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유시아를 보고 눈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 개는 어디서 났어?”유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구름이를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친구가 맡아 달라고 했어요.”“친구?”임재욱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말했다.“소현우?”유시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어떻게 알았어요?”‘그가 어떻게 알았지? 하긴 어떻게 그가 모를 수 있을까?”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남자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차를 몰고 문 앞을 막거나 강아지를 주려고 오거나. 그녀는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쉬운 여자일 뿐이다. 신서현의 털끝도 따로 올 수 없다.“이제부터 소현우하고 자주 만나지 마. 그리고...”임재욱은 차갑게 웃었다.“유시아, 네가 돈 많은 남자를 찾았다고 해서 나를 벗어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을 하는 거야. 알겠어?”유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요. 우리 둘 사이 문제에 다른 사람은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을 거니깐.”유시아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지는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이것이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받은 가르침이었다.그녀는 말하면서 구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작은 담요를 따뜻하게 깔아 주었다. 그녀의 다정한 행동과 부드러운 눈빛은 마치 아이를 돌보는 것 같았다.구름이를 다 챙기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임재욱 씨, 내 얼굴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도 너무 자주 하면 질리기 마련이다.그녀는 감옥에 있었을 때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를 미워했지만, 나중에는 미워하는 것도 지쳐서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았다.“임재욱 씨...”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언제 나한테 질릴 예정이에요? 증오도 괴롭힘도 모두 신물이 날 정도로 말이에요.”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예전에 넌 내가 널 지겨워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특히 그가 그녀와 만나기 시작할 때
사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유시아는 정말 다시는 이 독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만약 애초에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마음은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금처럼 이렇게 망신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유시아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고 그저 앞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임재욱은 미간 사이를 눌렀다. 지금 보니 유시아는 지난 3년 동안 감옥에서 똑똑함을 많이 배운 것 같았다. 적어도 예전에 그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알지 않았는가.그때의 유시아는 수업 시간에 그림을 배우는 것 외에는 항상 임재욱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행성처럼 영원히 임재욱이라는 태양의 주위를 맴돌았다.임재욱이 유시아에게 소리치고 호통을 치며 그녀를 하찮게 대해도 유시아는 항상 그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말없이 물러갔다.하루 이틀 지나면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되었다.마치 유시아의 대학 생활에는 임재욱만 있는 것 같았다!한때 자신을 깊이 사랑했던 여자에게 복수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유시아가 유병철의 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임재욱과 신서현의 일은 원래 그 아무도 몰랐다.어쨌든, 그때의 임재욱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이고 마침 다니는 대학교에서 멀지 않은 시내에는 일 년 내내 영화 제작진들이 주둔하여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촬영장이 있었다.겨울과 여름 방학 때마다 임재욱은 그곳에서 단역으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했다. 뛰어난 외모 덕분에 감독은 그에게 신서현과 가까이서 호흡을 맞출 기회를 줬다.그때, 신서현은 이미 배우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샛별이었기에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몰래 교제하며 모든 파파라치의 눈을 피했지만 유독 유병철의 눈만은 피하지 못했다.유병철은 한때 업계에서 워낙 유명했던 스턴트맨이었는데, 심송학에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현장은 매우 처참하고 무서웠다고 한다.그날 TH 빌딩의 CCTV는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아무런 영상도 남지 않았지만, 신서현은 꽤 유명한 신인배우였기에 이 일은 사회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고 결코 시간이 지나도 묻힐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인터넷에는 네티즌들의 추측이 분분했고, 경찰은 신서현과 연관된 거의 모든 사람을 샅샅이 조사했다.3일 후, 유병철은 직접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다!경찰이 유병철을 체포하러 왔을 때, 그는 이미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였다!영악하고 이기적인 남자는 스스로 가장 편안한 죽음을 택했고 비겁하게 흰색 알약으로 자신에게 내려질 정의의 심판을 피했다.옛말에 아버지의 빚은 자식이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유시아가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 못다 한 죗값을 마저 치르게 하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유병철이 그렇게 한 것도 유시아를 위해서였으니, 그녀는 기득권자로서 이 일에 전혀 연관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임재욱이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유시아는 화장실로 갔다.일반 가정집의 욕실이었기에 별장처럼 넓고 호화로운 욕조는 없었고 샤워기만 있었다. 물을 덥히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임재욱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유병철의 영정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순간 당황한 유시아는 임재욱이 자기 아버지의 영정사진에 무슨 짓을 할까 봐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대표님...”임재욱은 얼굴을 돌려 유시아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녀를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방금 그의 일련의 동작은 과격하고 속도가 빨랐기에 유시아는 속수무책이었고 머리가 어지러워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임재욱은 이미 유시아의 몸 위로 올라타 살짝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야릇한 분위기가 흘렀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구름이는 놀란 듯 돗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몇 번 짖었지만 아무도 반응을 해주지 않았다.가슴에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자, 유시아는 온몸을 떨었다.“대표
예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두꺼운 줄 몰라 임재욱을 애타게 추구하던 유시아는 이미 그때의 화려하고 번화한 결혼식장에서 죽었다.사랑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유시아는 3년간의 옥살이를 통해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았고, 스스로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고치려고 노력했다!임재욱은 유시아에게 조금도 정을 주지 않았고 이리저리 구워삶기만 하였으며 그에게 있어서 유시아는 마치 더럽고 구겨진 걸레와도 같아 그녀 자신마저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할 정도였다.사람만 죽이면 끝인데, 임재욱은 유시아를 살려두었고 천천히 그의 고문과 수모 속에서 고통을 느끼게 했다!한참 후, 유시아의 의식은 점차 흐려졌다.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렸고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유시아를 보고 있으니, 그녀가 정말로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임재욱은 천천히 유시아의 몸에서 일어나 앉았고, 닥치는 대로 땅에서 자기 외투를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고는, 담배에 불을 붙여 유유히 한 모금을 빨았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무렵, 임재욱은 일어나 유병철의 영정사진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네가 왜 서현이를 죽였는지, 네 딸을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난 네 딸이 네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지게 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유병철, 만약 내가 원망스럽다면 너 자신부터 탓해. 결코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를 건드린 너 자신을 원망하라고!’임재욱은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은 서서히 어두워졌다!소현우는 일주일 만에 정운시로 돌아왔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소현우는 유시아에게 전화를 걸어 구름이에 관해 물었다.유시아는 조금 마음에 찔렸는데, 구름이는 그녀의 집에 온 첫날 밤에 몸이 아팠을 뿐만 아니라, 보여서는 안 되는 장면까지 보여 구름이를 잘 돌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다행히도 구름이는 말을 할 줄 아는 앵무새가 아닌 강아지였고 그렇지 않으면 유시아는 소현우를 볼 면목이 없었다.유시아는 구름이
사람은 결국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었기에 혼자 외로워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더 나았다.유시아는 끝내 소현우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소현우는 유시아를 데리고 매우 우아하게 장식된 레스토랑에 갔는데, 지배인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이곳의 단골손님인 것이 분명했다.“대표님, 오셨습니까...”지배인은 잠시 유시아를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창가 근처의 자리로 안내했다.“친구와 함께 식사하러 오셨군요. 마침 오늘 프랑스에서 건너온 블랙 트러블이 있는데, 미용에도 좋고 몸에도 좋고, 참 잘 오셨어요!”소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하나 시키죠.”말하면서 소현우는 메뉴판을 받아 자신이 자주 먹는 요리를 몇 개 주문하고는 다시 메뉴판을 유시아에게로 돌렸다.“뭐 먹고 싶어?”유시아는 주문하지 않았고 이내 입을 열었다.“이미 많이 주문했잖아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충분해요. 음식을 낭비는 건 좋지 않으니깐요.”“좋아.”소현우는 들고 있던 메뉴판을 옆에 있던 지배인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이것만 먼저 주문할게요!”이 집 레스토랑은 음식이 섬세하고 담백하게 맛있어서 위가 좋지 않은 유시아와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적합했다.유시아는 너무 맛있게 먹어서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연히 고개를 들자 조리 있게 먹는 소현우의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 났다. 감옥에서는 끼니마다 엄격한 시간제한이 있었는데, 그 시간 내에 다 먹지 못하면 더는 먹을 수 없어 배를 쫄쫄 굶어야 했고 그 상태에서 동료들과 함께 재봉틀을 밟거나, 간단한 손가방을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시작하면 늦은 밤중까지 해야 했기에 배가 너무 고파 위가 자주 아프곤 했다.유시아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거쳐서야 자기 식사 속도를 올릴 수 있었고, 한순간도 느긋하면 안 되었다.마치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뼛속까지 비천한 흔적을 지녔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영원히
신시연...아직 유시아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하지만 ‘신서현’이 세 글자는 모든 사람의 귀에 익숙한 이름이었다.신서현은 그래도 유명 여배우였고 연예계에서의 업적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에 많은 사람이 안타까움을 표했다.유시아는 연예계 쪽에 관심이 없었기에 신서현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았고 그녀가 죽었을 때도 유시아는 그녀의 가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오히려 그때의 유시아는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긴 채 나태하게 살았었고, 아버지의 행동에 너무 가슴 아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유시아는 뼈에 사무치는 그 어떠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신시연에게 뺨을 세게 맞았을 때, 유시아는 비로소 모든 상처가 시간에 의해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상처가 어떻게 쉽게 아물 수 있겠는가.3년이 지난 지금, 유병철은 죽었고 유시아도 3년 동안 감옥에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어차피 신서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고, 신시연도 영원히 언니를 잃었으니 아무리 유시아를 때리고 모욕해도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저 신시연는 마음속에 있는 화를 분출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마침 저녁 시간이라 레스토랑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입구에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소란을 일으키자 곧바로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핸드폰을 꺼내 그녀들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신시연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더욱 득의양양해져서는, 유시아의 멱살을 잡고 사람들을 행해 소리쳤다.“여러분들 어서 보세요. 이 여자는 유시아입니다. 염치없게 3년 동안 임 씨 그룹의 대표님을 좋다고 따라다녔고 그것 때문에 유시아는 아버지를 도와 내 언니 신서현을 차로 치어 죽였습니다.”유시아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신시연 필사적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
설사 유시아가 죽어도 신씨 집안에 진 빚은 여전히 갚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젠 이런 수모와 괴롭힘을 더는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소현우는 근처 매점에 가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사서 휴지로 감싸 유시아의 얼굴을 찜질 해주었다.살을 에는 듯한 얼음물이 뜨거운 얼굴에 닿았지만, 유시아는 아무 반응도 없었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도대체 왜? 아빠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현우 씨, 우리 아빠는 왜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배우를 죽인 거죠?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유시아는 이성을 잃어 소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가 자신에게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유시아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기력한 모습을 소현우에게 보였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아빠는 너무 정직하고, 착하고 직업정신이 강한 사람이어서 평소에 술도 마시지 않고 남녀관계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셨는데... 왜 그런 걸까요? 왜?”소현우는 말없이 유시아를 품에 안았다.유시아는 포옹을 거절했고, 고집스럽게 소현우의 입에서 답을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현우는 아예 유시아를 꽉 껴안았고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대성통곡했다.소현우는 묵묵히 유시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마치 소리 없는 위로 같았다!한참 후에야 소현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시아야,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용이 없어. 그리고 네 아버지는 네가 행복하게 사는 걸 바랄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지?”유시아는 소현우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아빠는 왜 사람을 죽였을까요? 왜 날 떠났냐고요!”유시아는 아버지가 너무 필요했다. 유병철은 유시아가 고아로 될 준비가 아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소현우는 이를 악물며 유시아의 얼굴을 살며시 들었다.“유시아, 내 말 좀 들어봐. 신서현의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네 아버지는 목숨으로 목숨을
임재욱은 이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자체가 죄라고 생각했다. 만약 임 씨 집안사람들이 평생 임재욱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서로 무사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하필이면, 임재욱의 호적상의 아버지와 큰형이 모두 비행기 사고로 죽었고, 임씨 집안에는 오직 그의 할아버지인 임광철과 유일한 손녀인 임청아만 남게 되었다.임씨 집안의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임광철은 보수적이고 고집이 셌고 임청아는 여자로서 결국 시집을 가야 했기에 남아서 가업을 잇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아들 덕분에 임씨 집안에 남자 한 명이 늘어나게 되었고 임광철은 특별히 직접 남쪽으로 가서 임재욱을 데려와 임 씨 그룹의 대표 자리에 앉혔다.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존재가 뜻밖에 자기 아버지와 오빠의 자리를 대신 했으니, 임청아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임청아는 감히 공개적으로 임광철에게 반항할 수 없었기에 임재욱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거의 매번 만날 때마다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고 냉소적이었다!임재욱과 임씨 집안의 사람들의 친밀함은 어릴 적부터 자란 보육원만큼 깊지 못했다.임광철을 대할 때도 손주로서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경외하는 모습은 없었고 동년배인 임청아를 대할 때도 형제애는 아예 볼 수 없었다.임재욱은 임청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맞아, 그리고 남의 뒷담화나 하는 입이 더러운 할망구가 있지, 어리석고 자기 주제도 모르는!”임청아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라왔기에 임재욱의 말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임재욱, 네가 밖에서 더럽게 놀든 말든 관심 없지만 자기 분수를 좀 알았으면 좋겠네, 나가서 우리 임씨 집안의 체면을 구기지 말고!”임재욱은 냉소를 지었다.“이 말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거야.”집에서 뛰쳐나가 여자와 놀아나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사생아를 낳은 것은 결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부자가 모두 죽어, 이렇게 거대한 가업을 한평생 빛을 보지 못해야 할 사생아에게 물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