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강한서를 보면서 ‘내가 주방에 있을 때, 아저씨한테 무슨 헛소리를 한 거야? 내가 언제 반 시간이나 저걸 했어?'라는 눈빛을 보냈다.강한서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현진이는 무용을 배웠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유연해요. 몇 시간 동안 서 있어도 끄떡없죠.”“...”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유현진이 무용을 배웠다는 말에 송병천은 시큰한 다리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로 물었다.“무용을 배웠었어?”유현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 몇 년 배웠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실력이 늘지가 않아서 별로 잘 추지도 못해요.”송병천은 몰래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전에 친구한테 들었는데, 네가 크루즈 파티에서 피아노도 쳤다면서? 실력도 아주 좋다고 하더라.”유현진은 바로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피아노도 사실은 잘 칠 줄 몰라요. 그냥 한두 개 곡만 완벽하게 칠 줄 아는 정도거든요. 송가람 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딸의 칭찬을 들은 부모는 분명 겸손하게 몇 마디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송병천의 반응은 달랐다.“한두 개만 칠 줄 알아도 아주 대단한 거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음...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현진아, 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송병천이 물었다.유현진은 머뭇거렸다. 송병천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말을 보탰다.“민준이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네 팬이잖아. 최근에 널 아주 만나고 싶어 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때 가족끼리 모이게 되면 식사를 해야 할 텐데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준비에 애를 먹고 있단다.”“???”강한서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담시에만 있던 한씨 가문의 어르신 부부가 한주시로 현진이 만나러 온다고?'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만약 이 모든 게 송민준 여자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라면... 어쩌면 말이 되는 것 같았다.‘지금 온 가족이 총동원하여 현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
송병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러는 거지? 난 지금 현진이와 상의를 하고 있는 게 네 놈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지?”“아, 네.”강한서는 아주 성의 없게 대답하곤 유현진에게 물었다.“갈 거야?”유현진은 당연히 남의 가족 모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아저씨, 가족 모임이라면 전 안 갈게요.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인데 생판 남인 제가 끼어들면 가족분들도 불편해하실 거예요. 어르신들이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제가 시간을 내서 직접 뵈러 갈게요.”‘그럴 순 없어.'송병천이 말했다.“가족 모임도 아니다. 그냥 친구끼리 식사 한 끼 한다고 생각하면 돼. 대충 차려입고 오면 되는 자리란다.”유현진이 나직하게 말했다.“아까는 가족 모임이라고 강한서는 참석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송병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난... 난 그냥 걔가 바빠 보여서 그런 것이란다.”강한서가 바로 입을 열었다.“최근엔 그리 바쁘지 않아요. 어르신들께서 한주시로 오시면 제가 시간을 내면 되죠.”송병천이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그럼 한가하면 너도 오거라.”강한서가 바로 답했다.“감사합니다. 아저씨.”“...”송병천은 비록 강한서도 참석하겠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유현진을 어르신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특히 송병천은 루나를 핑계로 계속 찾아왔었기에 송병천과 유현진은 어느 정도 친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송병천은 유현진을 알아가는 데 아주 급급했다. 20여 년 동안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느 학교에 다녔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부모들이 잘해줬는지 등 아주 궁금했다...하지만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유현진의 찬란한 미소를 보면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그녀가 건강하게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송병천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예전에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는 차차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인공지능 로봇이에요. 강한서가 아직 대량 생산은 하지 않았죠. 마음에 드시면 얼른 주문하셔야 할 거예요. 가격도 한서랑 얘기하면 분명 싸게 해드릴 거예요.”그녀는 뜸을 들이며 눈치를 살폈다.“주문하실 거예요?”“...”송병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유현진이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한 이유가 결국은 강한서의 로봇을 팔기 위한 것일 줄 상상조차 못 했다.송병천은 마음이 다소 아팠다. 그는 자신의 순진한 딸이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다. ‘위자료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음에도 아직도 강한서 그놈을 도와줄 생각만 해?'송병천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유현진은 자신의 의도가 너무나도 선명하였다고 생각해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큼, 전 그냥 물어본 거예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송병천은 보물 같은 딸을 전대 민망하게 만들 수 없었다. 그가 급히 입을 열었다.“아니다. 난 지금 몇 대를 주문할까 고민 중이었단다.”“!!! 다른 곳에도 쓰시려고요?”유현진이 말했다.송병천이 답했다.“집에 하나, 민준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에도 하나, 그리고 회사에도 하나 필요할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세 대는 있어야 할 것 같구나.”유현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정말로 세 대나 구매하시려고요?”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송병천도 따라 기분이 좋아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일단 세 대만 주문하마.”유현진은 팔꿈치로 강한서를 찔렀다.“들었지? 얼른 준비해 드려.”강한서는 송병천을 힐끔 쳐다보곤 담담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 이따 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 연락드릴 겁니다. 먼저 계약금의 일부를 선불로 내셔야 할 겁니다.”송병천이 멈칫하더니 강한서를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계약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궁금한 건, 현진이가 네 로봇을 대신 팔아주었으니 어느 정도 보너스는 지급이 되겠지?”강한서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느릿하게 답했다.“현진이가 원하면 회사 대표도 현진이에게
차미주가 말했다.“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니야. 만약 뭐라도 없어지면 내 탓을 하려고?”한성우가 낮게 웃어버렸다.“만약 집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너를 팔아서라도 배상해 줘.”차미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럼 네 집에 있는 물건을 다 훔쳐 가야겠네.”그녀는 이내 다시 재촉했다.“빨리 말해. 나 내일 아침 회사로 가야 한단 말이야. 이러면 얼마 못 놀아.”“알았어. 일단 들어와.”차미주는 전화를 끊었다. 비번을 누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집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현관엔 호접란 화분이 있었고 하얀 꽃에 푸른 잎,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아름다웠다.그녀가 슬리퍼로 갈아 신을 때 무의식적으로 신발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신발장엔 전부 남자 신발만 진열되어 있었고 그녀가 갈아신은 슬리퍼만 여성 신발이었다. 슬리퍼엔 핑크색 토끼 귀가 달려있었고, 복슬복슬한 털 슬리퍼였다.게다가 이 슬리퍼는 그녀가 처음 한성우 집으로 오게 된 후 그의 슬리퍼가 너무 크다며 투덜거린 탓에 한성우가 새로 사 온 것이었다.그녀는 그때도 한성우의 안목이 구리다며 투덜대긴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현관은 지나쳐 머리만 빼꼼 내밀고 거실을 살폈다.집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티테이블 위엔 향초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게다가 식탁 위 꽃병엔 붉은 장미 하나와 흰 장미 하나가 꽂혀 있어 아주 심플해 보였다.한성우는 생활의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비록 혼자 살고 있었지만, 집안은 항상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매일매일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청소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와 친해진 뒤로 그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성우가 매일매일 직접 청소했던 것이었다.그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물건을 각을 딱 잡고 정리해 두었다. 그녀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이것저것 뒤지면 한성우는 항상 그녀의 뒤에서 물건을 정리하여 원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정리해 놓았었다
그녀는 각종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간식과 인스턴트 식품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었다.한성우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미주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전부를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막내였지만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에 그의 형과 누나들은 그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고 부모님은 그가 시골에서 ‘나쁜 버릇'만 길들였다며 계속 그를 질타해 왔었다.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 따로 자취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혼자 살게 되었다. 물론 가끔 명절 때에는 본가로 내려가 이틀 동안 묵고 다시 돌아오긴 했었다.하지만 그 이틀이라는 시간도 그에겐 고통이었다.부모님은 잘나가게 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친척들 앞에서 철이 들었다며 자랑하기 바빴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가 바삐 살 땐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다니는지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들은 매번 그의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그의 생활 습관에 대해 여기저기 지적하였고 얼른 여자를 만나 결혼이나 하라며 재촉하면서 어느 집안의 아가씨가 어떤지 말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술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어쩌면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예전에 그가 만났던 전 여친들도 그랬다. 그저 입으로만 걱정된다며 말했고 실질적인 행동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그랬기에 차미주가 유일했다. 차미주는 매번 그의 집으로 올 때마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었다.비록 그의 카드를 긁어 산 것이지만.마지막 물건까지 냉장고에 넣은 차미주는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냉장고처럼 보였던 것이었다.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를 질렀다.“미쳤어? 왜 소리 없이 거기 서 있는 건데? 깜짝 놀랐잖아!”한성우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화를
한성우는 변명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가 사귀었었던 전 여친들의 몸매가 아주 좋았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그래도 알뜰살뜰한 여자가 쭉쭉 빠지고 빵빵한 몸매까지 겸비했다면 당연히 더 좋고.”차미주는 바로 그를 노려보았다.“쓰레기!”한성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너 유튜브에서도 복근 영상만 찾아보잖아. 너도 몸매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내가 너랑 같아? 난 그냥 영상으로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뿐이야. 하지만 넌 그런 여자들에게 손을 대고 농락하잖아!”한성우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시나리오를 쓰는데 복근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찾는다고? 네가 쓴 시나리오 정말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거 맞아?”차미주는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선정적인 내용을 쓰는 줄 알아? 난 남자 캐릭터 이미지 구상을 위해 참고하는 거라고, 알긴 해?”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조금만 알려주는데, 내 새 작품 초안은 이미 통과되었어. 내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완성하고 별다른 문제 없으면 바로 계약 가능하다고!”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한성우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고 흐름을 타 물었다.“어떤 소재로 쓴 건데?”“현대 직장인에 대한 소재.”차미주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구체적인 소재는 의사 직업에 관한 내용이야. 조 선생님을 보니 영감이 막 솟구치더라고.”한성우의 표정에 웃음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미묘한 얼굴로 대충 대답하곤 물었다.“아, 그래. 의학물은 전문성이 뛰어난 소재라 쓰기 어려울 거야. 문제도 많이 생길 거고. 최근 나온 의학 드라마도 망한 게 하나가 아니잖아.”차미주는 수심이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조 선생님께서 전문적인 부분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어. 뭐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논란을 일으키게 될 것 같은 부분이 있으면 조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거든.”“... 너 설마 조준을 실제 모델로 쓴 거 아니지?”“맞아. 조
차미주가 말했다.“성우 오빠, 화 좀 그만 풀어. 네가 나한테 여성스러움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난 화를 내지 않았잖아. 안 그래? 넌 그냥 생긴 게 카사노바처럼 생긴 거야. 하지만 잘 알고 지내보면 또 의리는 아주 넘치지. 어차피 내가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카사노바이든 아니든 난 상관 안 해. 친구로서는 넌 최고야.”한성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차미주의 ‘어차피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고 순간 마음이 답답해지기까지 했다.그는 얼굴에 힘을 주고 이를 갈며 말했다.“네가 나랑 사귀자고 해도 넌 내 취향 자체가 아니야!”차미주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그럼 당연하지. 우리 성우 오빠의 눈이 얼마나 높은데, 짜리몽땅한 내가 성에 차겠어?”자신을 비하하며 그를 위로해 주는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 내가 눈이 삐었던 거지. 취향도 아닌 짜리몽땅한 너를 온종일 생각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하필이면 이런 쪽엔 눈치라곤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남자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다니.'“됐어, 됐어. 화 좀 풀어. 내가 저작권료를 받으면 한턱 크게 살게. 저기 앞 사거리에 새로 생긴 그 레스토랑 메뉴 전부 시켜서 싹수없는 사장 놀라게 만들어 주자고!”한성우는 답답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그 레스토랑 사장이 너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냐?”“뭘 딱히 한 건 아니야. 그냥 매번 내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거든.”차미주는 말하면서 사장 흉내를 냈다.“눈을 희번덕 뜨면서 마치 ‘거지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셨고 순간 웃음이 터져버렸다.“그러니까 그 사장이 널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메뉴에 있는 음식을 전부 시키겠다는 거야? 그건 사장한테 더 좋은 일이
‘난 그냥 한 말이었다고.'‘이 자식은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근육이 선명한 등에 차미주의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한성우의 키는 비록 강한서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몸은 다소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엔 근육이 가득했고 한눈에 봐도 매일 같이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미주는 드라마 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런 건장한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특히 근 몇 년 동안 회사에선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많이 만들었고, 그녀가 맡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인기가 많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었다.그 젊은 배우들은 하나같이 피부도 뽀얗고 아주 귀여웠지만, 옷을 벗기만 하면 열에 여덟은 비실비실한 몸이 드러났고 온몸에 뼈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근육이 조금 있다 해도 전부 다이어트를 했고 제작진이 준비한 옷도 오버 사이즈여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몰래 입을 것처럼 아주 커 보였다.관건은 팬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아이돌의 몸매 비율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차미주는 그 몇 년 동안 자신의 안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전엔, 번마다 제작진들이 어느 남자 배우에게 상반신 노출신을 제안할 때마다 사람들은 바로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나같이 비실비실하니 별로 구경할 생각도 나지 않은 것이었다.한성우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의 몸은 온통 근육이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한성우의 몸엔 체지방이 엄청 적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몸 구석구석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한성우의 몸은 그야말로 의사들이 인체 표본으로 삼을 만한 완벽한 몸이었다.한성우의 몸이야말로 정상적인 남성 몸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할 몸매였다.“얼른 안 하고 뭐 해?”재촉하는 한성우의 목소리에 차미주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큼, 할 거야. 지금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