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한성우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나 그는 못 알아들은 척 물었다. “네가 뭘 해?”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차미주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네 여자친구 행세를 하면 안 돼?”한성우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네가? 그건 좀 아니지 않냐?”차미주는 한성우가 자신을 마땅치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 “너 그게 무슨 표정이야? 그래, 내가 네 전 여친처럼 쭉쭉빵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그저 임시방편이잖아. 지금 나 말고 네가 어디 가서 나만큼... 만큼 네 비밀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한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 네가 싫다고 했어. 난 그냥 내가 네 발목을 잡을 것 같아서 그래.”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을 내리깔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조준 씨랑 잘 되고 싶잖아. 요즘 진전이 좀 있는 것 같던데, 네가 내 여자친구가 되면, 너희 관계는 끝나 버리게 되잖아. 그러면 나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조준 말이 나오자 차미주의 표정에는 주저함이 묻어났다. 한성우는 그저 가만히 차미주의 표정을 살폈다. 차미주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한성우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만두자, 너도 난처할 텐데. 아무래도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이것도 내 운명이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너한테 부항 치료를 해달라고 해서는...”흔들리고 있던 차미주의 마음이 한성우가 뒤에 한 말 때문에 죄책감으로 흘러넘쳤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죄책감과 양심을 콕콕 찔렀다. 만약 한성우가 정말 낫지 않는다면, 그녀에겐 사랑을 쫓을 자격 따위는 없을 것이다. 죄책감이 그녀를 집어삼킬 테니까. 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차미주가 조준에게 너무나도 티 나게 대시를 했지만, 조준은 한번도 그녀의 마음에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를 거절한 적도 없었다. 아마 조준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처를 주기 싫어서 직접적으로 거절하지 못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차미주: ??!!“이... 이렇게 빨리?”차미주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머뭇거리며 말했다. “의사가 먼저 약물치료를 하자고 했잖아. 먼저 약물 치료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지금 먼저 이 얘기를 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 것 같아. 만약 치료가 되면?”한성우는 꽤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치료할 수 있는 거면, 의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내 여자친구 역할 한다고 한 거 후회해?”“아니...”차미주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변명하는 것 같았고,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네가 올려.”한서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성우는 피드를 편집하고는 잔뜩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미주를 힐끔 보더니 헛기침하며 말했다. “손 줘 봐.”“왜?”차미주는 한성우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성우는 자신의 큰손으로 차미주의 손을 잡은 뒤, 자신의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끼워 깍지를 꼈다. 차미주가 멍해 있는 사이, 한성우는 이미 휴대폰으로 손깍지 낀 사진을 찍었다. 그러더니 한성우는 그녀의 손을 놓고 다시 피드에 올릴 글을 편집하고는 업로드했다. 막 샤워를 마친 유현진은 침대에 누워 팩을 하며 휴대폰을 옆에 두고 한 인터넷 사이트의 가쉽존에서 최근 올라온 연기에 관련된 예능에 나온 게스트와 심사위원들의 찌라시를 듣고 있었다. 이런 가쉽들을 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입이 험했고, 그들은 이런 예능의 내막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이돌이 이런 서바이벌에 참여하는 것은 도전을 해보기 위한 것이고, 스타의 2세가 참가하는 목적은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였다. 심사위원이 칭찬했던 사람들은 선택되지 못했고, 심사위원들이 혹평을 날렸던 사람들은 결국 제일 좋은 성적으로 다음 라운드로 진입했다. 더 이상 우려먹을 것이 없어지면 연애 예능으로 커플 케미를 만들었다. 유현진은 예능은 한 회도 보지 않으면서 이런
유현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한성우 취한 거 아냐?’그녀는 얼른 다시 새로고침을 눌렀다. 그러나 그 피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아래에는 심지어 댓글이 잔뜩 달려있었다. 신우: 축하해. 이번엔 2개월 기록을 깰 수 있는 거야?주강운: 조금 의외네. 현진 씨가 두 사람 이어준 거야? 차미주 씨 좋은 분이야. 조준: 두 사람 친척 아니었어요?...유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얘기하지 않다니, 그녀는 절친이 되어서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차미주 얘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조준 씨한테 대시 중인 거 아니었어? 왜 한성우랑 사귀고 있는 거야?’그녀는 팩을 떼어내고 차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색하게 침대 옆에 앉아있던 차미주는 휴대폰이 울리고 유현진의 번호가 액정에 뜨자 괜히 마음이 켕기는 기분이었다.끊어버릴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개자식이 올린 인스타그램을 보고 그녀에게 전화해 물어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차미주는 이미 머리가 복잡하고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현진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성우는 움직이지 않는 차미주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받아줘?”차미주가 얼른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둘러서 잘 얘기해.”한성우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유현진의 목소리가 바로 전화너머로 들려왔다. “차미주! 너 나한테 설명해. 한성우 씨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거 무슨 말이야? 너희 둘 설마 무슨 게임을 하다 걸려서 올린 건 아니지?”그녀는 전에 분명 차미주를 떠본 적이 있었다. 그때 차미주는 분명 한성우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사귀기로 했다니 이상했다. “형수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시네요.”휴대폰 저편에서 들려온 것은 한성우의 목소리였다. “저희 정말 사귀고 있어요.”유현진: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나긋해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전에 미주한테 아무 얘기도
그러더니 한성우는 차미주의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에 차미주가 당황했다. “휴대폰은 왜 꺼?”한성우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아니면 내 거기가 너 때문에 다쳐서 아마 평생 여자를 만질 수 없을지도 몰라서 네가 내 체면을 위해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거라고 얘기할래?”차미주: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한다고 안 했잖아. 현진이도 나 걱정돼서 그러지, 너한테 속을까 봐.”한성우는 실소가 터뜨렸다. “내가 널 뭘 속였는데?”차미주는 입을 뻐금거리더니 결국 닫아버렸다. 한성우가 칼을 그녀의 목에 대고 협박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여자친구 역할을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됐어. 그만 생각할래. 지금 중요한 건 한성우를 잘 간호하는 거야. 다 나으면 나도 더 이상 연기할 필요 없잖아?’그렇게 생각한 차미주는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가서 입원 수속하고 올게.”한성우가 말했다. “입원 안 해. 집에 가서 치료할 거야.”‘장난해? 여긴 응급실이라 의사가 거짓말을 해줄 수 있지만 입원하면 회진을 돌기 때문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바로 들통날 거야!’차미주는 의아해했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입원을 안 해?”“내가 입원하면 그 자식들 분명 병문안 올 거야. 와서는 어디가 다쳤는지 물어볼 텐데, 난 침대에 엎드려서 걔들 놀림거림가 되고 싶지 않아.”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네 집에서 누가 약 발라줘?”한성우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의사를 집으로 부르면 돼.”그의 말에 차미주가 입을 닫았다. ‘역시 돈이 최고야, 의사도 부를 수 있고.’차미주가 멍때리고 있을 때, 한성우가 그녀의 손가락을 건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도둑아, 나 배고파.”정신을 차린 차미주가 말했다. “뭐 먹고 싶어? 내려가서 사줄게.”“네가 외식하고 싶어?”그가 까탈스럽게 굴며 말했
차미주: ...‘내가 해준다고 했어?’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성기능 손상은 남자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것이다. 특히 한성우 같은 바람둥이는 더욱. 하지만 어쩐지 그는 그 사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 같을까?“너—”“나 먼저 엎드려 있을게. 너무 아파.”그는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의심을 품었던 차미주는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어쩌면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한편,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긴 유현진은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들고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 회의하고 있던 강한서는 유현진에게서 전화가 오자 멈칫거리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방금 말한 몇 가지 문제는 조금 더 토론해 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그러더니 그는 휴대폰을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팀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모두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경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민 실장님, 오늘 저희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건가요?”최근들어 이렇게 특별한 벨소리가 울릴 때면, 강한서는 유달리 관대해졌다. 퇴근을 일찍 시키는 것은 물론 가끔 팀원들에게 휴가도 주었다. 중요한 건 보너스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번 한 달은 그야말로 바캉스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들과 같은 연구개발팀은 업계에서도 야근하지 않는 회사는 없을 정도였다. 왜냐면 실험 데이터는 일관되고 정확해야 하므로 데이터가 나왔다고 해서 모두 퇴근해버리면 실험 데이터를 누가 기록하겠는가? 또 실험실에 사람이 없는 동안, 누군가 데이터를 수정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연구개발의 중요한 시즌일수록 야근은 더욱 심해졌고 실험실도 24시간 내내 교대 근무를 해야 했다. 한밤중이라도 데이터가 나오면 한데 모여 대책 회의를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비교되기 때문에 야근이 없는 생활은 천국과도 같았다. 특히 매번 강한서가 “자비를 베푸”
“대표님 현 여자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전 사모님 너무 예쁘셨잖아요. 대표님은 그런 분과도 이혼하셨는데, 이번 여자친구는 얼마나 더 예쁘겠어요.”민경하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그는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에이, 전 사실 대표님 전 아내분이 좋았어요. 두어 번밖에 못 뵀지만, 말씀을 너무 사람 기분 좋게 하시더라고요. 편하게 대해 주시기도 하고요. 길을 물으시고는 저한테 오렌지도 주셨는걸요. 웃을 때면... 세상에, 여자인 제가 봐도 얼굴이 빨개지던데요.”“듣기론 대표님과 이혼하시고 배우로 전향했다고 하더라고요. 최근엔 촬영하신 드라마가 방영된다고 하던데, 기대돼요. 그 얼굴로 연예계 쪽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아까운 일이에요.”“대표님과 이혼한 뒤 혼외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같던데, 아무튼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더라고요. 하지만 한 번도 대표님이 사모님 나쁜 얘기를 하시는 건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대표님은 전남편으로서 그래도 꽤 괜찮은 것 같아요.”“얼마 전에 영화 촬영을 시작한 것 같던데, 어쩐 부자가 9999송이 파스텔 장미로 망고 모형을 만들어 축하 인사 겸 보냈다고 해요. 그때 실검에도 올랐었는데. 이혼하셔도 쫓아다니는 사람이 줄지 않네요. 이혼 후에도 각자 잘 지내시니까,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얘기를 듣고 있는 민경하는 웃음이 났다. 만약 팀원들이 그 9999송이의 파스텔 장미가 바로 강한서가 보낸 것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한편, 강한서는 사무실을 벗어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유현진이 다짜고짜 말했다. “강한서, 너 한성우 잘 지켜보라고 했더니, 대체 뭐 한 거야?”어리둥절한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유현진이 이를 악물었다. “한성우가 내 절친을 꼬드겨 갔다고!”“차미주?”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강한서가 물었다. “걔들이 왜?”“너 한성우 인스타그램 못 봤어? 미주랑 사귄다고 피드에 올렸잖아!”잠시 멍해졌던 강한서가 얼른 한
유현진은 “억지 부리지 마.”라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그녀는 바로 표정을 굳히더니 말했다. “맞아, 내가 억지 부리는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났어? 아니잖아. 난 끝까지 억지 부릴테니까 잘 들어, 강한서. 한성우가 미주랑 헤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헤어지는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강한서가 대답도 하기 전에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한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바로 다시 전화하려던 그는 유현진이 마지막에 던진 한마디를 떠올렸다. 그 말이 너무 상처가 되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유현진은 너무 쉽게 꺼냈다. 마치 이 연애가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휴대폰을 움켜쥐던 강한서는 끝내 다시 전화하지 않고 어두워진 얼굴로 회의실로 돌아왔다. 팀원들이 아직 강한서와 그의 아름답던 전 부인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강한서라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강한서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막 서류를 집어 드는데, 한 남자 직원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강한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펼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남자 직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는 별일이 없지만, 대표님께서 일이 있으신 게 아닌가 해서요. 데이트가 있으면 저희도 덕을 좀 보고요.”강한서가 멈칫 행동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덕?”그 눈빛에 민경하의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박진수는 강한서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강한서도 그렇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동공의 움직임만이 그의 불쾌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일찍 퇴근하는 거 말이에요. 당연히 대표님 덕이죠.”민경하는 조금 처진 강한서의 눈을 보며 점점 더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민경하는 얼른 박진수를 제지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데이터나 프로젝터에 연결해서 계속 분석하죠. 일찍 끝
말을 마친 강한서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펜을 놓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계속하죠. 데이터는요?”박진수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갈 수도,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민경하가 헛기침하더니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얼른 분석 결과를 프로젝터에 연결해요! 정말 내일 회사 옮기고 싶어요?”직원은 그제야 허둥지둥 자신의 컴퓨터를 프로젝터에 연결하고 말을 더듬으며 데이터를 분석했다. 강한서는 비록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다들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강한서의 감정 기복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유현진은 전화를 끊고 후회 중이었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버릇처럼 헤어짐을 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자신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녀도 한성우가 헤어지고 말고는 강한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이지 억지를 부리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 그녀가 먼저 사과를 하자니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적어도 강한서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와야 했다. 그녀는 강한서가 전화하기를 기다렸지만, 1시간이 지나도 전화는커녕 문자도 없었다! 뒤척이던 유현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개자식! 나쁜 자식! 달래주면 뭐 죽냐?’‘전화가 오든 말든, 기대하지 않아!’그러곤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아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이불을 끌어와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강한서의 회의는 2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들 자리를 비우자 강한서는 슈트 단추를 풀고 안경을 벗더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눈을 반쯤 감고 긴장을 풀었다. 민경하가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사모님이랑 싸우셨어요?”강한서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민 실장도 미리 쉬고 싶어요?”민경하가 작게 웃어버렸다. “통화로도 싸우는 게 가능해요?”안 그래도 답답하던 강한서는 민경하의 말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현진이가 싸움을 걸었어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