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엔 침대도 없었고 송병천은 허리도 좋지 않았던 터라 아빠를 소파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강한서가 강민서를 내쫓은 뒤였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민서를 속인 것이었다. 사실 송병천을 집으로 데려온 강한서를 보며 강민서가 그에게 침대도 없는 집에 아저씨를 어디서 주무시게 할 거냐고 물었었다. 강한서는 대답 대신 강민서에게 옷을 던져주며 말했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와.”강민서는 갑작스러운 심부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한서를 무서워했던지라 그의 카리스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던져준 옷을 입으며 밖으로 향하던 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뭘 사 오면 되냐고 물었다. 강민서에게 쇼핑 리스트를 읊어주던 강한서가 그녀를 문밖으로 내보내더니 곧 문을 걸어 잠구고 태연하게 말했다. “다 사면 그대로 들고 가서 네가 먹어. 저녁엔 집에 돌아오지 말고.”강민서는 그제야 강한서가 자기를 쫓아내고 송병천에게 방을 내어줄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욱 화가 치민 강민서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집으로 들어가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는 강민서에 강한서는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을 작동했고 집안엔 고요함이 찾아왔다. 창문을 통해 고함을 지르는 강민서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던 강민서는 집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자 욕을 지껄이며 발길을 돌렸다. 그 의외의 모습에 오히려 한현진이 당황했다. 강민서는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의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빨리 얌전해졌다. 그녀가 아름드리를 나서자 강한서는 도우미에게 강민서의 방 침대 시트를 전부 교체해달라고 부탁한 후 송병천을 그녀가 지내던 게스트룸에서 쉴 수 있도록 했다. 송민준의 소식을 듣고 심신이 지쳐있던 송병천은 일찍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한현진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송민준이 선물해 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
강한서가 한현진을 꼭 끌어안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 말한 대로 할 수 있어요.”한현진이 눈을 감고 화를 삭이며 더 이상 강한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곤 곧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다지 깊은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꿈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송민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비행 도중 고장이 생겨 공중에서 분해가 되었다. 송민준은 비행기의 날개에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한현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어슴푸레 날이 밝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강한서는 이미 자리를 비웠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고요한 집안에는 황씨 아주머니가 강민서의 방을 청소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순간 한현지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송병천에게 전화했지만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현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방으로 돌아왔다.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여권이 사라졌다. ‘개자식.’‘몰래 가면 갔지, 왜 여권까지 숨긴 거야.’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향했다. 강한서의 휴대폰은 꺼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아직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현진은 주차장에서 아무 차에나 올라타 쏜살같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한현진에게 스팸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멋도 모르고 전화를 받은 한현진이 스팸 전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곧이어 휴대폰은 다시 울렸다. 안 그래도 짜증이 솟구치던 찰나 연달아 세 번이나 걸려 온 스팸 전화가 한현진의 성질을 건드렸다. 통화 버튼을 누른 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누구야. 뭐 하는 놈인데. 내 개인 정보는 어떻게 안 거야? 누가 너희들한테 팔아 넘겼어? 스팸 전화가 왜 스팸 전화인 줄 알아? 난
여자아이 혼자 그쪽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위험했다. 게다가 송민준 본인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기장에게 먼저 딸을 데리러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원본 파일을 가진 후 일반 항공편으로 한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송민준은 파일을 가지러 친구에게로, 기장은 부기장과 함께 송민준의 짐을 실은 채 한주로 향하는 비행기를 이륙했다. 파일을 손에 넣은 송민준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제일 빠른 티켓을 예약해 최대한 빨리 한주로 돌아왔다. 전용기는 이륙 5시간 정도 후 바다에 추락했다. 당시 송민준은 한주로 돌아오는 다른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기에 비행기 추락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몇 시간 동안 잠이 들었던 송민준은 이제 막 한주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한현진에게 연락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동생에게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하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가 추락 사고가 난 비행기에 탑승한 줄로 착각하고 있었고 한현진은 송민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너져내렸다. 그 전용기는 M 국에 착륙 후 기장이 바로 사람을 찾아 점검을 맡겼었다. 이륙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자신이 이번에 M 국에 온 목적을 떠올린 송민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한참 만에야 마음을 진정시킨 한현진이 말했다. “오빠. 제가 지금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요. 오빠는 공항에서 아빠와 한서 좀 찾아봐요. 오빠를 찾으러 M 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탑승했을 거예요.”알겠다고 대답한 송민준이 한현진에게 당부했다. “운전 조심해서 해. 다른 얘기는 만나서 해.”“알겠어요.”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 다시 한번 송민준을 불렀다. “오빠.”송민준이 멈칫했다. 한현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엔 비행 스케줄 바뀌면 바로 연락해 줘요. 이렇게 사
한현진도 곧 공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송민준을 보자마자 그의 품으로 달려가 꼭 껴안았다. 송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한현진은 이렇게까지 본인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비록 송병천이나 송민준은 한현진에게 지극한 사랑을 표현했지만 20여 년의 공백은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게 했다. 송민준 역시 가끔은 너무 오랜 세월을 지나쳤으니 동생과 너무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한현진에게 꽉 안긴 그는 비로소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동생은 아마 말솜씨가 없는 아버지를 닮아 표현에 서투른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송민준에서 사고가 닥치면 누구보다 걱정해 줄 사람이 바로 한현진이었다. 조금 전 통화 속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토끼처럼 빨개진 한현진의 눈을 바라보던 송민준은 참지 못하고 한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다정하고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곧 엄마도 될 애가 이렇게 울보라서 어떡해. 나중에 내 조카들이 다 웃겠어.”한현진이 코를 훌쩍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웃는 건 다 때려버릴 거야.”송민준이 쯧 혀를 찼다. “자식 교육 제대로 못 시킨 아빠 탓이니까 애 아빠를 때려.”강한서는 또 그렇듯 가만히 있다 송민준에게 한 방 먹었다. 한현진은 송민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강한서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송민준을 이끌며 말했다. “아빠, 오빠. 일단 차로 가요. 우리 차에서 얘기해요.”말하며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짐가방을 주웠다. 강한서가 막 손을 뻗어 한현진 손에 들린 가방을 가져가려고 하자 한현진이 휙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에 강한서가 멍해졌다. 송민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슥 훑었다. 그러던 그는 한현진 손에 있던 짐가방을 강한서에게 던져주었다. “눈치 없긴.”“...”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송병천은 송민준에게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송민준은 한현진에게 했던 것처럼 송병천에게 다시 설명했다. 송민준의 얘기를
송병천이 말했다. “우리 돌아왔어.”“돌아왔다고요?”서해금의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송병천은 행복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민준이가 돌아왔어. 사정이 생겨서 전용기가 다른 일반 항공편을 타고 왔대. 전엔 비행기에 있어서 연락이 안 됐던 거고.”서해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휴대폰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민준이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이에요? 지금 옆에 있어요?”“그래. 전화 바꿔줄게.”송병천은 말하며 송민준에게 전화를 건넸다. 서해금이 그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저예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서해금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돌아왔으면 됐어. 어제 대사관에서 온 전화를 받고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린 네가 정말... 돌아왔으니 됐어. 다행이야. 네 아빠랑 얼른 집으로 와. 아줌마가 도우미에게 식사 준비하라고 할게. 내일부터 설 연휴니까 온 가족이 같이 모여 밥도 먹고 안 좋은 기운도 툴툴 털어버리자.”송민준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살짝 올라간 그의 입꼬리와는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고마워요, 아줌마. 저희 곧 도착해요.”서해금은 조심해서 오라며 당부를 건네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 서해금은 안절부절못하며 집안을 서성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수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민준이가 돌아왔어.”서해금을 부르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곧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탑승하는 걸 내가 분명 봤는데.”“닥쳐.”서해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내가 진작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지. 왜 내 말은 안 듣고 민준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남자가 잔뜩 거칠어진 말투로 말했다. “송민준이 그 간호사까지 찾아냈어. 내가 손
서해금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 말 하지 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먼저 나랑 상의해. 괜히 가람이 위한다고 당신 마음대로 나섰다가 가람이 앞길 망치지 말고.”남자가 대답했다. “그래.”서해금이 남자에게 뭔가 더 얘기를 꺼내려는데 누군가에 의해 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깜짝 놀란 서해금 앞으로 송가람이 달려오며 말했다. “엄마, 오빠 무사하대.”서해금이 송가람을 째려보았다. “예의 없이 뭐 하는 거야.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는 법도 몰라?”송가람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서해금을 이끌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그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항공편을 타고 왔대. 역시 오빠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데 사고가 났을 리가 없지.”그녀가 말을 이었다. “엄마. 왜 안 놀라?”서해금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네 아빠가 방금 전화해서 알려줬어.”“내가 얼마나 오래 울었는데, 왜 알면서도 안 알려줬어?”말하며 화면이 켜진 서해금의 휴대폰을 본 송가람이 호기심에 물었다. “엄마, 누구와 통화하고 있었어?”서해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있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갑자기 송가람을 불렀다. “가람아.”송가람이 움찔했다. 자신을 부른 그 목소리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섞여 있어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송가람은 여전히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멈칫하더니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돼? 내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서해금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말을 꺼냈다. “넌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민준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준비하라고 얘기해. 좀 이따 네 아빠 오시면 같이 저녁 먹을 거야.”그런 서해금의 모습에 송가람은 조금 의아했지만 굳이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을
‘저렇게 말주변도 없는 놈이 어떻게 결혼을 한 거야?’“그럼 집에 가서 설 연휴 보내요. 택시 기사님은 휴가 안 가셨을 테니까 택시 타고 가요.”말하며 한현진은 여권을 강한서에게 던져주었다. “잘 가요.”여권을 손에 꼭 쥔 강한서는 그제야 한현진이 아직도 한마디 말없이 그녀만 집에 두고 송병천과 함께 송민준에게로 가려 했던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한서는 당연히 한현진이 임신한 채로 그런 고생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게다가 송민준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로 인한 정서기복은은 한현진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한현진을 막을 권리 또한 없었다. 송민준은 그녀의 친오빠였기 때문이었다. 아침 다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 송병천이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항공편이 정상 운항하여 7시쯤이면 이륙 가능하다는 공항 측에서 보낸 공지 사항이었다. 한현진까지 데리고 M 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던 송병천은 강한서에게 그녀를 설득해 보라고 했다. 그녀가 설득당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강한서는 차라리 말도 없이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늘 늦잠을 자던 한현진은 오늘따라 일찍 잠에서 깨어난 건 강한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한서가 송병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 조금 마음에 찔린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설 연휴엔 택시 잡기도 힘든데 한서도 같이 가서 저녁이라도 먹는 게 어때?”“아빠, 오늘 저녁은 가족끼리 먹어야죠. 강 대표님이 저희 가족과 무슨 사이인데요?”송병천이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현진이가 무슨 사이냐고 묻잖니.”입을 달싹이던 강한서가 대답했다. “비즈니스 파트너죠.”멈칫하던 한현진은 곧 비즈니스 파트너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강한서를 차 밖으로 밀어버렸다. 한현진의 차가 순식간에 출발했고 송병천은 뒤로 물러서는 강한서를 보며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딸, 그래도 한서가 우리에게 마음 써준 것도 있는데 이러는 건 너무
정인월의 말에 민경하는 풉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찌릿, 강한서가 노려보자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대표님과 사모님께서 이혼하시던 때 같네요.”그는 지금의 강한서 처지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낙동강 오리알.“...”민경하는 결국 강한서를 본가로 데려다주었다. 물론 정인월의 말은 강한서를 놀리기 위한 장난일 뿐이었다. 그녀가 큰손자를 설 하루 전 저녁밥도 먹지 못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씨가 진작 대문 앞에서 강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춰서자 진씨는 강한서가 앉은 쪽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 “민 실장님, 잠깐 기다리세요. 사모님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십니다.”민경하는 비록 의아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강단해는 며칠 전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지에는 하필 독감이 유행했고 그 역시 독감이 옮아 아직 한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강한서가 강현우를 신고한 일로 아직 그에게 속 좁게 굴고 있는 송민희 역시 남편이 없는 시댁에 얼굴조차 비치려 하지 않았다. 신미정은 정인월이 무서워 설 연휴 전부터 진작 동생인 신표 집으로 도망갔다. 그러니 강한서의 본가엔 정인월과 강한서, 강민서 남매 그리고 진씨 부부뿐이었다. 강민서는 아직도 어젯밤 강한서에 의해 아름드리에 쫓겨난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녀는 강한서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정인월은 훨씬 젊어 보였다. 그녀는 민경하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건넸다. “민 실장, 어서 와.”민경하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일단 식사부터 하지.”정인월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자고.”민경하가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설마 설 전날 맞선이라도 주선하시려는 거야?’민경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어머니께서 아직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급한 일 아니시면 내일—”“경하니?”민경하의 말이 끝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