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이 원경하의 동작을 봤을 때는 이미 피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원경하에게 정면으로 걷어차인 그녀는 어딘가에 부딪힌 것 같더니 뒤통수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기절해 버렸다.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오다 이 광경을 목격한 쌍둥이는 대경실색하며 소리 질렀다.“엄마.”“나쁜 놈, 감히 우리 엄마를 때려? 물어 죽일 거야.”화난 하준이가 눈이 빨개져서 원경하한테 달려들더니 그녀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원경하는 아파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하준이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힘을 써도 하준이는 그녀의 손목을 물고 놓지 않았다.“아비 없는 자식, 이거 놔!”너무 아파서 얼굴까지 일그러진 원경하는 하준이가 놓아주지 않자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발을 들어 하준이를 걷어찼다.귀가한 여준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뜨며 울부짖었다.“원경하, 네가 감히!”이 소리에 물린 자국을 살피던 원경하가 놀라서 흠칫했다.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여준재가 빠른 걸음으로 하준이한테 다가가 품에 안는 것이 보였다.“어디 다치지 않았어?”여준재는 하준이가 어디 다친 데 없는지 이리저리 살폈고 하준이는 그를 보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빠, 저 사람이 제 배를 찼어요. 배가 너무 아파요.”이때 하윤이도 달려오더니 엉엉 울었다.“아빠, 왜 이제야 돌아오세요? 저 나쁜 여자가 엄마를 괴롭혔어요. 엄마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고 엄마를 발로 찼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의 몸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하준이를 안고 주변을 살폈지만 고다정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긴장하며 물었다.“엄마는?”“엄마는 저기 있어요.”하윤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 고다정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여준재는 동공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다정 씨!”여준재는 급히 뛰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다정을 껴안고 긴장하며 이름을 불렀다.그러나 고다정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아
의사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가슴이 서늘해져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의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간호사에게 고다정을 병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한편, 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경찰서에 갔다.“경찰관님, 저희는 원경하의 가족입니다. 제 사촌 여동생이 무슨 일로 체포됐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원진혁은 원빈 노인의 지시에 따라 경찰관 한 명을 불러 문의했다.경찰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 여동생은 상해죄를 저질렀습니다.”“상해죄라니요?”원진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원빈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색이 어두워진 원빈 노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자리에서 콧방귀를 뀌는 소리에 이어 비꼬는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렇게 놀라요? 당신의 착한 여동생이 우리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를 속이고 우리 작은 사모님을 폭행했어요. 우리 작은 사모님은 아직도 병원에서 응급 처치 중이에요.”이집사는 말을 마치고 옆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좋지 않은 시선으로 원빈 노인과 원진혁을 노려보았다.원빈 노인과 원진혁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누구신지?”원진혁이 공손하게 묻자 이집사는 차갑게 대답했다.“저는 YS그룹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입니다.”이 말을 들은 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 순간 뭘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그들이 원경하가 온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원경하는 그들 몰래 또 밖에서 말썽을 피운 게 틀림없다.이집사도 그들의 기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저희 도련님이 이번 일은 끝까지 추궁할 것이라고 두 분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을 남기고 이집사는 자리를 떴다.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원경하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경하가 따라왔을 때 끝까지 고집해서 돌려보내야 했어.”원빈 노인이 후회하며 이렇게 말하자 원진혁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실을 나온 원빈 노인은 대기실에서 원진혁을 찾아냈다. 경찰을 통해 이미 상황을 파악한 원진혁이 원빈 노인 곁으로 다가와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보석은 불가능해요. 여씨 집안에서 끝까지 추궁하겠다고 했대요.”이 말을 들은 원빈 노인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조금 뒤 분부했다.“고 선생이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알아봐.”원경하가 말한 것처럼 그는 원씨 집안에서 수감자가 나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원씨 집안 명성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회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그래서 그는 염치 불고하고 여준재와 고다정을 찾아가 사정할 수밖에 없다.원진혁은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대충 알아챘지만 여 대표가 사람을 놓아줄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고 선생이 실질적 상해를 입지 않았던 지난번과 다르다.물론 그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담당자에게 연락했다.…병원 VIP 병실에서 고다정은 의식이 없는 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이마에는 흰색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에도 거즈가 붙어있었다.여준재는 안쓰러운 눈빛을 하고 곁을 지켰고 쌍둥이도 병상 양쪽에 엎드려 눈도 깜박하지 않고 엄마를 지켰다.“아빠, 엄마는 언제 깨어날까요?”“내일쯤 깨어날 거야.”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자 쌍둥이는 축 늘어졌다.이를 보던 여준재는 고다정을 신경 쓰느라 의사에게 하준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급히 일어나 하준에게 다가갔다.“아빠?”갑자기 누군가에게 안긴 하준이는 무의식적으로 옆 사람을 껴안았고 자기를 안은 것이 아빠인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준재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아까 그 여자한테 배를 차였다고 했잖아. 아빠가 여태 너를 신경 쓰지 못했어. 지금 아빠랑 같이 의사 선생님한테 가보자.”“나도 갈래요.”하윤이도 오빠가 걱정돼 즉시 따라나섰고 여준재는 막지 않았다. 조금 뒤, 세 사람은 의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의사는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듣고 나서
“제 탓도 있어요. 원경하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집에 있으니 별일 없으려니 하고 별로 방비하지 않았어요.”고다정이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후회하는 표정을 짓자 여준재가 급해 위로했다.“당신 탓이 아니에요. 당신도 그 여자가 간덩이가 부어 집에서까지 손찌검할 줄 몰랐잖아요.”여전히 안색이 어두운 고다정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원경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그녀는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긴장하며 물었다.“참, 원경하 그 여자는요? 제가 기절한 후 또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때 준이와 윤이가 2층 복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애들이 놀라지 않았어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여자는 이미 붙잡아 경찰서에 넘겼어요. 하준이와 하윤이는 하준이가 약간 외상을 입은 외에 아무 일도 없어요.”여준재는 하준이가 다친 것에 대해 숨기지 않고 고다정에게 사실대로 말했다.하준이가 다쳤다는 말에 고다정은 걱정하기 시작했다.“준이 왜 다친 거죠? 많이 다쳤어요?”“당신이 그 여자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고 하준이가 그 여자를 물었다가 그 여자한테 걷어차였어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장기는 괜찮고 멍이 좀 심하게 들었을 뿐이라고 하셨어요.”여준재는 고다정이 의식을 잃은 후 발생한 일을 대충 얘기해줬다.다 듣고 난 고다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진짜 악랄한 인간이네요. 이번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외할머니 생각이 나자 지나간 일인데도 무섭게 느껴졌다.“어젯밤에 외할머니가 친구 집에 가신 게 다행이네요. 집에 계셨다면 얼마나 놀라셨겠어요.”외할머니는 이제 나이가 드셔서 자극받지 못한다.잔뜩 화가 난 여인을 바라보며 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소리 없이 위로했다.한편, 호텔 로열 스위트룸에서 원진혁이 전화벨 소리에 깼다.“진혁 도련님, 말씀하신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고다정 씨는 YS그룹 산하의 사립병원에 있고 사람은 무사합니다.”“알았어요, 수고했어요.”
이 말을 들은 원빈 노인은 또 한 번 가슴이 내려앉았고 원씨 부부도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특히 자기 딸이 감옥 가는 것을 원치 않는 원여사는 마음이 매우 급했다.“고 선생님,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저희는 딸이 경하 하나뿐이에요. 얼마를 배상하든 저희 집안에서 다 받아들일 테니 감옥만 가지 않게 해줄 수 없을까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원빈 노인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아니나 다를까 여준재가 이내 맞받아쳤다.“아니, 저희가 당신네 집안의 그까짓 물건이 없어서 그래요? 지나치다는 걸 알면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원여사는 이 말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원빈 노인이 낮은 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말할 줄 모르면 조용히 옆에 서 있어.”시아버지의 성난 눈초리를 보면서도 원여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또 뭐라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는 남편에게 제지당했다.“정말 경하를 구하고 싶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버지에게 맡겨.”원호열이 머리를 약간 옆으로 돌리고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원여사는 어쩔 수 없이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이때 원빈 노인이 원진혁의 손에서 선물함을 넘겨받아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더니 협탁 위에 올려놓고 사과했다.“여 대표님, 고 선생님, 이 정도 선물로 고 선생님이 받은 상처를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저의 조그마한 성의니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물건을 가지고 돌아가세요. 조금 전, 준재 씨가 말한 것처럼 저는 그 물건들이 모자라지 않습니다.”이 사죄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고다정은 차갑게 거절했다. 받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여준재도 원빈 노인의 수단을 한눈에 알아채고 얼굴빛이 냉랭해졌다.“원씨 저택에 있을 때도 원경하가 여러 번 말썽을 일으켰고 심지어 다정 씨를 2층에서 아래로 밀었지만 저희는 신수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문제 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를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셨어요?”“…”말문이 막힌 원빈 노인은 멋쩍게 한마디 했다.“그럴
“말하지 마.”원호열이 경고하자 원여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정말 경하를 저렇게 버려둘 건가요?”“지금 우리가 버려두는 거야? 전혀 방법이 없잖아. 경하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한번 생각해 봐. 됐어, 나가자.”아내가 헛소리할까 봐 원호열은 그녀를 끌고 병실을 나갔다.두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그들이 자리를 뜨는 것에 대해 원빈 노인도 사실 동의했다.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잘 아는데, 계속 여기 있다가 무슨 나쁜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도 작별을 고하고 병실에서 나갔다.어느새 원진혁만 병실에 남았다. 여준재는 눈을 찡그리더니 쌀쌀하게 물었다.“아직 용건이 남았나요?”원진혁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미안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 선생님, 제 사촌 여동생이 한 짓에 대해 제가 여기서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원진혁은 고다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고다정은 몸을 옆으로 돌려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진혁 도련님이 저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잘못한 건 그쪽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는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아요. 원경하가 응당한 처벌을 받길 바랄 뿐이에요.”“그건 당연하죠. 동생이 잘못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죠.”원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한편, 복도에서 원여사는 원빈 노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이내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아버님, 정말 경하를 저렇게 둘 거예요?”“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원빈 노인은 눈을 치켜뜨고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원여사는 딸이 너무 걱정돼서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속마음을 낱낱이 털어놓았다.“어쨌든 경하를 감옥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감옥에 가면 그 애 인생은 끝장나요. 경하를 외국에 내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아버님이 고 선생과 여 대표한테 얘기해 보는 건 어때요?”“그런 다음 네가 또 손을 써서 중도에 빼내려고?”원빈 노인은 그녀를 사정없이 비난했다.이 얘기가 나오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다정도 걱정하는 눈빛이다. 어쨌든 얼굴에 난 상처이니 여준재가 개의치 않는다 해도 그녀는 신경이 쓰인다.그러나 더 이상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그녀는 이런 기분을 꼭꼭 숨겼다.여준재가 그녀의 모든 정서 변화를 눈여겨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이 일을 마음속에 기억했다.이때 하준이가 어젯밤에 다쳤다는 말이 생각난 고다정은 꼬맹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이리 와, 엄마가 다친 데 좀 보게.”“볼 게 없어요.”하준이는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배를 잡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고다정은 포기하지 않았다.“볼 게 없어도 엄마는 볼 거야. 스스로 올 거야? 아니면 엄마가 내려갈까?”어쩔 수 없이 하준이는 엄마한테 다가갔다.아이를 가까이 끌어당겨 옷을 젖히고 배에 있는 눈에 거슬리는 검푸른 멍 자국을 본 고다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이게 그냥 심각해 보일 뿐 아프지는 않아요.”엄마 표정이 바뀌는 것을 눈치챈 하준이는 급히 옷을 내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엄마를 설득했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엄마가 지금 편히 쉬어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요.”이렇게 철든 아들을 보며 고다정은 마음이 너무 아팠고, 원경하가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혔다.여준재도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날 오후, 그는 구남준을 경찰서에 보내 상해죄로 원경하를 고소했다. 증거가 충분한 까닭에 사건은 이내 수리됐고, 또한 100% 단죄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원경하는 실형을 받고 수감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교도관을 통해 이 소식을 알게 된 원경하는 안절부절못했다.“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저기요,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세요.”그녀는 수감실 문을 긁으며 복도에 있는 교도관을 향해 소리쳤다.그녀가 너무 시끄러웠던지 교도관은 편의를 봐줘서 원씨 집안에 연락해 줬다.하지만 원씨 부부 두 사람만 왔고, 이를 본 원경하는 약간 당황해했다.“엄마 아빠, 할아버지는
이 말을 들은 원여사는 그를 째려보았다. 원래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자기 생각을 실현하려면 이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지난번에는 여 대표와 고 선생이 신수 노인의 체면을 봐서 경하를 놓아줬어요. 이번에도 신수 노인이 나서면 경하를 빼낼 가망이 있을 거예요.”아내의 말을 들은 원호열은 잠시 침묵했다. 의외라기보다는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딸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그럼 신수 어르신한테 누굴 보낼 거야?”“당신이 가요.”원여사가 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하자 원호열은 기가 막혀 웃었다.“내 체면을 봐줄 거라 생각해?”“…”원여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원호열이 말을 이었다.“지금은 아마 아버지도 신수 어른신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걸.”이 말이 나오자 원여사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눈빛이 단호해졌다.“신수 어르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동의할 때까지 일어나지 말아요.”“진짜 그러려고?”원호열이 놀라자 원여사는 침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정색했다.“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보여요? 차를 돌려 신의약방에 가요.”마지막 두 마디는 기사가 들으라고 한 말이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을 태우고 신의약방에 갔다.운이 좋았던지 신수 노인이 마침 약방에 있었다.이들 부부를 싫어하지만 원빈 노인의 체면을 봐서 그는 두 사람을 만나주었다.자리에 앉은 후 신수 노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건지?”“신수 어르신, 부탁할 일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나요?”원여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애원하자 신수 노인은 그녀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천천히 말해봐. 무슨 일이야?”하지만 원여사는 울기만 하고 감히 말을 못 했다.신수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 귀찮아했다.자기가 입을 열길 기다린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원호열은 어쩔 수 없이 염치를 불고하고 중요한 것은 피하고 지엽적인 것만 골라가며 자초지종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