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도 망아지를 고르고 싶었지만 승마장 스태프의 말에 의하면 망아지는 오직 15세 이하의 아이가 타기에만 적합하다고 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성격이 온화해 보이는 암컷 말을 골랐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암컷 말의 큰 몸집에 압도되어 겁이 나서 선뜻 앞을 나설 수 없었다.승마장 코치는 두려워하는 고다정의 기색을 알아채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하며 설득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말은 승마장에서 가장 온순한 말입니다. 방금 제가 한 동작을 따라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안 되겠어요, 너무 긴장되는데요.”고다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한번 거절했다.다른 한 편, 여준재는 두 아이에게 승마를 가르쳐주기 위해 이미 승마장을 반 바퀴 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한 바퀴 다 돌고 돌아왔는데도 고다정은 아직 말에 오르지 않았다.“엄마, 왜 아직도 출발하지 않으셨어요? 저랑 오빠가 이미 승마장 한 바퀴를 다 돌았는데요.”“엄마, 설마 말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는 거 아니에요?”고하준이 눈을 깜빡이면서 순수한 얼굴로 정곡을 찔렀고, 그의 말에 고다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여준재가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한번 제안했다.“내가 가르쳐줄까요?”“괜찮아요, 천천히 배우면 돼요...”고다정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여준재는 분명 자기를 놀리려고 그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동시에 자신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했다.‘겨우 승마인데, 뭘. 두려워할 게 뭐가 있어?’그 생각에 고다정은 마음먹은 듯 용기를 내어 암컷 말에게 다가가고는 방금 승마장 코치에게서 배운 자세로 말에 올라타려고 했다.하지만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한참을 지나서도 말에 오를 수 없었다.고하윤은 참다못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엄마는 바보래요. 말에 올라타지도 못해요.”고하준도 엄마를 놀리려고 했는데 동생의 말을 듣고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동생을 교육하기 시작했다.“하윤아,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밝은 햇빛 아래 커다란 승마장에는 푸른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여준재는 고다정을 이끌고 유유히 걷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는 너무나도 화기애애했다.두 아이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다정의 휴대폰을 꺼내 두 사람을 위해 사진을 찍었고, 심지어 그 사진을 스토리에 올리기도 했다.스토리에 올리자마자 임은미로부터 문자가 왔다.“여준재 씨랑 승마장 데이트하러 갔어?”“이모, 우리도 있어요.”고하준이 휴대폰으로 임은미에게 답장했다.“뭐야? 승마하러 가는데 아무도 날 안 부른 거야? 섭섭하네!’두 아이가 임은미의 답장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했다.그들은 다음번에 꼭 부를 거라며 임은미를 진정시켰다.같은 시각, 임초연도 여준재와 고다정이 두 아이를 데리고 승마장에 갔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화가 난 나머지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바닥에 내던졌다.기사가 터진 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몸이 불편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기 싫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여준재와 고다정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워낙 크게 당했으니 그녀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고다정은 죽어야 해! 여준재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한다고!’그 생각에 그녀는 눈이 벌게진 채로 방을 나서고는 신해선을 찾아 돈을 요구했다.“10억만 주세요.”“그렇게 많은 돈은 왜 필요한데?”신해선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임초연이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돈만 주세요, 너무 많은 걸 묻지 마시고요.”그 말을 들은 신해선이 바로 거절했다.“안 믿어. 10억이 어디 적은 돈이야? 뭘 하려는지 꼭 똑똑히 말해야 해. 중요하지 않은 돈이면 그 돈 줄 수 없어. 아빠 회사도 계속 적자를 내고 있어 돈을 아껴야 한단 말이야.”신해선이 쉽게 돈을 내놓지 않자 임초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 일이 있은 뒤로 임광원은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그녀의 독단적인 움직임에 화가 나 그녀의 카드를 모두
신해선은 생각할수록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확신했다.하지만 남편과 딸을 보니 두 사람은 절대로 여준재에게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그녀가 이 생각을 포기하려고 할 때, 머릿속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쩍였다.“아니면 이러는 건 어때요? 두 사람이 여준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했으니 내가 심해영 부부를 찾아갈게요. 정 안 되면 여씨 집안 어르신에게 한 번 더 연락드리라고 어르신에게 부탁하죠, 뭐. 우리 두 집안의 친분, 그리고 어르신들의 친분을 봐서라도 여씨 집안에서 정말 그렇게 무자비하게 나올까요?”신해선의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임광원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누구를 찾아가든 그에게 있어서는 고개를 숙이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여준재는 그 상황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그는 고다정과 두 아이를 데리고 온하루 승마장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하루 동안의 연습을 걸쳐 고다정은 말을 잘 타진 못했지만 그래도 혼자 승마를 할 수 있었다.두 아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집으로 돌아갈 때조차 흥분에 겨워 있었다.“아저씨, 다음에 또 와서 놀면 안 돼요?”고하윤은 아쉬운 얼굴로 하루 종일 탄 망아지를 보며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여준재에게 물었다.여준재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물론이지. 하윤이가 승마하고 싶을 때 아저씨한테 말해. 그럼 내가 다 준비할게.”“우와, 아저씨 짱이에요!”녀석은 신이 나서 여준재의 품에 와락 안겼다.여준재는 고하윤이 의자에서 떨어질까 봐 다급하게 그녀를 꼭 잡았다.고다정이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얌전히 앉아있어. 아저씨 식은땀 흘리겠다.”“괜찮아요, 하윤이가 즐거워하는데요.”여준재가 괜찮다고 말하고는 활짝 웃으며 품에 안긴 하윤이를 바라봤다.고하윤은 그를 향해 귀엽게 웃어 보이더니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다.“그럼 아저씨, 혹시 다음에 와도 저 망아지를 타도 될까요?”“당연히 되지. 아저씨가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저 망아지는 오로지 하윤이의 망아지야. 언제 가도
크고 웅장한 거실에 임광원 부부와 여진성, 심해영이 서로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네 사람의 낯빛은 모두 그다지 좋지 못했고 예전만큼의 친근함은 보이지 않았다.도우미가 차를 올린 후 바로 나갔고 거실은 이상한 침묵에 사로잡혔다.신해선은 옆에 앉은 남편을 한 눈 보고는 아직 체면을 내려놓지 못해 입을 열지 못한다 생각해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해영 씨, 해외여행을 했다고 들었어요. 어제 돌아왔다면서요, 그동안 운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먼저 떠보듯 물어봤다.심해영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갑게 응수했다.“알아야 할 것, 몰라야 할 것 가리지 않고 다 알게 됐네요. 그러니 오늘 온 목적을 직접 말해도 돼요.”그 말에 신해선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마음속으로는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충분히 좋은 태도로 말을 꺼냈는데 심해영은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을 비웃기나 했다.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평온한 말투로 천천히 의도를 설명했다.“다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게 됐으니 더는 긴 말 하지 않을게요. 당신네 준재가 전담 의사 하나를 위해 우리 집 초연이를 망쳐놨으니 우리 두 가문의 관계도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거겠죠. 심지어 여기서 끝낸 게 아니라니,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말을 마치며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여 씨 부부를 쳐다봤다.심해영과 여진성은 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여진성은 어이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그의 예리한 눈빛이 신해선을 꿰뚫더니 차갑게 대답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뭐가 그리 지나친 거죠? 임초연이 먼저 우리 고 선생에게 해를 끼친 거 아니었던가요? 거기에 두 아이한테도 해를 입히려 했다니, 고 선생이 우리 준재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었단 거 임초연이 모를 리는 없겠죠?”“하지만 초연이도 다 준재를 위해서 한 일이잖아요.”신해선이 억울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심해영이 다급하게 말을 끊고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책임을 우리 준재에게 떠넘기려고 하지 마
구남준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여준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수많은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옛정이 여전할 거라 생각해?”당연히 더 이상의 남은 정은 없을 것이다.남준은 속으로 대답을 하고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표했다.“어떻게 해야 할 지 알 것 같습니다.” 남준은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남준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준재는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전화 속 여진성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밤에 집에 좀 들르렴. 나와 엄마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단다.”“알겠어요.”여준재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부모님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알아채고 있었다.너무 명백하게도 임 씨 부부가 찾아온 일과 연관될 것이었고 현실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그날 밤, 여준재가 집에 돌아오자 여진성이 임 씨 부부가 찾아온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오늘 임광원이 나와 네 엄마를 찾아왔단다. 두 집안의 지난 시간 동안 나눠온 옛정과 네 할아버지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만해달라고 하더구나.”그는 말을 마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준재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저한테 물으시면 전 당연히 동의하지 않죠.”여준재가 실눈을 뜨고 차갑게 대답했다.임 씨 집안을 용서해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이 집안사람들은 한 번, 또 한 번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다.특히 그날 밤 자신이 몇 분이라도 늦게 도착했으면 생겼을 끔찍한 결말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거기다 임초연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망쳐놨을뿐더러 자신의 아이까지 해하려 했다.제일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진다는 건 후환을 남겨두는 행동이었다.여진성은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씨 집안의 뿌리를 뽑아내는 건 불가능 할 거다. 너와 임광원이 대치했던 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알고 있어, 지금껏 임 씨네 어르신이 아직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직접 나선다면 임
여진성은 그 말에 오히려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임광원 씨,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우리 준재 성격으로는 당신 임 씨 집안을 당장이라도 파산시킬 수 있어요. 지금은 오히려 임 씨 집안이 다른 지방에서 발전할 기회를 주는 건데 활로를 찾아주는 거로 모자라다는 건가요?”“...”임광원은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이와 함께 여진성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는지 차갑게 한마디 했다.“길은 이미 알려줬으니 어떤 선택을 할지는 당신한테 달렸죠.”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한 편, 임광원도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는 타오르는 분노에 사로잡혔다.“망할 놈의 집안!”한 마디 사자후를 남기더니 책상 위의 모든 물건을 쓸어버리며 분풀이를 해댔다.‘펑’하는 굉음과 함께 유리 재떨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아래층에 있던 신해선과 방에 있던 임초연까지 놀라게 했고 둘은 임광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다급히 서재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서재는 이미 엉망진창이 돼 있었고 책꽂이들도 임광원에 의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임광원은 방 중앙에 선 채 새빨개진 얼굴로 가슴팍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고 얼핏 봐도 크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신해선과 임초연은 그가 이토록 극대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얼떨떨한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아버지, 무슨 일이에요?”두 모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이구동성으로 질문했다.임광원은 그들의 질문에 고개를 들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여 씨 집안에서 답변이 왔어.”그 말에 신해선 모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아무리 봐도 여 씨 집안에서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왔기에 임광원이 이토록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결국, 현실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두 모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임광원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여준재가 봐주는 건 가능하지만 우리 임 씨 집안 더러 앞으로 영영 운산을 떠나라고 요구했어.”“준재 씨가 뭔데 감히 그런
두 녀석이 자기가 만든 식사를 들고 점수를 따러 가는 모습에 고다정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여준재는 두 녀석의 극진한 대접을 누리며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만족감을 띠고 있었다.강말숙은 그들의 따뜻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이제는 갈수록 가까워져서 부모 자식 같은 모습이 나오는구나.”고다정은 그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진실을 이야기해줬다.“할머니, 저 두 녀석한테 속지 마세요. 오늘 저렇게 점수 따는 건 다 승마장에 가고 싶어서라니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방 쪽에서 그녀의 말을 증명해 줄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하윤이가 여준재를 보더니 기대에 찬 채 말했다.“아저씨, 이번 주말에도 승마장에서 놀면 안 돼요? 이렇게 오래 못 갔는데 망아지가 우릴 잊으면 어떡해요?”그 말에 여준재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는 두 녀석의 기대에 찬 모습을 보며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이번 주? 아마 안될 수도 있을 텐데.”“왜 안돼요? 바쁜 일 있어요?”두 녀석이 다급하게 여준재를 쳐다보자 여준재의 눈동자에 능글맞은 장난기가 서리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지금은 없지만, 그때 있을지 없을지는 아저씨가 확신할 수 없어.”하윤이가 그 말을 듣더니 혼란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였다.“일이 없다 했다가 또 있다 했다가 도대체 있는 거예요 없는거에요?”“이 바보야, 아저씨가 우릴 놀리는 거잖아.”하준이는 여준재의 나쁜 심보를 알아채고는 동생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꼬마 녀석은 맞은 곳을 문지르며 강력하게 변명해댔다.“당연히 아저씨가 우리 놀리는 거 알고 있거든, 그리고 나도 바보 아니야. 오빠야말로 자꾸 날 때렸다가는 진짜 바보가 될지도 몰라. 그땐 오빠가 책임져야 해!”“난 책임 안 질 건데.”하준이가 일부러 싫다는 표정을 하며 거절했다.한차례 웃고 난 후 결국에는 주말에 승마장에서 망아지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이때 하준이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아저씨, 한 사람만 더 데리고
대표 사무실에서 구남준이 여준재에게 아래층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임광원이 로비에서 대표님을 만나야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경비가 내쫓아도 다시 돌아와서 쫓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알겠어, 내가 직접 가볼게.”여준재는 말하며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나갔다.내려가면서 임광원이 회사의 경비와 난장판이 된 채 싸우고 있는 장면을 보자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그만둬요!”그 목소리에 경비와 싸우고 있던 임광원이 자리에 얼어붙더니 홱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준재를 발견했다.“여준재, 너 드디어 나타났구나.”임광원은 이를 꽉 깨물며 말하고는 꼿꼿하게 여준재를 향해 걸어왔다.다른 사람들은 그의 독기 어린 눈빛에 여준재를 해치려는 줄 알고 황급히 다가와 여준재를 보호했다.덕분에 임광원은 여준재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임광원이 몸부림치며 크게 외쳤지만 애석하게도 여준재의 분부가 없이는 경비들도 손을 놓지 않았다.임광원은 차오르는 분노에 여준재에게 욕을 퍼부었다.“여준재, 네 졸개한테 날 놓아달라고 말해. 너같이 검은 속내를 가진 애가 우리 딸 인생을 망치는 거로 모자라서 이젠 우리 집안을 몰락시키려 하는 거야? 넌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그 말을 듣고도 여준재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비들에게 분부했다. “놓아주세요.”경비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결국 손을 놓았고 자유를 얻은 임광원은 그대로 여준재의 코앞까지 뛰어왔다.그는 단번에 여준재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여준재, 어찌할 셈인 거야?”여준재는 차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임광원을 밀어내고는 옷에 진 주름을 살짝 털어냈다.“내가 뭘 하려는지는 이미 우리 아버지가 똑똑히 얘기해준 것 같은데요. 임 씨 집안이 영원히 운산을 떠나든, 이대로 사라지든 둘 중에 하나죠.”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고 임광원을 바라보는 눈빛은 온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