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선생과 준재가 만난 들 안될 것도 없지. 둘 사이에 아이들도 있고, 감정도 깊은 데 이렇게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우리 가족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말이야.”여진성이 속마음을 털어놨다.심해영은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몰랐다.그때 여진성이 말을 이었다.“항상 우리 준재에게 필요한 건 현모양처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몇 번이고 원 씨네든 임 씨네든 여준재의 능력은 충분히 입증됐으니 현모양처는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게 하는 것도 좋지. 그리고 고 선생도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지, 신분이 특출난 건 아니지만 고대 한의학 계승자를 사부로 모시고 있다고 하고.”“지금 그런 말을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미 미운털이 박혀버렸는데, 지금 우리 친손주마저 보지 못하게 됐잖아요.”심해영은 우울함과 후회에 가득 찬 채 말했다.여진성은 그녀의 시무룩한 모습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애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찾으러 가면 되지. 이미 준재가 이번 주 주말 고 선생과 아이들을 데리고 승마장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 기회에 두 아이에게 승마술 좀 가르쳐줄 셈이야.”심해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도우미에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 좀 준비시키라 해야겠어요.”같은 시각, 임 씨네 별장에서신해선은 클럽 직원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임 대표님이 지금 클럽에서 만취하셔서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아, 네. 바로 가도록 하죠.”신해선은 전화를 끊고는 집사에게 차를 대기시키라 분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클럽에 도착하자 룸에서 만취한 임광원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눈썹이 찌푸려졌다.“여보.”그녀는 임광원을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지만 임광원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술병을 잡은 채 바닥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아채기도 힘들었다.신해선은 그 상황을 보고는 수려한 눈썹을 또다시 크게 찌푸렸다.특히 룸 안에 풍기는 진한 알코올
임초연은 어머니의 말을 듣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여준재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이를 바득바득 갈며 가슴속으로는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하지만 지금 화를 내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귓가에 어머니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그 여준재라는 놈, 널 이렇게 만들어놓고도 끝장을 보겠다는 거지. 그 고 씨 성의 못된 년은 아무 일도 없고. 양심도 없지, 우리가 증거를 못 찾아낸 게 한이야, 아니면 여준재가 지금처럼 막 나갈 수 없었을 거다!”임초연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마음속에는 충동이 일었다.“여준재를 찾아가야겠어요!”말을 뱉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려 했고 신해선은 잠시 멍해 있더니 황급히 따라 나가며 막았다.“초연아, 거기 서!”임초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숨에 계단까지 걸어가더니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어쩔 수 없이 신해선도 속도를 높여 쫓아갔고 바로 그때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슬리퍼를 신은 신해선의 발이 삐끗하더니 새된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 소리를 들은 임초연이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가 자신의 위로 와락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둘은 함께 고꾸라져 데굴데굴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임광원이 소란을 듣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자신의 아내와 딸이 계단 입구에 넘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고 당장 다가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신해선은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임초연의 손목을 꽉 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말 들어, 여준재를 찾으러 갈 생각도 하지 마. 이미 널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었는데 네가 무릎 꿇고 빈들 그가 우리 임 씨 집안을 놓아줄 리 없어.”엄마의 마음으로 쓴소리를 하며 임초연을 설득했고 임초연은 이를 꽉 깨물고는 분노를 표출했다.그녀도 엄마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준재 앞에서 무릎 꿇고
드디어 기자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성 질문들에 임초연이 폭발하고 말았다.“그만 해요! 시집을 가든 못가든 당신들이랑 뭔 상관인데, 우리 임 씨 집안은 운산을 떠나는 것뿐이지 파산당한 것도 아니라니까, 난 여전히 임 씨 집안 아가씨라고!”그녀는 면전의 기자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에 자리에 있던 기자들 모두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그리고 이 틈을 타 그녀는 옆에 있던 엄마를 끌어당기고 아빠를 부르고는 몸을 돌려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잠시 멍해 있던 기자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임 씨 가족은 이미 보안 검색을 넘어 대기실로 들어간 뒤라 더는 인터뷰 할 수 없어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반 시간쯤 지났을까 운산에서 낙성시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했다.임초연은 퍼스트 클래스 창가 쪽에 앉아 창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운산을 바라보며 눈동자 속 살기가 극에 달했고 아름다운 얼굴은 음침한 악의로 일그러져갔다.‘여준재, 고다정, 가만두지 않겠어!언젠가는 나 임초연이 반드시 돌아와 복수해주지!’...YS그룹, 대표 사무실에서구남준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방 중앙에 선 채 공손하게 보고를 올렸다.“대표님, 임 씨 가족 모두가 운산을 떠나 낙성시로 향했답니다.”“알겠어, 계속 사람을 붙여 예의주시하도록 해.”여준재가 목소리를 낮추고 분부했다.그도 임광원이나 임초연이나 이렇게 쉽게 그만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람을 붙여 감시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대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구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리하러 나갔다.같은 시각, 고다정도 인터넷을 통해 임 씨 집안이 운산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하지만 별다른 신경은 쓰지 않은 채 그저 하던 일을 계속 집중해나갔다.그날 밤, 여준재가 다름없이 아파트로 와 두 아이와 함께했고 온 김에 치료를 받았다.그때 그가 임 씨 가족의 도피에 대해 말을 꺼냈다.“임초연이 떠나긴 했지만 이번에 큰 손실을 보았는데 절대 가만있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다정
여진성은 허허 웃으며 두 녀석을 바라봤고 보물인 양 하윤이를 안아 들며 물었다.“우리 보배 손녀 하윤이, 할아버지 안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어요. 하윤이랑 오빠 모두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하윤이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꿀 발라논 듯 달콤한 말로 대답했고 하준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심해영은 할아버지와 손주들의 끈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질투가 났는지 황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너희들은 할아버지만 보고 싶었고 할머니는 안 보고 싶었어?”“아니에요! 할머니도 똑같이 보고 싶었어요.”하준이가 심해영의 질투 난 모습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뛰어가 다리를 잡고 응석을 피웠다.심해영은 녀석을 안고는 인제야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고다정은 여준재가 깨워 차에서 내리자 보이는 광경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어리둥절한 채 여준재를 쳐다봤다.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준재가 그녀의 의중을 알아챘는지 손을 저으며 말했다.“나도 저분들이 올 줄 몰랐다면 믿어줄 거에요?”고다정은 고개를 들어 준재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준재가 그녀를 속일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눈길을 다시 여 씨 부부에게로 옮겼고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었다.바로 그때, 임은미가 다가오더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저 두 분은 누구야?”은미는 여 씨 부부를 몰랐지만 두 녀석이 저 둘과 친해 보였기에 호기심이 들었다.고다정이 대답해줬다. “여 대표님 부모님이야.”임은미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친구를 쳐다봤다.“대단하네, 여 대표님 부모님까지 해결하고. 이제 두 사람의 좋은 일도 머지않은 건가?”그녀는 말을 하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히히 웃으며 어깨로 고다정을 툭 쳤다.이내 능글맞은 눈빛으로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너랑 여 대표님 결혼하는 날, 이 들러리에게 사례금 두둑이 챙겨주는 것도 잊지 말라고!”“...”고다정은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승마장에 들어선 후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고다정 일행을 데리고 말을 보러 갔다.두 녀석은 그들의 망아지를 보고는 기분이 좋았는지 망아지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했다.“안녕 망아지, 우리가 또 왔어. 우리 기억나?”“후후~”두 녀석의 망아지가 후후 소리를 내며 쌍둥이의 질문에 대답하는 듯했고 이를 본 두 녀석은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엄마 이거 봐요, 망아지가 저를 기억하고 있어요.”하윤이가 흥분에 겨워 고다정을 보며 소리 질렀다.하준이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했지만 찢어질 듯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여진성은 아이들이 망아지를 좋아하는 것을 보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할아버지랑 같이 말을 산책시켜주러 가자.”“좋아요!”쌍둥이는 행복한 듯 자리에서 방방 뛰더니 여진성을 따라 떠났다.심해영은 상황을 보더니 혼자 남아 고다정과 여준재와 함께 하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해질 가봐 얼른 따라나섰다.더 중요한 것은 그녀도 아이들을 데리고 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이렇게 여준재와 고다정, 임은미 셋만 자리에 남았다.임은미도 눈치 빠르게 여준재와 다정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너희들도 놀러 가. 나는 선생님을 따라 승마나 배워봐야겠어.”“너도 나랑 같이 가자.”고다정은 친구를 혼자 남겨두는 게 마음에 걸렸고 더군다나 여준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임은미는 그녀가 보내는 눈빛을 보지 못한 듯 단칼에 거절했다.“아니야, 넌 여 대표님이랑 가서 놀아야지. 얼른 가.”“...”고다정은 이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졌다.여준재도 옆에서 바라보더니 고다정의 작은 꼼수를 놓치지 않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주먹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일부러 마른기침을 하며 웃었다.“고 선생님, 은미 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구남준과 함께 승마를 배우라고 할 거니 별일 없을 겁니다.”“고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는 한 친구분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구남준이 바로 대답하며 약속했고 고다정을 할 수 없이
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조금 전 확실히 바람 쫓는 기분만 즐기다 고삐를 풀었다고 생각하여 멋쩍게 말했다.“다음번에 조심할게요.”“다음이 어딨어요!”여준재는 진지한 얼굴로 그 말을 정정했다.그러고는 고다정이 이어 답하기도 전에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혹시 말로 달리고 싶다면, 제가 같이 타줄 수 있어요.”“같이 탄다고요?”고다정이 의아해하며 묻자, 여준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랑 같은 말에 타면, 안전은 제가 보장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조금 전 달렸을 때보다 기분도 더 좋을 거고요.”여준재는 고다정이 이미 말을 타는 기분을 좋아하게 됐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이런 말을 건넸다.하지만 실제로도 그건 사실이다.고다정은 조금 전 그 달리는 느낌이 좋았고, 심지어 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싶었다.하지만 여준재와 같은 말에 타면 너무 가까울 것이고 왠지 이상한 느낌이었다.게다가 여준재네 부모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말이다.여준재는 현재 고다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그는 고다정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씨익 웃더니 말에서 내리고는 바로 고다정이 타고 있는 말에 뛰어오르며 뒤에서 고다정을 껴안았다.고다정은 깜짝 놀란 나머지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그녀는 등 뒤의 뜨거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고, 수줍은 듯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얼른 내려요! 말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걱정하지 마요. 이게 암컷 말이래도 튼튼해서 두 사람의 무게는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여준재의 담담한 웃음소리가 고다정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심지어 그의 숨결도 고다정의 뺨에 느껴졌고, 그 숨결을 느낀 고다정은 얼굴에서부터 목까지 빨개졌다.고다정은 당황해하며 몸을 비틀었고, 화를 내며 말했다.“됐고! 빨리 내려요!”하지만 여준재는 듣는 체 만 체하며 고삐를 잡았다.“똑바로 앉아요. 이제 말 달릴 겁니다.”여준재는 두 다리를 말에 꼭 끼운 다음, 손의 승마용 채찍으로 말을 내리쳤다.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버렸다.지난번 승마장에서 다 같이 재밌게 논 뒤로, 고다정은 여준재 부모님과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게다가 심해영은 가끔 두 아이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강말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 고다정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감정 문제에 대해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전에 그녀가 말한 적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고다정 또한 현재의 조용한 생활에 무척 만족해하고 있었다.그녀는 가끔 여준재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 외에는 평소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며 집에서 의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그날도 그녀는 약방에서 새 약을 제작하고 있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다정아, 정 선배가 너 찾아왔다.”“네, 나가요.”고다정은 얼른 답한 뒤 가볍게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나가보니 정성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다정은 예의상 인사를 건넨 후 바로 질문을 던졌다.“선배, 아주머니 약 가지러 왔어요? 시간상으로 계산해보면, 지난번 가져갔던 약 아직 남아있는 거 아니에요?”비록 지난번에 이미 명확히 정성재를 거절했지만, 그는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고다정을 찾아왔다.정성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고다정이 자신의 진지함과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고다정도 그걸 알기에 최대한 정성재와 멀찍이 앉아 그에게 선을 그었다.정성재는 자신과 떨어져 앉은 냉담한 그녀를 보며, 다소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전에 가져갔던 약 아직도 남아있어. 내가 오늘 온 이유는, 저녁에 너와 아이들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야. 내 친구가 알려줬는데 라이브 공연 레스토랑이 새로 섰대. 거기에 피아니스트 연주도 있고 말이야. 가보면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아, 밥은 됐어요. 저 사실 밖에서 밥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고다정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그를 거절했다.
정성재는 여준재의 말을 듣고 의아해하며 물었다.“그쪽이 애들 아빠예요?”그는 여준재에게 질문을 던지며 고다정쪽을 바라봤다.여준재도 암묵적으로 고다정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이 상황에 고다정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 사람, 애들 아빠 맞아요.”“그래서 둘이 만난다는 거야?”정성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 질문에 고다정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다정이 답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답했다.“우리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데, 만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그쪽한테 물어본 거 아니에요.”정성재는 어두운 얼굴로 답하고는, 고다정을 응시하며 그녀의 대답만 기다렸다.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고다정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여준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 뜻이 곧 이 사람 뜻입니다.”여준재는 경고의 한마디를 날린 뒤 구남준에게 명령했다.“사모님 대신 손님 좀 모셔다드려.”구남준은 그의 말대로 정성재 옆에 다가가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그는 얼굴이 바로 굳어지며 이대로 자리를 떠나고는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구남준에게 강제로 끌려 아파트를 나갔다.곧 거실에는 여준재와 고다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여준재는 굳은 얼굴로 고다정 앞에 앉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조금 전에 왜 대답 안 했어요?”그 말에 고다정은 머리가 아파 났다. 그녀는 여준재가 이 질문을 할 거라 예상을 했었고, 조금 전 대답을 한다고 해도, 마땅한 답이 없었기에 대답을 하지 않은 거였다.고다정은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아예 대화 주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아, 맞다. 이 시간에 여긴 어찌한 일로 왔어요?”여준재는 그녀의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캐물으면 물을수록 고다정이 더욱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