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구영진이 방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영진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고다정이었다.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구영진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준수한 남자의 얼굴에 여자는 속으로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구영진도 고다정을 살펴보았다.눈앞에 있는 여자가 과거에 사귀었던 어떤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정교하게 박힌 이목구비, 특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게다가 이 여자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여준재가 좋아할 만하네.’하지만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여준재라는 남자를 만난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다.구영진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물었다.“방금 와서 들었는데, 장씨 아저씨 말이 기억을 잃으셨다고 하던데?”장씨 아저씨는 아래층에 있는 집사였다.고다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갈라진 목소리로 정정했다.“잠시 예전 일이 기억 안나는 것뿐이에요.”“그게 기억상실증과 뭐가 다르지?”구영진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다만 목소리가 작아서 그의 말소리만 들었을 뿐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고다정이 되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야. 바다에 빠진 것뿐인데 기억을 잃은 게 이상해서.”구영진은 일부러 의아한 척 말했다. 한쪽으로 연기를 하면서 고다정을 살폈다.고다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이 남자가 자신의 기억을 잃은 이유를 안다는 걸 의식했다.이윽고 그녀가 여러 질문을 던졌다.“방금 내가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했는데 내가 왜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난 누구고, 내 이름은 뭐예요?”말하는 동시에 고다정의 시선은 구영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 얼굴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구영진은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며, 상대도 자신을
눈앞에서 울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고다정은 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했다.“울지 마요!”구영진은 짧게 대답하며 눈물을 멈추고 붉어진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생각 끝에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방금 수경이라고 하셨는데, 제 이름과 가족에 대해 말해줘요.”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거짓말하지 마요. 들키면 가만 안 둬요.”“...”구영진은 어이가 없었다.‘조금 전까지 경계하던 여자가 바로 이렇게 본성을 드러낸다고?’기억상실증에 걸렸어도 이렇게 드센데, 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더 사나울 게 아니겠나.여준재가 이런 여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참 독특한 취향이다.구영진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다정의 정체를 꾸며냈다. “네 이름은 서수경, 올해 25살, 나와는 대학교 동창이야. 내가 학교에서 널 보고 첫눈에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만나게 됐어. 넌 내 말에 못 이겨 졸업 후 우리 회사에 취직했지만 일 때문에 자주 나를 소홀하게 대했어. 하지만 우린 돈이 부족하지 않아. 내 용돈으로도 충분히 너와 평생 먹고 살 수 있어. 게다가 넌 지금 임신했으니까 우린 돌아가서 일하지 않아도 돼. 부모님도 널 보고 무척 좋아하실 거야. 아이 낳으면 결혼식 올리자...”“그만!”고다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의 말을 서둘러 끊었다.그녀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얘기를 해달라는 거지, 미래에 대한 당신 상상을 얘기하라는 게 아니에요.”그러나 구영진은 일부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 것이었다.계획을 대충 세운 탓에 고다정의 집안에 대해 세심하게 구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쉽게 들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고다정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피할 길이 없는 것 같아 계속해서 꾸며낼 수밖에 없었다.“넌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똑똑해서 장학금을 받았고, 일과 공부
결국 구영진은 방에서 쫓겨났다.나가자마자 밖에 서 있던 장씨 아저씨가 할말을 잃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씨 아저씨는 자기가 모시는 도련님이 망나니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뻔뻔할 줄은 몰랐다.구영진은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경멸이 느껴졌는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지금의 구영진은 더 이상 고다정 앞에서 보여줬던 비굴하고 다정한 모습이 아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는 오만한 도련님의 모습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장씨 아저씨에겐 먹히지 않았다.그는 구영진을 옆에서 보살펴 주는 사람이었지만 오랜 시간 사이좋게 지낸 두 사람은 친구나 다름없었다.장씨 아저씨는 한때 구씨 가문 어르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구영진을 잘 보살피며 해외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도하겠다고 어르신께 약속드렸다.구영진 역시 장씨 아저씨가 자신을 공손하게 대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그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않도록 재차 경고와 협박을 전했다.“미리 경고하는데, 내 계획 일러바쳐서 일 망치면 돌아가서 당신 손자 데리고 클럽 갈 거야.”“...”이 순간 장씨 아저씨는 진심으로 구영진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는 속으로 계속 은인의 유일한 손자라고 되뇌면서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가볍게 코웃음치며 말했다.“도련님 걱정 마세요.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절대 어디 가서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잘 생각하셔야 해요. 이번 일 들키면 도련님 큰일 납니다. 여씨 집안이 아니라 할아버님 성격상 도련님 다리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다리를 부러뜨리다니! 이 영감탱이가 점점 더 날 우습게 보네.”구영진은 장씨 아저씨의 말에 욱하면서도 사실 속으로 겁이 났다.심각한 일인 건 사실이었다.그의 할아버지 성격만 봤을 때 다리 부러뜨리는 것 정도는 가벼운 벌이었다.하지만 여준재가 괴로워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를 힘들게 얻었는데, 그 모습을 보기 전에는 포기하기 싫었다.됐다. 어차피 게임은 이미 시작
눈 깜짝 새에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그사이 고다정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됐다.다만 태아가 아직 불안정해 많이 움직이지는 못하고 방에서 활동하는 게 전부였다.그녀와 구영진이 곧 헤어질 커플이라면 이 아이를 반기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논리다.아이가 있으면 구영진과 본의 아니게 얽힐 일이 많을 거니까.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잃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아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구영진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상했다.분명 이 남자가 마음에 없는데, 왜 아이를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구영진은 고다정의 몸이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그녀의 마음속 갈등은 모른 채 귀국할 준비를 했다.계속 여기 이러고 있다가는 부모님이 직접 잡으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고다정 앞에서 부모에게 잡혀가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어느 햇살 좋은 날 구영진은 고다정과 함께 빌린 헬기를 타고 무릉시에 돌아왔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점심이었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간 아들이 몹시 그리웠던 주혜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자식, 집에 오긴 오는구나!”주혜원은 구영진의 등을 툭툭 치며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만족스레 머리를 끄덕였다.“사지가 멀쩡한 걸 보니 그동안 해외에서 사고는 치지 않았구나. 다행이야.”구영진은 등에서 전해지는 아픔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엄마, 좀 살살 쳐요. 이러다 뼈가 부러지겠어요.”이 말이 하나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젊었을 때 배구 국가대표였던 주혜원은 팔 힘이 굉장히 세다.옆에 있던 구민석이 이 말을 듣고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네 엄마 팔 힘도 견디지 못하면 어디다 쓰겠어?”‘아빠도 못 견디면서!’구영진은 감히 변명하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고다정은 옆에서 이들 가족의 훈훈한 상봉 장면을 지켜보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딱 봐도 가족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구영진이 누구를 닮아서 천방지축인지도 알 것 같다.그녀가
이 말을 들은 구영진은 엄마가 뭔가 기억해 낼까 봐 걱정되어 급히 말을 가로챘다.“엄마, 그만 물어봐요. 수경이 놀라요.”“...”주혜원은 어이없었다.‘많이 묻지도 않았는데 왜 난리야? 기본 사항을 물었을 뿐인데.’주혜원의 불쾌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고다정이 구영진에게 입을 다물라고 곁눈질했다.왠지 모르지만, 구영진은 고다정이 눈빛을 보내자 무의식중에 온순해졌다.두 사람의 작은 동작은 구민석 부부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들은 놀라워하며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들에게 이렇게 온순한 면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정말 이 아이한테 푹 빠진 모양이다.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고다정이 입을 열었다.“제가 외국에 있을 때 사고를 당해서 과거 기억이 없습니다. 구영진 씨 말로는 제가 고아였다고 합니다.”“사고를 당했다고? 무슨 사고?”구민석 부부는 바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고다정은 숨기는 것이 없이 구영진이 지어내서 그녀에게 들려준 말들을 그대로 전했다.고다정이 이렇게 나오리라 전혀 생각지 못한 구영진은 당황해서 넋이 나갔다.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구민석 부부는 엄숙한 표정으로 구영진을 바라보며 캐물었다.“이놈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들으신 바와 같아요.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무슨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다 있는가 싶으시겠지만, 다 사실이에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는 수경을 두 분께 보여주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수경이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수경이 제 아이를 가졌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다고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저는 꼭 수경과 결혼할 겁니다.”구영진은 일부러 부모님이 수경을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척했다.정말이지 그는 부모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고다정이 임신했다는 소리에 두 사람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멍청한 녀석, 네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꽉 막힌 부모로 보이니? 임신한 애를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가다니. 정신 있는 거니? 그래도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무슨 일이 생겼으면 네 다리몽
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거절하지 않았다.상처 부위가 아직 다 낫지 않은 데다 먼 나라에서 귀국하느라 몸이 힘든 게 사실이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혜원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지금까지 아들이 이렇게 사람을 돌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영진이가 다 컸네요. 자기 여자를 아낄 줄도 알고.”“그럼 어떡해요? 계속 철없이 굴면 굴러들어 온 아내와 자식을 잃게 생겼는데.”구민석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대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말을 듣고 주혜원이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쳤다.“아차.”“왜 그래요?”구민석은 갑자기 안색이 변한 그녀를 관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방을 준비하라고 시키는 걸 깜박했어요. 수경이 몸이 저런데 둘이 같이 자면 안 되잖아요. 저 녀석은 지금 혈기 왕성할 때라 혹시라도 함부로 하면 수경과 우리 손자가 힘들어져요. 안 되겠어요. 가서 영진이 녀석을 불러내야지.”그때 고다정은 구영진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가 물었다.“구영진 씨 방이에요?”“응, 어때? 고등학교 때 내가 스스로 리모델링했어.”구영진이 자랑하자, 고다정은 그의 체면을 봐서 한 번 빙 둘러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네요.”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구영진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오늘 우리 같이 자요?”“...”구영진은 말문이 막혀 표정이 굳어졌다.그는 고다정과 같이 잘 담력은 없다. 그러면 여준재에게 완전히 밉보이게 된다.하지만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고다정이 의심하지 않을까?그가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주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진아, 수경아, 내가 들어와도 돼?”“들어오세요.”고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구영진도 생각을 멈추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손님방을 준비했다고 알려주러 왔어. 네가 손님방을 쓰고 이 침실은 수경이 혼자 쓰게 해.”주혜원은 숨기는 것이
사실 고다정도 방에서 바깥의 대화를 들었다.주혜원은 그녀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 같다.‘잠깐만! 왜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전에 진상을 만난 적이 있나?’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던 고다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이날 밤 그녀는 이상한 꿈을 꿨다.꿈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두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고, 어떤 키 큰 남자가 그녀를 아내로 대했다.고다정이 그들의 얼굴을 보려고 애쓸 때 잠에서 깼다. 무의식중에 얼굴을 만지니 눈물범벅이었다.“내가 울었어? 왜?”고다정은 손에 묻은 눈물을 물끄러미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왜 그녀의 꿈에 두 아이와 한 남자가 나타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그녀가 영문을 몰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수경아, 일어났어?”“일어났어요. 잠시만요.”짧게 대답한 고다정은 일어나서 대충 씻은 후 문을 열고 문밖에 서 있는 구영진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영진은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고 무심코 한마디 물었다.“울었어?”“아니요.”고다정이 딱 잡아뗐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구영진은 안절부절못했다.‘이 여자 뭔가 생각난 건 아니겠지?’이런 생각을 하며 구영진은 넌지시 떠보았다.“뭐가 생각난 거야?”“뭐 찔리는 게 있어요?”고다정이 대답하지 않고 되묻자 구영진은 말문이 막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내가 왜 찔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내려가 밥이나 먹자. 식사가 끝나면 너를 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할 거야. 앞으로 우리 아기 분윳값 벌어야지.”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거절하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기억이 없다. 구영진이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람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고다정은 구영진을 따라 다른 별장에 갔다.장씨 아저씨가 이미 별장을 깨끗이 정리해 놓았다.문을 나설 때
“수경 아가씨?”장씨 아저씨는 고다정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며 이름을 불렀다.‘이 아가씨가 서재를 보고 뭔가 기억난 것이 아닐까?’아무것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가 부르는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멋쩍어하며 말했다.“잠깐 딴생각 했어요. 방금 뭐라 하셨죠?”“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가씨가 갑자기 꼼짝하지 않길래 걱정돼서요.”장씨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설명하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 하셨죠?”“이 컴퓨터를 어떻게 켜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혹시 켤 줄 아세요?”고다정은 진실을 숨긴 채 눈앞의 게임 의자를 가리키며 질문했다.장씨 아저씨는 그녀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까발리지 않았다.“도련님께서 이 컴퓨터는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컴퓨터를 하시는 건 봤지만 어떻게 켜는지는 몰라요. 아니면, 아가씨께서 도련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실래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인터넷에 접속하려는 생각을 접었다.구영진이 컴퓨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는데, 전화해서 물어봐도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옆에서 지켜보던 장씨 아저씨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 방금 일부러 구영진에게 떠넘긴 것이다.그런 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를 내보낸 후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서재의 침대형 의자에 앉아 보기 시작했다.느긋한 이쪽 분위기와 달리 여준재 쪽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보름이 지났는데도 고다정은 감감무소식이다.부하들도 작은 사모님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수군댔다.운수 사납게도, 여준재가 마침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폭발했다.“누가 너희더러 여기서 헛소리하라고 했어?”여준재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음침했다.그는 매서운 눈으로 그 자리에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한가하면 지금 당장 바다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