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은 잠시 멍해졌다. 역시 그녀가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채성휘가 이미 짐작했다.하지만 그가 눈치챘으니 그녀는 그냥 말하기로 했다. “제 실험에 필요한 장비는 PHG 4 세대만 남았는데, 이 장비는 전국에서 ZS만 생산하고 판매하더군요. 어젯밤 여준재가 ZS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줬는데, 그들은 성휘 씨가 연구소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매 권한을 준다고 했어요.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성휘 씨더러 연구소를 떠나라는 뜻이 아니에요. 성휘 씨는 스승님이 특별히 모셔온 연구 전문가니까요. 전화를 건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조정 방법이 있을지 물어보고 싶어서였어요.”“이 문제로 다정 씨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 문제는 제가 일으킨 거니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채성휘가 사과했다.고다정은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의 주인공은 채성휘였으니까.이후 두 사람은 의학에 관한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고, 채성휘가 아쉬운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고다정은 채성휘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그와의 대화가 아쉬웠다. 스승님이 그녀에게 소개한 이 협력자는 정말로 좋은 선생이자 동료였다.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채성휘에게서 새로운 견해를 얻을 수 있었다.역시 스승님이 선택한 사람은 보통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녀는 채성휘와 더 많은 의학 이론에 대해 소통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채성휘는 전화를 끊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는 정한해가 그렇게 미친 듯이 굴 줄 몰랐다. 그를 겨냥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다정은 어디에도 엮이지 않았는데 왜 그녀를 건드렸을까?그는 핸드폰으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한 번 울리고 나서 연결됐고, 전화 속에서는 비웃는 듯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어, 이게 웬일이야. 채 전문가님이 시간을 내어 저에게 전화를 주다니.”“정한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채성휘는 그와 담소를 나눌 인내심이 없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정한해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추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
서은진은 정한해의 결심을 모르고 있었다.그 남자가 자신에게 일으킨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고, 또 한편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사라졌고, 그녀는 그 감정을 붙잡지 못했다.그녀의 생각은 다른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고다정은 서은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오늘은 바쁘지 않나 봐요? 전화할 시간이 있나요?”그녀는 알고 있다. 프로젝트를 맡은 전문가로서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눈을 뜨자마자 그날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했으니 말이다.서은진은 고다정의 놀람과 기쁨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더욱 미안한 마음이 커졌고,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녀의 침묵에 고다정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다정 씨,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서은진이 한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심으로 말했다.고다정은 혼란스러워했다.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죠?”“최근에 연구소를 세우고 의료 장비를 구매하는데 ZS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었다고 들었어요."서은진이 조용히 설명했다.고다정은 듣고 나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은진 씨가 ZS 사람들하고 친한가요?”“친하진 않지만, 제가 연구소를 그만두고 채성휘를 포기했다는 걸 부모님이 알고 저를 위해 결혼을 정해줬어요. 그 사람이 바로 ZS의 정한해예요.”서은진이 말하다가 잠시 멈추고 계속했다. “정한해는 제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저한테 계속 구애해왔어요...”나머지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였다.길게 말을 한다면 정한해를 변호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다정은 그 사건의 이유를 이해했다.그녀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답답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ZS는 연구소와 채성휘 씨가 관련이 있다고 듣고 일부러 방해를 한 거군요.”“그가 그럴 줄은 몰랐어요. 이미 그에게 연구소를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서은진은 계속 사과
눈 깜박할 사이에 반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연구소의 장식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고다정은 점점 바빠졌다.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은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그녀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처리하는 일이기 때문에 절차는 더욱 복잡했고 고다정은 매일 심사가 필요한 서류를 들고 여기저기로 다녔다.심지어 때때로 제출한 서류가 불합격하여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그 결과, 일주일도 안 되어 고다정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여준재는 이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두 아이들도 엄마가 최근에 지쳐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다정이 피곤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자 아이들은 곧바로 맞이했다.“엄마, 돌아왔네요. 얼른 앉아서 쉬어요.”하윤이가 고다정의 손을 잡고 소파로 데려가 앉혔고 하준은 옆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엄마, 물 마시고 쉬세요.”“응.”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잔을 들어 마셨다.그녀는 마침 목이 말랐다.오늘도 서류 한 부분이 불합격하여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했고, 하루 종일 바깥에서 돌아다녔다.시간이 촉박하여 물도 많이 마시지 못했고, 화장실 가는 시간이 지체될까 봐 걱정했다.공무원들도 자신의 일이 있어서 항상 시간이 있지는 않았다.아이들은 엄마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엄마, 다리를 주물러 드릴게요.”“오빠가 왼쪽 다리를 주물러 주고, 나는 오른쪽 다리를 주물러 줄게요. 아빠, 엄마의 어깨를 마사지해 주세요.”하윤이가 어른처럼 일을 분담했다.고다정은 웃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왔다.강말숙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띠고 조용히 옆에 앉아 따뜻한 장면을 방해하지 않았다.고다정은 잠시 여준재와 준이, 윤이의 돌봄을 받았지만 곧 그들에게 멈추라고 했다.“됐어, 이제 그만해. 너희도 하루 종일 바쁘게 지냈으니 여기 앉아.”“엄마, 언제쯤 바쁘지 않게 될까요?”아이들은 말을 듣고 행동을 멈추고는 고다정 옆에 앉았다.고다정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아직 좀 더 걸릴 거야
여준재의 도움으로 고다정은 연구원 설립 절차를 이틀 만에 마쳤다.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많은 일이 남아 있었다.연구원의 사무용품 구매, 일반 직원 채용, 그리고 장기간 협력할 약재 공급업자를 찾아야 했다.첫 번째 두 가지는 연구소가 완성될 때까지 아직 반 달 정도 남아 있어 급하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약재 공급업자는 매우 중요했다.한의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품질 좋고 귀한 약재가 장기간 필요했다.일반적으로 좋은 약재는 약품 브랜드나 약상들이 관리하고 있어, 그들에게서 일부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하지만 고다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녀의 뒤에는 여 씨 그룹이 있었고, 그녀는 두세 개의 한의약 가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그녀에게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그날, 그녀는 자발적으로 신수 노인과 문성 노인을 만났다.두 사람도 고다정이 최근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고다정의 초대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따라서 세 사람은 만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두 분을 찾아온 것은 두 분과 협력하고 있는 약재상을 소개해주시길 바라서입니다.”고다정이 직접 목적을 밝혔다.신수 노인은 듣고 문성 노인을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그거 봐, 내 말이 맞았지? 이 애가 갑자기 우리를 초대한 건 분명히 이 일 때문일 거야.”문성 노인은 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이 일은 이미 신수 노인과 나도 예상했고, 너를 위해 미리 준비해놨어.”그 말을 하고 나서 문성 노인은 옆에서 문서를 꺼내 고다정에게 건네주었다.신수 노인은 문성 노인의 행동에 당황했다. “이 노인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 원래 계획대로 고다정을 조금 놀리고 나서 줄 생각이었잖아.”“방금 네가 그렇게 우쭐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문성 노인이 말하며 신수 노인에게 그의 문서를 가져오라고 재촉했고 신수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준비한 문서를 고다정 앞에 내밀었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작은 여인을 보며 여준재가 피식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다정이 그 모습을 보고는 그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잠깐 잊어버렸어요. 약속할게요.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요.”고다정의 애교에 그는 결국 공략당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고다정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당신이 말한 것처럼, 다음번은 없을 거예요. 아니면 매일 지켜보다가 정시에 밥을 먹게 할 거라고요.” 그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코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고 고다정은 눈을 깜빡이며 깜찍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준재 씨 매일 나랑 밥을 먹으러 오는 게 어떨까요? 그런 벌칙이 나에게 딱 맞을 것 같은데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여준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고 동시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다정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앞으로 가능한 매일 다정 씨와 함께 식사하려고 노력할게요.”“난 방금 장난친 거예요.” 고다정은 서둘러 말을 고쳤다. 그녀는 여준재가 평소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고, 때때로 식사 시간조차 짜내야 했다.여준재는 고다정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날 이후 고다정은 여전히 연구소의 일로 바빴다. 연구소가 곧 완공될 것처럼 보이자,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는 할 일이 없어졌다.이에, 고다정은 주말에 두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기로 계획했다. 연구소가 완공되면, 그녀의 활동은 대부분 연구 개발 프로젝트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주말, 놀러 갈 생각에 두 아이는 흥분해서 일찍 일어났고 덩달아 고다정과 여준재도 이른 아침에 깨어났다.간단한 아침 식사 후, 가족은 어린이 놀이공원으로 향했다.이것은 새해 이후 두 아이가 처음으로 놀이공원에서 놀아본 것이었고, 주변에는 많은 새로운 놀이기구들이 추가되었다.들어가자마자, 두 아이는 흥분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무엇이든 하고 싶어 했다.고다정도 이를 막지 않았고 몇몇 위험하지 않은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두 어르신은 각자 아이들을 안고 거실로 돌아갔고 고다정과 여준재는 손을 잡고 뒤따랐다. 붉은 석양이 그들을 비추며, 그림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풍경을 만들었다.집에 들어간 후, 가족들은 잠시 웃고 떠들다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중, 여진성이 고다정에게 물었다. “최근에 연구소를 세우고 있다고 들었어요.”“그건 제가 세운 것은 아니고, 그저 스승님의 부탁을 받은 것일 뿐이에요.”고다정은 여진성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몰랐지만, 정직하게 대답했다.여진성과 심해영은 놀란 듯했다. “스승님?”“네, 제 스승님이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스승님은 해외에도 연구소가 있어서 지금 중요한 연구 중이세요. 잠시 돌아오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여기 연구소를 세우라고 하셨어요. 스승님이 그곳 일을 마치면 돌아오실 거예요.”두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궁금해했다. “그 연구소에서 무엇을 연구하나요?”“그건... 죄송하지만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비밀 유지 계약이 있거든요.”고다정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두 어르신은 자신들이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비밀 유지 계약이 있다면 당연히 잘 지켜야죠.”이야기가 끝나고,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이어지는 날들 동안 고다정은 가능한 한 아이들이랑 여준재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마침내 연구소의 인수 기간이 다가왔다.그날 아침 일찍, 고다정은 김창석과 함께 연구소로 향했고 그들을 본 장식팀 팀장이 즉시 다가와 인사했다. “다정 씨, 창석 선생님, 오셨군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문제가 없으면 인수 서류에 서명하고 나중에 잔금을 정산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다정 씨. 지금 당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팀장은 열정적으로 고다정을 연구소로 안내했다.리모델링된 연구소는 시야가 탁 트이고 빛이 들어와 더 환해졌다.고다정은 돌
돌아오는 길에, 고다정은 너무 피곤해서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여준재 쪽으로 기울었다. 다행히 여준재가 빠르게 반응하여 다정이 자신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서 품에 눕혔다. 익숙한 향기를 맡은 것 같은지, 고다정은 여준재의 품에서 더욱 달콤하게 잠들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다리에 볼을 비볐다.품 안의 여인의 움직임을 보며 여준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고다정의 오똑한 코를 쓰다듬었고, 운전하는 남준에게 천천히 운전하라고 지시했다. 남준은 자신의 상사의 뜻을 알고 차 속도를 줄였다.고다정은 이 모든 것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이런, 벌써 이렇게 늦었네.”그녀는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휴대폰을 확인했고, 거의 열 시가 되었음을 알고는 서둘러 일어나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서, 강말숙은 그녀의 조급한 모습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정아,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바쁘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아뇨, 할머니,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일어나보니 이렇게 늦었는데 연구소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요.”고다정은 말하면서 이미 현관으로 가 신발을 갈아신고 나가려 했다.강말숙은 말릴 수 없었고,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그럼 저녁에는 집에 와서 밥 먹을 거니?”이 말을 듣고 막 나가려던 고다정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생각한 뒤 돌아서 대답했다. “지금 확실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녁에 집에 오든 안 오든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강말숙은 고다정을 보내주었고 고다정은 머리를 끄덕이고 빌라를 떠났다.대략 반 시간 후, 그녀는 연구소에 도착했고, 연구소 밖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녀가 고용한 데스크 직원과 다른 직원들이 이미 근무 중이었다. 그들은 연구소에서 고다정을 보고 그녀가 연구소의 책
이틀 후 채성휘는 연구개발팀을 거느리고 운산 공항에 도착했다.벌써 소식을 들은 고다정이 버스 한 대를 빌려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입구에 서 있는 채성휘 일행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채 선생님.”“고 선생님.”채성휘는 고다정을 보더니 약간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살짝 웃음기를 띠며 캐리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잇달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느낀 고다정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채 선생님 팀의 멤버들이시죠?”“고 선생님, 안녕하세요.”사람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고다정은 그들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고 차에 타도록 안내했다.호텔로 가는 길에 그녀는 채성휘와 함께 버스의 맨 앞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채성휘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소개했다.“팀원 중 일부는 성시원 선생님 쪽 사람이에요. 선생님께서 저한테 전화하셔서 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앞으로 이들은 이쪽 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거예요.”“스승님 쪽 사람도 있다고요?”고다정은 다소 뜻밖이라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아쉽게도 이들 중 누가 스승님이 보낸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동작을 보고 채성휘가 웃으며 말했다.“나중에 짐을 풀고 나서 소개해 드릴게요. 앞으로 이들은 고 선생님과 함께 이쪽 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될 겁니다.”“그건 급하지 않아요.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제가 회식을 마련할게요. 모두 같이 식사하면서 안면을 트고 모레부터 정식으로 일을 시작해요. 어때요?”고다정이 계획을 말하자 채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러죠. 마침 저희 물건이 내일모레나 돼야 배송되는 것도 있는데, 그 물건이 없으면 일할 수 없어요.”“맞아요. 채 선생님이 가지고 오는 약재가 가장 중요해요.”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녀의 진지한 표정이 채성휘 눈에는 유난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채성휘는 저도 모르게 넋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