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는 그들의 말을 듣고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너희 말대로라면 겁만 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야?”이를 악물며 말하는 그의 눈빛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이 섬뜩했다.이봉원과 그의 팀원들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니면 두려워서인지 하나둘씩 움츠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내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여준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데려가.”구남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봉운과 그의 팀원들을 잡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손짓했다.그들은 이내 보안 회사를 떠났다.여준재도 같이 떠나려고 할 때 구 상무가 그를 불러세웠다.구 상무는 아첨하는 듯 웃으면서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여 대표님, 아까 그 자료는...”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여준재는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그는 차가운 눈길로 구 상무를 힐끗 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신고할 생각 없으니까요.”여준재는 한 마디만 남기고 성큼성큼 떠나자 구남준도 그의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구남준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진짜 이렇게 가만둘 건가요?”“내가 신고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이 신고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잖아. 증거 남기지 말고 그 자료를 경쟁 회사에 넘겨.”말을 하는 여준재의 눈에 한기가 맴돌았다.‘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다니,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지!’...그날 저녁, 여준재는 부랴부랴 운산으로 돌아왔다.구남준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준재에게 물었다.“대표님, 저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경찰서에 넘겨.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면 판사에게 선처해 주게끔 고려해 보겠다고 전해.”“알겠습니다.”구남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을 처리하러 갔다.여준재는 차를 몰고 빌라로 돌아갔다.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마당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었다.소리를 따라가 보니 고다정이 두 아이를 데리고 뒷마당에서 놀고 있었다.세 사람의 밝은 미소를 보면서 여준재는 이틀
고다정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감동 받았다.그는 마음속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고다정을 품에 와락 껴안았다.고다정은 여준재가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라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무슨 일어났는지 깨달았다.“뭐 하는 거예요. 얼른 놔요. 등 뒤에 아직 침이 꽂혀있단 말이에요.”그녀는 화가 나서 여준재의 팔을 쳤다.여준재는 고다정을 더 꼭 끌어안다가 이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고다정이 화낼까 봐 결국 오래 안지 못했다.다시 자유를 얻은 고다정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는 말했다.“얼른 엎드려요. 혈을 잘못 찌르면 큰일 나는 거 몰라서 그래요?”“알겠어요. 화내지 말아요. 다시 엎드리면 되잖아요.”여준재는 화난 고다정을 달래면서 얌전히 다시 엎드렸다.다행히도 침이 정확한 혈을 이탈하는 현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고다정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퉁명스럽게 여준재의 뒤통수를 노려보더니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스읍~”고요한 방안에서 여준재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등 이곳저곳이 아파 나자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갑자기 왜 이리 아픈 거예요? 혈을 잘못 찌른 거 아니에요?”“잘못 찌르지 않았어요. 건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 치료방안을 바꿔보았어요.”고다정은 자신이 손을 보았다는 걸 숨기지 않고 그대로 털어놓았다.“...”여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그녀를 화나게 한 게 분명했기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그는 주의력을 돌리기 위해 아까 끝내지 못한 얘기를 다시 꺼냈다.“아까 항운시로 갔다고 했는데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서 다녀온 거예요. 조사한 소식에 따르면 고다빈이 지시한 짓이 분명해요.”“역시 고다빈이었네요.”고다정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을 전해 듣자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여준재도 이를 눈치채고 그녀를 달랬다.“이런 일로 기분 나빠 할 필요 없어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지 한 번 생각해
진동진과 유이단의 섬뜩한 눈빛 때문에 고다빈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그녀는 사실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경찰이 그녀의 일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로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진동진과 유이단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고다빈을 보면서 불만스러웠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묻기도 전에 진시목을 수저를 놓고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먼저 경찰들을 집안으로 모셔야지 않을까요?”“그래 네 말이 맞아. 얼른 가서 경찰들을 안으로 모셔 와요. 그리고 차도 준비해 드리고요.”유이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에 있던 집사에게 말했다.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유이단은 집사가 나가자마자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고다빈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이 안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니라고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진씨 집안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미치게 되면 당장 너희 고씨 집안으로 돌아가!”유이단은 한마디 말만 남기고 일어서 거실로 나갔다.진동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아서는 유이단의 말을 동의하는 것 같았다.진시목도 두 사람을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일어서기도 전에 고다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오빠, 나 도와줄 거지?”그녀는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진시목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진시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고다빈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불법적인 일만 하지 않고 진씨 집안에 해가 되는 일만 하지 않았다면 내 아내인데 당연히 도와줄 거야.”진시목은 말하고는 고다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거실로 나갔다.고다빈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불법적인 일만 하지 않고 진씨 집안에 해가 되는 일만 하지 말라고... 두 가지 다 한 것 같은데.’‘하지만 경찰이 그 일로 찾아온 건 아닐 거야.’고다빈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거실로 나
“전에 이혼하고 싶다고 한 건 진짜 이혼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겁을 주려고 그런 거예요.”진시목은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유이단은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생각 못 했는지라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바꾸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고씨 집안에 알려요?”“잠시 알리지 말고 회사 변호사를 시켜서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게 하는 거로 해.”진동진은 엄숙하게 말했다.진시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사 법무팀에 연락할게요.”그러나 그들은 고씨 집안에서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전해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고다빈이 경찰에 체포된 후 고씨 집안에 연락했던 것이다.그녀는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진씨 집안에서 자신을 도울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고씨 집안에 도와달라고 했다.심여진은 고다빈이 경찰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경찰에게 잡혀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진시목은? 진씨 집안에서 상관 안 해?”심여진은 연달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하지만 통화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고다빈은 답하지 못하고 급하게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엄마, 먼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빠랑 변호사 데리고 와서 나 좀 꺼내줘요. 그리고 나중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게요.”심여진은 어쩔 수 없이 끊어진 전화를 들고 고경영한테 연락했다.반 시간 후, 두 사람은 부랴부랴 경찰서로 들어갔다.심여진은 들어가자마자 로비에 있는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안녕하세요. 저희 고다빈 가족인데요 우리 다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죠? 왜 우리 다빈이를 잡아가는 거예요?”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심여진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훑어보면서 공식적인 답변을 했다.“청부업자를 통해 다른 사람 안전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협박까지 했습니다. 증거가 충분하니 왼쪽에 있는 세 번째 사무실에 가서 자세한 정보를
심여진은 너무 무안해서 한동안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로비에서 걸어오는 진시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시목아, 우리 여기에 있어.”말하는 도중에 그녀는 진시목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는 복도에 있는 고씨 부부를 보고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는 고다빈이 이 두 사람을 부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장모님, 장인어른.”진시목이 걸어가서 담담하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고경영은 장인어른의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다빈이 때문에 왔는가?”진시목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하려고 하자 귓가에는 고경영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빈이가 이렇게 된 걸 알면서도 어떻게 우리보다 늦게 도착했지?”“장인어른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제가 늦게 온건 회사에 가서 변호사를 데려왔습니다. 이분이 우리 회사 고문변호사인데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이분이 도와주시면 다빈이가 무사할 거예요.”진시목은 옆에 있는 변호사를 가리키며 두 분께 설명했고 그 뒤에 있는 사무실을 보며 물었다.“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이미 다빈이 사건을 들으셨나요?”“우리는 막 안에서 나와 다빈이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너는 들어가지 않아도 돼. 내가 가는 길에 다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게.”고경영이 말하면서 진시목에게 그를 따라 가자고 손짓했다.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진시목이 경찰의 말을 듣고 고다빈을 포기할까 봐서였다.고다빈이 건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YS그룹을 방패로 하는 고다정이었다.진시목은 거절하지 않고 변호사를 데리고 그를 따라갔다.심여진은 앞에서 걸어가는 세 사람을 보며 긴장하던 마음이 반쯤 내려앉았다.다행히 진씨 집안이 고다빈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떻게 고다빈을 구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한편, 고경영은 그들이 방금 경찰에게서 들은 소식을 전했다.“경찰이 다빈이가 사람을 구해 고다정을 협박했는데 그 수법이 잔혹하고 부정당해서 고다정 측에서 책임을 따진다고 했어. 만약 실형을 선고하면 3에서 5년 형을
변호사는 진시목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는 사실 고다빈이 풀려날 확률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이 여자는 다름 아닌 여씨 집안을 건드린 것이다.그러나 이 말은 감히 하지 못하고 몇 초를 침묵하다가 신중하게 말했다.“지금 대충 생각 해봤는데 사모님을 만나 구체적인 사정을 알아야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씨 부부와 진시목은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이미 경찰이 고다빈을 들여보냈다.그녀는 부모님과 진시목, 그리고 진씨 집안의 유능한 변호사를 본 후 빛을 잃었던 두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엄마 아빠, 오빠. 저를 빨리 꺼내줘요. 나 감옥 가기 싫어요.”“감옥에 가기 싫으면 네가 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진시목은 고씨 부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고다빈에게 말했다.마지막에 말을 덧붙였다.“숨기려 하지 마. 숨기면 우리가 너를 구할 수 없을 것이야.”요행을 바라던 고다빈은 얼굴빛이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결국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을 인정했다.“내가 사람을 고용해서 고다정을 협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해치게 하지 않았어요. 단지 고다정 차에 낙서하게 하고 겁만 주게 한 것뿐이에요.”“겁을 주었단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죠?”변호사가 추궁했고 진시목과 고씨 부부도 그녀가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해했다.이들의 시선을 마주한 고다빈은 제 발 저려서 고개를 내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시켜 죽은 고양이를 고다정에게 보내게 했는데 한 번은 시체를 통째로 한 번은 토막 낸 것이에요.”이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들이마셨다.“고다빈, 너 미쳤니?”진시목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차가운 얼굴로 호통을 쳤다.고씨 부부도 듣고 가뜩이나 어두운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특히 심여진은 자기 딸을 호통을 치는 것을 보고 설교하러 돌아가려던 찰나, 고경영이 그녀를 막았다.고경영은 사실 지금 진시목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다빈이 한 일들은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지만 성질이 악랄하
남이 자기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질투하여 다른 사람을 위협하려 하다니.변호사는 이런 사모님이 있다면 진씨 집안은 언젠가는 망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이 말들을 그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몇 마디 했을 뿐, 진시목 등은 이를 모른다.그들은 변호사가 방금 한 말을 듣고 변호사의 뜻을 이해했다.이것은 고다정을 찾아 화해하라는 것이다.고경영은 말하지 않았다.전에 그가 신우하이테크에 가서 고다정을 찾은 일 때문에 그는 여준재에게 여러 날 짓눌려 있었고, 지금까지도 회사가 안정되지 않아 지금의 그는 고다정 앞에 조금도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심여진도 말하지 않았다.그녀도 자기 딸을 구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고다정에게 사정하는 짓은 하기 싫었다.고다정이 그녀에 대한 증오로 그녀가 가더라도 고다정은 그녀에게 좋은 표정을 짓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이를 생각하며 고경영과 심여진은 진시목을 바라보았다.그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진시목은 그들의 눈빛을 이해했다.고씨 부부는 그가 직접 가서 간곡히 애원하기를 원했지만 이 일은 그가 나설 수 없었다.“제가 고다정을 찾아가는 것보다 장인어른이 고다정을 찾아가는 것이 더 유용할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도 저와 고다정의 원한을 알고 있고 고다정은 저를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나타나서 고다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도 몰라요.”이 말을 들은 고경영과 심여진 역시 진시목과 고다정의 관계를 떠올렸다.고다빈도 반대했다.“아빠가 고다정에게 가서 말해보세요. 아빠도 고다정의 아버지잖아요.”고경영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봤다.“고다정이 나를 인정해야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그 천박한 계집애는 여준재와 함께 있은 후부터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아.”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도 고다정을 찾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게다가 진시목이 방금 한 말도 실제로는 여씨 집안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다는 걸 그도 알아차렸다.누구도 고다정을 찾아가기 싫어 한동안 화제가 정체되었다.진시목은 미간을 찌
핸드폰을 내려놓은 외손녀를 보며 강말숙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서 네가 그동안 받은 장난은 다 고다빈 그 여자가 한 거야?”“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세요?”고다정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런 일들을 외할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준재 씨가 알려줬어요?”강말숙이 그녀를 쳐다보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준재가 말한 거 맞아. 너는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한마디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외할머니께서 걱정할까 봐 말 안 했어요.”고다정은 화가 난 외할머니를 보며 부드럽게 애교를 부렸지만 안타깝게도 강말숙에게 먹히지 않고 계속 훈계했다.“네가 말하지 않으니 내가 더 걱정하잖아. 앞으로는 다른 일을 숨기면 안 돼.”이런 경고에 고다정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말숙은 그제야 마음에 드는 듯 다른 것을 물었다.“방금 준재에게서 전화 왔는데 고다빈 일 말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외할머니, 어쩜 그것도 맞췄어요. 준재 씨가 그러는데 고경영과 진씨 집안 쪽에서 고다빈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러 온대요.”고다정은 방금 전화한 내용을 숨기지 않았다.강말숙은 아부하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이 일은 결코 화해할 수 없어. 이번에는 협박이지만 다음번에는 고다빈 그 여자가 너를 유괴하려고 할 거야.”화가 난 외할머니를 보며 고다정은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저도 화해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외출할 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해요. 고경영과 진씨 집안 쪽은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들이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를지 걱정스러워요.”여기까지 말하고 고다정은 저녁에 여준재가 돌아오면 외할머니에게도 보디가드 한 명을 붙여 주어 외할머니가 평일 나들이를 나갈 때 보호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강말숙은 고다정의 마음을 모르지만 그녀의 말에는 동의했다.“준이 윤이는 평소에 너와 준재가 데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