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속에 아이를 지금 이 시기에 지우지 않으면 더는 지우기 힘들어질 것이었고 유도 분만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예전에 유서훈을 낳을 때도 대충 사립대병원을 찾아가 낳았고 혈액형 조작 같은 것이 아주 편리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유상수는 이미 그녀를 국립대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했기에 아이를 낳을 때도 그곳에서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혈액형 부분에서 바로 들통나게 될 것이었다.유상수는 A형이고 그녀는 O형이었다. 그랬기에 절대 B형 아이가 나올 수 없었다.만약 이 아이를 낳는다면 아무리 멍청한 유상수라도 눈치채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유현아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현아는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 백혜주 옆으로 가 앉았다.“엄마, 몸 관리 잘해야 해요. 안 그러면 어떻게 그 여우 년이랑 싸울 힘이 나겠어요?”백혜주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그 여우 년이 아이를 지운대?”“아니요!”유현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저도 사람을 시켜서 그년을 끌고 가 몰래 지울 생각이었지만 아빠가 그년한테 경호원을 여럿을 붙여두어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더라고요.”백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상수 이 개자식, 내가 그럴 줄 알았어!'“네 아빠는, 얼른 여기로 오시라고 해!”유현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여기 오셔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그년이 남자아이를 가졌다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아빠 성질을 몰라요? 아빠가 어떻게 그 아이를 포기하시겠어요?”백혜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아이라니?”유현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그년이 불법 산부인과로 가서 아이의 성별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빠가 어떻게 갑자기 마음을 바꾸실 수 있었겠어요. 아이를 절대 지울 수 없다면서 경호원을 잔뜩 붙여 주었더라고요. 우리가 손을 댈까 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엄마도 최근에 아빠가 엄마를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백혜주의 표정
사진을 확인한 유현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 사람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죠?」최연서가 답장했다.「죽을 만들고 있어요. 제가 입맛이 없다고 하니 아주 초조해하더라고요. 음식을 안 먹으면 행여라도 아이에게 영향이 미치게 될까 봐 이것저것 잔뜩 사다주기도 했어요. 제가 직접 만든 죽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지금 배우면서 만들고 있어요.」“...”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순간 유상수를 비웃어야 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어릴 때 자신의 ‘이상한 관점'만 주저리주저리 말하면서 하현주와 싸우기도 했었다. 그녀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바로 “여자라면 응당 집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거야. 돈 벌어오는 일은 남자한테 맡기는 거라고. 넌 무슨 일이든지 항상 욱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항상 내가 무능한 줄로만 알잖아. 왜 날 그런 취급 받게 하는 거냐?”였다.이런 뼛속까지 ‘남편은 하늘과도 같다'라는 고리타분한 사상을 가진 남자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신기할 정도였다.다만 이 모든 것이 최연서가 임신한 남자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순간 모든 것이 ‘합리'하게 느껴졌다.유현진이 문자를 보냈다.「검사 결과를 의심하거나 그런 모습은 없었죠?」최연서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아주 굳게 믿고 있어요. 최근에는 제 배만 뚫어지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배가 살짝 나온 것 같다면서 남자아이가 누굴 닮았을지 추측까지 하더라고요.」유현진이 또 문자를 보냈다.「백혜주 그 사람은 아주 음험한 사람이에요. 그 여자가 연서 씨가 남자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분명 연서 씨에게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요.」최연서는 유상수를 힐끔 보더니 답장을 했다.「아마 이미 알았을 거예요. 유현아가 이미 사람을 보냈더라고요. 물론 유상수에
켕기는 것이 있었던 유상수가 얼버무리며 말했다.“어, 회의 중이라 못 들었어. 왜, 무슨 일인데?”백혜주는 그의 변명이 너무나도 귀에 익었다. 예전에 그녀가 유상수와 뒹굴 때도 하현주에게 같은 변명으로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 그녀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말하는 어투마저 그때와 똑같았다.백혜주는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왜 그 여자한테 수술하라고 하지 않은 건데요?”유상수는 입술을 틀어 물고 말했다.“의사가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지금은 수술할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군. 목숨을 잃게 된다고 했어.”백혜주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그럼 언제 수술이 가능한 건데요?”유상수가 말했다.“몸 상태가 회복되면 다시 의사에게 찾아갈 거야.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억지로 할 수는 없잖아.”백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속으로는 차갑게 비꼬고 있었다.‘정말이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러는 거지? 애초에 하현주에게 손을 댈 때도 군소리 없이 바로 움직였잖아. 감방 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백혜주는 화를 꾹 참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설마 정말로 그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니죠?”유상수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바로 부정을 했다.“그럴 리가 없잖아. 난 이미 너랑 약속했어. 네가 아이만 잘 품고 있으면 연서 쪽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거라고.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내 곁을 오래 함께 한 네 생각도 해줘야지 않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배 속의 아이나 잘 지켜줘.”백혜주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수술이 부작용이 심하다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해요.”유상수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너, 지금 뭐라고?”백혜주가 말했다.“그렇게 그 아이가 갖고 싶으면 낳게 하라고요. 하지만 나랑 약속 하나 해요.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여자는 한주시에서 영원히 떠나게 만들어요.
백혜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상수의 불륜녀가 낳은 아이를 키워주는 대신 반드시 유상수와의 표면적인 명분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그녀는 이미 불륜녀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었고 지금은 또 다른 불륜녀가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외부인이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아마 한주시의 웃음거리로 될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결혼식을 올리려는 이유 또한 유상수에게 혼외자식이 생겼다는 사실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이 한주시 재벌가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되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이와 같은 이유로 유상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그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 그녀가 “사랑한다.”라고 그에게 백번을 속삭이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으니까.백혜주는 비록 그의 앞에서 온순한 사람인 척 굴었지만, 유상수는 백혜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순한 얼굴 뒤에는 사악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고, 그녀가 정말로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면 유상수는 오히려 그녀를 경계했을 것이었다.그러나 좋은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면, 웃음거리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바로 받아들였을 것이다.생각에 잠긴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역시 네가 생각이 깊어. 하지만... 넌 임신한 상태잖아. 결혼식을 준비하기엔 몸에 무리가 갈 거야. 난 네가 힘든 게 싫단다.”백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어떻게 되었든 결국은 이 아이에게 명분을 주려는 거잖아요. 결혼식만 올리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 난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유상수는 순간 자신이 확실히 백혜주를 홀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그는 뜸을 들이며 말했다.“그런 말을 하지 마. 나도 네가 속상하다는 거 알고 있단다. 한창 젊을 때는 너와 결혼식을 올릴 순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으니 결혼식도 올려야겠지. 그럼 아주 성대하게 올려야겠구나. 결혼식 준비에 관해서는 네가 신경 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집에서 편히 배 속에 아이만
“결혼식만 올리면.”백혜주는 유현아를 흘겨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니까 넌 좀 경계심을 올려. 종일 다른 집안 여식들과 쇼핑하며 차나 마실 궁리나 하지 말고.”유현아는 여전히 다소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지만 백혜주의 경고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알았어요, 엄마.”전화를 끊은 유상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서버렸다. 최연서는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유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유현진은 문자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아직 백혜주가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단톡방에 소식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의 방영일이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원래 두 드라마의 방영일은 하루 차이가 났었다. 그러나 현재, 두 드라마는 같은 날짜, 같은 시간 저녁 8시에 방영하게 된 것이었다.을 하루빨리 방영하기 위해 방송사에서는 아직 종영되지 않은 드라마의 마지막 화를 삭제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 드라마는 과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게 된 것이었다.심지어 그들의 홍보 수단 또한 아주 사악하였다. 첫 방의 시청률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바로 드라마 광고마저 없애고 방영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이런저런 글을 올리며 조회수를 올렸다.애초부터 두 드라마의 방영일은 아주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의 방영일을 바로 과 같은 날짜로 바꿨으니 첫 방송 시청률부터 빼앗아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주 분명했다.논란이 많은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이니 애초에 화젯거리였고 드라마를 제작한 제작진들도 그다지 평판이 좋은 팀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기회를 노려 화젯거리를 이용한 것이고 스폰으로 ‘인기'를 얻은 것이었다.의 홍보팀은 아주 잠잠하고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차이현이라는 감독의 평판이 아주 좋았고 그의 작품이라면 재밌는 것이 아주 많았다.만약 이 먼저 방영을 한다면, 그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스폰' 받
차이현은 삐친 척 말했다.“그래서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연락한 거예요?”차이현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에이, 설마요. 그냥 감독님께서 자본가들의 돈지랄에 속상해할까 봐 특별히 안부차 전화 드린 것뿐이에요.”차이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현진 씨는 현진 씨 할 거나 하세요. 이런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마시고요. 어차피 이런 일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맞는 선택이거든요. 그 결과가 어떻든 나만 정정당당하면 되거든요.”“흘러가는 대로... 그래도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어요.”유현진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먼저 뒷돈을 주고 방영일을 바꾼 거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그 사람들의 찌라시를 퍼뜨리는 거죠. 그 사람들은 어차피 표절 논란으로 드라마 홍보하고 있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 저희는 표절 논란을 더 크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좋거든요. 최대한 표절 당한 작가한테도 연락해서 같이 소송을 제기하죠. 표절 논란을 받은 예전의 드라마도 다 들추어내면 되잖아요.”“그리고 원작자를 더 지지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면서, 특히 ‘이 드라마는 원작과 연관이 없습니다', ‘배우와 원작은 연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반박을 하는 거죠. 그러면 여론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과 남의 인기를 빼앗으려는 사람, 그리고 그 인기를 묵혀 더 큰 이익을 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에게 어떻게든 팔아먹으려는 사람들을 혼내주는 거죠!”“그렇게 되면 인기와 그들이 원하던 평판도 전부 와르르 무너지게 될 거예요. 최대한 다시는 이 바닥에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비리를 낱낱이 밝히는 거죠. 우리가 잘 지낼 수 없다면 누구도 잘 지낼 수 없어요.”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차이현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누가... 그런 것을 가르쳐준 거죠?”“전 그냥 정의감이 불타올랐을 뿐이에요.”차이현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난 왜 현진 씨가 복수하려는 걸로 느껴지는 거죠? 송민영 씨가
민경하가 서류를 들고 나가버린 후, 강한서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도와줘.”한성우는 소파에 엎드려 과일을 먹고 있었다. 주방에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차미주가 바삐 주방에서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장시간 동안 엎드려 있었더니 한성우는 허리가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요즘 너무나도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강한서의 연락을 받은 후에도 그는 거만하게 답했다.“뭘 도와줘?”강한서는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한성우는 생각도 해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그런 부도덕한 일은 네가 알아서 해.”강한서는 거절을 당해도 화내지 않았다.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차미주가 아직 네 검진 결과를 못 봤지? 그래도 네 여자친구인데 차미주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한성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개자식아. 내가 그동안 어떻게 널 도와 현진 씨 마음을 돌려줬는데?”강한서가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말을 안 했으면 나도 잊고 있을 뻔했네.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간질하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재혼하고도 남았어!”“...”한성우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넉살 좋은 사람처럼 강한서와 다시 얘기를 나누려 했다.“장난인 거 알지? 그런 일은 당연히 네 친구인 내가 도와줘야지. 그러니까 입 싹 다물고 있어. 내 연애에 방해하지 말고.”강한서는 코웃음을 쳤다.“하,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그렇게 속이고 있으면 관계도 오래 못 가. 그러니까 알아서 적당한 때에 밝혀.”“그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한성우가 반박했다.“넌 현진 씨한테 현진 씨가 먼저 너를 덮쳤다고 속였잖아. 잊었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더니 네가 딱 그런 식이네. 내가 미주랑 사귀게 되었으면 평생 미주한테 잘해주면 되잖아, 안 그러냐?”“...”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통화를 하고 있던 와중에 차미주는 냄비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한성우
속으로 야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차미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턱에 닿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당황한 듯했다. 이내 분위기도 어색해지게 되었다.물론 제일 당황했던 사람은 바로 차미주였다. 한성우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차미주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어때, 꽉 끼진 않아?”“괜찮아.”한성우는 대답을 하며 차미주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그럼 됐어.”차미주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강한서가 왜 너한테 전화를 한 거야?”한성우의 손이 순간 움찔 떨려오고 하마터면 삐끗 몸이 넘어갈 뻔했다.“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수다 떨고 있었어.”차미주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던 것이었기에 그에게 갈비찜을 그릇에 담아주며 그의 옆에 앉아 말했다.“너희 회사 단톡방 있어?”“있지. 왜?”차미주의 눈이 반짝거렸다.“그럼 얼른 현진이 드라마를 시청하라고 해. 송여우 드라마랑 현진이 드라마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시청률이 낮게 나올까 봐 좀 걱정되네.”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단톡방엔 1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있어. 아무리 그 사람들이 본다고 해도 시청률이 그리 오르진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차미주는 어깨가 축 내려가게 되었다.한성우는 잔뜩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위로를 했다.“아직 첫 방 시간이 안 되었잖아. 어쩌면 시청률이 생각보다 잘 나올 수도 있지.”차미주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여하간에 톱스타와 시청률 경쟁을 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것이었으니까.비록 그렇다 해도 그녀는 방송 시간에 맞춰 다른 친구들을 불러 TV 앞에 앉아 본방송 사수할 사람이었다.차미주는 인맥이 많았다. 각 방송사 시청률 또한 그는 바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그녀는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률 통계표를 보고 있었다.예상대로 첫 방송 시청률은 4%를 달성하게 되었고 꽤 좋은 성적이었다.은 1.3%를 달성하게 되었다. 좋지도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