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강한서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펜을 놓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계속하죠. 데이터는요?”박진수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갈 수도,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민경하가 헛기침하더니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얼른 분석 결과를 프로젝터에 연결해요! 정말 내일 회사 옮기고 싶어요?”직원은 그제야 허둥지둥 자신의 컴퓨터를 프로젝터에 연결하고 말을 더듬으며 데이터를 분석했다. 강한서는 비록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다들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강한서의 감정 기복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유현진은 전화를 끊고 후회 중이었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버릇처럼 헤어짐을 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자신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녀도 한성우가 헤어지고 말고는 강한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이지 억지를 부리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 그녀가 먼저 사과를 하자니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적어도 강한서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와야 했다. 그녀는 강한서가 전화하기를 기다렸지만, 1시간이 지나도 전화는커녕 문자도 없었다! 뒤척이던 유현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개자식! 나쁜 자식! 달래주면 뭐 죽냐?’‘전화가 오든 말든, 기대하지 않아!’그러곤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아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이불을 끌어와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강한서의 회의는 2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들 자리를 비우자 강한서는 슈트 단추를 풀고 안경을 벗더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눈을 반쯤 감고 긴장을 풀었다. 민경하가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사모님이랑 싸우셨어요?”강한서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민 실장도 미리 쉬고 싶어요?”민경하가 작게 웃어버렸다. “통화로도 싸우는 게 가능해요?”안 그래도 답답하던 강한서는 민경하의 말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현진이가 싸움을 걸었어
당황한 강한서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끊겨버렸다. 유현진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민경하를 쳐다보며 눈빛을 보냈다. ‘왜 민 실장이 얘기한 거랑 다르죠?’민경하가 헛기침을 했다. “방금 싸우셨을 때 바로 하셨어야 해요. 이미 두, 세 시간이나 지났으니 처음엔 조금 기분 나쁜 정도였겠지만 이젠 정말 화가 나셨겠죠. 그러니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당연해요. 여자친구한테 사과할 땐, 절대 질질 끌면 안 돼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여자들은 기다리고 싶지 않아 하거든요.”강한서: ...“그럼 어떡해요?”“내일 아침 데리러 가셔서, 만나서 얘기하세요.”강한서는 생각하더니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늦은 상태였고 전화로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면 또 화를 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현진에게 10억을 보내면서 메시지를 작성했다. 「잘 자.」아직 강한서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유현진은 그의 계좌이체 내역을 보더니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100원을 송금하며 답장했다. 「잠이 안 와.」강한서는 또 얼른 10억을 보냈다. 「지금은?」유현진은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답장했다. 「조금 졸려.」강한서가 또 20억을 송금했다. 「이러면?」유현진이 답장했다. 「잠들었어. 건드리지 마.」강한서가 작게 웃었다. 민경하가 그에게 다가왔다. “사모님 답장하셨어요?”강한서는 휴대폰을 넣더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민 실장 추측도 정확한 건 아니네요.”민경하: ???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민 실장이 말한 것보다 달래기 쉬워요.”민경하: ...“아, 맞다. 송민준 요즘 동향 살피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정신을 차린 민경하가 말했다. “송 대표님 요즘 특별한 움직임은 없으세요. 일 하지 않으면 그냥 노세요. 확실히 요즘 사모님한테 많이 가시긴 하지만 오랫동안 계시지는 않고, 매번 물건을 주러 가세요.”“물건? 뭘 주는데요?”강한서가 잔뜩 경계했다. “보석?”“그건 아니고요, 전부 음
강한서는 움찔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그는 그 사진을 들고 한참이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아이는 네, 다섯 살쯤 되어 보였고, 작은 치마를 입고는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머리는 길었지만 모자에 달린 가발 같았다. 아이는 손에 핑크팬서를 안고 수영장 끝에 서 있었다. 수영장의 타일은 고대 격자 모양이었고 수영장에는 물을 뿜는 오리가 있었다. 멍해있던 강한서는 갑자기 이곳이 공원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곳은 예전 송씨 가문의 본가였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송민준은 오리가 움직인다며 그를 속여 그에게 앉으라고 했다. 송민준의 말을 믿었던 그는 결국 앉자마자 바지가 다 젖도록 물을 맞아야 했다. ‘그 자식, 어렸을 때부터 은근히 나쁜 구석이 있었어.’사진 속의 “여자아이”는 유현진이 결혼하며 집으로 가져왔던 어린 시절의 사진과 거의 90% 비슷했다. 다만 그 찌푸린 미간에서 조금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왜냐면, 유현진은 사진 찍을 때 한 번도 미간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든, 커서든 사진만 찍으면 콧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더라도 꼭 포즈를 취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이건 유현진일 리가 없었다. 강한서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송민준의 이상했던 행동들을 반복해 떠올렸다. 그리고 송병천이 유현진을 향한 과분한 관심도 말이다. 그 하나하나를 손에 있는 산부인과 의료진의 정보와 연결하니, 하나의 추측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떠올랐다. 그는 번쩍 눈을 뜨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민준이 친어머니가 언제 난산으로 돌아가셨지?”민경하는 서류를 뒤로 넘기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97년 12월 20일이요.”말하던 민경하도 놀라더니 한참 후에야 말했다. “사모님 생일이랑 같네요?”유현진과 송민준은 어린 시절 사진이 닮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송씨 가문의 세상을 뜬 막내딸의 생일과도 똑같았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송씨 가문의 동
게다가... 그녀는 송씨 가문에 요절한 막내딸이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 송씨 가문과 사이가 좋았던 몇몇 가문들뿐이었다. 민경하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실 이것도 좋은 일이에요. 송 대표님이 대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어요?”말하던 민경하가 멈칫하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송 대표님이 혹시 대표님이 전에 소개팅을 주선해 주신 것을 마음에 품고 계신건 아니겠죠? 그리고 루나로 사적인 복수를 하려고 송 대표님을 괴롭혔던 것도요.”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민경하는 남몰래 “쯧”하며 혀를 찼다. 삼각관계의 문제는 인제 걱정이 없었지만, 처남사이가 되기엔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운이 나쁜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만 이렇게까지 나쁜 건 또 처음이었다. 이미 다 손에 넣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제야 첫 난관을 해결했을 뿐이었고, 아직 보스는 뒤에 있었다. 강한서는 처남에게 미움을 샀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장인어른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었다.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을, 종아리 스트레칭 기구로 괴롭혔으니 말이다. 송씨 가문의 “여존남비”의 가족 특성상 유현진의 신분을 알았을 때부터 그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주제도 모르고” 유현진과 이혼하면서 홀몸으로 그녀를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강한서가 눈을 감았다. 기쁜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이었다. 유현진에게 자신 말고도 다른 가족이 생겨서 기뻤고, 어쩌면 이 결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민경하는 “동정”하는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하며 “위로”했다. “괜찮아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되죠. 아직 기회는 있어요. 이번에 새로 명문가의 규수들 자료를 정리했는데, 꽤 괜찮아요. 만약 송 대표님께서 마음에 드시는 분이 있으면, 아마 마음을 푸실지도 몰라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꺼져요.”민경
차미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알지. 전 여친들 내가 일하면서 다 만나봤던 사람들이었어. 알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한성우랑 헤어졌는지도 알지.’그녀와 같은 대중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업계의 이런 얘기였으니 당연했다. 차미주는 목을 가다듬더니 콩깍지가 씐 것처럼 말했다. “비록 연애 경험은 많지만, 한 번도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어. 남자잖아, 특히 걔처럼 성공한 사람을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거니까.”유현진: ...‘얘가 내가 알던 순애보 맞아? 생각이 언제 이렇게 개방적으로 변했지?’유현진이 물었다. “너 전혀 신경 안 쓰여?”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차미주는 어쩐지 그 말이 목에 턱 걸려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성우의 전 여자 친구들을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상대방의 과거에 얽매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없었던 시간에, 내가 무슨 권리로 순정을 지키라고 하겠어. 한 사람을 좋아하면, 현재와 미래를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냐?”차미주의 말에 멍해진 유현진은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한서의 말이 맞았다. 감정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좋은지 아닌지, 기쁜지 슬픈지는 당사자만 아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미주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은 원래 온갖 단계를 거쳐야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었다. 차미주가 만약 다른 사람과 연애한다고 해서 꼭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만약 어떻게든 상처받게 되는 거라면 한성우를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보험일 수도 있었다. 만약 한성우가 차미주에게 상처를 준다면 적어도 그녀가 강한서에게 한성우를 정리해 버리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유현진이 한숨을 내쉬더니 물
“...”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라리 치질 치료하러 갔다고 하는 게 더 낫겠네.'“너 뭐 말실수하거나 그러진 않았지?”차미주는 코웃음을 쳤다.“네가 나한테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내가 정말로 말했겠어? 멍청이도 아니고.”한성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유현진 씨가 뭘 말했었는데?”그는 유현진이 아주 교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차미주의 입을 열게 만들어 모든 사실을 알아내 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심지어 차미주는 자신이 말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별말은 안 했어. 그냥 축하한대. 그리고 네가 날 괴롭힐 것 같으면 강한서를 시켜서 널 처리할 거래!”“...”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유현진이 할 것 같은 말이기도 했으니까.차미주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우리는 정말로 사귀는 건 아니잖아. 넌 지금은 그냥 날 믿고 기대고 있는 처지인데, 네가 감히 날 괴롭힌다고?”한성우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나도 두려워서 정말로 사귀지는 못하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갑자기 한성우가 한 말이 느끼하게 느껴졌다.“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어? 우리 사이를 반대한다던가 그런?”정신이 든 차미주가 말했다.“그리고 너 같은 어장남과 절대 잠을 자지 말라고 하던데? 넌 전과가 많잖아. 그래서 네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까 봐 자지 말라고 하더라고.”한성우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현진 씨는 지금 내가 전에 적대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복수를 하고 있는 거야.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현진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전과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아직 정식으로 사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유현진을 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유현진은 조준보다 더 차미주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유현진이 무엇이라고 하면 차미주는 바로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었다.한성우는 자신과 유
유현진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강한서가 바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여하간에 이 일은 전부 강한서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아마 누구라도 그녀의 무리한 요구를 들으면 반박할 것이었다.특히 강한서처럼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설마 나를 위해 자신의 원칙도 깨버린 거야?'유현진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그녀는 헛기침하면서 말했다.“전부 네 탓은 아니야. 내 탓도 있었어. 다른 사람 사이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아니지. 확실히 내가 했던 요구들이 너무하기도 했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잘못을 반성하게 되었고 감정도 더 깊어지게 되었다. 모두가 즐거운... 그런 유현진이 원하던 결말이었다.그녀의 말에 강한서가 말했다.“나도 널 이해해. 넌 그때 급해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말을 내뱉은 거겠지. 이런 일엔 항상 감정이 먼저 앞서니까. 그래도 이런 습관은 좋지 않아, 고쳐야 해.”“...”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사과하던 게 아니었어? 지금 내 문제를 지적해 내는 거야?'강한서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무슨 일만 있으면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그거 엄청 상처야.”확실히 그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쳐야겠다며 인정했다.하지만 사과하러 온 강한서가 그녀의 문제만 따지고 드니 유현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그래서 내가 또 뭘 고쳐 줬으면 하는데?”강한서가 멈칫했다.“다른 문제는 내가 참을 수 있으니까 안 고쳐도 돼.”유현진은 속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그녀는 떠보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강한서가 정말로 그녀를 문제투성이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과 ‘쿨한' 표정을 지으며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괜찮아. 감정은 서로 알아가고 고쳐가고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말해 봐. 정말로 내 문제라고 생각되면 나도 허심하게 고칠 테니까.”강한서는 유현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한서는 그녀도 안 먹었다는 말에 바로 수긍하였다.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뭘 먹고 싶어?”유현진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네가 봐서 아무거나 시켜줘. 네가 시킨 거라면 난 다 좋아.”강한서는 그녀의 다정한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고 얼른 그녀를 꼬옥 끌어안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그럼 나 기다려. 바로 올 테니까.”“응응.”미소를 지으며 강한서를 문 앞까지 배웅하자마자 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경비실에 연락했다.연락을 받은 경비원은 나이가 아주 젊었고 유현진의 팬이기도 했다.“여보세요, 경비실이죠?”오민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유현진 씨.”유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 저 그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아침을 먹고 있던 오민수가 급히 말했다.“네네, 뭐든지 말씀하세요.”“최근에 사생팬이 저의 집까지 따라오게 되었더라고요. 아침마다 자꾸 꽃이나 음식을 문 앞에 가져다 놓더라고요. 아시잖아요. 우리 집에는 여자 둘이 산다는 것을.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좀 어떻게 조치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오민수가 바로 화를 내면서 말했다.“사생팬은 팬도 아닙니다. 그런 스토커잖아요. 제가 대신 신고해 드릴까요?”유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급히 대답했다.“신고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저에게 어떤 피해를 준 건 아니라서요. 게다가 경찰이 오고 그 사람을 잡아가면 그 사람에게도 안 좋잖아요. 그냥 못 들어오게 막아주시기만 하면 돼요.”오민수가 말했다.“유현진 씨는 너무 착하네요. 그 사람이 스토킹을 했는데도 현진 씨는 그 사람의 앞날을 고려해 주시잖아요. 너무 마음이 착하네요. 그 사람 인상착의는 기억하세요?”켕기는 것이 있었던 유현진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키는 아주 크고 조금 잘생겼어요. 그리고 슈트를 입고 있었어요. 차 번호는 한 A8986이었어요.”오민수는 바로 수첩에 적어두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두 눈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