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어제 일에 대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대했다.주혜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성우를 불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하성우는 주혜민의 눈빛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에게 말조심하라는 듯 못마땅하게 경고하고 있었다.주혜민는 충분히 참고 있었다.하성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혜민 씨, 나 혜민 씨한테 실수한 거 있어? 왜 그렇게 무섭게 노려봐? 아이고, 무서워라!" 하성우가 진현에게 말했다. "진현, 너 솔직히 말해. 네가 혜민 씨 기분 상하게 했어?""남자가 되어서 여자 화나게 하면 안 되지! 여자는 사랑하고 예뻐하라고 있는 건데, 여자가 화나는 건 전부 남자 잘못이라고."주혜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성우 씨,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더 말하면, 그 입 내가 찢어버릴 거야."주혜민은 정말로 화난 것처럼 보였다.뻔히 자기 때문에 화난 것인데, 돌연 화살을 진현에게 돌리자 주혜민은 하성우에게 더욱 화가 났다.그녀는 일부러 나상준을 자극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나상준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니, 당연히 신경 쓸 거라고 여겼다. 자기가 다른 남자와 있으면 나상준이 돌아올 줄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진현과 함께 온 것이다. 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려고 따라온 것이다.나상준에게 알려주기 위해.그러나 나상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칼로 마음을 휘저은 것처럼 괴로웠다.하성우가 그녀를 도와 나상준에게 대신 말해주리라 믿었으나, 하성우는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래서 주혜민도 화가 났다.진현은 주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는 주혜민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혜민 씨, 성우가 농담한 거니까 이해해 줘."주혜민의 의도를 진현이 모를 리 없었다.주혜민이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를 따라왔는지, 진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럼에도 진현은 그녀를 이 자
나상준은 술잔을 들고 묵묵히 술을 들이켤 뿐, 그녀를 쳐다보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나상준은 진현과 하성우도 쳐다보지 않았다.그는 마치 동떨어진 세상에 사는 것처럼 굴었다.주혜민이 주먹을 꽉 쥐더니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나상준이 신경 써주길 바랐다, 자기가 진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알리고 싶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상준이라고 그에게 직접 알려주고 싶었다. 자기를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그러나 나상준의 지금 태도가 그녀의 화를 돋웠다.그녀도 성격이 있었다.진현은 자리에 앉아 나가는 주혜민을 쳐다보았다. 따라가지 않았다. 다만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따라가."하성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진현을 쳐다보았다.전화를 끊은 진현에게 하성우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네가 쫓아갈 줄 알았는데."진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전에나 그랬지."하성우의 눈길이 무의식 적으로 진현의 다리로 향했다.하지만 아주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쳐다보지 않았던 것처럼.주혜민이 가버리자, 하성우가 진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현의 술잔에 자기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드디어 어떻게 여자를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구나. 여자는 자기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한다고, 순애보처럼 굴다간 영원히 널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하성우는 연애에 아주 능숙했다, 그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진현이 웃으면서 술잔을 살짝 부딪쳤다. 술 한 모금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나상준이 시선을 술잔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술잔의 입구를 따라 돌 뿐, 술을 마시지 않았다.나상준이 고개를 돌렸다. "귀국하기로 한 거야?"하성우가 이해되지 않는 듯 물었다. "귀국하기로 했다니? 이미 여기 와 있잖아."하성우는 나상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현은 알아차렸다. "그래.""외국에서 오래 살았더니 이젠 슬슬 지겹네."하성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침내 알아차렸
바깥이 어두워졌다. 하성우는 만취 상태였다. 진현이 운전기사를 불러 하성우를 차에 태워 보냈다.진현과 나상준은 아직 멀쩡했다.두 사람은 와인바 밖에서 고요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나상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준아, 네가 혜민 씨 이해 좀 해줘. 그녀도 시간이 필요해."그의 말에 나상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진현, 넌 그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하겠지만 난 달라.""전에는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달라, 나도 한계가 있어."진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예전에는 주혜민이 어떤 행동을 하든 나상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변했다.나상준은 신경 쓰이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주혜민이 자기 마음대로 설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이 각자 있는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지켜볼게."나상준은 차에 올라탔고, 차가 빠르게 떠났다.진현은 자리에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차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진현은 예전에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나상준은 백미러로 진현을 바라보았다. 진현은 전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는 나상준의 눈빛이 어둡게 변해 있었다.한편, 호텔.차우미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가끔 졸기도 했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연거푸 하품해댔고 결국 차우미는 책을 덮었다.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12시가 넘었다.또다시 하품한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고요한 어둠이 깃든 밤, 오가는 차들도 없어 한없이 조용했다.그녀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일을 하려 했다.하지만 또다시 하품했고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눈앞이 흐려졌다. 차우미는 휴지로 눈가를 닦았고 더는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몰려왔다.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나상준이
센서 등이 꺼져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 빛이 어렴풋이 들어와 방안의 어둠을 걷어냈다.선명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보였다.복도의 불빛이 방안에 비쳤고 동시에 센서 등이 켜졌다. 나상준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차우미가 보였다.잠옷을 입은 그녀는 학생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나상준을 향해 있었다.깊은 잠이 든 차우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평온했다.그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더니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안으로 들어선 나상준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들고 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나상준은 다리를 꼬고 평온하게 차우미를 바라보았다.어떤 인기척도 내지 않고 눈꺼풀을 움직여 소리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봄날의 바람처럼,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게 일렁거렸다.센서 등이 꺼졌고 침실 안에 정적만 가득했다. 어둠이 방 안에 깃들었다.그는 말없이, 꿈쩍도 하지 않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차우미를 바라보는 나상준은 편안해 보였다.차우미는 한 번 잠들면 이튿날까지 숙면한다.한밤중에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다.차우미는 나상준 걱정에 좀처럼 편하게 잘 수 없었다.나상준의 술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들어왔고 차우미가 잠에서 깼다.눈꺼풀을 살짝 움직여 천천히 눈을 떴다.그녀의 시야로 어둑어둑한 방 안이 들어왔다. 막 잠에서 깬 그녀는 나상준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몽롱한 잠기운에 나상준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그래서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나상준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어둠에 점차 적응하면서 그녀의 시야로 나상준이 또렷하게 들어왔다.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나상준의 어두운 눈빛이 느껴졌다.차우미는 멍한 얼굴로 몇 초간 굳어 있었다.몸을 일으킨 차우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 밖의 가로등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나상준이 돌아온 것을 그제야
평소대로라면 그녀는 자리에 앉아 나상준을 기다렸을 것이다.나상준은 여전히 낮에 빗물에 젖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약을 옆에 올려두고 물을 컵에 따랐다.나상준이 문을 열어 배달원이 건넨 물건을 받고 문을 다시 닫았다.나상준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우미를 바라보았다방안의 불빛이 그녀를 환하게 비추었다.긴 머리를 늘어뜨린 차우미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집합한 것처럼 눈부셨다.나상준은 말없이 자리에서 서서 그녀를 눈 안에 담았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세차게 뛰었다.손가락을 오므리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차우미를 기다란 그림자가 덮었다."이것부터 마셔, 가루약이야."그녀가 약을 푼 컵을 나상준에게 건넸다.하지만 몸을 돌리고 나서야, 나상준과 발끝 정도 닿을 거리에 가까이 선 것을 알아차렸다.차우미는 멍하게 굳었다.나상준이 시선을 내리깔고 차우미를 바라보았다. 차우미의 놀란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 뚜렷하게 티 났다.나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건넨 컵을 받아 컵 안에 든 약을 먹었다.차우미가 속눈썹을 내리깔고 의식적으로 뒷걸음질쳤다.너무 가까워 오히려 불편했다.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한 차우미가 말했다. "줘."그가 건네준 쇼핑백에서 체온계를 꺼냈다.설명서를 따로 보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있다.그녀는 간단히 조작한 뒤 나상준을 쳐다보았다. "열 나는지, 안 나는지 몰라서 샀어. 체온부터 체크해.""음."나상준이 컵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이마에 체온계를 대기 위해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나상준은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래서 발꿈치를 들어야 했다.그러자, 나상준이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덕분에 수월하게 체온을 잴 수 있게 되었다.순간,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 호흡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그녀의 얼굴로 나상준의 술 냄새가 풍겨왔다.차우미는 살짝 당황했다. 몸이
차우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를 낚아챈 나상준의 손을 발견한 차우미는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하성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 강제로 그의 이마에 댔을 때처럼 말이다.혼란스러웠다.그녀는 침착함을 잃고 발목이 삔 것을 잊은 채 황급히 뒷걸음질쳤다.마치 전장에 뛰어든 병사들처럼 비틀거리다가 곧 무게 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지는 것 같았다.차우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의 눈가로 공포가 드러났고 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그녀의 팔을 낚아챈 나상준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자기 쪽으로 당겼고, 순식간에 차우미는 나상준에 품에 안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차우미도 어찌할 새가 없이 일어난 일이다.차우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던 자기가 되려 나상준의 품에 안기게 되자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유연한 그녀의 몸이 그의 가슴팍으로 안겼다. 두 사람은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그녀가 자기 품에 안기는 순간, 나상준의 눈빛이 변했다.잠잠했던 바다에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라도 한 듯, 더는 평온하지 않았다.고요한 침실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센서 등이 밝아졌다가 꺼지기까지, 방 안의 모든 물건이 다시 잠들기까지 고요함만 감돌았다.차우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뛰어댔다. 머리가 뒤죽박죽 뒤엉킨 차우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눈앞을 찾아온 어둠에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정신을 차렸다."어... 미안."체온을 재려다가 되려 이상한 꼴이 되었다.그녀도 예상치 못한 결과다.그녀는 사과하며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차우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고마워."말을 마친 차우미가 손으로 나상준을 가볍게 밀쳤다. 나상준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더 크게 다쳤을 것이다.신중하게 행동하기로 한 차우미는 그를 세게 밀지 않았다. 가볍게 밀쳤다.계속 부상을 당한 채로 생활할 수 없었다.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리
나상준은 매우 세심했다, 차우미도 그에게 고마웠다.몸을 살짝 뒤로 움직인 차우미는 자리에 똑바로 서 있었다. 나상준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그녀는 나상준의 품에서 시종일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자 나상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차우미가 멍한 눈길로 나상준을 쳐다보았다. 나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부축하려 했다. "잡아."차우미는 그제야 뒤에 있는 테이블을 의식적으로 잡았다. 그제야 나상준이 팔을 거두었다. 차우미가 바닥에 안전히 서고 나서야 마음을 내려놓은 것이다.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나상준은 불을 켜기 위해 움직였다. 어두컴컴한 방이 밝아졌다.차우미가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나상준이 갑자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혀버렸다. 차우미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옆을 받치고 몸을 숙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체온."나상준의 야릇한 자세는 마치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뽀뽀라도 할 기세 같았다. 그러나 나상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의 말이다. 차우미는 더는 예민하게 움츠러들지 않았다.자기가 다시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나상준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차우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손에 꼭 쥐고 있던 체온계를 그의 이마에 대고 눌렀다.띡-기계음이 울렸고 체온계에 36.8이라는 수치가 명확하게 떴다."36.8도야, 열 안나." 차우미가 미소 지었다.다행이라 여기며 환하게 웃었다.나상준이 눈을 떴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으로 불현듯 거실에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의 뒤로 춘란 한 그루가 있었다.차우미는 춘란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쿵, 쿵, 쿵...심장 박동 소리가 그의 명치를 때렸다. 세게 부딪치면서 그의 울대까지 진동이 느껴졌다."응."나상준은 후회되었다...
진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온화한 그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혜민아, 난 상준이가 아니야.""너도 알고 있잖아."순간, 주혜민이 억눌렀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 당신은 나상준이 아니야. 당신은..."그녀는 나상준이 진현처럼 그녀를 따듯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주혜민은 다시 술병을 들어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녀의 마음은 상처로 곪았다.진현은 눈물을 흘리는 주혜민을 바라보다가 휴지를 들어 그녀의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혜민아, 그만 내려놔."순간, 술을 마시던 주혜민의 행동이 멈추었다.고개를 돌려 실눈을 뜨고 진현을 쳐다보았다.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온대 간대 사라졌다. 차가운 모습만 남아 있었다. "내려 놓으라니? 진현, 무슨 뜻이야?"급격히 표정이 변한 주혜민 때문에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던 진현도 손을 거두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남자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랑 같이 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잠자리 가지고 싶어해. 그 여자랑 결혼하고 싶고, 평생을 살고 싶어하지.""그런데 상준이는...""닥쳐!"주혜민은 진현의 말을 중도에 끊어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주혜민이 문을 가리키며 분노했다. "꺼져."진현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예상이라도 한 듯 놀라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찍 쉬어."진현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주혜민은 방문이 닫힐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손에 든 병을 바닥에 힘껏 내리쳤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이 산산이 조각났다.방문을 노려보는 주혜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과 마음에 화가 차올라 당장에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좋아하는 여자랑 함께 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잠자리를 갖고 싶은 게 남자라고? 결혼하고 평생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허. 나상준이 그 여자랑 결혼한 이유가 그녀를 사랑해서라고? 그녀를 사랑하는데, 왜 3년간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