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금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 말 하지 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먼저 나랑 상의해. 괜히 가람이 위한다고 당신 마음대로 나섰다가 가람이 앞길 망치지 말고.”남자가 대답했다. “그래.”서해금이 남자에게 뭔가 더 얘기를 꺼내려는데 누군가에 의해 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깜짝 놀란 서해금 앞으로 송가람이 달려오며 말했다. “엄마, 오빠 무사하대.”서해금이 송가람을 째려보았다. “예의 없이 뭐 하는 거야.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는 법도 몰라?”송가람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서해금을 이끌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그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항공편을 타고 왔대. 역시 오빠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데 사고가 났을 리가 없지.”그녀가 말을 이었다. “엄마. 왜 안 놀라?”서해금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네 아빠가 방금 전화해서 알려줬어.”“내가 얼마나 오래 울었는데, 왜 알면서도 안 알려줬어?”말하며 화면이 켜진 서해금의 휴대폰을 본 송가람이 호기심에 물었다. “엄마, 누구와 통화하고 있었어?”서해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있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갑자기 송가람을 불렀다. “가람아.”송가람이 움찔했다. 자신을 부른 그 목소리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섞여 있어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송가람은 여전히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멈칫하더니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돼? 내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서해금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말을 꺼냈다. “넌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민준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준비하라고 얘기해. 좀 이따 네 아빠 오시면 같이 저녁 먹을 거야.”그런 서해금의 모습에 송가람은 조금 의아했지만 굳이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을
‘저렇게 말주변도 없는 놈이 어떻게 결혼을 한 거야?’“그럼 집에 가서 설 연휴 보내요. 택시 기사님은 휴가 안 가셨을 테니까 택시 타고 가요.”말하며 한현진은 여권을 강한서에게 던져주었다. “잘 가요.”여권을 손에 꼭 쥔 강한서는 그제야 한현진이 아직도 한마디 말없이 그녀만 집에 두고 송병천과 함께 송민준에게로 가려 했던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한서는 당연히 한현진이 임신한 채로 그런 고생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게다가 송민준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로 인한 정서기복은은 한현진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한현진을 막을 권리 또한 없었다. 송민준은 그녀의 친오빠였기 때문이었다. 아침 다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 송병천이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항공편이 정상 운항하여 7시쯤이면 이륙 가능하다는 공항 측에서 보낸 공지 사항이었다. 한현진까지 데리고 M 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던 송병천은 강한서에게 그녀를 설득해 보라고 했다. 그녀가 설득당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강한서는 차라리 말도 없이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늘 늦잠을 자던 한현진은 오늘따라 일찍 잠에서 깨어난 건 강한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한서가 송병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 조금 마음에 찔린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설 연휴엔 택시 잡기도 힘든데 한서도 같이 가서 저녁이라도 먹는 게 어때?”“아빠, 오늘 저녁은 가족끼리 먹어야죠. 강 대표님이 저희 가족과 무슨 사이인데요?”송병천이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현진이가 무슨 사이냐고 묻잖니.”입을 달싹이던 강한서가 대답했다. “비즈니스 파트너죠.”멈칫하던 한현진은 곧 비즈니스 파트너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강한서를 차 밖으로 밀어버렸다. 한현진의 차가 순식간에 출발했고 송병천은 뒤로 물러서는 강한서를 보며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딸, 그래도 한서가 우리에게 마음 써준 것도 있는데 이러는 건 너무
정인월의 말에 민경하는 풉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찌릿, 강한서가 노려보자 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대표님과 사모님께서 이혼하시던 때 같네요.”그는 지금의 강한서 처지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낙동강 오리알.“...”민경하는 결국 강한서를 본가로 데려다주었다. 물론 정인월의 말은 강한서를 놀리기 위한 장난일 뿐이었다. 그녀가 큰손자를 설 하루 전 저녁밥도 먹지 못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씨가 진작 대문 앞에서 강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춰서자 진씨는 강한서가 앉은 쪽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 “민 실장님, 잠깐 기다리세요. 사모님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십니다.”민경하는 비록 의아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강단해는 며칠 전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지에는 하필 독감이 유행했고 그 역시 독감이 옮아 아직 한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강한서가 강현우를 신고한 일로 아직 그에게 속 좁게 굴고 있는 송민희 역시 남편이 없는 시댁에 얼굴조차 비치려 하지 않았다. 신미정은 정인월이 무서워 설 연휴 전부터 진작 동생인 신표 집으로 도망갔다. 그러니 강한서의 본가엔 정인월과 강한서, 강민서 남매 그리고 진씨 부부뿐이었다. 강민서는 아직도 어젯밤 강한서에 의해 아름드리에 쫓겨난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녀는 강한서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정인월은 훨씬 젊어 보였다. 그녀는 민경하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건넸다. “민 실장, 어서 와.”민경하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일단 식사부터 하지.”정인월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자고.”민경하가 강민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설마 설 전날 맞선이라도 주선하시려는 거야?’민경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어머니께서 아직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급한 일 아니시면 내일—”“경하니?”민경하의 말이 끝나기도
강한서의 본가에서는 풍성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정인월은 일찍이 고윤을 초대할 생각이었던지라 성의를 표현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다섯 명이 삼십 첩 반찬이 차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처음 민경하의 직장 상사와 저녁을 먹게 된 고윤은 예의에 어긋날까 특별히 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심지어 행동 하나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아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민경하가 고윤에게 젓가락을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어요. 회장님께서는 그렇게 까다로운 분이 아니세요.”“그래.”비록 고윤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여전히 자기 앞에 놓은 반찬만 집었다.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정인월이 웃으며 말했다. “고윤 씨, 음식이 이렇게 많은데 앞에 있는 것만 입맛에 맞으신가 봐요?”고윤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다 맛있어요.”정인월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 한 번씩 들어요.”그러더니 민경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민 실장, 어머니께 음식 좀 집어드려. 설인데 든든하게 먹어야지.”살짝 고개를 끄덕인 민경하가 일부러 고윤이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렸다. 고윤과 민경하의 맞은편에 앉은 강민서는 국을 마시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민경하는 단 한 번도 가정사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태껏 민경하가 고아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윤은 확실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미정보다 10살 정도는 더 있어 보였다. ‘늦둥이인 건가?’강민서는 강한서를 흘끗 쳐다보았다. 오빠에게 고윤의 나이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저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 강민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입을 삐죽인 그녀가 먼저 고윤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아이는 민 실장님 한 명뿐이세요?”고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진씨 내
민경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다 마지막엔 심지어 신미정을 조금 비꼬기도 했다. 그의 말에 강민서가 오히려 멍해졌다. 그녀는 줄곧 민경하는 화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강한서 옆에서 민경하는 늘 처세에 능한 면모를 보이며 여러 사람의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강민서 역시 가끔 성질을 부리며 민경하를 강씨 가문의 개일 뿐이라고 욕했지만 민경하는 단 한 번도 반박한 적이 없었다. 강민서는 민경하처럼 상사에게 붙어먹는 “앞잡이”를 싫어했다. 그러니 몇 달 전 한성의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게 된 강민서는 강한서가 그녀를 민경하의 밑에서 일을 배우도록 지시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은근히 민경하를 퉁명스럽게 대했었다. 민경하는 늘 강민서에게 남들보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겼다. 똑같은 보고서를 제출해도 다른 사람의 것은 대충 평가를 내리지만 강민서의 보고서에는 일일이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하며 말했다. “데이터 비교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전월 대비는 어딨어요?”“제목도 잘못 썼어요. 전부 한글이긴 한데, 붙여 놓으니까 뜻을 전혀 모르겠는데요?”“혹시 졸업 논문 통과율이 100%였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민서 씨가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건지 전 이해가 되지 않네요.”“담당자 이름 적는 곳에 제 이름 쓰지 마시죠. 그런 책임은 지고 싶지 않네요.”...강민서는 이제껏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왔었다. 비록 집안에는 강한서라는 더 귀한 존재가 있었지만 똑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강한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녀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착실하게 공부만 했던 애들도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서 졸업해 때가 되면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민서처럼 F 학점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학점까지 높은 건 제법 머리가 똑똑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민경하 앞에서는 아무런 능력
그 남자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좋은 소식 가져올게.”...수치심을 자극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강민서의 귀에 박혔다. 늘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강민서였지만 그날만큼은 그 말을 듣고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강민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서로 명품이나 자랑하며 즐기던 티타임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정인월 옆에서 매일 강한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란 가끔은 이렇게 알 수 없도록 이상한 존재였다. 잔뜩 흥분했을 땐 다신 안 볼 것처럼 다투다가도 마음의 진정을 찾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정인월의 목소리를 따라 하나둘 강민서의 마음에 흘러들었다. ‘나와 오빠는 왜 이렇게 됐을까?’‘정말 단순히 한현진 때문일까?’강민서는 아직도 자기를 경찰에 넘기던 강한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삐었다며 강한서를 욕했던 것도, 한현진에게 미쳐 동생도 나 몰라라 한다고 했던 말들 전부. 그때의 강한서는 실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강민서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폐지 줍는 어르신만 봐도 마음이 아파 눈물을 뚝뚝 흘리던 네가 지금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강민서, 대체 왜 이렇게 변했어?”그가 내뱉은 모든 말들이 쿡쿡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당시의 강민서는 곧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한서가 어느 날엔가 한현진의 진면모를 파악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신미정을 집에서 내쫓은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에 떨어진 강한서를 따라 앞뒤 재지 않고 그를 따라 강으로 뛰어든 한현진의 모습을 본 강민서는 뺨이라도 얼얼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싸움을 하던 강민서와 민경하도 그날을 기점으로 약속이나 한 듯 화해했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하고 민경하는 강한서의 팀을 이끌고 강단해 쪽을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민서는 바삐 돌아치는 팀원들을 보며 처음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기의 무능력함
민경하는 고윤의 모습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는 사실 정인월이 굳이 그에게 식사를 권유하고 그의 어머니까지 모셔 온 원인을 눈치챘다. 전에 정인월이 언급했었던 강민서와의 혼사를 민경하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고집을꺾지 않은 노인네가 또 이런 “맞선” 자리를 마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그런 의도를 내비치지 않고 그저 두 모자가 썰렁하게 설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같이 식사하려 한다는 핑계로 민경하가 도무지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괜히 아들이 상사에게 밉보여 직장생활이 힘들어질까 두려워 황송해하며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 웃어 보이며 감싸주는 고윤의 모습에 민경하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강민서를 보는 그의 눈빛에 차가움이 더해졌다. 냉기가 도는 민경하의 눈빛에 꼭 마음을 찔린 강민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굴던 옛날의 제 모습을 떠올린다면 민경하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일부러 고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강민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고하게만 자라 미안하다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강민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공용 젓가락으로 닭 날개를 집어 고윤의 접시에 올리며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전... 전... 사실 흰머리가 빨리 나는 건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작은 어머니께서도 40대이신데 흰머리가 엄청 많거든요. 그래서 계속 검은색으로 염색하셨고요.”강민서의 말에 강한서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괜히 불똥이 튄 송민희가 재채기했다. ‘괜찮은 아이인 것 같은데, 경하는 왜 오만하다고 했을까?’그런 생각을 하며 고윤이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데 민경하가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는 닭고기 안 좋아하세요.”강민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순간 부잣집 딸내미의 성깔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 좋아하면 버려요.”툭 내뱉어진 강민서의 말에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고
강한서는 말 하며 휴대폰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젠 거실엔 민경하와 강민서 단둘이 남게 되었다. 잠시 생각하던 민경하가 먼저 집을 열었다. “민서 씨,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강민서가 어리둥절해졌다.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예요?”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강민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민경하가 말했다. “이성으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강민서가 멈칫하더니 이내 그녀의 귓불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어디 아픈 거예요? 제가 왜 실장님을 이성으로 생각해요?”‘내가 요즘 좀 대들지 않았다고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미친 거 아냐, 이 사람?’강민서의 대답에 민경하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중에 회장님께서 물어보시면 꼭 지금처럼 대답해 줘요.”강민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할머니와 무슨 상관인데요?”민경하의 맑은 눈빛이 강민서를 향했다. “회장님께서 저희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세요. 눈치 못 채셨어요?”멍해진 강민서가 무의식적으로 민경하의 말에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민경하는 말없이 그저 가만히 강민서를 바라보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강민서는 요즘 틈만 나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던 정인월을 떠올렸다. 강민서가 가끔 민경하의 얘기를 꺼낼 때면 정인월은 꼭 몇 마디를 더 보태기도 했었다. 민경하의 얘기라면 정인월은 늘 은근슬쩍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엔 전혀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을 민경하의 귀띔으로 다시 돌이켜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녔다. 정인월은 쉽게 사람을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에 쏙 든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 정인월이 틈만 나면 칭찬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 정인월이 지금 민경하를 칭찬한다는 것은 민경하를—강민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 둘 사이에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실장님이 할머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