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구영진이 방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영진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고다정이었다.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구영진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준수한 남자의 얼굴에 여자는 속으로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구영진도 고다정을 살펴보았다.눈앞에 있는 여자가 과거에 사귀었던 어떤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정교하게 박힌 이목구비, 특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게다가 이 여자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여준재가 좋아할 만하네.’하지만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여준재라는 남자를 만난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다.구영진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물었다.“방금 와서 들었는데, 장씨 아저씨 말이 기억을 잃으셨다고 하던데?”장씨 아저씨는 아래층에 있는 집사였다.고다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갈라진 목소리로 정정했다.“잠시 예전 일이 기억 안나는 것뿐이에요.”“그게 기억상실증과 뭐가 다르지?”구영진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다만 목소리가 작아서 그의 말소리만 들었을 뿐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고다정이 되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야. 바다에 빠진 것뿐인데 기억을 잃은 게 이상해서.”구영진은 일부러 의아한 척 말했다. 한쪽으로 연기를 하면서 고다정을 살폈다.고다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이 남자가 자신의 기억을 잃은 이유를 안다는 걸 의식했다.이윽고 그녀가 여러 질문을 던졌다.“방금 내가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했는데 내가 왜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난 누구고, 내 이름은 뭐예요?”말하는 동시에 고다정의 시선은 구영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 얼굴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구영진은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며, 상대도 자신을
눈앞에서 울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고다정은 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했다.“울지 마요!”구영진은 짧게 대답하며 눈물을 멈추고 붉어진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생각 끝에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방금 수경이라고 하셨는데, 제 이름과 가족에 대해 말해줘요.”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거짓말하지 마요. 들키면 가만 안 둬요.”“...”구영진은 어이가 없었다.‘조금 전까지 경계하던 여자가 바로 이렇게 본성을 드러낸다고?’기억상실증에 걸렸어도 이렇게 드센데, 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더 사나울 게 아니겠나.여준재가 이런 여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참 독특한 취향이다.구영진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다정의 정체를 꾸며냈다. “네 이름은 서수경, 올해 25살, 나와는 대학교 동창이야. 내가 학교에서 널 보고 첫눈에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만나게 됐어. 넌 내 말에 못 이겨 졸업 후 우리 회사에 취직했지만 일 때문에 자주 나를 소홀하게 대했어. 하지만 우린 돈이 부족하지 않아. 내 용돈으로도 충분히 너와 평생 먹고 살 수 있어. 게다가 넌 지금 임신했으니까 우린 돌아가서 일하지 않아도 돼. 부모님도 널 보고 무척 좋아하실 거야. 아이 낳으면 결혼식 올리자...”“그만!”고다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의 말을 서둘러 끊었다.그녀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얘기를 해달라는 거지, 미래에 대한 당신 상상을 얘기하라는 게 아니에요.”그러나 구영진은 일부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 것이었다.계획을 대충 세운 탓에 고다정의 집안에 대해 세심하게 구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쉽게 들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고다정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피할 길이 없는 것 같아 계속해서 꾸며낼 수밖에 없었다.“넌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똑똑해서 장학금을 받았고, 일과 공부
결국 구영진은 방에서 쫓겨났다.나가자마자 밖에 서 있던 장씨 아저씨가 할말을 잃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씨 아저씨는 자기가 모시는 도련님이 망나니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뻔뻔할 줄은 몰랐다.구영진은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경멸이 느껴졌는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지금의 구영진은 더 이상 고다정 앞에서 보여줬던 비굴하고 다정한 모습이 아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는 오만한 도련님의 모습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장씨 아저씨에겐 먹히지 않았다.그는 구영진을 옆에서 보살펴 주는 사람이었지만 오랜 시간 사이좋게 지낸 두 사람은 친구나 다름없었다.장씨 아저씨는 한때 구씨 가문 어르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구영진을 잘 보살피며 해외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도하겠다고 어르신께 약속드렸다.구영진 역시 장씨 아저씨가 자신을 공손하게 대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그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않도록 재차 경고와 협박을 전했다.“미리 경고하는데, 내 계획 일러바쳐서 일 망치면 돌아가서 당신 손자 데리고 클럽 갈 거야.”“...”이 순간 장씨 아저씨는 진심으로 구영진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는 속으로 계속 은인의 유일한 손자라고 되뇌면서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가볍게 코웃음치며 말했다.“도련님 걱정 마세요.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절대 어디 가서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잘 생각하셔야 해요. 이번 일 들키면 도련님 큰일 납니다. 여씨 집안이 아니라 할아버님 성격상 도련님 다리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다리를 부러뜨리다니! 이 영감탱이가 점점 더 날 우습게 보네.”구영진은 장씨 아저씨의 말에 욱하면서도 사실 속으로 겁이 났다.심각한 일인 건 사실이었다.그의 할아버지 성격만 봤을 때 다리 부러뜨리는 것 정도는 가벼운 벌이었다.하지만 여준재가 괴로워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를 힘들게 얻었는데, 그 모습을 보기 전에는 포기하기 싫었다.됐다. 어차피 게임은 이미 시작
눈 깜짝 새에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그사이 고다정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됐다.다만 태아가 아직 불안정해 많이 움직이지는 못하고 방에서 활동하는 게 전부였다.그녀와 구영진이 곧 헤어질 커플이라면 이 아이를 반기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논리다.아이가 있으면 구영진과 본의 아니게 얽힐 일이 많을 거니까.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잃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아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구영진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상했다.분명 이 남자가 마음에 없는데, 왜 아이를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구영진은 고다정의 몸이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그녀의 마음속 갈등은 모른 채 귀국할 준비를 했다.계속 여기 이러고 있다가는 부모님이 직접 잡으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고다정 앞에서 부모에게 잡혀가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어느 햇살 좋은 날 구영진은 고다정과 함께 빌린 헬기를 타고 무릉시에 돌아왔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점심이었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간 아들이 몹시 그리웠던 주혜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자식, 집에 오긴 오는구나!”주혜원은 구영진의 등을 툭툭 치며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만족스레 머리를 끄덕였다.“사지가 멀쩡한 걸 보니 그동안 해외에서 사고는 치지 않았구나. 다행이야.”구영진은 등에서 전해지는 아픔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엄마, 좀 살살 쳐요. 이러다 뼈가 부러지겠어요.”이 말이 하나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젊었을 때 배구 국가대표였던 주혜원은 팔 힘이 굉장히 세다.옆에 있던 구민석이 이 말을 듣고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네 엄마 팔 힘도 견디지 못하면 어디다 쓰겠어?”‘아빠도 못 견디면서!’구영진은 감히 변명하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고다정은 옆에서 이들 가족의 훈훈한 상봉 장면을 지켜보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딱 봐도 가족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구영진이 누구를 닮아서 천방지축인지도 알 것 같다.그녀가
이 말을 들은 구영진은 엄마가 뭔가 기억해 낼까 봐 걱정되어 급히 말을 가로챘다.“엄마, 그만 물어봐요. 수경이 놀라요.”“...”주혜원은 어이없었다.‘많이 묻지도 않았는데 왜 난리야? 기본 사항을 물었을 뿐인데.’주혜원의 불쾌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고다정이 구영진에게 입을 다물라고 곁눈질했다.왠지 모르지만, 구영진은 고다정이 눈빛을 보내자 무의식중에 온순해졌다.두 사람의 작은 동작은 구민석 부부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들은 놀라워하며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들에게 이렇게 온순한 면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정말 이 아이한테 푹 빠진 모양이다.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고다정이 입을 열었다.“제가 외국에 있을 때 사고를 당해서 과거 기억이 없습니다. 구영진 씨 말로는 제가 고아였다고 합니다.”“사고를 당했다고? 무슨 사고?”구민석 부부는 바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고다정은 숨기는 것이 없이 구영진이 지어내서 그녀에게 들려준 말들을 그대로 전했다.고다정이 이렇게 나오리라 전혀 생각지 못한 구영진은 당황해서 넋이 나갔다.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구민석 부부는 엄숙한 표정으로 구영진을 바라보며 캐물었다.“이놈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들으신 바와 같아요.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무슨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다 있는가 싶으시겠지만, 다 사실이에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는 수경을 두 분께 보여주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수경이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수경이 제 아이를 가졌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다고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저는 꼭 수경과 결혼할 겁니다.”구영진은 일부러 부모님이 수경을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척했다.정말이지 그는 부모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고다정이 임신했다는 소리에 두 사람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멍청한 녀석, 네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꽉 막힌 부모로 보이니? 임신한 애를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가다니. 정신 있는 거니? 그래도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무슨 일이 생겼으면 네 다리몽
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거절하지 않았다.상처 부위가 아직 다 낫지 않은 데다 먼 나라에서 귀국하느라 몸이 힘든 게 사실이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혜원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지금까지 아들이 이렇게 사람을 돌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영진이가 다 컸네요. 자기 여자를 아낄 줄도 알고.”“그럼 어떡해요? 계속 철없이 굴면 굴러들어 온 아내와 자식을 잃게 생겼는데.”구민석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대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말을 듣고 주혜원이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쳤다.“아차.”“왜 그래요?”구민석은 갑자기 안색이 변한 그녀를 관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방을 준비하라고 시키는 걸 깜박했어요. 수경이 몸이 저런데 둘이 같이 자면 안 되잖아요. 저 녀석은 지금 혈기 왕성할 때라 혹시라도 함부로 하면 수경과 우리 손자가 힘들어져요. 안 되겠어요. 가서 영진이 녀석을 불러내야지.”그때 고다정은 구영진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가 물었다.“구영진 씨 방이에요?”“응, 어때? 고등학교 때 내가 스스로 리모델링했어.”구영진이 자랑하자, 고다정은 그의 체면을 봐서 한 번 빙 둘러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네요.”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구영진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오늘 우리 같이 자요?”“...”구영진은 말문이 막혀 표정이 굳어졌다.그는 고다정과 같이 잘 담력은 없다. 그러면 여준재에게 완전히 밉보이게 된다.하지만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고다정이 의심하지 않을까?그가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주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진아, 수경아, 내가 들어와도 돼?”“들어오세요.”고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구영진도 생각을 멈추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손님방을 준비했다고 알려주러 왔어. 네가 손님방을 쓰고 이 침실은 수경이 혼자 쓰게 해.”주혜원은 숨기는 것이
사실 고다정도 방에서 바깥의 대화를 들었다.주혜원은 그녀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 같다.‘잠깐만! 왜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전에 진상을 만난 적이 있나?’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던 고다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이날 밤 그녀는 이상한 꿈을 꿨다.꿈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두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고, 어떤 키 큰 남자가 그녀를 아내로 대했다.고다정이 그들의 얼굴을 보려고 애쓸 때 잠에서 깼다. 무의식중에 얼굴을 만지니 눈물범벅이었다.“내가 울었어? 왜?”고다정은 손에 묻은 눈물을 물끄러미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왜 그녀의 꿈에 두 아이와 한 남자가 나타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그녀가 영문을 몰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수경아, 일어났어?”“일어났어요. 잠시만요.”짧게 대답한 고다정은 일어나서 대충 씻은 후 문을 열고 문밖에 서 있는 구영진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영진은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고 무심코 한마디 물었다.“울었어?”“아니요.”고다정이 딱 잡아뗐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구영진은 안절부절못했다.‘이 여자 뭔가 생각난 건 아니겠지?’이런 생각을 하며 구영진은 넌지시 떠보았다.“뭐가 생각난 거야?”“뭐 찔리는 게 있어요?”고다정이 대답하지 않고 되묻자 구영진은 말문이 막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내가 왜 찔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내려가 밥이나 먹자. 식사가 끝나면 너를 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할 거야. 앞으로 우리 아기 분윳값 벌어야지.”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거절하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기억이 없다. 구영진이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람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고다정은 구영진을 따라 다른 별장에 갔다.장씨 아저씨가 이미 별장을 깨끗이 정리해 놓았다.문을 나설 때
“수경 아가씨?”장씨 아저씨는 고다정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며 이름을 불렀다.‘이 아가씨가 서재를 보고 뭔가 기억난 것이 아닐까?’아무것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가 부르는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멋쩍어하며 말했다.“잠깐 딴생각 했어요. 방금 뭐라 하셨죠?”“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가씨가 갑자기 꼼짝하지 않길래 걱정돼서요.”장씨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설명하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 하셨죠?”“이 컴퓨터를 어떻게 켜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혹시 켤 줄 아세요?”고다정은 진실을 숨긴 채 눈앞의 게임 의자를 가리키며 질문했다.장씨 아저씨는 그녀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까발리지 않았다.“도련님께서 이 컴퓨터는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컴퓨터를 하시는 건 봤지만 어떻게 켜는지는 몰라요. 아니면, 아가씨께서 도련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실래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인터넷에 접속하려는 생각을 접었다.구영진이 컴퓨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는데, 전화해서 물어봐도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옆에서 지켜보던 장씨 아저씨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 방금 일부러 구영진에게 떠넘긴 것이다.그런 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를 내보낸 후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서재의 침대형 의자에 앉아 보기 시작했다.느긋한 이쪽 분위기와 달리 여준재 쪽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보름이 지났는데도 고다정은 감감무소식이다.부하들도 작은 사모님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수군댔다.운수 사납게도, 여준재가 마침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폭발했다.“누가 너희더러 여기서 헛소리하라고 했어?”여준재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음침했다.그는 매서운 눈으로 그 자리에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한가하면 지금 당장 바다에 나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