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이었다.강한서는 정색하더니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주강운은 잠깐 주춤했다.“한서야?”강한서는 그제야 ‘응’ 하고 대답했다.주강운이 물었다.“왜 전화를 안 받아?”“배터리가 없어서.”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현진이를 찾아?”주강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너 찾으려고 전화한 거야. 그런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할 수 없이 현진 씨한테 전화했어.”‘현진 씨?’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무슨 일인데?”주강운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네가 다친 것도 몰랐잖아. 민서랑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어, 네가 다쳤다는걸. 그리고 성우한테 연락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강한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괜찮아.”“성우가 그러던데 범죄자가 잡혔다며? 내 도움이 필요해?”주강운은 충분히 두 사람이 최고 형량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필요하면 연락할게.”강한서가 말을 마치자 유현진이 겨우 눈을 뜨며 물었다.“누구야? 왜 이렇게 오래 얘기해?”잠에서 금방 깨어나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잠겼다.주강운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했다.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강운이야.”그러더니 또 그녀에게 물었다.“강운이랑 얘기할 거 있어?”유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설마 소송할 일을 얘기한 건 아니겠지?”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강한서를 등진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운 씨,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주강운이 대답했다.“한서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성우한테서 들었는데 두 사람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안 다쳤어요?”유현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소송 때문에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괜찮아요. 한서가 좀 다치긴 했는데 너무 심각한 건 아니에요.”강한서는 말문이 막혔
강한서가 어젯밤 일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유현진은 고민하고 있었다.‘그냥 사고였다고, 다 큰 성인이 그럴 수도 있다고 덤덤하게 말하면 될까?’하지만 강한서는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유현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무턱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젯밤 일을 마음에 두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그래, 강한서가 먼저 시작했으니 난 그냥 즐겼을 뿐이라고.’그 생각에 유현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별생각 없이 그냥.”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100억은 이혼 소송을 도와주는 주강운에게 줄 변호사 비용이었으니.물론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이혼 소송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주강운은 강한서의 친구이니 소송을 도와준다고 해도 자신이 아닌 강한서를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니 ‘주강운을 별생각 없이 100억으로 저장했다’라는 유현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캐묻지도 않았다.“그럼 나는 뭐로 저장했는데?”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당연히 이름으로 저장했지, 뭐로 저장했겠어?”하지만 강한서는 바로 유현진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의 시선에 유현진은 등골이 오싹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휴대폰을 가져가서 확인할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이불을 거두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그는 맨발로 카펫을 밟으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몸에 걸쳤다.유현진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강한서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는 몸이 얄팍했지만 근육 라인이 굉장히 예뻤다. 복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등 근육까지 탄탄했다. 운동하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등 근육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매일 회사 일로 바쁘면서도 시간을 짜내 운동하니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남자라면 다 그런 눈으로 봐?”강한서가 바지를 다 입고는
“무슨 기사?”유현진이 눈 주변을 정성껏 마사지하며 물었다. 대본을 종일 봤기에 눈이 아팠다.“배우 Z씨가 출연하고 있는 모든 작품에서 퇴출당했대.”“누구?”“원래 네 배역을 맡기로 한 배우분 말이야. 그래도 좀 이름 있는 여자 연예인인데, 상도 꽤 많이 받고.”유현진이 차이현과 계약한 후, 차미주는 스태프 단톡방에 겨우 들어가 많은 소식들을 알아냈다.이번 유현진이 연기하기로 한 배역은 원래 배우 Z씨로 캐스팅되어 있었다.“왜 퇴출당했대?”“학폭 때문인 것 같아. 전에도 피해자가 몇 번이나 글을 올렸었는데 증거가 없었거든. 그런데 누가 글쎄 배우 Z씨가 10년 전에 게시판에 남긴 글을 찾아냈나 봐. 학폭에 가담했다는 증거라며 난리가 났대. 차 감독님은 진작 알고 계셔서 자른 걸 수도 있고.”‘어쩐지... 이렇게 중요한 배역을 계속 캐스팅 안 했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나 그럼 계 탄 건가?’“너 진짜 다행인 줄 알아, 이 배역 노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배우 Z씨가 퇴출당했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 감독님께 배우를 추천했겠어. 하지만 이미 그 배역이 너로 결정되었는걸. 그러니까 이 드라마 끝날 때까지 절대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정말 조심해야 해.”차미주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닥에서는 워낙 흔한 일이기 때문이니.차이현도 염려하는 부분이 있어 주역 배우 오디션은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후 역을 맡기로 한 배우 Z씨는 약점을 잡혀 작품에서 퇴출당했다.10년 전 게시판에 남긴 글을 지금 찾아내다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신박했다.차이현이 유현진을 캐스팅한 건 물론 그녀의 연기가 마음에 든 것도 있었지만 Z씨를 폭로한 배후에게 일부러 도발하려는 것도 있었다.‘아무리 다른 사람을 밀어내 봤자 너는 뽑지 않을 거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유현진이 이 배역을 따내게 된 건 정말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신인인 데다가 이 바
하지만 유현진은 유상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유현진은 한성우를 60억 넘게 벌어주고, 또 굴 한 박스까지 선물했으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유상수 씨가 또 부경동 프로젝트에 투자한다면서, 돈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났대?”유씨 집안의 재력 정도는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유현진이 강한서와 결혼하기 전, 유씨 집안은 운주시에서 겨우 삼류 기업에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도 모두 아내의 전략 덕분이었다.하지만 아내가 사고를 당한 후 유상수는 회사를 다루기 위해 많은 핵심 멤버를 내쫓았었다. 아무리 야망이 커도 워낙 능력이 없었으니 2년도 되지 않아 회사는 부도 위기에 빠졌다.자금도 없고 주문받은 물건은 만들어내지 못하니 유상수는 희망을 곧 졸업한 딸에게 걸었다.유씨 집안은 명문 집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즈니스계에 발을 들였다고 할 수 있었다. 유상수처럼 명예와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업 파티나 연회의 단골이었다.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유현진을 데리고 종종 파티에 참석했다.유상수와 아내는 모두 외모가 평범했으나 딸인 유현진의 얼굴은 워낙 예뻤다.연예인 중에서도 예쁘게 생긴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연예인을 좋아해도 그들과 결혼을 할 건 아니었다.특히 상류사회에서는 결혼할 남녀의 집안이 엇비슷해야 했다. 그래야 서로에게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니.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사생활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좋았다.유현진은 완벽한 며느릿감이었다.예쁘고 깔끔하게 생겼지, 젊기까지 해. 또 유상수의 독녀라 그녀와의 혼인을 성사하기 위해 유씨 집안이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유상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강한서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덤덤하게 말했다.“회사 주식을 좀 판 것 같아. 부경동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최소 200억은 벌 수 있거든.”부경동의 프로젝트는 잠재적 가치가 높았다.유상수에게는 돈이
그때부터 한성우는 유현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강씨 집안의 재력으로 20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현진이 말도 안 하고 그 돈을 친정에 보냈으니 한성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강한서가 그의 입을 막은 바람에 이 일은 알려지지 않았지, 아니면 정인월도 그렇게 그녀를 예뻐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최근 한 달 사이, 한성우는 유현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설마 전에 자신이 너무 불편한 시선으로 유현진을 바라본 게 아니었나 싶었다.유현진이 만약 정말 유상수의 편이라면 팔찌 일을 그에게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또 유현진이 만약 허영심에 찌든 사람이었다면 강한서와 이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를 꽉 잡고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유현진은 ‘선셋 스타’ 이다.한성우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그가 실생활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니.그래도 팬심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유현진이 ‘선셋 스타’ 인 걸 알고는 그녀가 마냥 밉지는 않았다.한성우가 강한서를 힐끔 보며 물었다.“설마 유상수 씨를 투자하게 한 건 현진 씨를 도우려고 그러는 거야?”강한서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아니야. 투자를 많이 할수록 내가 다루기 쉽거든.”한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유상수 씨도 참 단순하셔. 강한서 돈을 벌기 그렇게 쉬운 줄 아나? 한서가 작정하면 모든 돈을 다 날려버리게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참, 모레 강운이 고모가 여는 주얼리 전시회에 갈 거야? 현진 씨가 주얼리 좋아하지 않았나? 너 시간이 없으면 내가 같이 가줄 수도 있는데.”강한서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요즘 현진이 많이 찾는다?”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그래?”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 예전에 현진이 데리고 파티 가는 것도 너 안 좋아했었잖아.”한성우가 유현진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아도 눈치가 빠른 강한서를 속일 수는 없었다.하지만 한성우는 강한서에게 유현진이 ‘선셋 스타’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진실을 알았을 때의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그건 내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한성우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얘 왜 이렇게 독설이야.’다행히 유현진은 바로 기분이 풀렸다. 서재로 찾아온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철이 없었어. 네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내가 널 잘 챙겨야지. 요즘 유머 모음집 보고 있는데 엄청 재밌거든. 한 번 들어볼래?”강한서는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했다. 유현진은 독설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강한서가 한참 그녀를 지켜보고는 말했다.“얘기해 봐.”그러고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유현진은 뜸을 들이다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어느 날, 엄마 파리가 아기 파리를 데리고 똥에서 식사하고 있었어. 아기 파리가 엄마한테 물었어. ‘엄마, 우리는 왜 똥을 먹어요?’, 엄마 파리는 잔뜩 화가 났어. ‘밥 먹을 때 그렇게 징그러운 얘기를 하면 어떡해!’”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차마 우유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다른 한편, 그 얘기를 들은 한성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유현진은 그제야 한성우도 듣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강한서는 겨우 우유를 넘기고는 미간을 구겼다.“네 수준답다.”“엄청 웃겨요.”한성우는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형수님, 개그우먼 해도 되겠어요.”한성우는 빈말이 아니었다. 유현진은 성우를 해서 그런지 캐릭터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는데 꽤 몰입감 있게 들렸다.유현진은 한성우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한성우랑 영상통화하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나 안 했을 텐데.’유현진이 서재를 떠나려던 그때, 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다른 거 없어?”‘수준 떨어진다더니.’유현진이 대답했다.“있어, 그럼 수준 높은 거로 얘기해 줄게. 옛날 옛적에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가 있었어. 어느 날,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물었어. ‘큰~ 물고기야~, 넌~ 어떤~ 음식을~ 좋아해?’, 큰 물고
“저는... 안 갈래요. 남편이 팔을 다쳤는데 집에서 잘 챙겨줘야죠.”유현진이 주저하며 말했다. 역시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다.한성우가 말했다.“한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형수님이 안고 재워야 해요? 한서는 집에 두고 저랑 같이 가죠.”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한성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그... 그럼... 나, 갔다 올까?”유현진이 조심스럽게 강한서에게 물었다.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가고 싶으면 가. 왜 내 눈치를 봐?”“그래.”유현진이 또 한성우에게 물었다.“모레 몇 시 시작이죠?”“저녁 7, 8시쯤일 거예요. 야광주니 저녁이 되어야 그 아름다움이 보이겠죠. 그럼 그때 형수님 데리러 갈게요.”두 사람이 약속을 잡은 후 한성우는 영상통화를 끊었고 서재는 삽시에 조용해졌다.유현진은 아직 물어보고 싶은 말을 못 물어봤기에 서재에 남아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가 걸리적거렸다.그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야, 너 일 봐. 나 여기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강한서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너 여기 있으면 나 일하는 데에 방해돼.”유현진은 겨우 화를 참으며 활짝 미소를 보였다.“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너 너무 피곤하게 일하면 안 된대. 대표님, 서재에 이렇게나 오래 있으셨는데 제가 어깨를 마사지해 줄게요.”강한서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너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유현진은 벌컥 역정을 냈다.“강한서, 네가 다쳐서 미안한 마음에 좀 잘해주려고 하니까 왜 시비야? 싫으면 말아.”강한서가 그녀를 지켜보더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어젯밤에도 미안한 마음에 나 보상해 주려고 그런 거야?”유현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운 마음에 서재를 나서려고 했는데 강한서가 그녀의 팔을 잡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나 어깨 마사지해 준다며?”‘마사지는 무슨! 우유를 확 엎어버리고 싶네. 말을 어쩜 저렇게 해?’하지만 유현진은
유현진은 계속 강한서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강한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덤덤하게 물었다.“왜 퇴출당했대?”‘뭐야? 모르고 있었어?’유현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게시판에 남긴 글들을 네티즌들이 찾아냈나 봐. 학폭이라며 작품에서도 퇴출당하고 그랬어.”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군가에게 밉보인 게 틀림없어. 아니면 누가 10년 전 게시판 글을 찾아봐?”강한서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잘못을 했으니까 그렇게 목덜미를 잡힌 거 아니야.”“요새 새 드라마 촬영한다던데 그 배역을 누가 탐내서 이런 일을 벌였대. 배역 하나로 사람 연예계 퇴출시킨 건 좀 너무하지 않았어?”“자본주의는 다 이래. 예전에 그런 글을 남기지 않았으면 연예계 퇴출당하지도 않았을 거잖아.”강한서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힘 좀 더 줘봐.”‘입이 무겁긴.’유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럼 송민영 씨도 이런 방법 자주 쓰지 않을까? 워낙 뒤 봐주는 사람 많아서 말이야.”강한서가 흠칫하더니 미간을 구겼다.“그게 무슨 말인데?”“아니, 그냥 해본 말이지. 송민영 씨가 전에 ‘정상에서’라는 작품에서 다른 성우분 배역을 뺏어갔잖아. 한때 엄청 화제 됐었는데, 이 일이랑 비슷하지 않아?”“어디가 비슷해?”강한서는 기분이 언짢았다.“그 성우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아니잖아.”유현진은 바로 그가 했던 말로 반박했다.“그 성우분은 잘못한 일이 없어서 목덜미 안 잡혔겠지.”“돈 받고 본인이 작품 안 하겠다고 했는지 어떻게 알아?”“내가... 내가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유현진은 하마터면 말이 빗나갈 뻔했다.‘돈을 받기는 무슨! 계약한다고 해놓고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 그러면 어떡해. 보상은커녕 차비도 내 돈으로 냈는데 말이야.’강한서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그 일을 인터넷에서 떠벌리고 다니겠어?”유현진은 분노가 끓어올랐다.“정말 돈을 받았으면 왜 인터넷에 그런 글을 올렸겠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안 하지.”강한서가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