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하가 서류를 들고 나가버린 후, 강한서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도와줘.”한성우는 소파에 엎드려 과일을 먹고 있었다. 주방에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차미주가 바삐 주방에서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장시간 동안 엎드려 있었더니 한성우는 허리가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요즘 너무나도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강한서의 연락을 받은 후에도 그는 거만하게 답했다.“뭘 도와줘?”강한서는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한성우는 생각도 해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그런 부도덕한 일은 네가 알아서 해.”강한서는 거절을 당해도 화내지 않았다.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차미주가 아직 네 검진 결과를 못 봤지? 그래도 네 여자친구인데 차미주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한성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개자식아. 내가 그동안 어떻게 널 도와 현진 씨 마음을 돌려줬는데?”강한서가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말을 안 했으면 나도 잊고 있을 뻔했네.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간질하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재혼하고도 남았어!”“...”한성우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넉살 좋은 사람처럼 강한서와 다시 얘기를 나누려 했다.“장난인 거 알지? 그런 일은 당연히 네 친구인 내가 도와줘야지. 그러니까 입 싹 다물고 있어. 내 연애에 방해하지 말고.”강한서는 코웃음을 쳤다.“하,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그렇게 속이고 있으면 관계도 오래 못 가. 그러니까 알아서 적당한 때에 밝혀.”“그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한성우가 반박했다.“넌 현진 씨한테 현진 씨가 먼저 너를 덮쳤다고 속였잖아. 잊었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더니 네가 딱 그런 식이네. 내가 미주랑 사귀게 되었으면 평생 미주한테 잘해주면 되잖아, 안 그러냐?”“...”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통화를 하고 있던 와중에 차미주는 냄비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한성우
속으로 야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차미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턱에 닿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당황한 듯했다. 이내 분위기도 어색해지게 되었다.물론 제일 당황했던 사람은 바로 차미주였다. 한성우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차미주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어때, 꽉 끼진 않아?”“괜찮아.”한성우는 대답을 하며 차미주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그럼 됐어.”차미주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강한서가 왜 너한테 전화를 한 거야?”한성우의 손이 순간 움찔 떨려오고 하마터면 삐끗 몸이 넘어갈 뻔했다.“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수다 떨고 있었어.”차미주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던 것이었기에 그에게 갈비찜을 그릇에 담아주며 그의 옆에 앉아 말했다.“너희 회사 단톡방 있어?”“있지. 왜?”차미주의 눈이 반짝거렸다.“그럼 얼른 현진이 드라마를 시청하라고 해. 송여우 드라마랑 현진이 드라마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시청률이 낮게 나올까 봐 좀 걱정되네.”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단톡방엔 1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있어. 아무리 그 사람들이 본다고 해도 시청률이 그리 오르진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차미주는 어깨가 축 내려가게 되었다.한성우는 잔뜩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위로를 했다.“아직 첫 방 시간이 안 되었잖아. 어쩌면 시청률이 생각보다 잘 나올 수도 있지.”차미주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여하간에 톱스타와 시청률 경쟁을 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것이었으니까.비록 그렇다 해도 그녀는 방송 시간에 맞춰 다른 친구들을 불러 TV 앞에 앉아 본방송 사수할 사람이었다.차미주는 인맥이 많았다. 각 방송사 시청률 또한 그는 바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그녀는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률 통계표를 보고 있었다.예상대로 첫 방송 시청률은 4%를 달성하게 되었고 꽤 좋은 성적이었다.은 1.3%를 달성하게 되었다. 좋지도
두 사람의 촬영은 이미 대충 끝난 상태였다. 오늘의 촬영만 끝마치면 바로 종방일 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차이현의 매니저는 단톡방에 좋은 소식이라며 문자를 보냈고 유현진은 대충 확인한 뒤 메이크업 받으러 갔다.그녀는 이따 한열과 송민영 등 배우들과 촬영을 해야 했다.비록 의상은 갈아입지 않아도 되었지만, 메이크업은 수정해야 했다.여주와 남주에겐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있었지만, 유현진은 다른 배우들과 함께 지정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찾아가 줄을 서서 메이크업을 받아야 했다. 원래는 두 명이었지만 다른 한 명은 집안 사정으로 오지 않게 되었다.그래서 그들에겐 단 한 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있었고 기다리는 시간도 엄청 길었다.한열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브러쉬를 들고 살살 쓸며 그의 얼굴 화장을 수정해 주고 있었다.한열의 얼굴이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계속 손으로 그의 머리를 돌렸다. 그랬기에 얼굴 음영을 수정하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짜증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옆에 있던 그의 매니저가 멈칫하더니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역시, 그곳엔 유현진이 우뚝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촬영장에서 바로 메이크업을 수정해야 했기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유현진은 촬영 때문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오랫동안 서 있으니 당연히 발이 아파져 왔고 그녀는 계속 자세를 바꿔가며 발목을 풀어주고 있었다.매니저는 시선을 거두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물었다.“수정 화장은 끝난 건가?”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네, 거의요.”한열의 얼굴은 아주 완벽했기에 크게 화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극 중에서 그는 40대 남성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얼굴에 음영을 주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사실 감독은 한열의 중년 역할을 따로 다른 중년 배우를 찾아 촬영할 생각이었다.하지만 한열이 직접 시도해 보고 싶다고 하니 안창수는 당연히 그를 열정적이라며 칭찬하며 승낙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강한서는 아주 진지하게 답장했다.힐끔 쳐다보던 민경하는 눈가가 바르르 떨리게 되었다.강한서의 답장은 이러했다.「발등에 있던 점은 없앤 거야?」민경하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얼른 문자를 전송하려던 강한서의 손을 막았다.“대표님, 이건 사모님의 발이 아닙니다.”강한서는 동작을 멈추고 그를 흘겨보았다.“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민경하가 얼른 설명에 나섰다.“이 사진은 전에 인터넷에 뜨겁게 달군 적이 있었거든요. 심지어 이모티콘으로 만들어 떠돌기도 했었죠.”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이모티콘 목록을 보여주었다.강한서는 보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했다.“그럼 현진이가 이걸 왜 나한테 보낸 거죠?”민경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마도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서 보낸 것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정말로 그냥 심심해서 장난을 걸었다거나 말이죠.”강한서가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민경하는 이내 통통한 발이 하이힐에 끼어버린 사진을 강한서에게 보내면서 말했다.“이걸 사모님께 보내보세요.”강한서는 민경하의 말대로 바로 보냈다.유현진은 통통한 발 때문에 하이힐이 망가진 사진을 보고는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응석을 부리는 듯한 어투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촬영팀에서 준비한 신발이 다 사이즈가 작아서 아파. 그래서 현진이 발도 아야 해.”강한서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바로 음성을 틀었다.이윽고 애교 섞인 유현진의 목소리가 iPad를 통해 울려 퍼졌다.순간, 두 사람 사이엔 정적이 흐르게 되었다.민경하가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큼, 역시 신발이 발에 안 맞으셨던 거였네요.”강한서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게 되었고 바로 음성으로 답장을 보냈다.“네가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말했었다면 우린 아마 지금이 없었을 거야.”유현진은 그의 답장을 들으며 한참이나 웃어댔다.강한서가 그녀와 결혼 전에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건 분명 그의 성격 탓이었다.
도우미는 이미 방을 정리해 두었다. 유현진은 얼른 그녀를 방으로 들여보내 쉬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현진의 집에 관심을 보이며 굳이 유현진의 남편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거실에는 커다란 웨딩사진이 설치되기 전이라 1층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그 “동창”은 계속 “아쉽다”는 말투로 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으면서 왜 일찍 결혼했냐는 둥, 아무리 결혼이라지만 조건만 따질 게 아니라 대화가 통해야 한다는 둥, 나이 차가 많으면 세대 차이가 느껴진다는 둥 그런 말들을 해댔다. 한참이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유현진은 그제야 그 말에 담긴 뜻을 파악했다. 그녀는 아마 유현진이 강한서의 재산을 보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인지한 유현진은 조금 화가 났지만 예의상 대놓고 입 밖으로 불쾌한 기분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태도가 많이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그 “동창”도 자신이 말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더는 그 화제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만약 단순히 그뿐이었더라면, 유현진은 그 동창이 조금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서가 집으로 돌아오자, 강한서가 유현진의 남편이라는 것을 안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오빠”라고 부르면서 강한서가 물만 마셔도 “오빠 물 마시는 포즈가 너무 멋져요.”라고 하면서 칭찬했다. 그 “동창”은 몸매가 아담하고 귀여운 타입이었다. 외모는 너무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봐줄 만한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반에서 남자아이들과 사이가 좋았고, 학교 축제가 있을 때면 그녀가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학교의 여신이라 불리던 유현진도 그런 “대접”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유현진은 안 그래도 차미주에게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녀에게
유현진이 강한서에게 묻자 그가 오히려 되물었다. “1년이라도 살게 하려고?”유현진도 당연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가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다만 그녀는 인사도 없이 간 것에 대해 가볍게 불만을 늘어놓고는 더 캐묻지 않았었다. 다 지나간 일인 줄 알았는데 2개월 후, 그 “동창”이 인스타그램에 피드를 업로드했다. 그녀는 1000자가 넘는 문자로 자신이 한 친구 집에 신세를 지면서 친구 남편에게 당했던 불쾌한 일들을 막힘없이 서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이제껏 사실을 밝히지 않고 숨겨왔었는데, 오늘 또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폭로한다고 했다. 그 동창이 유현진 집에서 신세를 졌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가 치민 유현진은 바로 그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유현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단톡방에서는 유현진이 바람둥이 같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시끄럽게 퍼져갔고, 심지어 고등학교 친구들도 어디서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그녀에게 사실을 물어보기도 했다. 유현진은 그 일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결국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한 강한서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그제야 유현진은 참지 못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다. 그녀가 만약 강한서가 그의 “옛사랑”과 만나고 있다고 했으면 유현진은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강한서가 그녀에게 들이댔다는 건 유현진은 전혀 믿지 않았다. 강한서는 비록 예쁘게 말하는 법은 몰랐지만 인성은 괜찮았다. 그는 아내 친구에게 들이대는 일 같은 건 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역시나, 유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가져와 그녀에게 동영상 하나를 전송했다. 강한서의 서재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서재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한서가 그녀에게 보낸
강한서가 말했다. “나도 참지 못하고, 바로 욕해버렸어.”어리둥절하던 유현진은 폭소를 터뜨렸다. 강한서는 애교와 상극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현진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강한서가 그 여자에게 욕설을 내뱉은 것은 단순히 그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신세를 지는 동안 강한서 앞에서 여러 번 유현진의 뒷담화를 했었다. 그녀는 유현진이 돈을 밝히고, 허영심이 많고, 학창 시절엔 친구들을 괴롭히고, 일진 놀이를 했다며 심지어 유현아의 일까지 들먹이며 고아도 봐주지는 않는 동정심도 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강한서는 유현진을 봐서 한두 번 정도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뒷담화의 횟수가 점차 많아지자 그도 더 이상 그녀를 봐줄 생각이 없어졌다. 자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그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릴 필요가 없었다. 애교를 극혐하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며 유현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애교 부리면 넌 속으로 몰래 웃어야지, 어디서 까탈스럽게 굴어?”강한서가 대답했다. “네 애교보다는, 네가 애원하는 걸 난 더 좋아해. 특히... 울먹일 때. 굉장히 매력 있어.”유현진: ...“이 변태야!”강한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악당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네 연기를 말한 거였어. 넌 무슨 생각한 거야?”유현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중지를 날렸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 한열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유현진 씨, 아직 메이크업 못 받으셨어요?”유현진은 휴대폰을 내리며 예의 있게 대답했다. “몇 명 안 남았으니 곧 제 차례가 올 거예요.”한열의 매니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이는 이미 다 마쳤어요. 은지한테 메이크업 도와드리라고 할게요.”유현진이 막 거절하려는데, 매니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열이가 저녁에 스케줄이 하나 더 있어서요. 너무 늦게 끝나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요.”‘한열 씨 시간 아끼려고 그러시는 거였구나.’거절하
“믿는 구석”라는 네 글자에는 숨길 수 없는 질투가 짙게 느껴졌고, 그 말은 유현진의 발걸음을 우뚝 멈추게 했다. 주위의 스태프들도 그 말에 하나둘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랄까, 연예계에서 여배우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스폰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이 바닥에는 신하리처럼 집안이 좋은 사람이 연예계에 진출하는 것이 적었으니 말이다. 여배우들은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데뷔작부터 좋은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스폰서가 없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유현진에게 스폰서가 있다는 송민영의 말을, 많은 사람들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얼굴에 스폰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본인이 싫다고 해도 이 바닥에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아래에 둘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사실 촬영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찌라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유현진과 브랜드 뉴 엔터의 송민준 대표와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유현진이 촬영이 있는 날이면 브랜드 뉴 엔터의 송 대표는 하루가 멀다고 촬영장으로 구경 왔었다. 말로는 자기 회사 연예인이 걱정되어서라고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제일 상업 가치가 있는 송민영이 아닌 유현진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액션신에서 남자배우가 힘 조절을 제대로 못 해 유현진의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남은 적이 있었다. 송민준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남자배우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하지만 송민영이 쇼크로 입원했을 때, 듣기로 송민준은 입원 당일에만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병원에 갔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했다. 차별이 이토록 분명하니 당연히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송민영의 “스폰서”라는 말에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브랜드 뉴 엔터의 송민준을 떠올렸다. 송민영의 불만도 바로 브랜드 뉴 엔터의 차별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연예인의 기 싸움은 너무 흔한 일이었다. 유현진은 고개를 돌려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