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가 말했다.“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니야. 만약 뭐라도 없어지면 내 탓을 하려고?”한성우가 낮게 웃어버렸다.“만약 집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너를 팔아서라도 배상해 줘.”차미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럼 네 집에 있는 물건을 다 훔쳐 가야겠네.”그녀는 이내 다시 재촉했다.“빨리 말해. 나 내일 아침 회사로 가야 한단 말이야. 이러면 얼마 못 놀아.”“알았어. 일단 들어와.”차미주는 전화를 끊었다. 비번을 누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집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현관엔 호접란 화분이 있었고 하얀 꽃에 푸른 잎,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아름다웠다.그녀가 슬리퍼로 갈아 신을 때 무의식적으로 신발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신발장엔 전부 남자 신발만 진열되어 있었고 그녀가 갈아신은 슬리퍼만 여성 신발이었다. 슬리퍼엔 핑크색 토끼 귀가 달려있었고, 복슬복슬한 털 슬리퍼였다.게다가 이 슬리퍼는 그녀가 처음 한성우 집으로 오게 된 후 그의 슬리퍼가 너무 크다며 투덜거린 탓에 한성우가 새로 사 온 것이었다.그녀는 그때도 한성우의 안목이 구리다며 투덜대긴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현관은 지나쳐 머리만 빼꼼 내밀고 거실을 살폈다.집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티테이블 위엔 향초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게다가 식탁 위 꽃병엔 붉은 장미 하나와 흰 장미 하나가 꽂혀 있어 아주 심플해 보였다.한성우는 생활의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비록 혼자 살고 있었지만, 집안은 항상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매일매일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청소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와 친해진 뒤로 그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성우가 매일매일 직접 청소했던 것이었다.그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물건을 각을 딱 잡고 정리해 두었다. 그녀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이것저것 뒤지면 한성우는 항상 그녀의 뒤에서 물건을 정리하여 원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정리해 놓았었다
그녀는 각종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간식과 인스턴트 식품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었다.한성우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미주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전부를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막내였지만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에 그의 형과 누나들은 그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고 부모님은 그가 시골에서 ‘나쁜 버릇'만 길들였다며 계속 그를 질타해 왔었다.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 따로 자취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혼자 살게 되었다. 물론 가끔 명절 때에는 본가로 내려가 이틀 동안 묵고 다시 돌아오긴 했었다.하지만 그 이틀이라는 시간도 그에겐 고통이었다.부모님은 잘나가게 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친척들 앞에서 철이 들었다며 자랑하기 바빴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가 바삐 살 땐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다니는지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들은 매번 그의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그의 생활 습관에 대해 여기저기 지적하였고 얼른 여자를 만나 결혼이나 하라며 재촉하면서 어느 집안의 아가씨가 어떤지 말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술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어쩌면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예전에 그가 만났던 전 여친들도 그랬다. 그저 입으로만 걱정된다며 말했고 실질적인 행동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그랬기에 차미주가 유일했다. 차미주는 매번 그의 집으로 올 때마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었다.비록 그의 카드를 긁어 산 것이지만.마지막 물건까지 냉장고에 넣은 차미주는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냉장고처럼 보였던 것이었다.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를 질렀다.“미쳤어? 왜 소리 없이 거기 서 있는 건데? 깜짝 놀랐잖아!”한성우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화를
한성우는 변명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가 사귀었었던 전 여친들의 몸매가 아주 좋았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그래도 알뜰살뜰한 여자가 쭉쭉 빠지고 빵빵한 몸매까지 겸비했다면 당연히 더 좋고.”차미주는 바로 그를 노려보았다.“쓰레기!”한성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너 유튜브에서도 복근 영상만 찾아보잖아. 너도 몸매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내가 너랑 같아? 난 그냥 영상으로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뿐이야. 하지만 넌 그런 여자들에게 손을 대고 농락하잖아!”한성우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시나리오를 쓰는데 복근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찾는다고? 네가 쓴 시나리오 정말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거 맞아?”차미주는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선정적인 내용을 쓰는 줄 알아? 난 남자 캐릭터 이미지 구상을 위해 참고하는 거라고, 알긴 해?”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조금만 알려주는데, 내 새 작품 초안은 이미 통과되었어. 내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완성하고 별다른 문제 없으면 바로 계약 가능하다고!”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한성우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고 흐름을 타 물었다.“어떤 소재로 쓴 건데?”“현대 직장인에 대한 소재.”차미주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구체적인 소재는 의사 직업에 관한 내용이야. 조 선생님을 보니 영감이 막 솟구치더라고.”한성우의 표정에 웃음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미묘한 얼굴로 대충 대답하곤 물었다.“아, 그래. 의학물은 전문성이 뛰어난 소재라 쓰기 어려울 거야. 문제도 많이 생길 거고. 최근 나온 의학 드라마도 망한 게 하나가 아니잖아.”차미주는 수심이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조 선생님께서 전문적인 부분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어. 뭐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논란을 일으키게 될 것 같은 부분이 있으면 조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거든.”“... 너 설마 조준을 실제 모델로 쓴 거 아니지?”“맞아. 조
차미주가 말했다.“성우 오빠, 화 좀 그만 풀어. 네가 나한테 여성스러움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난 화를 내지 않았잖아. 안 그래? 넌 그냥 생긴 게 카사노바처럼 생긴 거야. 하지만 잘 알고 지내보면 또 의리는 아주 넘치지. 어차피 내가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카사노바이든 아니든 난 상관 안 해. 친구로서는 넌 최고야.”한성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차미주의 ‘어차피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고 순간 마음이 답답해지기까지 했다.그는 얼굴에 힘을 주고 이를 갈며 말했다.“네가 나랑 사귀자고 해도 넌 내 취향 자체가 아니야!”차미주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그럼 당연하지. 우리 성우 오빠의 눈이 얼마나 높은데, 짜리몽땅한 내가 성에 차겠어?”자신을 비하하며 그를 위로해 주는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 내가 눈이 삐었던 거지. 취향도 아닌 짜리몽땅한 너를 온종일 생각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하필이면 이런 쪽엔 눈치라곤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남자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다니.'“됐어, 됐어. 화 좀 풀어. 내가 저작권료를 받으면 한턱 크게 살게. 저기 앞 사거리에 새로 생긴 그 레스토랑 메뉴 전부 시켜서 싹수없는 사장 놀라게 만들어 주자고!”한성우는 답답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그 레스토랑 사장이 너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냐?”“뭘 딱히 한 건 아니야. 그냥 매번 내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거든.”차미주는 말하면서 사장 흉내를 냈다.“눈을 희번덕 뜨면서 마치 ‘거지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셨고 순간 웃음이 터져버렸다.“그러니까 그 사장이 널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메뉴에 있는 음식을 전부 시키겠다는 거야? 그건 사장한테 더 좋은 일이
‘난 그냥 한 말이었다고.'‘이 자식은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근육이 선명한 등에 차미주의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한성우의 키는 비록 강한서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몸은 다소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엔 근육이 가득했고 한눈에 봐도 매일 같이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미주는 드라마 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런 건장한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특히 근 몇 년 동안 회사에선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많이 만들었고, 그녀가 맡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인기가 많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었다.그 젊은 배우들은 하나같이 피부도 뽀얗고 아주 귀여웠지만, 옷을 벗기만 하면 열에 여덟은 비실비실한 몸이 드러났고 온몸에 뼈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근육이 조금 있다 해도 전부 다이어트를 했고 제작진이 준비한 옷도 오버 사이즈여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몰래 입을 것처럼 아주 커 보였다.관건은 팬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아이돌의 몸매 비율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차미주는 그 몇 년 동안 자신의 안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전엔, 번마다 제작진들이 어느 남자 배우에게 상반신 노출신을 제안할 때마다 사람들은 바로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나같이 비실비실하니 별로 구경할 생각도 나지 않은 것이었다.한성우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의 몸은 온통 근육이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한성우의 몸엔 체지방이 엄청 적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몸 구석구석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한성우의 몸은 그야말로 의사들이 인체 표본으로 삼을 만한 완벽한 몸이었다.한성우의 몸이야말로 정상적인 남성 몸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할 몸매였다.“얼른 안 하고 뭐 해?”재촉하는 한성우의 목소리에 차미주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큼, 할 거야. 지금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한성우가 가져온 상자엔 부항 치료 도구가 가득했고 심지어 등에 바르는 오일도 있었다.한성우는 가끔 마사지샵으로 찾아가기 귀찮을 때마다 안마사를 집으로 불렀었다. 그랬기에 그의 집엔 뜬금없는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대충 핑계를 둘러대며 허세를 부리던 차미주는 지금, 이 순간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누가 보면 네가 마사지샵을 차린 줄 알겠어.”한성우는 그녀에게 도구를 던져주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네 실력을 보여줘.”말을 마친 한성우는 바로 소파 위에 엎드렸고 등을 전부 드러냈다.차미주는 손에 든 라이터를 힐끔 보더니 이내 다시 상자에 가득 담긴 부항 도구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예전에 부항 치료받으러 갔을 때의 전문가 손길을 떠올리며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일단 이걸 이렇게 쥐고, 다음은 이렇게 꽂아 넣고, 등에 올려놓는 거겠지?'‘뭐... 전문적인 기술은 없는 것 같은데?'“빨리해.”한성우가 재촉했다.“이따 게임도 해야 한단 말이야.”차미주는 집중을 하며 소독솜을 들고 그의 등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이내 부항을 들고 빠르게 그의 등에, 정중앙에 놓았다.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한성우에 차미주는 부항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천재가 아닌가 생각했고 대충 아무렇게 부항을 놓아도 완벽할 것이라 여겼다.한성우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그는 여유롭게 차미주의 치료를 받아들이고 있었다.TV엔 마침 이라는 드라마 예고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다음 주에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고 방영하기 2주 전부터 이미 실검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진 않았지만, 홍보는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로 많이 했던 것이었다.드라마를 찍을 때 원작자는 표절 의혹으로 실검에 오른 적이 있었다. 표절 논란이 되고 오히려 드라마에 역효과를 일으켜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그때 당시 드라마 원작자를 비난하는 네
차미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아아아아악, 너 엉덩이에 불붙었어!”한성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가 뜨겁다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돌리니 바지에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그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빠르게 불이 붙은 바지를 벗어 휙 던져버렸다.그제야 정신이 든 차미주는 얼른 발로 불이 붙은 바지를 마구 밟았다.불이 꺼지고 그녀는 다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한성우가 화상을 입진 않았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성우는 알몸으로 소파 옆에 서 있었고 그녀의 애착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차미주는 순간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 담요는 왜 두르는데!”한성우는 담요를 허리에 꽉 두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그럼 벗고 있을까?”담요 뒤로 가려진 그의 하반신을 떠올린 그녀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그러다 한참 후에야 이를 갈며 말했다.“아니, 왜 팬티는 안 입고 있었는데!”한성우가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이건 네가 집에서 브래지어를 안 입고 있는 거랑 같은 원리야. 안 입으면 아주 편하거든.”“...”차미주는 할 말을 잃었다.말을 마친 한성우가 결국 투덜거렸다.“너 부항 치료에 아주 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내 바지를 태워 먹을 수가 있어? 내가 반응이 빠르지 않았다면 이미 엉덩이가 타버렸을 거야.”차미주는 그에게 아주 미안했다. 그녀에게서는 평소의 기세등등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잔뜩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사실 할 줄 몰라. 네가 처음이야. 아까 한창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그만... 그렇게 된 거야.”한성우는 그녀를 흘겨보았다.“너 때문에 하마터면 나한테서 대가 끊길 뻔했어. 정말로 심하게 타버렸다면 너 어떻게 나한테 배상하려고 그래?”차미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네가 정말로 화상을 입고 네
차미주는 엘리베이터 입구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박스를 안아 들었다. 막 집으로 돌아오자 한성우가 절뚝거리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차미주가 얼른 물건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때, 아직도 아파?”한성우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안 좋아.”차미주의 얼굴이 한성우보다 더 어두워졌다.그녀는 사고를 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말없이 한성우를 끌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녀는 한성우를 병원에 데려가기에 급급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차미주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성우는 엉덩이가 다쳐 앉을 수 없었기에 뒷좌석에 옆으로 누워 차미주의 다리를 베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야에서 봤을 때, 차미주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평소 통통하던 턱은 긴장으로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성우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보조개를 쿡 찔렀다. 그는 피식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정말 병신이라도 돼서 나한테 시집오는 거로 사죄해야 할까 봐서 그래?”“너 말하지 마. 나 심장 떨려.”차미주는 지금 전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성우에게 화상으로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한성우는 정말 많이 아픈지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곧 병원에 도착했고 차미주는 한성우를 데리고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부항 치료를 하다가 화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둘러 바지를 벗게 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잠시 멈칫한 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 “너 먼저 나가 있어.”걱정되었던 차미주는 그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켰다. 커튼을 친 의사가 그에게 말했다. “누우세요, 확인할게요.”한성우는 움직이지 않고 의자를 끌어와 의사의 맞은켠에 앉았다. 의사: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