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그의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었기에 강한서는 일찍이 포기했다.유현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강한서는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술 마셨어?”“아니.”유현진은 얼굴이 새빨갰다.하지만 거짓말을 해봤자 티가 날 것 같아 유현진은 솔직하게 말했다.“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셨어.”겨우 와인 반병뿐이었다. 그녀의 주량으로 와인 반병을 마셔도 전혀 취할 리 없었고 그저 도저히 맨정신으로 강한서를 씻겨줄 수 없을 것 같아 마신 거였다.강한서는 그녀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먼저 한 번 닦아내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씻겨본 적이 없었다.전에 두 사람은 욕실에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유현진이 강한서가 샤워하는 틈을 타 등을 밀어준다는 핑계를 대고 욕실로 들어온 거였다. 등을 밀기는커녕 결국 욕구에 못 이겨 그녀가 먼저 옷을 훌렁 벗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스킨십이 끝나면 강한서는 그녀를 깨끗이 씻어주고 침대까지 안아가곤 했다.강한서는 그녀의 구애를 곧잘 받아줬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침대에서만큼은 열정적이었다.하지만 작년부터 강한서의 열기가 점점 식은 것 같았다.두 사람은 아이의 일 때문에 싸움이 잦아졌고 이로 인해 강한서는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듯했다.‘내가 진작 질렸겠지, 뭐.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건 그저 핑계일 뿐이야. 아니면 사랑하는 송민영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나? 개자식. 나랑 질리도록 자고 나서는 이제 와서 사랑하는 여자 생각하는 거야?’이때,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정신을 차려보니 강한서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유현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손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간 것이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다급하게 손을 움츠렸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유현진은 중심을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이었다.강한서는 정색하더니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주강운은 잠깐 주춤했다.“한서야?”강한서는 그제야 ‘응’ 하고 대답했다.주강운이 물었다.“왜 전화를 안 받아?”“배터리가 없어서.”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현진이를 찾아?”주강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너 찾으려고 전화한 거야. 그런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할 수 없이 현진 씨한테 전화했어.”‘현진 씨?’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무슨 일인데?”주강운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네가 다친 것도 몰랐잖아. 민서랑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어, 네가 다쳤다는걸. 그리고 성우한테 연락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강한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괜찮아.”“성우가 그러던데 범죄자가 잡혔다며? 내 도움이 필요해?”주강운은 충분히 두 사람이 최고 형량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필요하면 연락할게.”강한서가 말을 마치자 유현진이 겨우 눈을 뜨며 물었다.“누구야? 왜 이렇게 오래 얘기해?”잠에서 금방 깨어나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잠겼다.주강운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했다.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강운이야.”그러더니 또 그녀에게 물었다.“강운이랑 얘기할 거 있어?”유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설마 소송할 일을 얘기한 건 아니겠지?”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강한서를 등진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운 씨,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주강운이 대답했다.“한서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성우한테서 들었는데 두 사람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안 다쳤어요?”유현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소송 때문에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괜찮아요. 한서가 좀 다치긴 했는데 너무 심각한 건 아니에요.”강한서는 말문이 막혔
강한서가 어젯밤 일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유현진은 고민하고 있었다.‘그냥 사고였다고, 다 큰 성인이 그럴 수도 있다고 덤덤하게 말하면 될까?’하지만 강한서는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유현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무턱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젯밤 일을 마음에 두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그래, 강한서가 먼저 시작했으니 난 그냥 즐겼을 뿐이라고.’그 생각에 유현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별생각 없이 그냥.”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100억은 이혼 소송을 도와주는 주강운에게 줄 변호사 비용이었으니.물론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이혼 소송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주강운은 강한서의 친구이니 소송을 도와준다고 해도 자신이 아닌 강한서를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니 ‘주강운을 별생각 없이 100억으로 저장했다’라는 유현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캐묻지도 않았다.“그럼 나는 뭐로 저장했는데?”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당연히 이름으로 저장했지, 뭐로 저장했겠어?”하지만 강한서는 바로 유현진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의 시선에 유현진은 등골이 오싹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휴대폰을 가져가서 확인할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이불을 거두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그는 맨발로 카펫을 밟으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몸에 걸쳤다.유현진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강한서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는 몸이 얄팍했지만 근육 라인이 굉장히 예뻤다. 복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등 근육까지 탄탄했다. 운동하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등 근육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매일 회사 일로 바쁘면서도 시간을 짜내 운동하니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남자라면 다 그런 눈으로 봐?”강한서가 바지를 다 입고는
“무슨 기사?”유현진이 눈 주변을 정성껏 마사지하며 물었다. 대본을 종일 봤기에 눈이 아팠다.“배우 Z씨가 출연하고 있는 모든 작품에서 퇴출당했대.”“누구?”“원래 네 배역을 맡기로 한 배우분 말이야. 그래도 좀 이름 있는 여자 연예인인데, 상도 꽤 많이 받고.”유현진이 차이현과 계약한 후, 차미주는 스태프 단톡방에 겨우 들어가 많은 소식들을 알아냈다.이번 유현진이 연기하기로 한 배역은 원래 배우 Z씨로 캐스팅되어 있었다.“왜 퇴출당했대?”“학폭 때문인 것 같아. 전에도 피해자가 몇 번이나 글을 올렸었는데 증거가 없었거든. 그런데 누가 글쎄 배우 Z씨가 10년 전에 게시판에 남긴 글을 찾아냈나 봐. 학폭에 가담했다는 증거라며 난리가 났대. 차 감독님은 진작 알고 계셔서 자른 걸 수도 있고.”‘어쩐지... 이렇게 중요한 배역을 계속 캐스팅 안 했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나 그럼 계 탄 건가?’“너 진짜 다행인 줄 알아, 이 배역 노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배우 Z씨가 퇴출당했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 감독님께 배우를 추천했겠어. 하지만 이미 그 배역이 너로 결정되었는걸. 그러니까 이 드라마 끝날 때까지 절대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정말 조심해야 해.”차미주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닥에서는 워낙 흔한 일이기 때문이니.차이현도 염려하는 부분이 있어 주역 배우 오디션은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후 역을 맡기로 한 배우 Z씨는 약점을 잡혀 작품에서 퇴출당했다.10년 전 게시판에 남긴 글을 지금 찾아내다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신박했다.차이현이 유현진을 캐스팅한 건 물론 그녀의 연기가 마음에 든 것도 있었지만 Z씨를 폭로한 배후에게 일부러 도발하려는 것도 있었다.‘아무리 다른 사람을 밀어내 봤자 너는 뽑지 않을 거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유현진이 이 배역을 따내게 된 건 정말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신인인 데다가 이 바
하지만 유현진은 유상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유현진은 한성우를 60억 넘게 벌어주고, 또 굴 한 박스까지 선물했으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유상수 씨가 또 부경동 프로젝트에 투자한다면서, 돈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났대?”유씨 집안의 재력 정도는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유현진이 강한서와 결혼하기 전, 유씨 집안은 운주시에서 겨우 삼류 기업에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도 모두 아내의 전략 덕분이었다.하지만 아내가 사고를 당한 후 유상수는 회사를 다루기 위해 많은 핵심 멤버를 내쫓았었다. 아무리 야망이 커도 워낙 능력이 없었으니 2년도 되지 않아 회사는 부도 위기에 빠졌다.자금도 없고 주문받은 물건은 만들어내지 못하니 유상수는 희망을 곧 졸업한 딸에게 걸었다.유씨 집안은 명문 집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즈니스계에 발을 들였다고 할 수 있었다. 유상수처럼 명예와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업 파티나 연회의 단골이었다.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유현진을 데리고 종종 파티에 참석했다.유상수와 아내는 모두 외모가 평범했으나 딸인 유현진의 얼굴은 워낙 예뻤다.연예인 중에서도 예쁘게 생긴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연예인을 좋아해도 그들과 결혼을 할 건 아니었다.특히 상류사회에서는 결혼할 남녀의 집안이 엇비슷해야 했다. 그래야 서로에게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니.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사생활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좋았다.유현진은 완벽한 며느릿감이었다.예쁘고 깔끔하게 생겼지, 젊기까지 해. 또 유상수의 독녀라 그녀와의 혼인을 성사하기 위해 유씨 집안이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유상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강한서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덤덤하게 말했다.“회사 주식을 좀 판 것 같아. 부경동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최소 200억은 벌 수 있거든.”부경동의 프로젝트는 잠재적 가치가 높았다.유상수에게는 돈이
그때부터 한성우는 유현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강씨 집안의 재력으로 20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현진이 말도 안 하고 그 돈을 친정에 보냈으니 한성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강한서가 그의 입을 막은 바람에 이 일은 알려지지 않았지, 아니면 정인월도 그렇게 그녀를 예뻐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최근 한 달 사이, 한성우는 유현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설마 전에 자신이 너무 불편한 시선으로 유현진을 바라본 게 아니었나 싶었다.유현진이 만약 정말 유상수의 편이라면 팔찌 일을 그에게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또 유현진이 만약 허영심에 찌든 사람이었다면 강한서와 이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를 꽉 잡고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유현진은 ‘선셋 스타’ 이다.한성우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그가 실생활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니.그래도 팬심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유현진이 ‘선셋 스타’ 인 걸 알고는 그녀가 마냥 밉지는 않았다.한성우가 강한서를 힐끔 보며 물었다.“설마 유상수 씨를 투자하게 한 건 현진 씨를 도우려고 그러는 거야?”강한서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아니야. 투자를 많이 할수록 내가 다루기 쉽거든.”한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유상수 씨도 참 단순하셔. 강한서 돈을 벌기 그렇게 쉬운 줄 아나? 한서가 작정하면 모든 돈을 다 날려버리게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참, 모레 강운이 고모가 여는 주얼리 전시회에 갈 거야? 현진 씨가 주얼리 좋아하지 않았나? 너 시간이 없으면 내가 같이 가줄 수도 있는데.”강한서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요즘 현진이 많이 찾는다?”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그래?”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 예전에 현진이 데리고 파티 가는 것도 너 안 좋아했었잖아.”한성우가 유현진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아도 눈치가 빠른 강한서를 속일 수는 없었다.하지만 한성우는 강한서에게 유현진이 ‘선셋 스타’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진실을 알았을 때의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그건 내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한성우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얘 왜 이렇게 독설이야.’다행히 유현진은 바로 기분이 풀렸다. 서재로 찾아온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철이 없었어. 네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내가 널 잘 챙겨야지. 요즘 유머 모음집 보고 있는데 엄청 재밌거든. 한 번 들어볼래?”강한서는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했다. 유현진은 독설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강한서가 한참 그녀를 지켜보고는 말했다.“얘기해 봐.”그러고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유현진은 뜸을 들이다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어느 날, 엄마 파리가 아기 파리를 데리고 똥에서 식사하고 있었어. 아기 파리가 엄마한테 물었어. ‘엄마, 우리는 왜 똥을 먹어요?’, 엄마 파리는 잔뜩 화가 났어. ‘밥 먹을 때 그렇게 징그러운 얘기를 하면 어떡해!’”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차마 우유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다른 한편, 그 얘기를 들은 한성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유현진은 그제야 한성우도 듣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강한서는 겨우 우유를 넘기고는 미간을 구겼다.“네 수준답다.”“엄청 웃겨요.”한성우는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형수님, 개그우먼 해도 되겠어요.”한성우는 빈말이 아니었다. 유현진은 성우를 해서 그런지 캐릭터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는데 꽤 몰입감 있게 들렸다.유현진은 한성우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한성우랑 영상통화하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나 안 했을 텐데.’유현진이 서재를 떠나려던 그때, 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다른 거 없어?”‘수준 떨어진다더니.’유현진이 대답했다.“있어, 그럼 수준 높은 거로 얘기해 줄게. 옛날 옛적에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가 있었어. 어느 날,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물었어. ‘큰~ 물고기야~, 넌~ 어떤~ 음식을~ 좋아해?’, 큰 물고
“저는... 안 갈래요. 남편이 팔을 다쳤는데 집에서 잘 챙겨줘야죠.”유현진이 주저하며 말했다. 역시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다.한성우가 말했다.“한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형수님이 안고 재워야 해요? 한서는 집에 두고 저랑 같이 가죠.”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한성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그... 그럼... 나, 갔다 올까?”유현진이 조심스럽게 강한서에게 물었다.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가고 싶으면 가. 왜 내 눈치를 봐?”“그래.”유현진이 또 한성우에게 물었다.“모레 몇 시 시작이죠?”“저녁 7, 8시쯤일 거예요. 야광주니 저녁이 되어야 그 아름다움이 보이겠죠. 그럼 그때 형수님 데리러 갈게요.”두 사람이 약속을 잡은 후 한성우는 영상통화를 끊었고 서재는 삽시에 조용해졌다.유현진은 아직 물어보고 싶은 말을 못 물어봤기에 서재에 남아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가 걸리적거렸다.그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야, 너 일 봐. 나 여기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강한서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너 여기 있으면 나 일하는 데에 방해돼.”유현진은 겨우 화를 참으며 활짝 미소를 보였다.“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너 너무 피곤하게 일하면 안 된대. 대표님, 서재에 이렇게나 오래 있으셨는데 제가 어깨를 마사지해 줄게요.”강한서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너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유현진은 벌컥 역정을 냈다.“강한서, 네가 다쳐서 미안한 마음에 좀 잘해주려고 하니까 왜 시비야? 싫으면 말아.”강한서가 그녀를 지켜보더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어젯밤에도 미안한 마음에 나 보상해 주려고 그런 거야?”유현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운 마음에 서재를 나서려고 했는데 강한서가 그녀의 팔을 잡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나 어깨 마사지해 준다며?”‘마사지는 무슨! 우유를 확 엎어버리고 싶네. 말을 어쩜 저렇게 해?’하지만 유현진은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