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목은 잠시 멍해졌다가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네. 무슨 좋은 일이 있어?”고다빈은 이 소리를 듣고서야 진시목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인터넷에서 고다정과 여준재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보고 속시원해서요. 참, 알고 있었어요?”진시목은 깨고소해 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 일을 당신이 꾸민 건 아니지?”“그럴 리가요.”고다빈은 즉시 부인하고 또 자신을 위해 변명했다.“내가 지금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내가 뭘 하는지, 어디 가는지, 누구와 연락하는지 다 당신한테 보고하잖아요. 집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당신을 도와서 나를 감시하는데, 내가 한 짓이라면 당신이 모를 수 있겠어요?”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고다빈은 자기의 삶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진씨 집안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곳곳은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진시목이 이혼으로 협박할까 봐 감히 화도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혼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진시목에게 빼앗긴 주식을 되찾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이혼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자기의 아버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회사가 위기에 빠진 지금, 그녀가 진시목과 이혼한다면 틀림없이 집안 이익을 위해 그녀를 재혼시킬 것이다.그녀와 결혼할 사람은 가정 형편이 좋은 것 외에 다른 건 볼품없을 것이다.고다빈은 생각할수록 원망스러웠다.그녀는 진시목이 기왕 사기 결혼을 선택했으면 왜 끝까지 속이지 않았는지 원망했다.물론 그녀는 고다정이 더 원망스러웠다.그년이 아니었으면 명예도, 돈도 없는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을 것이다.진시목은 고다빈의 속마음을 몰랐다.그는 고다빈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 잠시 의심을 멈추고 경고했다.“고다정의 일에 당신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집안에 말썽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당신도 잘 알지
또한 여준재는 도대체 어떤 사람 혹은 세력이 YS그룹을 공공연히 배신하도록 공급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결단을 내렸다.“공급사 쪽은, 그들이 계약을 위반하고 협력을 중단한 것이니 법무팀을 보내 배상 문제를 논의하도록 해. 납품 문제는, 네가 내일 고객사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도록 해. 현존 물량을 받아들이면 YS그룹이 신세 한번 지는 걸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약금을 전액 돌려주되 납품은 하지 않는 걸로 정리해.”“네.”구남준이 대답한 후 전화를 끊으려 하자 여준재가 그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연구소 쪽 조사는 어떻게 됐어? 뭔가 알아낸 게 있어?”“아직 쓸만한 정보는 없어요. 하지만 인원을 늘려 추적하고 있습니다.”구남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자 여준재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고다정은 그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걱정스레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별일 아니에요. 내가 해결할 수 있어요.”여준재는 고다정이 걱정할까 봐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래도 고다정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했다.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지만 마음이 무거워져 입술을 깨물었다.여준재는 배후 인물이 누군지 생각하느라고, 고다정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빌라에 돌아왔다.거실에 들어서니 거실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고, 소파에 강말숙과 여준재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외할머니, 이렇게 늦었는데 왜 쉬지 않으세요?”고다정은 걱정스레 외할머니에게 말을 건넨 후, 여준재 부모님을 바라보며 물었다.“여 회장님, 심 여사님, 두 분은 언제 오셨어요?”두 분이 대답하기 전에 강말숙이 말했다.“너한테 일이 생긴 후, 두 분이 걱정돼서 찾아오셨어. 기자들이 학교에 가서 애들을 괴롭힐까 봐 준이, 윤이도 데려오시고.”이 말을 들은 고다정이 감동하며 두 어르신을 바라보았다.오늘 연달아 일이
여기까지 생각한 고다정은 이따 방에 올라가면 채성휘한테 연락해 병원 쪽 상황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눈 후, 고다정은 외할머니와 여준재 부모님에게 쉬라고 재촉했다.시간이 늦었고 어르신들이 연세도 많아서 잘 쉬지 못하면 몸에 문제가 생기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방에 돌아온 후, 고다정은 전화해야 하니 먼저 씻으라고 여준재한테 말하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창가로 갔다.이를 본 여준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돌아서서 욕실에 들어갔다.다만 고다정이 채성휘에게 전화했지만 줄곧 받는 사람이 없었다.몇 번 연속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받지 않아서 그녀는 덜컥 불안해졌다.채성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고다정은 생각할수록 그런 것 같았다.‘안 되겠어. 병원에 가서 무슨 상황인지 봐야겠어.’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옷걸이에서 방금 걸어둔 코트와 핸드백을 들고 출발 준비를 했다.욕실 앞을 지날 때 그녀는 멈춰서서 안에 대고 말했다.“준재 씨, 채 선생 쪽에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걱정돼서 병원에 가봐야겠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떠나려고 했다.그 순간 여준재가 하반신에 목욕 수건을 두른 채 황급히 걸어 나와 그녀를 붙잡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이렇게 늦게 당신 혼자 병원에 가면 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같이 가요.”이 말을 남기고 여준재는 바로 깨끗한 옷을 찾으러 갔다.그가 옷을 갈아입을 때 침대 협탁 위에 놓인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여준재는 서둘러 옷을 입느라 고다정에게 말했다.“내 전화를 받아봐요.”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가 보니 구남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전화기에서 구남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병원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망자 가족이 몰래 시신을 빼돌려 화장하려 하는 걸 다행히 우리 쪽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뭐래도 화장해야 한다며 억지부리고 합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시신을 화장한다고? 가족들이 문제 있네
여준재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속도를 냈다. 20분도 안 돼서 두 사람은 병원에 도착했다.구남준이 이미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한 후 두 사람을 병원의 영안실로 안내했다.지금 사망자 가족을 영안실 복도에서 못 가게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그들이 거의 도착했을 때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우리를 풀어줘.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잡아둬?”“계속 우리를 잡고 있다가 좋은 시산을 놓치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몰라? 비켜, 비키라고!”한 중년 남자가 화가 치밀어 올라 경호원들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아쉽게도 이 중년 남자는 겉만 세보이는 건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온 힘을 다했지만 경호원을 한 발짝도 밀어내지 못했다.이때 그 옆에 있던 중년 남자의 아들이 대문으로 들어오는 여준재 일행을 발견하고 그에게 귀띔했다.“아버지, 누가 왔어요. 그 연구소 여자예요.”아들은 고다정을 한눈에 알아봤다.이 말을 들은 중년 남자는 무심코 대문 쪽을 바라보았고, 정말 고다정이 보이자 양심에 찔린 듯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내 조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우리를 여기에 잡아둬? 우리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거야?”눈을 부릅뜨고 고다정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죠. 당신이 사망자 시신을 몰래 빼돌려 화장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제가 왜 당신들을 잡고 있으라 했겠어요?”이 말을 들은 중년 남자는 눈썹이 심하게 흔들렸다.너무 긴장해서인지 옆으로 드리워진 그의 두 손이 가볍게 떨렸다.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중년 남자는 가슴이 떨렸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매서운 눈빛으로 고다정을 쏘아보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무슨 허튼소리야. 당신들이 우리 가족이 없을 때 몰래 시체를 해부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다.그들은 복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형식적으로 물었다.“여기 무슨 일이 있었어요?”이를 본 여준재가 구남준에게 눈짓하자, 구남준이 알았다는 듯 나서서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이 두 사람은 사망자의 삼촌과 사촌동생인데, 사망자가 우리 작은 사모님의 연구소에서 개발한 약품을 복용하고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이 사망자가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해서 사람을 파견해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한밤중에 와서 사망자를 훔쳐 화장하려고 했습니다.”“훔치다니요? 우리는 떳떳합니다. 고인을 안장하는 것이 중요해서 길시에 조카를 데려가 화장하고 안장하려 했을 뿐입니다.”중년 남자는 완강하게 부인하며 자기들이 시신을 훔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경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만스럽게 말했다.“이건 조사 중인 사망 사건입니다. 사건 담당 경찰관이 사망자는 중요한 증거가 되니 사건 종결 전에 화장하거나 매장할 수 없다고 말해주지 않았나요?”이 말을 들은 중년 남자는 반박할 수 없었다.이때 고다정이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경찰관님, 이 사람들이 사망자 시신을 훔치려 한 것으로 볼 때, 시신에 사건 관련 결정적 증거가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저희는 강제 부검을 신청하고, 모든 결과를 책임지겠습니다.”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중년 남자는 깜짝 놀란 듯 안색이 돌변했다.“부검은 안 돼. 내 조카가 당신들 때문에 죽은 것도 불쌍한데 시체 해부까지 하려고 해? 역시 흑심 자본가였어.”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급히 자기 아들에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라고 눈짓했다.아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즉시 울며 소란을 피웠다.“불쌍한 우리 사촌형,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는데, 이 속이 검은 사람들이 시신도 가만 안 둬. 법이 안중에 없는 건가?”“경찰이 돈에 눈이 멀어 서민을 돕지 않고 돈 많은 자본가를 돕고 있어. 불쌍한 우리 조카, 삼촌이 공정한
상황 파악이 된 듯한 부자를 보며 고다정이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이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채성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부자는 그 사진을 보더니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본 적이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부인했다.“본 적 없어.”당연히 그들이 거짓말한다는 걸 알아차린 고다정은 눈빛이 차가워졌다.“한 번 더 기회를 줄게요. 정말 본 적이 없어요?”“본 적 없다고. 이 여자가 왜 이래? 말귀를 못 알아들어?”말이 많으면 착오가 많을까 봐 그러는지 중년 남자는 성내는 척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이를 본 고다정은 저절로 화가 치밀어올랐다.옆에 있던 여준재도 안색이 어두워진 채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군.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이들을 잘 감시하고 있어.”이 말을 남기고 그는 부자가 어떤 표정인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다정을 끌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예상대로 그들이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포효하는 듯한 부자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젠장, 당신들이 뭔데 우릴 감시해?”“우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그러나 고다정과 여준재는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다정은 자기를 끌고 가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하려고요?”“채성휘가 병원에서 실종됐다면 아직 병원에 있을 거예요. 이들 부자가 어디다 숨겨놨는지 모를 뿐이죠. 병원 측에 연락해 우리가 수색할 수 있게 허락받을 거예요.”여준재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고다정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 여준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그럼 부탁드릴게요.”“우리 사이에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있어요?”여준재가 불만 있는 척하며 눈을 흘겼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당연히 남자의 뜻을 알기에 눈을 깜박거리며 비위를 맞춰주었다.“당연히 필요 없죠. 그냥 말이 빗나갔어요.”“당신은 내가 벌주지 못하는 걸 너무 잘 알아.”여준재가 사랑스럽다는 듯 고다정의 이마를 톡톡 치더니 말을 이었다.“시간이 늦었
고다정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여준재는 휴대폰을 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요?”고다정은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것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여준재도 그녀의 걱정을 알기에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병원 쪽에서 채성휘를 찾지 못했대요.”“어떻게 그럴 수 있죠?”고다정은 의외라고 생각했다.참다못해 그녀는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걸까요?”여준재가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했다.“어쩌면요. 근데 그 부자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그들이 말할까요?”고다정은 어젯밤에 그 부자가 했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사실대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여준재는 고다정의 생각을 알아채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코웃음을 쳤다.“골탕을 좀 먹이면 자연히 뭐든 다 말하게 되어 있어요.”그는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부자가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고다정은 그의 이 말을 듣고 다소 주저했다.“사사로이 고문하는 것은 안 돼요. 만에 하나 그들이 나가서 말하면 당신과 YS그룹 이미지에 좋지 않아요.”그러나 여준재는 개의치 않았다.그에게는 그 부자의 입을 막을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다만 그가 이 말을 하기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구남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대표님, 부검 결과가 나왔습니다.”“어떻게 나왔어?”여준재가 표정이 엄숙해지더니 즉시 캐물었고, 구남준이 상황을 보고했다.“사망자는 작은 사모님 연구소의 약품을 먹고 죽은 것이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소에 중독된 것입니다. 그 독소에 중독되면 시체가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중독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약을 먹고 죽은 줄로 알았나 봅니다. 경찰은 어젯밤에 그 부자가 시신을 화장하려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 그들이 뭔가 알고 있다고 의심해 체포하러 나섰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제가 대표님 허락 없이 그들을 기절시켜 돌려보냈습니다.”“잘했
경찰은 소년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얼굴빛이 엄숙해지더니 다시 물었다.“사망자가 왜 스스로 독약을 주사했어? 아는 것이 있으면 사실대로 진술해. 협조하는 정도에 따라 형벌을 줄여줄 수 있으니까.”“경찰 아저씨, 저는 정말 잘 몰라요. 사촌 형이 우리를 불러놓고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며 부자가 될 기회가 있다고 말했어요. 자기가 죽은 후 그 연구소 약품을 먹고 죽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 일을 크게 만들고, 그 연구소 책임자를 찾아가 배상을 요구하라고 했어요.”소년은 울상이 되어 자기가 아는 상황을 전부 털어놓았다.그래도 경찰은 그가 일부 단서를 숨겼다고 의심하며 거듭 취조했다.소년은 취조하는 경찰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제가 아는 건 다 말했어요. 이것밖에 없어요. 믿지 않으면 저도 방법이 없어요.”소년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낼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취조하던 경찰 두 명이 눈을 마주치더니 그중 한 명은 물건을 챙겨 나가버렸다.그가 나가니 소년의 머리도 빠르게 돌아갔다.그는 남은 한 명의 경찰에게 물었다.“경찰 아저씨, 진술이 필요한 건 다 진술했는데, 언제 저를 풀어줄 수 있나요?”“나가고 싶어? 사건이 종결된 후 네가 이 사건과 연관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풀어줄 수 있어. 지금은 여기 조용히 있어. 소리 지르며 힘을 빼지 말고.”소년이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경찰은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날카로운 눈빛에 마주한 소년은 떠들려던 마음을 접고 바로 조용해졌다.여유로운 이쪽과 달리 중년 남자 쪽은 분위기가 무거웠다.중년 남자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고 있어 취조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이때 문이 열리면서 소년 쪽에서 나온 경찰이 이쪽 취조실에 걸어 들어왔다.그는 취조하고 있는 경찰 옆에 가더니 고개를 숙이고 몇 마디 귀엣말을 했다. 그러자 약간 조급했던 그 경찰은 눈이 반짝 빛나더니 다시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아들이 이미 자백했어요. 사망자가 초심 약품을 먹고 죽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