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다 마지막엔 심지어 신미정을 조금 비꼬기도 했다. 그의 말에 강민서가 오히려 멍해졌다. 그녀는 줄곧 민경하는 화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강한서 옆에서 민경하는 늘 처세에 능한 면모를 보이며 여러 사람의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강민서 역시 가끔 성질을 부리며 민경하를 강씨 가문의 개일 뿐이라고 욕했지만 민경하는 단 한 번도 반박한 적이 없었다. 강민서는 민경하처럼 상사에게 붙어먹는 “앞잡이”를 싫어했다. 그러니 몇 달 전 한성의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게 된 강민서는 강한서가 그녀를 민경하의 밑에서 일을 배우도록 지시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은근히 민경하를 퉁명스럽게 대했었다. 민경하는 늘 강민서에게 남들보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겼다. 똑같은 보고서를 제출해도 다른 사람의 것은 대충 평가를 내리지만 강민서의 보고서에는 일일이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하며 말했다. “데이터 비교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전월 대비는 어딨어요?”“제목도 잘못 썼어요. 전부 한글이긴 한데, 붙여 놓으니까 뜻을 전혀 모르겠는데요?”“혹시 졸업 논문 통과율이 100%였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민서 씨가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건지 전 이해가 되지 않네요.”“담당자 이름 적는 곳에 제 이름 쓰지 마시죠. 그런 책임은 지고 싶지 않네요.”...강민서는 이제껏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왔었다. 비록 집안에는 강한서라는 더 귀한 존재가 있었지만 똑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강한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녀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착실하게 공부만 했던 애들도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서 졸업해 때가 되면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민서처럼 F 학점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학점까지 높은 건 제법 머리가 똑똑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민경하 앞에서는 아무런 능력
그 남자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좋은 소식 가져올게.”...수치심을 자극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강민서의 귀에 박혔다. 늘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강민서였지만 그날만큼은 그 말을 듣고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강민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서로 명품이나 자랑하며 즐기던 티타임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정인월 옆에서 매일 강한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란 가끔은 이렇게 알 수 없도록 이상한 존재였다. 잔뜩 흥분했을 땐 다신 안 볼 것처럼 다투다가도 마음의 진정을 찾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정인월의 목소리를 따라 하나둘 강민서의 마음에 흘러들었다. ‘나와 오빠는 왜 이렇게 됐을까?’‘정말 단순히 한현진 때문일까?’강민서는 아직도 자기를 경찰에 넘기던 강한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삐었다며 강한서를 욕했던 것도, 한현진에게 미쳐 동생도 나 몰라라 한다고 했던 말들 전부. 그때의 강한서는 실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강민서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폐지 줍는 어르신만 봐도 마음이 아파 눈물을 뚝뚝 흘리던 네가 지금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강민서, 대체 왜 이렇게 변했어?”그가 내뱉은 모든 말들이 쿡쿡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당시의 강민서는 곧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한서가 어느 날엔가 한현진의 진면모를 파악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신미정을 집에서 내쫓은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에 떨어진 강한서를 따라 앞뒤 재지 않고 그를 따라 강으로 뛰어든 한현진의 모습을 본 강민서는 뺨이라도 얼얼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싸움을 하던 강민서와 민경하도 그날을 기점으로 약속이나 한 듯 화해했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하고 민경하는 강한서의 팀을 이끌고 강단해 쪽을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민서는 바삐 돌아치는 팀원들을 보며 처음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기의 무능력함
민경하는 고윤의 모습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는 사실 정인월이 굳이 그에게 식사를 권유하고 그의 어머니까지 모셔 온 원인을 눈치챘다. 전에 정인월이 언급했었던 강민서와의 혼사를 민경하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고집을꺾지 않은 노인네가 또 이런 “맞선” 자리를 마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그런 의도를 내비치지 않고 그저 두 모자가 썰렁하게 설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같이 식사하려 한다는 핑계로 민경하가 도무지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괜히 아들이 상사에게 밉보여 직장생활이 힘들어질까 두려워 황송해하며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 웃어 보이며 감싸주는 고윤의 모습에 민경하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강민서를 보는 그의 눈빛에 차가움이 더해졌다. 냉기가 도는 민경하의 눈빛에 꼭 마음을 찔린 강민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굴던 옛날의 제 모습을 떠올린다면 민경하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일부러 고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강민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고하게만 자라 미안하다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강민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공용 젓가락으로 닭 날개를 집어 고윤의 접시에 올리며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전... 전... 사실 흰머리가 빨리 나는 건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작은 어머니께서도 40대이신데 흰머리가 엄청 많거든요. 그래서 계속 검은색으로 염색하셨고요.”강민서의 말에 강한서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괜히 불똥이 튄 송민희가 재채기했다. ‘괜찮은 아이인 것 같은데, 경하는 왜 오만하다고 했을까?’그런 생각을 하며 고윤이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데 민경하가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는 닭고기 안 좋아하세요.”강민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순간 부잣집 딸내미의 성깔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 좋아하면 버려요.”툭 내뱉어진 강민서의 말에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고
강한서는 말 하며 휴대폰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젠 거실엔 민경하와 강민서 단둘이 남게 되었다. 잠시 생각하던 민경하가 먼저 집을 열었다. “민서 씨,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강민서가 어리둥절해졌다.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예요?”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강민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민경하가 말했다. “이성으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강민서가 멈칫하더니 이내 그녀의 귓불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어디 아픈 거예요? 제가 왜 실장님을 이성으로 생각해요?”‘내가 요즘 좀 대들지 않았다고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미친 거 아냐, 이 사람?’강민서의 대답에 민경하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중에 회장님께서 물어보시면 꼭 지금처럼 대답해 줘요.”강민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할머니와 무슨 상관인데요?”민경하의 맑은 눈빛이 강민서를 향했다. “회장님께서 저희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세요. 눈치 못 채셨어요?”멍해진 강민서가 무의식적으로 민경하의 말에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민경하는 말없이 그저 가만히 강민서를 바라보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강민서는 요즘 틈만 나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던 정인월을 떠올렸다. 강민서가 가끔 민경하의 얘기를 꺼낼 때면 정인월은 꼭 몇 마디를 더 보태기도 했었다. 민경하의 얘기라면 정인월은 늘 은근슬쩍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엔 전혀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을 민경하의 귀띔으로 다시 돌이켜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녔다. 정인월은 쉽게 사람을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에 쏙 든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 정인월이 틈만 나면 칭찬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 정인월이 지금 민경하를 칭찬한다는 것은 민경하를—강민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 둘 사이에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실장님이 할머
고윤은 순간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 정인월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 없이 오히려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고윤 씨 말이 맞아요. 일이라는 건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는 거죠. 안 그러면 돈을 버는 의미가 없잖아요.”정인월의 말에 고윤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니까요.”“고윤 씨는 민서 그 아이, 어떤 것 같아요?”정인월이 갑자기 대화 주제를 돌리며 물었다. 고윤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민서 아가씨야 예쁘시죠. TV에 나오는 연예인만큼이나 예뻐요. 제가 다 쑥스러워서 말도 못 걸겠는걸요. 성격도 착하시고 예의도 바르신 것 같아요. 회장님 말씀엔 잘 따르시는 것 같고요.”정인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민 실장에게 소개해 주면 어떨 것 같으세요?”“그건 당연히—”고윤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갑자기 멈칫 몸을 굳히더니 말을 더듬었다. “소... 소, 누굴 소개해 주신단 말씀이세요?”정인월이 퍽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경하 실장이요.”놀란 고윤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녀는 아무리 해도 정인월이 자기를 집으로 초대한 건 아들에게 연을 맺어주기 위해서일 것이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소개해 주려는 사람이 손녀라니. 연예인처럼 예쁘던 부잣집 딸이 며느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고윤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고윤이 점차 침착함을 되찾았다. “회장님, 결혼은 아무래도 아이들 본인 생각이 중요하죠. 물론 저야 경하가 얼른 결혼해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제가 더 바라는 건 경하 행복이에요. 만약 경하가 민서 씨가 서로를 좋아한다면 부모로써 당연히 두손 두발 다 들고 찬성할 일이지만 만약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없다면 어른인 저희가 아무리 밀어붙여도 소용없잖아요.”말을 마친 고윤은 사실 이제 정인월의 호통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부잣집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민경하에게 손녀를 소개해 주려고 했으면 감지덕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감히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상대방의 체면 따위는
민경하와 강민서를 더 밀어줘야겠다고 생각한 정인월이 말했다. “고윤 씨, 설 연휴가 지나면 다시 집에 초대할게요. 우리가 먼저 애들 약혼 날짜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약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우리 집 예비 사위가 되면 더 이상 민 실장이 여기에 드나드는 일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정인월의 말에 고윤은 조금 멍해졌다. ‘저녁 식사 한 번에 며느리가 생겼다고?’하지만 더 어리둥절한 쪽은 오히려 민경하와 강민서였다. 특히 강민서는 왜 하필 민경하를 이겨 먹겠다고 “괜찮다”라는 말을 내뱉었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분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정인월의 모습에 그녀는 차마 방금 한 말이 민경하에게 농락당한 것이 기분이 나빠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고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인월을 설득했다. “할머니, 전 아직 그렇게 조급해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저 아직 어려요.”“넌 어리겠지만 민 실장은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어. 그리고 약혼식을 올리면 너희 둘이 나란히 다녀도 쓸데없는 말도 돌지 않을 테고.”문벌의 차이가 심한 두 사람이 만약 약혼자라는 신분 없이 가깝게 지낸다면 불필요한 루머를 생성할 수 있었다. 민경하는 정인월이 가족으로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맞는 신분과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 강민서의 멘탈이 와장창 붕괴했다. 그녀는 10여 분 전으로 돌아가 홧김에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쳐다보았다. ‘실장님도 저랑 엮이는 거 싫잖아요. 얼른 거절해요, 얼른.’그런 강민서의 눈짓을 받은 민경하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민서 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저 자식이!’‘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바라본다는 그 한마디 했다고 지금 이렇게까지 복수하는 거야?’민경하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정인월이 얼른 강민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아직도 강운
버럭 화를 내는 강한서에 강민서와 민경하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설에 대체 무슨 저렇게 내는 거야?’순간 강민서는 정인월이 민경하와 인연을 맺어준 지금, 자기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강한서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오빠, 할머니께서 나더러 실장님과 약혼하래.”멈칫하던 강한서가 민경하를 쳐다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연봉은 못 올려줘요.”민경하와 강민서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강민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이야?”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요. 결정 내린 후엔 반품은 없어요.”강민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인 건데?’‘오빠는 결사반대해야 하는 거 아냐? 부하 직원이 자기 여동생과 결혼하는 게 어딨어? 집안이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난 전에 실장님한테 못되게 굴기도 했잖아.’‘기억을 잃기만 한 게 아니라 머리도 어떻게 된 거야?’강민서는 강한서의 이성을 되찾게 하려는 듯 자신과 민경하를 가르키며 말했다. “오빠, 잘 봐. 우리가 어울리는 것 같아?”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민 실장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뭐 괜찮겠지. 아무래도 나한테서 그렇게 많은 보너스를 받았으니.”“...”‘내 실력으로 받은 보너스가 왜 몸을 판 돈이 된 거야?’강민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한참 만에야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오빠 따위는 어떻게 되는 그냥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말하며 그녀는 씩씩 화를 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민경하는 강한서를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민경하에게 말했다. “약혼이 결혼은 아니니까요. 할머니께서는 그저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알아갈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뿐이에요. 잘되든 아니든, 그건 두 사람 일이죠.”말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민경하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집은 오너가라는 이유로 민 실장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 같은 건
고여정: [새해 복 많이 받아요.]신우: [여보, 아직 나한테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안 했잖아.]차미주: [¥%&*&*...]한성우: [시스템도 너 따라 놀라서 버그가 생긴 거야?]신하리: [새언니 주량 세시네요. 나중에 저랑 열이 결혼할 때 독한 거로 몇 병 준비해드릴게요.]한열: [젠장.]양지원: [절대 일반적인 맛은 아닐 거예요. 그 정도면 일반인들은 며칠은 마실 거라고요.]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한현진과의 대화창으로 들어왔다. 한편, 편안하게 소파에 앉은 한현진은 휴대폰에 뜬 강한서와의 채팅창을 보고 있었다. “입력 중”이라는 글과 “기억 잃고 사리 분별 못하는 남편”이라는 글이 번갈아 대화창 상단에 표시되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고 한현진이 기다리다 지칠 때쯤, 강한서가 드디어 겨우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뭐해요?]한현진은 그 세 글자에 화가 치밀어 실소를 내뱉었다. 저녁 내내 한현진은 강한서가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꺼지라는 말에 본가로 들어간 강한서는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인스타그램에 협박성적인 피드를 업로드했다. ‘봐, 이 개자식 바로 확인했잖아.’‘고작 이 세 글자를 5분 동안 생각했다고?’한현진이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답장했다. [아이 아빠를 바꿀까, 생각 중이었어요.]그리고 곧 강한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려왔다. “그러기만 해봐요.”‘하, 정색을 하시겠다?’한현진이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예요. 누가 아이 아빠가 되든 그건 제 마음이죠. 제가 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한번 볼래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직도 화났어요?”한현진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화 안 났어요. 제가 왜 화를 내요? 강한서 씨는 절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모든 걸 다 참고 책임까지 짊어지시는 대단한 분이시라 전 너무 기쁜걸요? 하하.”“...”강한서는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