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버렸다.지난번 승마장에서 다 같이 재밌게 논 뒤로, 고다정은 여준재 부모님과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게다가 심해영은 가끔 두 아이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강말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 고다정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감정 문제에 대해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전에 그녀가 말한 적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고다정 또한 현재의 조용한 생활에 무척 만족해하고 있었다.그녀는 가끔 여준재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 외에는 평소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며 집에서 의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그날도 그녀는 약방에서 새 약을 제작하고 있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다정아, 정 선배가 너 찾아왔다.”“네, 나가요.”고다정은 얼른 답한 뒤 가볍게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나가보니 정성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다정은 예의상 인사를 건넨 후 바로 질문을 던졌다.“선배, 아주머니 약 가지러 왔어요? 시간상으로 계산해보면, 지난번 가져갔던 약 아직 남아있는 거 아니에요?”비록 지난번에 이미 명확히 정성재를 거절했지만, 그는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고다정을 찾아왔다.정성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고다정이 자신의 진지함과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고다정도 그걸 알기에 최대한 정성재와 멀찍이 앉아 그에게 선을 그었다.정성재는 자신과 떨어져 앉은 냉담한 그녀를 보며, 다소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전에 가져갔던 약 아직도 남아있어. 내가 오늘 온 이유는, 저녁에 너와 아이들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야. 내 친구가 알려줬는데 라이브 공연 레스토랑이 새로 섰대. 거기에 피아니스트 연주도 있고 말이야. 가보면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아, 밥은 됐어요. 저 사실 밖에서 밥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고다정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그를 거절했다.
정성재는 여준재의 말을 듣고 의아해하며 물었다.“그쪽이 애들 아빠예요?”그는 여준재에게 질문을 던지며 고다정쪽을 바라봤다.여준재도 암묵적으로 고다정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이 상황에 고다정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 사람, 애들 아빠 맞아요.”“그래서 둘이 만난다는 거야?”정성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 질문에 고다정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다정이 답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답했다.“우리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데, 만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그쪽한테 물어본 거 아니에요.”정성재는 어두운 얼굴로 답하고는, 고다정을 응시하며 그녀의 대답만 기다렸다.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고다정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여준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 뜻이 곧 이 사람 뜻입니다.”여준재는 경고의 한마디를 날린 뒤 구남준에게 명령했다.“사모님 대신 손님 좀 모셔다드려.”구남준은 그의 말대로 정성재 옆에 다가가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그는 얼굴이 바로 굳어지며 이대로 자리를 떠나고는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구남준에게 강제로 끌려 아파트를 나갔다.곧 거실에는 여준재와 고다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여준재는 굳은 얼굴로 고다정 앞에 앉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조금 전에 왜 대답 안 했어요?”그 말에 고다정은 머리가 아파 났다. 그녀는 여준재가 이 질문을 할 거라 예상을 했었고, 조금 전 대답을 한다고 해도, 마땅한 답이 없었기에 대답을 하지 않은 거였다.고다정은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아예 대화 주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아, 맞다. 이 시간에 여긴 어찌한 일로 왔어요?”여준재는 그녀의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캐물으면 물을수록 고다정이 더욱
눈 깜빡할 사이에 어느덧 주말이 되었다.아침부터 여준재는 구남준과 다른 부하들을 데리고 고다정네 집에 이사를 도우러 왔다.가구들이 하나둘씩 옮겨져 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고다정은 다소 혼란스러웠다.반년이란 시간 동안 이번이 그녀에게 있어 두 번째 이사이다.이번 이사 후로는 앞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강말숙도 두 아이를 데리고 옆에 서 있었고, 각자 다른 심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두 아이는 이 상황이 즐겁기만 한지 뛰어다니며 좋아했고, 여준재는 옆에서 두 아이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는 두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은 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그렇게도 좋은 거야?”“당연하죠. 앞으로는 아저씨와 자주 볼 수 있게 됐으니까요.”하윤이는 고개를 들어 까만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봤다.그 옆에 하준이도 고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저씨도 앞으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집에 방도 많으니까 마왕도 데려오고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윤이는 뭐가 생각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아저씨도 같이 산다면 우리 한 가족 같겠다.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해.”“아저씨, 그냥 저희랑 같이 살아요. 네?”하준이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그 말에 여준재와 고다정 모두 멍해 있었다. 그들은 애들 입에서 이런 요구사항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이윽고 여준재는 멍해 있는 고다정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아이들에게 답했다.“아저씨도 그러고 싶은데 너희 엄마가 동의 안 할걸.”그 말에 고다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흘겨봤다. 그가 교활하게도 그 책임을 그녀에게 다 밀어버렸으니 말이다.두 아이는 진짜 엄마가 동의하지 않는 건 줄 알고 바로 엄마에게 떼를 쓰며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엄마, 그냥 아저씨도 같이 살게 해줘요.”“새집에 방도 많은데 아저씨한테도 하나 남겨주자. 응?”그 말을 듣고 있자니 고다정은 어이가 없기도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다정은 다소 취기가 올랐다.그녀의 뺨은 새빨개졌고, 새까만 두 눈망울로 쳐다볼 때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꽉 껴안고 싶게 만들었다.“아,좋다.”고다정은 술잔을 들며 여준재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여준재의 목젖이 움직였고, 그녀를 더욱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두 아이 또한 여준재의 이상행동에 두 눈을 깜빡였다.“아저씨, 엄마가 취한 것 같아요. 어떡하죠?”아이들은 여준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아이들 눈의 교활함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아쉽게도 여준재는 지금 이 시각 고다정에게 홀딱 빠져버려 두 아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강말숙은 현재 상황을 눈치챘지만, 전혀 뭐라 하지 않았다.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난 뒤, 그녀도 사실 자기의 외손녀가 여준재와 함께 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외손녀 고다정이 생각이 너무 많고, 우유부단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이터지게 할 뿐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말숙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다정이가 술에 취한 것 같은데, 대표님이 방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물론이죠.”여준재는 단번에 승낙하고 바로 몸을 일으켜 고다정에게 걸어갔다.자신한테 다가오는 걸 본 고다정은 반쯤 풀린 눈으로 여준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다정 씨가 술에 취해서 방까지 안아다 주려고요.”그러면서 여준재는 허리를 숙여 고다정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안았다.고다정은 조금씩 몸부림치며 항의했다.“저 안 취했거든요. 내려줘요. 더 마실 수 있다고요.”“그래요, 방에 가서 다시 술 줄게요. 그럼 되죠?”여준재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고다정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답했다.“그럼 말하면 말한 대로 해요. 거짓말하지 말고요.”“당연하죠. 절대 거짓말 아니에요!”여준재는 다시금 맹세했다.게다가 이렇게 애교스러운 고다정의 모습 또한 처음 봤기에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빤히 쳐다봤
밝은 불빛 아래 고다정은 큰 눈을 부릅뜨며 눈앞에 있는 그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여준재의 외모에 푹 빠졌다.그 시각, 둘 사이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고, 공기 중에는 고다정이 금방 먹은 과일주 냄새와 그녀만의 특유의 살 냄새가 풍겼다.여준재 또한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그 순간 고다정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더니 여준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진짜 예쁘게 생겼네. 어떻게 나보다도 더 예쁘지? 사람이 이렇게 예쁘게 생길 수 있어요?”그러고는 여준재의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손이 내려갔다. 그 상황으로 보아서는 아마 더 아래로 내려갈 듯한 기세였다.그녀의 손이 흰색 셔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갑자기 여준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고는 약간의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어요. 안 그러면 나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요.”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다정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뭔 짓을 할 수 있는데요?”“내가 뭔 짓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죠.”고다정의 도발에 여준재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깔끔하게 몸을 뒤집어 조금 전의 자세에서 남자가 위에 있는 자세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위에서 품속에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다정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여준재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순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그런 눈빛에 여준재는 조금 전까지 들었던 생각이 말끔히 사라지며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결국, 그는 좌절감에 고개를 숙인 채 고다정의 턱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지금 다정 씨에게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죠?”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에게 되돌아오는 건 고다정의 괴로움에 호소하는 소리였다.게다가 고다정 또한 여준재가 조금 전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여준재는 그녀가 아파하는 소리에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러고는 그녀의 턱
이튿날 아침, 고다정은 술에서 깼지만,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파 났다.하지만 그것보다 더 쪽팔리는 일은 어제저녁 자신이 여준재에게 한 모든 언행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할수록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여준재에게 구라쟁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턱이 물린 후, 마치 쓰다듬어 달라고 들이대는 고양이처럼 그에게 턱도 내주었으니 말이다.“아, 술이 문제야. 다음부터는 집에서라도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네!”고다정은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문밖에서는 여준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선생님, 일어났어요?”“아니요, 그러니 문 그만 두드려요!”고다정은 자신의 답한 게 얼마나 멍청한 대답인지를 인지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어서 그녀는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그러니까 제 뜻은 저 조금 더 잘 거니까 저 신경 쓰지 말라고요.”그 말을 남긴 뒤 그녀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침대로 돌아가 조금 전 그 멍청한 대답을 피하고만 싶은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문 앞의 여준재는 잠시 멈칫하더니 방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고다정의 현재 기분이 어떨지 눈치채고는 사려 깊게 답했다.“그럼 좀 더 자요. 저 사람 시켜서 해장국이랑 아침밥 데워놓으라 할게요. 일어나서 먹기만 하면 될 거에요.”그가 말을 마친 뒤에도 방안에서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하지만 여준재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있는 두 아이와 강말숙은 그가 혼자 내려오는 모습에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아저씨, 엄마는요?”“너희 엄마 조금 더 자고 싶대. 일단 우리끼리 먼저 아침 먹자. 이따 아저씨가 학교로 데려다줄게.”여준재는 웃으며 설명해줬다.두 아이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얌전히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30분 뒤, 두 아이는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빌라를 떠났다.할머니는 눈인사로 그들을 보낸 뒤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
“어르신, 어쩐 일이세요?”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그러자 신수 노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다른 게 아니라 내 오랜 친구가 중병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한번 가서 봐줬으면 하는데 나도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이참에 너도 같이 가서 봐줬으면 하는데, 너 시간 괜찮니?”“당연하죠.”고다정은 망설임 없이 그 말에 승낙했다.잘 알아야 할 게 그녀는 신수 어르신의 보살핌 덕분에 오랫동안 운산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이어서 고다정이 되물었다.“그럼 일단은 만나서 같이 가는 거예요? 아니면 주소를 저한테 보내주시는 거예요? 주소 보내주면 제가 그 주소대로 갈게요.”그 질문에 신수 노인은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그녀에게 설명했다.“그게 내 친구가 진성 시에 있거든. 거기서 하루 자고 와야 하는데 너 괜찮니?”“네, 문제없어요.”고다정은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 아니라는 듯 답했다.때마침 이 기회를 빌려 여준재와 잠시 떨어져 지내면서 할머니가 했던 그 말들도 잘 생각해보려 했다.신수 노인은 그녀의 승낙에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내가 지금 너 데리러 갈게. 그리고 둘이 같이 진성으로 가면 될 거야.”“네, 알겠어요. 근데 그 친구분 병세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준비도 해갈 겸요.”고다정은 바로 업무 상태로 빠져들었다.신수 노인도 속일 거 없이 그가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전부 말해주었다.전화를 끊은 뒤, 고다정은 도우미한테 정원으로 가서 할머니를 찾아오라고 알린 뒤, 위층으로 올라가 짐과 약재를 싸기 시작했다.몇 분 후 강말숙이 고다정을 찾아왔다. 그녀는 고다정의 발 옆에 놓인 트렁크를 보며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신수 어르신이 친구분을 치료하기 위해 저보고 같이 가자고 초대해주셨어요. 그 장소가 진성인지라 거기서 하룻밤 자고 올 거예요. 그러니 오늘과 내일 할머니 혼자서 집 봐줘야 할 거 같아요.”고다정은 사실대로 일의 자초지종에 관해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말숙 또한 별문제 없이 동의했
그 질문에 고다정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여준재가 빌라에 같이 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에게 방 하나를 남겨주었고, 만약 같이 산다고 하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나가야 할지 곤란했다.고다정은 일부러 신수 노인의 그 예리한 질문을 피해 대화 주제를 돌려보았다.“이럴 게 아니라, 저희 어르신 친구분 병세에 대해 얘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그 모습에 신수 노인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 답했다.“보아하니 내가 말한 게 틀린 말은 아닌가 보네. 그럼 둘이 같이 살면서 왜 진지하게 만나지는 않는 거야?”“...”그 말에 고다정은 난처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외할머니뿐만 아니라 어르신까지 그녀와 여준재 일에 대해 이렇게나 호기심이 많다니?그녀가 하는 수 없이 대답하려던 찰나 신수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준재 그놈이 책임을 안 진다기에는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내가 봤을 땐 네가 문제인 것 같은데.”“제 문제 맞아요. 저 아직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저와 여 대표님 사이의 일 또한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저희 사이에 또 많은 일이 엮여 있거든요.”고다정이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그 모습에 신수 노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참지 못하고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너와 준재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인생에 후회 남길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아무리 큰 문제라도 해결방법은 있을 거니까 언제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눈앞에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고.”그 말에 고다정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신수 노인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눈앞에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그녀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깊게 감명받았다.그날 저녁, 여준재는 퇴근 후 빌라에 도착했다.큰 대문에 들어서 보니 아이들은 두 마리 야옹이와 마왕이를 데리고 정원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