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가 말했다.“성우 오빠, 화 좀 그만 풀어. 네가 나한테 여성스러움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난 화를 내지 않았잖아. 안 그래? 넌 그냥 생긴 게 카사노바처럼 생긴 거야. 하지만 잘 알고 지내보면 또 의리는 아주 넘치지. 어차피 내가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카사노바이든 아니든 난 상관 안 해. 친구로서는 넌 최고야.”한성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차미주의 ‘어차피 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고 순간 마음이 답답해지기까지 했다.그는 얼굴에 힘을 주고 이를 갈며 말했다.“네가 나랑 사귀자고 해도 넌 내 취향 자체가 아니야!”차미주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그럼 당연하지. 우리 성우 오빠의 눈이 얼마나 높은데, 짜리몽땅한 내가 성에 차겠어?”자신을 비하하며 그를 위로해 주는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 내가 눈이 삐었던 거지. 취향도 아닌 짜리몽땅한 너를 온종일 생각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하필이면 이런 쪽엔 눈치라곤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남자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다니.'“됐어, 됐어. 화 좀 풀어. 내가 저작권료를 받으면 한턱 크게 살게. 저기 앞 사거리에 새로 생긴 그 레스토랑 메뉴 전부 시켜서 싹수없는 사장 놀라게 만들어 주자고!”한성우는 답답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그 레스토랑 사장이 너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냐?”“뭘 딱히 한 건 아니야. 그냥 매번 내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거든.”차미주는 말하면서 사장 흉내를 냈다.“눈을 희번덕 뜨면서 마치 ‘거지는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셨고 순간 웃음이 터져버렸다.“그러니까 그 사장이 널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메뉴에 있는 음식을 전부 시키겠다는 거야? 그건 사장한테 더 좋은 일이
‘난 그냥 한 말이었다고.'‘이 자식은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근육이 선명한 등에 차미주의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한성우의 키는 비록 강한서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몸은 다소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엔 근육이 가득했고 한눈에 봐도 매일 같이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미주는 드라마 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런 건장한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특히 근 몇 년 동안 회사에선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많이 만들었고, 그녀가 맡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인기가 많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었다.그 젊은 배우들은 하나같이 피부도 뽀얗고 아주 귀여웠지만, 옷을 벗기만 하면 열에 여덟은 비실비실한 몸이 드러났고 온몸에 뼈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근육이 조금 있다 해도 전부 다이어트를 했고 제작진이 준비한 옷도 오버 사이즈여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몰래 입을 것처럼 아주 커 보였다.관건은 팬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아이돌의 몸매 비율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차미주는 그 몇 년 동안 자신의 안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전엔, 번마다 제작진들이 어느 남자 배우에게 상반신 노출신을 제안할 때마다 사람들은 바로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나같이 비실비실하니 별로 구경할 생각도 나지 않은 것이었다.한성우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의 몸은 온통 근육이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한성우의 몸엔 체지방이 엄청 적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몸 구석구석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다. 한성우의 몸은 그야말로 의사들이 인체 표본으로 삼을 만한 완벽한 몸이었다.한성우의 몸이야말로 정상적인 남성 몸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할 몸매였다.“얼른 안 하고 뭐 해?”재촉하는 한성우의 목소리에 차미주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큼, 할 거야. 지금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한성우가 가져온 상자엔 부항 치료 도구가 가득했고 심지어 등에 바르는 오일도 있었다.한성우는 가끔 마사지샵으로 찾아가기 귀찮을 때마다 안마사를 집으로 불렀었다. 그랬기에 그의 집엔 뜬금없는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대충 핑계를 둘러대며 허세를 부리던 차미주는 지금, 이 순간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누가 보면 네가 마사지샵을 차린 줄 알겠어.”한성우는 그녀에게 도구를 던져주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네 실력을 보여줘.”말을 마친 한성우는 바로 소파 위에 엎드렸고 등을 전부 드러냈다.차미주는 손에 든 라이터를 힐끔 보더니 이내 다시 상자에 가득 담긴 부항 도구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예전에 부항 치료받으러 갔을 때의 전문가 손길을 떠올리며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일단 이걸 이렇게 쥐고, 다음은 이렇게 꽂아 넣고, 등에 올려놓는 거겠지?'‘뭐... 전문적인 기술은 없는 것 같은데?'“빨리해.”한성우가 재촉했다.“이따 게임도 해야 한단 말이야.”차미주는 집중을 하며 소독솜을 들고 그의 등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이내 부항을 들고 빠르게 그의 등에, 정중앙에 놓았다.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한성우에 차미주는 부항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천재가 아닌가 생각했고 대충 아무렇게 부항을 놓아도 완벽할 것이라 여겼다.한성우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그는 여유롭게 차미주의 치료를 받아들이고 있었다.TV엔 마침 이라는 드라마 예고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다음 주에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고 방영하기 2주 전부터 이미 실검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진 않았지만, 홍보는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로 많이 했던 것이었다.드라마를 찍을 때 원작자는 표절 의혹으로 실검에 오른 적이 있었다. 표절 논란이 되고 오히려 드라마에 역효과를 일으켜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그때 당시 드라마 원작자를 비난하는 네
차미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아아아아악, 너 엉덩이에 불붙었어!”한성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가 뜨겁다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돌리니 바지에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그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빠르게 불이 붙은 바지를 벗어 휙 던져버렸다.그제야 정신이 든 차미주는 얼른 발로 불이 붙은 바지를 마구 밟았다.불이 꺼지고 그녀는 다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한성우가 화상을 입진 않았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성우는 알몸으로 소파 옆에 서 있었고 그녀의 애착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차미주는 순간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 담요는 왜 두르는데!”한성우는 담요를 허리에 꽉 두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그럼 벗고 있을까?”담요 뒤로 가려진 그의 하반신을 떠올린 그녀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그러다 한참 후에야 이를 갈며 말했다.“아니, 왜 팬티는 안 입고 있었는데!”한성우가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이건 네가 집에서 브래지어를 안 입고 있는 거랑 같은 원리야. 안 입으면 아주 편하거든.”“...”차미주는 할 말을 잃었다.말을 마친 한성우가 결국 투덜거렸다.“너 부항 치료에 아주 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내 바지를 태워 먹을 수가 있어? 내가 반응이 빠르지 않았다면 이미 엉덩이가 타버렸을 거야.”차미주는 그에게 아주 미안했다. 그녀에게서는 평소의 기세등등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잔뜩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사실 할 줄 몰라. 네가 처음이야. 아까 한창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그만... 그렇게 된 거야.”한성우는 그녀를 흘겨보았다.“너 때문에 하마터면 나한테서 대가 끊길 뻔했어. 정말로 심하게 타버렸다면 너 어떻게 나한테 배상하려고 그래?”차미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네가 정말로 화상을 입고 네
차미주는 엘리베이터 입구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박스를 안아 들었다. 막 집으로 돌아오자 한성우가 절뚝거리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차미주가 얼른 물건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때, 아직도 아파?”한성우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안 좋아.”차미주의 얼굴이 한성우보다 더 어두워졌다.그녀는 사고를 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말없이 한성우를 끌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녀는 한성우를 병원에 데려가기에 급급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차미주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성우는 엉덩이가 다쳐 앉을 수 없었기에 뒷좌석에 옆으로 누워 차미주의 다리를 베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야에서 봤을 때, 차미주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평소 통통하던 턱은 긴장으로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성우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보조개를 쿡 찔렀다. 그는 피식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정말 병신이라도 돼서 나한테 시집오는 거로 사죄해야 할까 봐서 그래?”“너 말하지 마. 나 심장 떨려.”차미주는 지금 전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성우에게 화상으로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한성우는 정말 많이 아픈지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곧 병원에 도착했고 차미주는 한성우를 데리고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부항 치료를 하다가 화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둘러 바지를 벗게 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잠시 멈칫한 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 “너 먼저 나가 있어.”걱정되었던 차미주는 그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켰다. 커튼을 친 의사가 그에게 말했다. “누우세요, 확인할게요.”한성우는 움직이지 않고 의자를 끌어와 의사의 맞은켠에 앉았다. 의사:
의사는 차미주의 눈을 피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문제가 조금 심각해요. 엉덩이 피부뿐만 아니라 서혜부, 회음부, 생식기 근처에도 화상을 입은 흔적이 있었어요.”의사의 말에 차미주는 순간 멍해졌다. “선생님, 확실한 건가요? 집에 있을 땐, 걸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심할 수 있어요?”의사는 그녀를 쓱 훑어보았다. “제 소견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건가요?”차미주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단지...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집에서는 분명 멀쩡했어요. 아프다는 말도 안 했고 걷기도 했는데, 왜 병원에 도착하니까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예요?”의사가 대답했다. “화상이 심할 경우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둔해질 수 있는데, 이건 정상이에요.”차미주가 이 말의 논리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의사가 말을 이었다.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남성의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 안 그래도 부항 치료는 비전문적인 사람이 진행하면 위험한데, 진료소도 아니고 집에서 하셨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네요.”앞부분의 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차미주가 뒤의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말을 들은 차미주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눈도 덩달아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풀쩍거렸고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해요, 입원해야 하는 건가요? 수술은 안 해도 돼요? 제가 얼마를 준비하면 되죠?”“화상 부위가 혈관과 신경이 많은 곳이라, 약물 치료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수술은 위험부담이 적지 않으니까요. 아직 저렇게 젊은데, 만약 약물 치료로 호전이 없으면 그때 다시 수술을 고민해 보죠.”말을 마친 의사는 괜히 마음에 찔려 눈길을 피했다. 의사의 말은 허점투성이였지만 마침 마음이 복잡했던 차미주는 그의 말을 자세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성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녀는 만약 집에서 마련한 혼사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집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6살 생일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들떠 있었다. 이틀 전엔 엄마가 미신을 믿는다며, 역시 미신은 믿을 게 못 된다며 문자를 보내 디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은, 마침 25살의 마지막 순간에 걸려들었다. 감방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차미주는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웠고 점점 더 괴로웠다. 이건 차라리 자신이 화상을 입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병실로 들어온 차미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너무 오랫동안 엎드려 누워있었던 한성우는 뻐근한 기분에 막 자세를 살짝 바꿔보려던 순간 차미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병원비는 내가 책임질게. 그리고 네가 치료하는 동안 식비, 영양비, 피해...”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피해보상은 내가 지금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차용증 써도 돼?”그녀를 쳐다보던 한성우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의사가 방금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에 차미주는 당황했다. “너한테 얘기 안 했어?”한성우가 말했다. “아까 약 바를 때 너무 아파서 제대로 못 들었어.”차미주: ...‘그걸 내가 어떻게 말해? 화상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앞으로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해?’그녀가 계속 입을 열지 않자 한성우가 떠보듯 물었다. “심각한 거야?”차미주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말해. 마음의 준비 다 했어.”그의 말에 차미주는 더 미안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네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네가 성적 불능이 되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할 말을 정리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의사가, 네가 거기를 다쳐서, 완전히 회복되기 전엔 남성적 기능에 영향이 있을 수 있대.”그녀의 말에
그녀의 말에 한성우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나 그는 못 알아들은 척 물었다. “네가 뭘 해?”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차미주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네 여자친구 행세를 하면 안 돼?”한성우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네가? 그건 좀 아니지 않냐?”차미주는 한성우가 자신을 마땅치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 “너 그게 무슨 표정이야? 그래, 내가 네 전 여친처럼 쭉쭉빵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그저 임시방편이잖아. 지금 나 말고 네가 어디 가서 나만큼... 만큼 네 비밀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한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 네가 싫다고 했어. 난 그냥 내가 네 발목을 잡을 것 같아서 그래.”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을 내리깔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조준 씨랑 잘 되고 싶잖아. 요즘 진전이 좀 있는 것 같던데, 네가 내 여자친구가 되면, 너희 관계는 끝나 버리게 되잖아. 그러면 나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조준 말이 나오자 차미주의 표정에는 주저함이 묻어났다. 한성우는 그저 가만히 차미주의 표정을 살폈다. 차미주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한성우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만두자, 너도 난처할 텐데. 아무래도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이것도 내 운명이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너한테 부항 치료를 해달라고 해서는...”흔들리고 있던 차미주의 마음이 한성우가 뒤에 한 말 때문에 죄책감으로 흘러넘쳤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죄책감과 양심을 콕콕 찔렀다. 만약 한성우가 정말 낫지 않는다면, 그녀에겐 사랑을 쫓을 자격 따위는 없을 것이다. 죄책감이 그녀를 집어삼킬 테니까. 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차미주가 조준에게 너무나도 티 나게 대시를 했지만, 조준은 한번도 그녀의 마음에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를 거절한 적도 없었다. 아마 조준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처를 주기 싫어서 직접적으로 거절하지 못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