겼을 때도 정씨 가문에서 참 많이 도와줬었어.” 송가람은 그의 말에 속으로 내심 좋아했다. ‘그래도 현진 씨 말고 나한테 대신 마셔달라고 하네? 내가 이젠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을 쳐다보았고 한현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송가람은 강한서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말까지 꺼냈는데 제가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한현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최고인가? 역시 강한서 씨 얼굴은 믿고 본다니까.’ 그녀는 송가람의 사뭇 다른 반응에 강한서의 “미남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명석은 고개를 숙여 나지막한 소리로 한현진에게 말을 걸었다. “음, 네가 그토록 바라는 남자는 이미 물 건너 간 것 같은데? 나랑 둘이서 먼 곳까지 도망이라도 칠까?” “도망은 개뿔. 닥치라고!” 장명석은 한현진의 말에 짜증이 난 듯 말했다
“얘한테 내 이름을 기억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냥 현진이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건지는 저도 아직까지 모르겠어요. 근데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현진이한테 선생님이 배워주셨던 중점 내용들을 알면서도 한 번 더 물어봤었어요.” “처음에는 현진이도 제가 수업내용을 물어보니까 깜짝 놀라더라고요. 나 같이 매일 잠만 자는 열등생이 갑자기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그랬나 봐요.” “그래서 댄 핑계가 바로 그거였어요. 우리 아빠가 매 시험 때마다 성적이 오르면 오른 점수만큼 2만원씩 주기로 했다고. 내가 봐둔 모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가격이 1200만원인가 그랬어요. 그래서 나는 꼭 600점 이상의 점수를 받고 싶다고.” “제 얘기를 들은 현진이가 생각 외로 되게 열정적으로 저한테 공부를 가르쳐줬어요. 막 자기가 직접 쓴 필기 책도 저한테 넘겨주면서. 특히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나서는 수업도 빡세고 친구들도 다 이기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자기가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알고 있는 지식을 전파하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남을 도운 친구는 정말 몇 안 됐어요. 그중 한명이 현진이었고.” “그때 현진이는 제가 기초가 되게 약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하나하나 가르칠 때마다 저한테 물었어요. 알아들을 만하냐고 혹은 이해할만 하냐고. 내가 못 알아듣는 거는 다시 가르쳐 주기도 했죠.” “남자들만 사는 숙소에서 늘 현진이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걔들이 그러더라고요. 처음에는 집 조건도 좋은데다가 부모님은 자선 사업을 한다면서 부러워했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복지 센터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했는데 현진이가 늘 그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음식을 일부로 먹이면서 괴롭히고 때리고 욕하는 바람에 입양당한 여자애가 집에서 불행한 삶을 산다고. 그래서 친구들이 현진이를 따돌렸대요. 얘 인성이 너무 안 좋아서 같이 놀고 싶지 않아서.” “근데 그때도 전 걔들 말을 하나도 안 믿었어요. 속으로는 나한테 자기 소중한 시간까지 허비하며 공부
“그 사실을 알고 너무 화가 나서 막 웃음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현진이가 나한테 관심이 왜 없는가에 대해 많은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그게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학교에서 교복을 입으라고 하면 저는 딱 하얀 셔츠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이랑 대화를 나눌 때나 현진이랑 대화를 나눌 때나 다 제일 잘생겨 보이는 각도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심지어는 현진이랑 말할 때 목소리도 조절해가며 잘생겨 보이려고 애를 썼죠. 그러다가 어느 날, 현진이가 저한테 공부를 가르칠 때 가끔 갑자기 멍을 때리더라고요? 그래서 전 얘가 드디어 나한테 반응을 하는가 생각했어요.” “학창시절 현진이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하나도 숨기지 않는 아이였어요. 다른 여자애들은 몰래몰래 숨어서 저를 보곤 했는데 현진이는 당당하게 제 앞에서 제 눈을 보더라고요.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경찰에 신고도 했을 거예요. 얘가 참 외유내강이었죠.” 정명석은 말을 하며 껄껄 웃더니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능 시험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일인데 제가 딱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에 저한테 연애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전 참 못난 놈이었죠. 그 말 한마디에 얼굴이랑 귀까지 다 빨개지고... 전 진짜 연애경험이 없었으니 당연히 없다고 했고 아직까지 제 마음을 흔든 사람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그러더니 현진이가 그럼 우리 둘이 한번 만나보겠냐고, 연애라는게 뭔지 한번 경험해보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전 당연히 좋다고 했죠.” “진짜 하늘을 날 듯이 기뻤어요. 그날 뒤돌아서 갈 때 현진이는 아마 몰랐을 거예요. 제가 속으로 얼마나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는지.” “저녁이 돼도 잠도 안 와서 한달음에 우리 집에서 현진이 집까지 달려갔었어요. 현진이 방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얘를 부를 용기가 안 나서 혼자 바보처럼 두 시간 가까이 밖에 서 있다가 불이 꺼지는거 확인하고 돌아갔어요.” “전 진짜 한 번도 그 정도로 누군가를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