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라리 치질 치료하러 갔다고 하는 게 더 낫겠네.'“너 뭐 말실수하거나 그러진 않았지?”차미주는 코웃음을 쳤다.“네가 나한테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내가 정말로 말했겠어? 멍청이도 아니고.”한성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유현진 씨가 뭘 말했었는데?”그는 유현진이 아주 교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차미주의 입을 열게 만들어 모든 사실을 알아내 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심지어 차미주는 자신이 말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별말은 안 했어. 그냥 축하한대. 그리고 네가 날 괴롭힐 것 같으면 강한서를 시켜서 널 처리할 거래!”“...”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유현진이 할 것 같은 말이기도 했으니까.차미주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우리는 정말로 사귀는 건 아니잖아. 넌 지금은 그냥 날 믿고 기대고 있는 처지인데, 네가 감히 날 괴롭힌다고?”한성우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나도 두려워서 정말로 사귀지는 못하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갑자기 한성우가 한 말이 느끼하게 느껴졌다.“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어? 우리 사이를 반대한다던가 그런?”정신이 든 차미주가 말했다.“그리고 너 같은 어장남과 절대 잠을 자지 말라고 하던데? 넌 전과가 많잖아. 그래서 네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까 봐 자지 말라고 하더라고.”한성우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현진 씨는 지금 내가 전에 적대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복수를 하고 있는 거야.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현진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전과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아직 정식으로 사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유현진을 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유현진은 조준보다 더 차미주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유현진이 무엇이라고 하면 차미주는 바로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었다.한성우는 자신과 유
유현진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강한서가 바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여하간에 이 일은 전부 강한서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아마 누구라도 그녀의 무리한 요구를 들으면 반박할 것이었다.특히 강한서처럼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설마 나를 위해 자신의 원칙도 깨버린 거야?'유현진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그녀는 헛기침하면서 말했다.“전부 네 탓은 아니야. 내 탓도 있었어. 다른 사람 사이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아니지. 확실히 내가 했던 요구들이 너무하기도 했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잘못을 반성하게 되었고 감정도 더 깊어지게 되었다. 모두가 즐거운... 그런 유현진이 원하던 결말이었다.그녀의 말에 강한서가 말했다.“나도 널 이해해. 넌 그때 급해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말을 내뱉은 거겠지. 이런 일엔 항상 감정이 먼저 앞서니까. 그래도 이런 습관은 좋지 않아, 고쳐야 해.”“...”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사과하던 게 아니었어? 지금 내 문제를 지적해 내는 거야?'강한서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무슨 일만 있으면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그거 엄청 상처야.”확실히 그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쳐야겠다며 인정했다.하지만 사과하러 온 강한서가 그녀의 문제만 따지고 드니 유현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그래서 내가 또 뭘 고쳐 줬으면 하는데?”강한서가 멈칫했다.“다른 문제는 내가 참을 수 있으니까 안 고쳐도 돼.”유현진은 속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그녀는 떠보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강한서가 정말로 그녀를 문제투성이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과 ‘쿨한' 표정을 지으며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괜찮아. 감정은 서로 알아가고 고쳐가고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말해 봐. 정말로 내 문제라고 생각되면 나도 허심하게 고칠 테니까.”강한서는 유현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한서는 그녀도 안 먹었다는 말에 바로 수긍하였다.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뭘 먹고 싶어?”유현진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네가 봐서 아무거나 시켜줘. 네가 시킨 거라면 난 다 좋아.”강한서는 그녀의 다정한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고 얼른 그녀를 꼬옥 끌어안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그럼 나 기다려. 바로 올 테니까.”“응응.”미소를 지으며 강한서를 문 앞까지 배웅하자마자 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경비실에 연락했다.연락을 받은 경비원은 나이가 아주 젊었고 유현진의 팬이기도 했다.“여보세요, 경비실이죠?”오민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유현진 씨.”유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 저 그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아침을 먹고 있던 오민수가 급히 말했다.“네네, 뭐든지 말씀하세요.”“최근에 사생팬이 저의 집까지 따라오게 되었더라고요. 아침마다 자꾸 꽃이나 음식을 문 앞에 가져다 놓더라고요. 아시잖아요. 우리 집에는 여자 둘이 산다는 것을.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좀 어떻게 조치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오민수가 바로 화를 내면서 말했다.“사생팬은 팬도 아닙니다. 그런 스토커잖아요. 제가 대신 신고해 드릴까요?”유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급히 대답했다.“신고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저에게 어떤 피해를 준 건 아니라서요. 게다가 경찰이 오고 그 사람을 잡아가면 그 사람에게도 안 좋잖아요. 그냥 못 들어오게 막아주시기만 하면 돼요.”오민수가 말했다.“유현진 씨는 너무 착하네요. 그 사람이 스토킹을 했는데도 현진 씨는 그 사람의 앞날을 고려해 주시잖아요. 너무 마음이 착하네요. 그 사람 인상착의는 기억하세요?”켕기는 것이 있었던 유현진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키는 아주 크고 조금 잘생겼어요. 그리고 슈트를 입고 있었어요. 차 번호는 한 A8986이었어요.”오민수는 바로 수첩에 적어두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두 눈
강한서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여자가 화나지 않았다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유현진이 ‘나 화 안 났어'라고 말했을 때부터 이미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는 뜻이었다.자아도취, 공짜를 좋아하고 훈남을 찾아보는 건 전부 작은 문제였다.뒤끝이 있는 성격만이 그녀의 진짜 문제였다.그녀에게 문제가 있어도 되고, 그녀도 본인의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강한서는 그걸 입 밖에 내지 말았어야 했다.특히 그녀가 웃으면서 이런 주제에 대해 말할 때는 더더욱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그의 입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그렇게 강한서는 그녀에게 속아 사실대로 전부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걸 듣고도 유현진이 넘어가 주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자신을 사생이라고 말해 경비원에게 쫓아내라고 했으니 강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경비원은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보며 계속 쫓아냈다.“뭘 멍하니 서 있어요? 얼른 차 빼세요.”정신이 든 강한서는 경비원을 훑어보며 말했다.“유현진 씨가 누구죠?”경비원은 그를 째려보았다.“뭘 모르는 척이에요? 여기까지 쫓아왔으면서, 유현진 씨가 누군지 모른다고요?”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쫓아왔다고요? 대체 유현진 씨가 누군데 그러는 거죠?'“모른 척 잡아떼도 소용없어요. 방금 제가 이미 CCTV를 돌려 보았거든요. 당신이 최근 며칠 동안 수시로 7동에 나타났을 뿐만 9층에 자주 가셨잖아요. 유현진 씨가 사는 9층에 말이에요.”강한서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9층으로 간 건 902호에 사는 제 친구를 찾으러 온 겁니다. 거기 사는 한성우가 바로 제 친구이자, 여기 주민이거든요.”말을 하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클라우드 아파트 정보가 있는 앱을 켜곤 경비에게 건넸다.경비는 힐끔 쳐다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뭐야, 정말로 클라우드 아파트 주민이잖아. 심지어 집 두 채에 상가 건물 세 개!'‘이게 다 얼마야? 몇백억은 족히 되겠네!'클라우드 주민은
그녀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순간, 강한서가 말했다.“끊지 마. 내 말끝까지 들어.”유현진은 멈칫했다.강한서가 나직하게 말했다.“이따 사람을 시켜 음식을 촬영장으로 보낼 거야. 먹고 촬영해. 난 다른 배우들이 몸매 관리를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해. 네가 맡은 역할이 삐쩍 말라 죽어가는 캐릭터만 아니라면 공복으로 일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돈을 적게 벌어도 되니까 항상 몸 건강 챙겨줘.”그는 뜸을 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너랑 수많은 사계절을 함께 보내고 싶고, 우리 둘 중 누구라도 아파서는 안 돼.”유현진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그저... 강한서가 자신을 너무 봐주는 것 같았다.끝도 없이 봐주고 있었다.강한서는 그녀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경비에게 그를 내쫓으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도 강한서는 그녀에게 밥을 잘 챙겨 먹으라면서 걱정하고 있었다.너무나 다정한 강한서에 그녀는 점점 더 억지를 부리게 된 것이었다...유현진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는 바지에서 툭 뛰어나온 실밥을 잡아당기며 웅얼거렸다.“왜 화를 안 내?”강한서가 답했다.“뭐 처음에는 화가 났긴 했어. 하지만...”그는 뜸을 들였다.“네가 예쁘길 바라고, 또 내조 잘하길 바라면 그건 너무 욕심이잖아. 그냥 그렇게만 있어 주면 돼. 어차피 네 몸에 있는 영양분은 전부 미모에 갔으니까 머리가 다소 딸리는 건 정상이야.”다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유현진은 순간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지게 되었다.강한서 개자식은 예쁜 말을 하면서 그녀가 죄책감을 하고 있을 때마다 항상 그런 말로 ‘모욕'을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하마터면 정말로 속을 뻔했다!‘개자식! 나쁜 자식! 난 또 성격이 부드럽게 변한 줄 알았네! 아니지, 변한 건 맞지. 예전에 독사처럼 말을 내뱉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젠 칭찬과 욕을 섞어서 한다는 게 맞지. 사악 게이지 max야.'유현진은 어두워진 얼굴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단 1초라
배 속에 아이를 지금 이 시기에 지우지 않으면 더는 지우기 힘들어질 것이었고 유도 분만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예전에 유서훈을 낳을 때도 대충 사립대병원을 찾아가 낳았고 혈액형 조작 같은 것이 아주 편리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유상수는 이미 그녀를 국립대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했기에 아이를 낳을 때도 그곳에서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혈액형 부분에서 바로 들통나게 될 것이었다.유상수는 A형이고 그녀는 O형이었다. 그랬기에 절대 B형 아이가 나올 수 없었다.만약 이 아이를 낳는다면 아무리 멍청한 유상수라도 눈치채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유현아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현아는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 백혜주 옆으로 가 앉았다.“엄마, 몸 관리 잘해야 해요. 안 그러면 어떻게 그 여우 년이랑 싸울 힘이 나겠어요?”백혜주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그 여우 년이 아이를 지운대?”“아니요!”유현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저도 사람을 시켜서 그년을 끌고 가 몰래 지울 생각이었지만 아빠가 그년한테 경호원을 여럿을 붙여두어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더라고요.”백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상수 이 개자식, 내가 그럴 줄 알았어!'“네 아빠는, 얼른 여기로 오시라고 해!”유현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여기 오셔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그년이 남자아이를 가졌다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아빠 성질을 몰라요? 아빠가 어떻게 그 아이를 포기하시겠어요?”백혜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아이라니?”유현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그년이 불법 산부인과로 가서 아이의 성별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빠가 어떻게 갑자기 마음을 바꾸실 수 있었겠어요. 아이를 절대 지울 수 없다면서 경호원을 잔뜩 붙여 주었더라고요. 우리가 손을 댈까 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엄마도 최근에 아빠가 엄마를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백혜주의 표정
사진을 확인한 유현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 사람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죠?」최연서가 답장했다.「죽을 만들고 있어요. 제가 입맛이 없다고 하니 아주 초조해하더라고요. 음식을 안 먹으면 행여라도 아이에게 영향이 미치게 될까 봐 이것저것 잔뜩 사다주기도 했어요. 제가 직접 만든 죽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지금 배우면서 만들고 있어요.」“...”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순간 유상수를 비웃어야 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어릴 때 자신의 ‘이상한 관점'만 주저리주저리 말하면서 하현주와 싸우기도 했었다. 그녀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바로 “여자라면 응당 집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거야. 돈 벌어오는 일은 남자한테 맡기는 거라고. 넌 무슨 일이든지 항상 욱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항상 내가 무능한 줄로만 알잖아. 왜 날 그런 취급 받게 하는 거냐?”였다.이런 뼛속까지 ‘남편은 하늘과도 같다'라는 고리타분한 사상을 가진 남자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신기할 정도였다.다만 이 모든 것이 최연서가 임신한 남자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순간 모든 것이 ‘합리'하게 느껴졌다.유현진이 문자를 보냈다.「검사 결과를 의심하거나 그런 모습은 없었죠?」최연서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아주 굳게 믿고 있어요. 최근에는 제 배만 뚫어지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배가 살짝 나온 것 같다면서 남자아이가 누굴 닮았을지 추측까지 하더라고요.」유현진이 또 문자를 보냈다.「백혜주 그 사람은 아주 음험한 사람이에요. 그 여자가 연서 씨가 남자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분명 연서 씨에게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요.」최연서는 유상수를 힐끔 보더니 답장을 했다.「아마 이미 알았을 거예요. 유현아가 이미 사람을 보냈더라고요. 물론 유상수에
켕기는 것이 있었던 유상수가 얼버무리며 말했다.“어, 회의 중이라 못 들었어. 왜, 무슨 일인데?”백혜주는 그의 변명이 너무나도 귀에 익었다. 예전에 그녀가 유상수와 뒹굴 때도 하현주에게 같은 변명으로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 그녀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말하는 어투마저 그때와 똑같았다.백혜주는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왜 그 여자한테 수술하라고 하지 않은 건데요?”유상수는 입술을 틀어 물고 말했다.“의사가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지금은 수술할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군. 목숨을 잃게 된다고 했어.”백혜주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그럼 언제 수술이 가능한 건데요?”유상수가 말했다.“몸 상태가 회복되면 다시 의사에게 찾아갈 거야.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억지로 할 수는 없잖아.”백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속으로는 차갑게 비꼬고 있었다.‘정말이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러는 거지? 애초에 하현주에게 손을 댈 때도 군소리 없이 바로 움직였잖아. 감방 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백혜주는 화를 꾹 참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설마 정말로 그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니죠?”유상수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바로 부정을 했다.“그럴 리가 없잖아. 난 이미 너랑 약속했어. 네가 아이만 잘 품고 있으면 연서 쪽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거라고.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내 곁을 오래 함께 한 네 생각도 해줘야지 않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배 속의 아이나 잘 지켜줘.”백혜주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수술이 부작용이 심하다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해요.”유상수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너, 지금 뭐라고?”백혜주가 말했다.“그렇게 그 아이가 갖고 싶으면 낳게 하라고요. 하지만 나랑 약속 하나 해요.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여자는 한주시에서 영원히 떠나게 만들어요.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