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천의 안색이 파래졌다.“이제 고작 1분 30초가 지났다고? 난 5, 6분이나 지난 것 같은 느낌인데, 설마 날 속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강한서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1분이 짧고 긴지는 아저씨께서 화장실 가기 전과 후에 따라 차이가 다르죠. 그래서 아저씨가 지금 1분이 길다고 느끼시는 겁니다.”송병천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졌다.“안 한다. 못한다. 내려가야겠다.”강한서는 뒤로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아직도 1분이나 남았습니다. 견지하면 곧 건강해 질 겁니다.”“...”송병천은 할 말을 잃었다.한편, 주방.차미주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눈알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뜬 채 옆에 있는 유현진을 보았다.유현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왜 그래. 왜 그런 눈으로 날 봐?”차미주가 말했다.“강한서가 네 발등에 입을 맞췄잖아.”유현진이 정정하며 말했다.“... 아니야. 발목이야.”차미주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강한서 설마 그런 페티쉬가 있는 거야?”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뭐라는 거야? 우린 영상을 찍고 있었다고!”“아무리 동영상을 찍어도 발에 뽀뽀를 하진 않지. 안 그래?”“발목이라고.”유현진은 굴하지 않고 발목이라며 말했다.차미주는 방금 그녀가 목격한 그 장면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걔도 참 뽀뽀를 열심히 하더라.”“...”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솔직히 말해, 강한서가 그녀의 발에 뽀뽀를 할 때 그녀도 아주 놀랐었다.놀라움이 먼저 밀려오고 그다음으로 밀려온 감정은 바로 흥분과 민망함이었다.여하간에 발목에 키스를 하는 행위는 연인 사이에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기도 했다.유현진은 자부심이 강한 강한서가 그런 모습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보여줄 줄 전혀 몰랐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귀를 만지며 나직하게 말했다.“밖에 가서 절대 헛소리하지 마. 알았어?”
차미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은 거라고. 알아?”한성우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렸다.“그럼 내가 사직서 내러 같이 가 줄까?”“장난치지 마.”차미주가 이어서 말했다.“난 회사를 그만두러 가는 거야. 놀러 가는 줄 알아? 너를 데리고 가게?”한성우는 소파에 몸을 기대 느릿하게 말했다.“바이브 엔터 대표님을 데리고 회사를 때려치우러 가는 거지.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네가 그 엿 같은 회사가 아닌 더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그 회사에서 너를 엄청 신경 쓰고 있으니까 대표가 직접 나서서 널 정직시켰겠지. 나랑 함께 가면 전부터 널 계속 괴롭혀 왔다는 그 작가는 아마 안색이 파래지게 될걸? 그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아?”차미주는 순간 설득당해 버렸다.그녀가 쉽게 설득당한 이유도 사실은 그 작가 밑에서 고생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작가는 항상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다른 직원에게 일을 떠넘기면서 공로와 노력을 전부 빼앗아 갔다. 회사를 그만두면 더 이상 그 작가를 골려줄 기회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차미주는 기분이 여간 좋지 않았었다.만약 한성우가 그녀와 함께 회사로 간다면... 그 작가의 표정도 아주 볼만 해질 것 같았다.다만 이미 한성우에게 많이 당해 똑똑해진 차미주는 이번에 잊지 않고 먼저 물었다.“갑자기 이렇게 나를 도와줄 리가 없는데? 말해봐. 뭘 원해?”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나 상처받았어. 대체 날 뭐로 생각한 거야? 난 그냥 좋은 마음에 널 도와주려고 한 거라고.”차미주가 답했다.“허허, 넌 파리가 네 곁을 날아다녀도 잡아서 다리를 뽑아버릴 인간이잖아. 그런데 그런 네가 날 아무런 목적도 없이 돕는다고?”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표현도 많잖아. 왜 하필이면 더러운 파리로 예를 드는 거냐?”차미주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 무릇 좋은 작품
차미주가 말했다.“아니, 오늘은 안 갈 거야. 너랑 계속 같이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면서 게임만 했더니 몸무게가 4kg이나 쪘어. 나 다이어트 할 거야.”“넌 연예인도 아니고 얼굴로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잖아. 다이어트를 왜 해? 현진 씨를 봐. 너무 말라서 개미 같잖아. 그런 모습이 정말 예뻐 보여?”차미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내가 그동안 당한 게 있지 않았다면 분명 또 네 터무니없는 말에 넘어갔을 거야!”유현진은 여자 연예인 중에서도 삐쩍 마른 편은 아니었다.유현진은 키가 168cm 정도였고 몸무게도 대략 50kg 정도였으며 키가 같은 다른 여자 연예인들보다 5kg이나 더 많았다.만약 다른 연예인이었다면 절대 50kg을 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현진은 달랐다. 그녀는 얼굴이 아주 작았고 팔다리도 아주 길쭉했으며 가슴과 엉덩이도 풍만했기에 다른 여자들이 봐도 질투할 만한 그런 완벽한 몸매였다.아무리 실물로 봐도 유현진은 개미라고 취급될 만한 깡깡 마른 몸매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성우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이 방법도 통하지 않자 한성우가 또 입을 열었다.“나 아까 새로 나온 한정판 스킨을 뽑았는데 캐릭터 숙련도가 부족하거든. 아무리 매칭해도 캐릭터 선택할 수 없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너랑 캐릭터 스킬 연습 좀 해보려고 했단 말이야.”“!!! 너 또 새로 스킨 뽑았어?”한성우가 말을 이었다.“나 강박증이 있잖아. 반드시 캐릭터 스킨 전부 모아야 직성이 풀리거든.”“...”차미주는 할 말을 잃었다.‘돈이 많다고 그저 막 퍼붓네. 돈 자랑도 이젠 강박증이라고 말하다니!'“그래서 올 거야?”한성우는 다시 한번 물었다.“나 너한테 그 커플 스킨 주려고 했는데. 그럼 같이 게임을 할 때마다 특수 효과가 나오게 되잖아. 나도 아직 그 스킨 특수 효과가 어떤 형태로 나오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래서 엄청 궁금하거든.”게임 스킨을 준다는 말에 차미주는 바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그... 그럼 최대한 가도록
그녀는 강한서를 보면서 ‘내가 주방에 있을 때, 아저씨한테 무슨 헛소리를 한 거야? 내가 언제 반 시간이나 저걸 했어?'라는 눈빛을 보냈다.강한서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현진이는 무용을 배웠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유연해요. 몇 시간 동안 서 있어도 끄떡없죠.”“...”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유현진이 무용을 배웠다는 말에 송병천은 시큰한 다리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로 물었다.“무용을 배웠었어?”유현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 몇 년 배웠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실력이 늘지가 않아서 별로 잘 추지도 못해요.”송병천은 몰래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전에 친구한테 들었는데, 네가 크루즈 파티에서 피아노도 쳤다면서? 실력도 아주 좋다고 하더라.”유현진은 바로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피아노도 사실은 잘 칠 줄 몰라요. 그냥 한두 개 곡만 완벽하게 칠 줄 아는 정도거든요. 송가람 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딸의 칭찬을 들은 부모는 분명 겸손하게 몇 마디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송병천의 반응은 달랐다.“한두 개만 칠 줄 알아도 아주 대단한 거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음...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현진아, 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송병천이 물었다.유현진은 머뭇거렸다. 송병천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말을 보탰다.“민준이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네 팬이잖아. 최근에 널 아주 만나고 싶어 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때 가족끼리 모이게 되면 식사를 해야 할 텐데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준비에 애를 먹고 있단다.”“???”강한서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담시에만 있던 한씨 가문의 어르신 부부가 한주시로 현진이 만나러 온다고?'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만약 이 모든 게 송민준 여자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라면... 어쩌면 말이 되는 것 같았다.‘지금 온 가족이 총동원하여 현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
송병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러는 거지? 난 지금 현진이와 상의를 하고 있는 게 네 놈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지?”“아, 네.”강한서는 아주 성의 없게 대답하곤 유현진에게 물었다.“갈 거야?”유현진은 당연히 남의 가족 모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아저씨, 가족 모임이라면 전 안 갈게요.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인데 생판 남인 제가 끼어들면 가족분들도 불편해하실 거예요. 어르신들이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제가 시간을 내서 직접 뵈러 갈게요.”‘그럴 순 없어.'송병천이 말했다.“가족 모임도 아니다. 그냥 친구끼리 식사 한 끼 한다고 생각하면 돼. 대충 차려입고 오면 되는 자리란다.”유현진이 나직하게 말했다.“아까는 가족 모임이라고 강한서는 참석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송병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난... 난 그냥 걔가 바빠 보여서 그런 것이란다.”강한서가 바로 입을 열었다.“최근엔 그리 바쁘지 않아요. 어르신들께서 한주시로 오시면 제가 시간을 내면 되죠.”송병천이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그럼 한가하면 너도 오거라.”강한서가 바로 답했다.“감사합니다. 아저씨.”“...”송병천은 비록 강한서도 참석하겠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유현진을 어르신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특히 송병천은 루나를 핑계로 계속 찾아왔었기에 송병천과 유현진은 어느 정도 친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송병천은 유현진을 알아가는 데 아주 급급했다. 20여 년 동안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느 학교에 다녔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부모들이 잘해줬는지 등 아주 궁금했다...하지만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유현진의 찬란한 미소를 보면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그녀가 건강하게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송병천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예전에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는 차차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인공지능 로봇이에요. 강한서가 아직 대량 생산은 하지 않았죠. 마음에 드시면 얼른 주문하셔야 할 거예요. 가격도 한서랑 얘기하면 분명 싸게 해드릴 거예요.”그녀는 뜸을 들이며 눈치를 살폈다.“주문하실 거예요?”“...”송병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유현진이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한 이유가 결국은 강한서의 로봇을 팔기 위한 것일 줄 상상조차 못 했다.송병천은 마음이 다소 아팠다. 그는 자신의 순진한 딸이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다. ‘위자료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음에도 아직도 강한서 그놈을 도와줄 생각만 해?'송병천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유현진은 자신의 의도가 너무나도 선명하였다고 생각해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큼, 전 그냥 물어본 거예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송병천은 보물 같은 딸을 전대 민망하게 만들 수 없었다. 그가 급히 입을 열었다.“아니다. 난 지금 몇 대를 주문할까 고민 중이었단다.”“!!! 다른 곳에도 쓰시려고요?”유현진이 말했다.송병천이 답했다.“집에 하나, 민준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에도 하나, 그리고 회사에도 하나 필요할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세 대는 있어야 할 것 같구나.”유현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정말로 세 대나 구매하시려고요?”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송병천도 따라 기분이 좋아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일단 세 대만 주문하마.”유현진은 팔꿈치로 강한서를 찔렀다.“들었지? 얼른 준비해 드려.”강한서는 송병천을 힐끔 쳐다보곤 담담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 이따 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 연락드릴 겁니다. 먼저 계약금의 일부를 선불로 내셔야 할 겁니다.”송병천이 멈칫하더니 강한서를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계약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궁금한 건, 현진이가 네 로봇을 대신 팔아주었으니 어느 정도 보너스는 지급이 되겠지?”강한서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느릿하게 답했다.“현진이가 원하면 회사 대표도 현진이에게
차미주가 말했다.“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니야. 만약 뭐라도 없어지면 내 탓을 하려고?”한성우가 낮게 웃어버렸다.“만약 집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너를 팔아서라도 배상해 줘.”차미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럼 네 집에 있는 물건을 다 훔쳐 가야겠네.”그녀는 이내 다시 재촉했다.“빨리 말해. 나 내일 아침 회사로 가야 한단 말이야. 이러면 얼마 못 놀아.”“알았어. 일단 들어와.”차미주는 전화를 끊었다. 비번을 누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집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현관엔 호접란 화분이 있었고 하얀 꽃에 푸른 잎,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아름다웠다.그녀가 슬리퍼로 갈아 신을 때 무의식적으로 신발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신발장엔 전부 남자 신발만 진열되어 있었고 그녀가 갈아신은 슬리퍼만 여성 신발이었다. 슬리퍼엔 핑크색 토끼 귀가 달려있었고, 복슬복슬한 털 슬리퍼였다.게다가 이 슬리퍼는 그녀가 처음 한성우 집으로 오게 된 후 그의 슬리퍼가 너무 크다며 투덜거린 탓에 한성우가 새로 사 온 것이었다.그녀는 그때도 한성우의 안목이 구리다며 투덜대긴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현관은 지나쳐 머리만 빼꼼 내밀고 거실을 살폈다.집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티테이블 위엔 향초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게다가 식탁 위 꽃병엔 붉은 장미 하나와 흰 장미 하나가 꽂혀 있어 아주 심플해 보였다.한성우는 생활의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비록 혼자 살고 있었지만, 집안은 항상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매일매일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청소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와 친해진 뒤로 그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성우가 매일매일 직접 청소했던 것이었다.그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물건을 각을 딱 잡고 정리해 두었다. 그녀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이것저것 뒤지면 한성우는 항상 그녀의 뒤에서 물건을 정리하여 원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정리해 놓았었다
그녀는 각종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간식과 인스턴트 식품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었다.한성우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미주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전부를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막내였지만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에 그의 형과 누나들은 그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고 부모님은 그가 시골에서 ‘나쁜 버릇'만 길들였다며 계속 그를 질타해 왔었다.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 따로 자취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혼자 살게 되었다. 물론 가끔 명절 때에는 본가로 내려가 이틀 동안 묵고 다시 돌아오긴 했었다.하지만 그 이틀이라는 시간도 그에겐 고통이었다.부모님은 잘나가게 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친척들 앞에서 철이 들었다며 자랑하기 바빴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가 바삐 살 땐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다니는지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들은 매번 그의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그의 생활 습관에 대해 여기저기 지적하였고 얼른 여자를 만나 결혼이나 하라며 재촉하면서 어느 집안의 아가씨가 어떤지 말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술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어쩌면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예전에 그가 만났던 전 여친들도 그랬다. 그저 입으로만 걱정된다며 말했고 실질적인 행동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그랬기에 차미주가 유일했다. 차미주는 매번 그의 집으로 올 때마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었다.비록 그의 카드를 긁어 산 것이지만.마지막 물건까지 냉장고에 넣은 차미주는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냉장고처럼 보였던 것이었다.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를 질렀다.“미쳤어? 왜 소리 없이 거기 서 있는 건데? 깜짝 놀랐잖아!”한성우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화를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