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각종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간식과 인스턴트 식품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었다.한성우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미주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전부를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막내였지만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에 그의 형과 누나들은 그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고 부모님은 그가 시골에서 ‘나쁜 버릇'만 길들였다며 계속 그를 질타해 왔었다.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 따로 자취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혼자 살게 되었다. 물론 가끔 명절 때에는 본가로 내려가 이틀 동안 묵고 다시 돌아오긴 했었다.하지만 그 이틀이라는 시간도 그에겐 고통이었다.부모님은 잘나가게 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친척들 앞에서 철이 들었다며 자랑하기 바빴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가 바삐 살 땐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다니는지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들은 매번 그의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그의 생활 습관에 대해 여기저기 지적하였고 얼른 여자를 만나 결혼이나 하라며 재촉하면서 어느 집안의 아가씨가 어떤지 말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술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어쩌면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예전에 그가 만났던 전 여친들도 그랬다. 그저 입으로만 걱정된다며 말했고 실질적인 행동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그랬기에 차미주가 유일했다. 차미주는 매번 그의 집으로 올 때마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었다.비록 그의 카드를 긁어 산 것이지만.마지막 물건까지 냉장고에 넣은 차미주는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냉장고처럼 보였던 것이었다.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를 질렀다.“미쳤어? 왜 소리 없이 거기 서 있는 건데? 깜짝 놀랐잖아!”한성우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화를
한성우는 변명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가 사귀었었던 전 여친들의 몸매가 아주 좋았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그래도 알뜰살뜰한 여자가 쭉쭉 빠지고 빵빵한 몸매까지 겸비했다면 당연히 더 좋고.”차미주는 바로 그를 노려보았다.“쓰레기!”한성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너 유튜브에서도 복근 영상만 찾아보잖아. 너도 몸매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내가 너랑 같아? 난 그냥 영상으로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뿐이야. 하지만 넌 그런 여자들에게 손을 대고 농락하잖아!”한성우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시나리오를 쓰는데 복근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찾는다고? 네가 쓴 시나리오 정말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거 맞아?”차미주는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선정적인 내용을 쓰는 줄 알아? 난 남자 캐릭터 이미지 구상을 위해 참고하는 거라고, 알긴 해?”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조금만 알려주는데, 내 새 작품 초안은 이미 통과되었어. 내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완성하고 별다른 문제 없으면 바로 계약 가능하다고!”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한성우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고 흐름을 타 물었다.“어떤 소재로 쓴 건데?”“현대 직장인에 대한 소재.”차미주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구체적인 소재는 의사 직업에 관한 내용이야. 조 선생님을 보니 영감이 막 솟구치더라고.”한성우의 표정에 웃음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미묘한 얼굴로 대충 대답하곤 물었다.“아, 그래. 의학물은 전문성이 뛰어난 소재라 쓰기 어려울 거야. 문제도 많이 생길 거고. 최근 나온 의학 드라마도 망한 게 하나가 아니잖아.”차미주는 수심이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조 선생님께서 전문적인 부분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어. 뭐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논란을 일으키게 될 것 같은 부분이 있으면 조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거든.”“... 너 설마 조준을 실제 모델로 쓴 거 아니지?”“맞아. 조
차미주가 말했다.“성우 오빠, 화 좀 그만 풀어. 네가 나한테 여성스러움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난 화를 내지 않았잖아. 안 그래? 넌 그냥 생긴 게 카사노바처럼 생긴 거야. 하지만 잘 알고 지내보면 또 의리는 아주 넘치지. 어차피 내가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카사노바이든 아니든 난 상관 안 해. 친구로서는 넌 최고야.”한성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차미주의 ‘어차피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고 순간 마음이 답답해지기까지 했다.그는 얼굴에 힘을 주고 이를 갈며 말했다.“네가 나랑 사귀자고 해도 넌 내 취향 자체가 아니야!”차미주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그럼 당연하지. 우리 성우 오빠의 눈이 얼마나 높은데, 짜리몽땅한 내가 성에 차겠어?”자신을 비하하며 그를 위로해 주는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 내가 눈이 삐었던 거지. 취향도 아닌 짜리몽땅한 너를 온종일 생각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하필이면 이런 쪽엔 눈치라곤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남자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다니.'“됐어, 됐어. 화 좀 풀어. 내가 저작권료를 받으면 한턱 크게 살게. 저기 앞 사거리에 새로 생긴 그 레스토랑 메뉴 전부 시켜서 싹수없는 사장 놀라게 만들어 주자고!”한성우는 답답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그 레스토랑 사장이 너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냐?”“뭘 딱히 한 건 아니야. 그냥 매번 내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거든.”차미주는 말하면서 사장 흉내를 냈다.“눈을 희번덕 뜨면서 마치 ‘거지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셨고 순간 웃음이 터져버렸다.“그러니까 그 사장이 널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메뉴에 있는 음식을 전부 시키겠다는 거야? 그건 사장한테 더 좋은 일이
‘난 그냥 한 말이었다고.'‘이 자식은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근육이 선명한 등에 차미주의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한성우의 키는 비록 강한서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몸은 다소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엔 근육이 가득했고 한눈에 봐도 매일 같이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미주는 드라마 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런 건장한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특히 근 몇 년 동안 회사에선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많이 만들었고, 그녀가 맡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인기가 많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었다.그 젊은 배우들은 하나같이 피부도 뽀얗고 아주 귀여웠지만, 옷을 벗기만 하면 열에 여덟은 비실비실한 몸이 드러났고 온몸에 뼈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근육이 조금 있다 해도 전부 다이어트를 했고 제작진이 준비한 옷도 오버 사이즈여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몰래 입을 것처럼 아주 커 보였다.관건은 팬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아이돌의 몸매 비율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차미주는 그 몇 년 동안 자신의 안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전엔, 번마다 제작진들이 어느 남자 배우에게 상반신 노출신을 제안할 때마다 사람들은 바로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나같이 비실비실하니 별로 구경할 생각도 나지 않은 것이었다.한성우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의 몸은 온통 근육이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한성우의 몸엔 체지방이 엄청 적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몸 구석구석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한성우의 몸은 그야말로 의사들이 인체 표본으로 삼을 만한 완벽한 몸이었다.한성우의 몸이야말로 정상적인 남성 몸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할 몸매였다.“얼른 안 하고 뭐 해?”재촉하는 한성우의 목소리에 차미주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큼, 할 거야. 지금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한성우가 가져온 상자엔 부항 치료 도구가 가득했고 심지어 등에 바르는 오일도 있었다.한성우는 가끔 마사지샵으로 찾아가기 귀찮을 때마다 안마사를 집으로 불렀었다. 그랬기에 그의 집엔 뜬금없는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대충 핑계를 둘러대며 허세를 부리던 차미주는 지금, 이 순간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누가 보면 네가 마사지샵을 차린 줄 알겠어.”한성우는 그녀에게 도구를 던져주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네 실력을 보여줘.”말을 마친 한성우는 바로 소파 위에 엎드렸고 등을 전부 드러냈다.차미주는 손에 든 라이터를 힐끔 보더니 이내 다시 상자에 가득 담긴 부항 도구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예전에 부항 치료받으러 갔을 때의 전문가 손길을 떠올리며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일단 이걸 이렇게 쥐고, 다음은 이렇게 꽂아 넣고, 등에 올려놓는 거겠지?'‘뭐... 전문적인 기술은 없는 것 같은데?'“빨리해.”한성우가 재촉했다.“이따 게임도 해야 한단 말이야.”차미주는 집중을 하며 소독솜을 들고 그의 등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이내 부항을 들고 빠르게 그의 등에, 정중앙에 놓았다.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한성우에 차미주는 부항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천재가 아닌가 생각했고 대충 아무렇게 부항을 놓아도 완벽할 것이라 여겼다.한성우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그는 여유롭게 차미주의 치료를 받아들이고 있었다.TV엔 마침 이라는 드라마 예고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다음 주에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고 방영하기 2주 전부터 이미 실검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진 않았지만, 홍보는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로 많이 했던 것이었다.드라마를 찍을 때 원작자는 표절 의혹으로 실검에 오른 적이 있었다. 표절 논란이 되고 오히려 드라마에 역효과를 일으켜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그때 당시 드라마 원작자를 비난하는 네
차미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아아아아악, 너 엉덩이에 불붙었어!”한성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가 뜨겁다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돌리니 바지에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그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빠르게 불이 붙은 바지를 벗어 휙 던져버렸다.그제야 정신이 든 차미주는 얼른 발로 불이 붙은 바지를 마구 밟았다.불이 꺼지고 그녀는 다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한성우가 화상을 입진 않았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성우는 알몸으로 소파 옆에 서 있었고 그녀의 애착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차미주는 순간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 담요는 왜 두르는데!”한성우는 담요를 허리에 꽉 두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그럼 벗고 있을까?”담요 뒤로 가려진 그의 하반신을 떠올린 그녀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그러다 한참 후에야 이를 갈며 말했다.“아니, 왜 팬티는 안 입고 있었는데!”한성우가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이건 네가 집에서 브래지어를 안 입고 있는 거랑 같은 원리야. 안 입으면 아주 편하거든.”“...”차미주는 할 말을 잃었다.말을 마친 한성우가 결국 투덜거렸다.“너 부항 치료에 아주 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내 바지를 태워 먹을 수가 있어? 내가 반응이 빠르지 않았다면 이미 엉덩이가 타버렸을 거야.”차미주는 그에게 아주 미안했다. 그녀에게서는 평소의 기세등등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잔뜩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사실 할 줄 몰라. 네가 처음이야. 아까 한창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그만... 그렇게 된 거야.”한성우는 그녀를 흘겨보았다.“너 때문에 하마터면 나한테서 대가 끊길 뻔했어. 정말로 심하게 타버렸다면 너 어떻게 나한테 배상하려고 그래?”차미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네가 정말로 화상을 입고 네
차미주는 엘리베이터 입구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박스를 안아 들었다. 막 집으로 돌아오자 한성우가 절뚝거리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차미주가 얼른 물건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때, 아직도 아파?”한성우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안 좋아.”차미주의 얼굴이 한성우보다 더 어두워졌다.그녀는 사고를 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말없이 한성우를 끌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녀는 한성우를 병원에 데려가기에 급급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차미주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성우는 엉덩이가 다쳐 앉을 수 없었기에 뒷좌석에 옆으로 누워 차미주의 다리를 베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야에서 봤을 때, 차미주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평소 통통하던 턱은 긴장으로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성우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보조개를 쿡 찔렀다. 그는 피식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정말 병신이라도 돼서 나한테 시집오는 거로 사죄해야 할까 봐서 그래?”“너 말하지 마. 나 심장 떨려.”차미주는 지금 전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성우에게 화상으로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한성우는 정말 많이 아픈지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곧 병원에 도착했고 차미주는 한성우를 데리고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부항 치료를 하다가 화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둘러 바지를 벗게 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잠시 멈칫한 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 “너 먼저 나가 있어.”걱정되었던 차미주는 그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켰다. 커튼을 친 의사가 그에게 말했다. “누우세요, 확인할게요.”한성우는 움직이지 않고 의자를 끌어와 의사의 맞은켠에 앉았다. 의사:
의사는 차미주의 눈을 피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문제가 조금 심각해요. 엉덩이 피부뿐만 아니라 서혜부, 회음부, 생식기 근처에도 화상을 입은 흔적이 있었어요.”의사의 말에 차미주는 순간 멍해졌다. “선생님, 확실한 건가요? 집에 있을 땐, 걸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심할 수 있어요?”의사는 그녀를 쓱 훑어보았다. “제 소견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건가요?”차미주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단지...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집에서는 분명 멀쩡했어요. 아프다는 말도 안 했고 걷기도 했는데, 왜 병원에 도착하니까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예요?”의사가 대답했다. “화상이 심할 경우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둔해질 수 있는데, 이건 정상이에요.”차미주가 이 말의 논리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의사가 말을 이었다.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남성의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 안 그래도 부항 치료는 비전문적인 사람이 진행하면 위험한데, 진료소도 아니고 집에서 하셨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네요.”앞부분의 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차미주가 뒤의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말을 들은 차미주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눈도 덩달아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풀쩍거렸고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해요, 입원해야 하는 건가요? 수술은 안 해도 돼요? 제가 얼마를 준비하면 되죠?”“화상 부위가 혈관과 신경이 많은 곳이라, 약물 치료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수술은 위험부담이 적지 않으니까요. 아직 저렇게 젊은데, 만약 약물 치료로 호전이 없으면 그때 다시 수술을 고민해 보죠.”말을 마친 의사는 괜히 마음에 찔려 눈길을 피했다. 의사의 말은 허점투성이였지만 마침 마음이 복잡했던 차미주는 그의 말을 자세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성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뿐이었다.‘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