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이 기획서를 확인해 보니 두 개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그녀와 채성휘가 각각 따로 팀을 이끌어 약 성분을 배합해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해 내는 것이다.팀을 두 팀으로 나뉘었기에 두 팀 간의 경쟁 구도도 끌어내 더욱 많은 새로운 레시피도 연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하여 이렇게 팀을 짠 게 싫은 건 또 아니다.하지만 좋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왜냐하면 고다정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비록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지만, 아직 그걸 보완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하여 괜히 자신이 팀을 이끌어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방해할까 봐 걱정되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기획서를 내려놓고 채성휘를 바라봤다.“기획서 괜찮네요. 우리 연구원들의 새로운 레시피에 대한 연구를 더 광범위하게 자극할 수 있을 건 같지만…”그녀는 갑자기 말을 돌렸다.“저를 2팀 팀장으로 둔 게 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저는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어거지로 보고 배운 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뒤떨어질 거예요. 심지어 연구팀에 누를 끼칠 수도 있고요.”그 말을 들은 채성휘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고다정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저는 고다정 씨가 바로 동의할 줄 알았는데. 혹시 전에 저랑 겨뤄서 진 것 때문에 그래요?”채성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가 오해할 만도 하다. 고다정이 전에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일정한 이념만 있으면 그것을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 이념이 옳은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그 질문에 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조금 전에 말하다시피, 제 개인의 전문적이지 못한 지식으로 모든 사람의 연구 과정에 누를 끼칠가봐 걱정돼서 그래요.”“그러면 연구하면서 배울 수 있잖아요. 고다정 씨가 팀장이라고 해도, 문제가 있으면 저한테 와서 물어봐도 되고, 고다정 씨 팀의 다른 연구원들한테 물어봐도 되고요.”채성휘는 고다정을 설득하며 이어서 말했다.“
몇 분 뒤, 소담이 삼 층 도시락을 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그녀 또한 소파에 앉아있는 채성휘를 보았고, 바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손에 있는 도시락통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고다정에게 말했다.“사모님, 식사하세요.”“네.”고다정은 그녀의 말에 응한 뒤 채성휘를 바라보며 예의상으로 한마디 건넸다.“채 선생님, 도시락 양도 많은 것 같은데, 아니면 같이 먹을래요?”이때 소담도 한마디 더 보탰다.“채 선생님도 남아서 같이 드실 수 있습니다. 저희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주변 사람들과도 같이 드실 거라면서 삼 인분 요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저런 말 까지 나왔는데 어떻게 남아서 같이 먹을 수 있겠는가?특히 소담의 말끝마다 사모님 소리에 그는 더욱 불편해 났다.“저는 됐어요. 고다정 씨 일단 점심 드시고, 저녁쯤 택배가 도착하면 제가 가져다드릴게요.”말을 마친 뒤 그는 고다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소담은 다급히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흘겼다.‘고작 이 정도 기량으로 감히 우리집 사모님을 넘보다니. 진짜 헛된 망상을 하고 있군.’하지만 고다정은 소담의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락량에 시선을 뺏겼다.“뭔 반찬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어요?”그녀는 조금 전 소담이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채성휘를 남긴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여준재가 통 크게 채성휘까지 같이 먹을 수 있게 도시락을 사주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예상외로 그녀의 생각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이윽고 소담이 답했다.“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채 선생님이 사모님이랑 밖에서 식사하기 좋아하신다고요. 그리고 사모님이 혼자서 재미없어하실까 봐 쉐프님더러 요리를 많이 준비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모님이 채 선생님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사모님도 덜 심심할 거고요.”“…”고다정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게다가 이런 말 또한 여준재만이 할 수 있는 소리이긴 하다.그와 동시에 그녀는 채성휘가 먼저 자리를 떠난 게
“이건 엄마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 학습 자료야.”고다정이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이때 여준재가 물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물 마시고 숨 좀 돌려요.”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 상자를 보더니 찬성하지 않는듯한 태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이렇게 무거운 거 있는데 왜 저 안 불렀어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물을 마시다 말고 여준재를 향해 웃어 보였다.“까먹었어요.”그녀는 진짜로 까먹은 것이다. 전부터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했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했다.그녀의 표정을 본 여준재는 그녀의 진심을 눈치채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앞으로 잊지 마요.”“알겠어요.”고다정은 그에게 환심을 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두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애정행각이 기쁘기도 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다.하윤이는 고다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이 학습자료 설마 나랑 오빠한테 주는 거 아니지?”“엄마, 우리는 이거 필요 없어요. 엄마도 알잖아요. 엄마의 반대만 아니면 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에서 공부할 수도 있다고요.”하준이도 옆에서 손으로 4학년을 가리키며 그 말에 가담했다.고다정은 두 아이의 속셈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이거 누가 너희들 거래. 이건 엄마 학습자료야.”비록 두 아이에게 장난하고 싶었지만, 전에 장난이 심해 두 아이가 난리를 피운 걸 생각하고는 그 마음을 접고 사실대로 답했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미 예상을 한 듯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지만 두 아이는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이거 다 엄마가 공부해야 하는거야?”“엄마는 이미 어른인데 왜 공부하는 거지?”하윤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웃으며 하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엄마 어른 맞는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거 잘 알아둬. 옛말에 늙어 죽을 때까지도 배운다는운다는 말 있잖니? 즉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거야. 알겠지?”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두 아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주가 지났다.비록 여준재가 매일 사랑의 도시락을 사주긴 하지만, 고다정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늦게 퇴근하며 바쁘게 지냈기에 전체적으로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여준재는 야위어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청 속상했다.그는 고다정에게 여러 번이나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녀는 말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잊어버리곤 했다.그날도 고다정은 연구소에서 저녁까지 일한 뒤에야 퇴근했다.시간도 이미 늦은지라 그녀는 여준재가 먼저 잘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까맣던 방안이 순식간에 밝아질 줄 누가 알았으랴.게다가 이미 잠에 든 줄로만 알았던 여준재가 침대에 앉아서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흐흐,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잤어요?”고다정은 멋쩍게 여준재에게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여준재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 어둡고 깊은 눈동자를 보니 소름이 돋는 듯 했다.더 중요한 건 여준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없이 고다정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 고다정은 더욱 불안해졌다.이윽고 그녀는 뭐가 생각난 듯 여준재 앞으로 걸어가 겸허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그렇게 무섭게 좀 보지 마요. 저도 잘못한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 꼭 일찍이 집에 올게요.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 이렇게 맹세할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맹세의 제스처도 취해 보였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제야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그래요? 그러면 그 일찍이라는게 몇 시인지 말해봐요. 10시나 11시나 다정 씨에게는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12시도 일찍하다고 느끼겠네요?”“아…”그 고다정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왜냐하면 그동안 여준재가 통금시간을 정했어도, 그녀는 그걸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점점 더 굳어가는 여준재의 표정을 보며 고다정은 얼른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약속할게요. 앞으로는 10시… 아니 12시에는 집에
고급 병실에는 하준이가 다소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는 해열 패치를 하고 있었다.하윤이는 그 옆에 앉아 다소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오빠, 어때? 아직도 머리 아파?”“이젠 그렇게 아프지 않아. 걱정하지 마.”하준이는 마치 어른처럼 동생을 안심시켜줬다.그 둘의 우애 깊은 모습에 강말숙은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그러고는 여준재를 바라보며 다소 시름이 놓이지 않는 듯 말했다.“이거, 다정이 한테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집에 누구도 없어 다정이가 의심할 텐데.”“하준이가 지금은 그나마 괜찮아졌지만, 의사 선생님이 하룻밤은 병원에서 더 지켜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가서 이 집사님에게 말씀드리면 돼요. 우리 부모님이 손주들 보고 싶다고 해서 친할머니네 집에 보냈다고요. ”여준재는 자기 생각에 대해 털어놓았다.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열며 들어왔고, 그건 바로 고다정이였다.“준이야!”고다정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하준이를 바라보았고, 속상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그들은 고다정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다정아, 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강말숙이 놀란 듯 물었다.여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도 강말숙과 똑같이 놀랐다.아이들도 약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며 낮게 그녀를 불렀다.“엄마.”고다정은 아이들의 표정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고, 눈에는 오직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준이의 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준이의 이마를 만지려 했지만 해열 패치를 하고 있는걸 보고는 생각을 바꿔 준이의 얼굴을 만졌다. 얼굴을 만져보니 아직 열이 조금 남아있었다.“어떻게 열이 날 수 있어? 설마 어제저녁에 잘 때 너희들 창문 열고 잤어?”비록 거의 여름이 되어가고 있지만 저녁 기온은 여전히 낮다. 하여 그녀는 계속 두 아이더러 저녁에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었다.고다정의 말을 들은 두 아이는 아까보다 더 찔렸다.
자책감에 휩싸인 고다정을 보며 여준재는 살며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위로했다.“자책할 필요 없어요. 다정 씨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고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그녀는 그동안 연구소의 일 때문에 두 아이와 가정, 심지어 여준재한테도 소홀했다.하지만 여준재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마음 놓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아까 여준재한테 화를 낸 거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했어요. 아까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두 아이한테 소홀해 놓고는, 준재 씨가 저 속였다고 화내서 미안해요.”고다정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에게 사과했다.후회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본 여준재는 웃어 보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더욱 다정하게 물었다.“다정 씨 바보 아니에요? 그게 왜 사과할 일이에요. 그리고 제가 다정 씨한테 아이가 아픈 걸 속였으니 엄마로서 다급함에 화를 내는 건 정상이죠.”하지만 고다정의 마음은 여전히 죄책감에 휩싸였다.여준재도 그걸 눈치채고는 그녀를 위로했다.“그렇게 미안하면, 그 프로젝트 끝나고 나와 아이들한테 제대로 보상해줘요.”“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앞으로는 가능한 집에 일찍 들어갈게요.”고다정은 조금 전 생각해놓은 계획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었다.비록 연구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아이와 가족, 그리고 배우자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여준재는 무언갈 결심한듯한 그녀의 모습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또한 고다정이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이다.그렇게 그 둘은 병원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고다정은 하준이가 또다시 열이 날까 봐, 그동안 자주 하준이의 체온도 체크해줬다.다행히 거의 해가 뜰 대쯤, 하준이의 체온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고다정도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여
이른 아침, 고다정은 채성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기 너머로 채성휘의 목소리는 아주 다급해 보였다.“고다정 씨, 방금 생산부 실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HS 그룹에서 어젯밤에 보내기로 한 약초가 오늘 아침에 도착하지 않았대요. 전화로 물어보니, HS 쪽에서 합작을 종료했다고 하던데요? 지금 우리 쪽에 3일 후에 납품해야 할 주문도 있어요. 처음부터 다정 씨와 체결한 계약이니, 다정 씨가 그쪽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안 돼요? 대체 왜 그러는지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삽시간에 멍해졌다.HS 그룹에서 말을 번복하고 계약위반 후 공급을 끊어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린 뒤 심각하게 물었다.“제가 한번 그쪽에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그런데 저희 이미 모든 희망을 HS 그룹에 걸었잖아요? 지금이라도 얼른 다른 약재 업체에 전화해서 저희한테 어느 정도의 약재를 줄 수 없는지 물어보세요. 약재가 비싸더라도 괜찮으니 납품일은 꼭 지켜야 해요. 이건 우리 연구소 명의까지 관련된 일이니까요.”“그 부분은 저도 잘 알아요. 다정 씨는 일단 HS 그룹에 연락해봐요. 저도 아는 사람 통해서 약재 물어볼게요.”말은 마친 뒤 채성휘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한편 고다정은 바로 계약서 체결을 담당했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 연결음이 한참을 울려도 상대 쪽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때마침 여준재가 욕실에서 나오며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고다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요? ”“HS 그룹에서 갑자기 계약을 중지했어요. 원래는 어제 도착해야 하는 약재가 오늘 아침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대요. 거기 담당자한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요.”고다정은 속임 없이 그 상황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그 말을 들은 여준재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누가 뭐라고 하든 HS 그룹은 그가 고다정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그의 일 처리 능력이 좋지 못하다는 걸 나타내는 것
비록 윗선에서 이미 그에게 대충 핑계를 대라고는 했지만, 여 씨 그룹에서 이 일에 끼어드는 한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이윽고 이 실장이 처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구 비서실장님, 물건 공급을 멈춘 이유는 그쪽 사모님이 저희 대표님 약혼녀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밖에 말해주지 못하겠네요.”“그쪽 대표님 약혼녀가 누구인데요?”구남준이 바로 되묻자 이 실장은 완곡하게 거절했다.“그것까지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여 씨 그룹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저희 대표님 약혼녀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여 씨 그룹에서는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제 말 맞죠?”그 말을 들은 구남준은 자신이 되묻는다고 해도 더는 그에게서 별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눈치챘다.하여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캐냈기에 예의상으로 몇 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여준재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고 문자를 몇 통 보낸 뒤에야 여준재에게 연락했다.“대표님, 정보 알아냈습니다. HS 그룹에 말로는 사모님이 그 그룹 대표님의 약혼녀에게 미움을 사 약재 공급을 멈춘 거라고 합니다.”“현진우 약혼녀?”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누군데?”구남준은 솔직하게 답했다.“그쪽에서 그들 대표님 약혼녀가 누군지는 끝까지 말하려 하지 않아 저도 지금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게 했습니다. 늦어도 오후쯤에는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그래, 알겠어. 제대로 확인해보고 다시 보고해. 그리고 사람 시켜서 적당한 약재 공급업체가 있는지도 한번 알아보고.”여준재가 그에게 업무를 분부하자 구남준은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그 일을 제대로 조사해보고 고다정에게 알려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이 일에 대해 중시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냥 바로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실제로도 고다정은 그 일에 대해 엄청 신경 쓰고 있었고 온 오전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이때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