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 아가씨?”장씨 아저씨는 고다정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며 이름을 불렀다.‘이 아가씨가 서재를 보고 뭔가 기억난 것이 아닐까?’아무것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가 부르는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멋쩍어하며 말했다.“잠깐 딴생각 했어요. 방금 뭐라 하셨죠?”“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가씨가 갑자기 꼼짝하지 않길래 걱정돼서요.”장씨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설명하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 하셨죠?”“이 컴퓨터를 어떻게 켜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혹시 켤 줄 아세요?”고다정은 진실을 숨긴 채 눈앞의 게임 의자를 가리키며 질문했다.장씨 아저씨는 그녀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까발리지 않았다.“도련님께서 이 컴퓨터는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컴퓨터를 하시는 건 봤지만 어떻게 켜는지는 몰라요. 아니면, 아가씨께서 도련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실래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인터넷에 접속하려는 생각을 접었다.구영진이 컴퓨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는데, 전화해서 물어봐도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옆에서 지켜보던 장씨 아저씨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 방금 일부러 구영진에게 떠넘긴 것이다.그런 줄 모르는 고다정은 장씨 아저씨를 내보낸 후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서재의 침대형 의자에 앉아 보기 시작했다.느긋한 이쪽 분위기와 달리 여준재 쪽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보름이 지났는데도 고다정은 감감무소식이다.부하들도 작은 사모님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수군댔다.운수 사납게도, 여준재가 마침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폭발했다.“누가 너희더러 여기서 헛소리하라고 했어?”여준재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음침했다.그는 매서운 눈으로 그 자리에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한가하면 지금 당장 바다에 나
임세준은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된 후 여씨 집안에서 왜 또 갑자기 자기들을 공격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그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여준재에게 전화했다.“여 대표, 지금 뭐 하는 거야?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가?”“한 입으로 두말한 건 제가 아니라 어르신입니다.”여준재는 임세준이 전화한 것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그는 임세준이 재차 질문하기 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르신은 우리 두 가문의 합의 내용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임초연을 가만두는 대신 임씨 가문은 운산시를 떠나고 임초연을 잘 단속한다는 거였죠. 제 말이 맞나요?”임세준은 침묵했다. 여준재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할 리 없다.“초연이... 또 무슨 짓을 했어?”“임초연이 저와 적대 관계인 세력과 손잡고 제 약혼녀를 잡아갔고, 제 약혼녀가 도망갈 때 총을 쏴서 죽이려 했습니다. 지금 제 약혼녀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원래 이 일을 임씨 가문과 연관 지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임초연이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말하기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배후가 누군지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르신은 제 심정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여준재가 이 보름간 발생한 일을 대충 설명했다.다 듣고 난 임세준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가빠졌다.임초연이 남몰래 이렇게 엄청난 짓을 벌였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몇 번 심호흡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초연이 옆에 있어? 내가 말해보지.”“그러죠.”여준재가 휴대폰을 구남준에게 건네며 분부했다.“임초연에게 전화 바꿔줘.”구남준이 지시받은 후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떴다.잠시 후, 갑판에 도착한 그는 임초연을 끌고 오라고 했다.끌려 나온 임초연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핏자국, 갈라 터진 입술, 그리고 하얗던 얼굴도 너저분해지고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었다. 게다가 정신도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그래도 그녀는 한 가닥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구남준을 본 그녀는 또
여준재는 구남준이 바로 돌아오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렇게 빨리 얘기가 끝났어?”“아니요. 어르신이 임초연 씨를 설득하고 있어요. 저는 방금 들은 소식을 전하려고 왔어요.”구남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걱정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여준재는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언짢아하며 말했다.“무슨 소식인데, 이렇게 우물거려?”꾸지람을 들은 구남준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여준재의 압박을 견뎌냈다.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 성시원이 문 앞에 나타났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물었다.“둘이 왜 이러고 있어? 참, 구남준, 다정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있다고 나를 불렀잖아. 무슨 소식인데?”“어르신, 제가 말하기 전에 먼저 대표님께 침을 놓아주십시오. 대표님이 너무 충격받을까 봐 걱정돼서요.”목멘 소리로 입을 여는 구남준을 보고 여준재와 성시원은 표정이 굳어졌다.성시원은 구남준을 빤히 쳐다보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여준재한테 다가갔다.이때 얼굴이 사색이 된 여준재는 온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구남준이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아닌 게 분명하다.그가 충격받을 소식은 그것 하나뿐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준재는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때 그의 정수리가 따끔하더니, 이어서 성시원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됐어.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도 돼.”이 말을 들은 구남준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임초연한테서 작은 사모님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방금 뭐라 했어?”여준재와 성시원은 믿을 수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구남준이 다시 한번 말했다.“작은 사모님이 임신했답니다.”이번에 여준재와 성시원은 똑똑히 들었다.이와 동시에 여준재가 폭발해 버렸다. 두 눈이 충혈된 그는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를 방불케 했다.“임초연이 어디 있어? 죽여버릴 거야!”
여준재가 병을 치료하는 동안 고다정도 구영진의 별장에서 휴양하고 있었다.며칠 같이 지내면서 그녀의 마음속 의심만 커져갔다.구영진은 입으로만 그녀를 깊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한 번도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뭘 하든지 아기가 잘못될까 봐 걱정된다며 그녀와 안전거리를 유지했다.하지만 그건 단지 핑계일 뿐임을 그녀는 알았다.정말 다정한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고다정도 이 남자에게 친밀감이 없고 거부감이 들었다.게다가 어떤 때는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장난이 가득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했다.얼마 전 그녀가 인터넷에서 자기 신원정보를 찾아보겠다고 했더니 구영진은 집에 인터넷이 고장 났는데 당분간 수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그녀가 외출하려고 하니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서 걱정된다며 못 나가게 했다.아무튼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하지만 고다정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구영진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기로 했다.이 남자가 뭘 하려는 건지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그렇게 고다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영진네 집에서 몸조리를 했다.차분한 그녀와 달리 여준재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3일간의 휴양을 거쳐 여준재의 지병 악화 상황은 잠시 통제됐다.조금 낫자마자 그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임초연을 찾으러 부두에 갔다.공중에 매달려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은 여인을 쳐다보는 여준재의 눈에는 전혀 속시원한 기색이 없고 원한만 가득했다.이 여자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다정과 배 속의 아이는 생사를 알 수 없다.“내려놔 봐.”여준재가 옆에 있는 부하에게 분부하자,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임초연을 내려놓았다.여준재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땅에 누워 있는 임초연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정신 차리게 찬물을 가져다 끼얹어.”물을 끼얹는 소리와 함께 임초연이 사레가 들려 기침했다.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기침하고 있는 그녀의 눈앞에 말끔하고 반짝거리는 구두가 나타났다.여준재가 항상 신는 구두
유라는 끌려가는 임초연을 바라보며 이 여자 목숨이 진짜 질기다고 속으로 거듭 감탄했다.여준재가 그렇게 못살게 구는데도 죽지 않다니. 보아하니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여자가 여준재에게 시달리다 죽기를 기다릴 수 없다.아니면 이 여자가 디카프리도를 불어버릴지도 모른다.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죽일지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한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라는 태연한 얼굴로 여준재를 향해 걸어갔다.여준재는 그녀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떠나가려 했다.유라는 어쩔 수 없이 여준재를 불러세웠다.“이렇게 그냥 갈 거야? 나한테 할 말이 없어?”그녀가 막아서자, 여준재는 힐끗 보고는 쌀쌀맞게 말했다.“비켜.”유라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말을 이었다.“내가 아무 이유 없이 누명을 쓰고 그렇게 많은 자금을 손해봤는데, 고다정을 잡아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면, 이제 나한테 뭔가 해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이고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유라를 노려보았다.왠지 모르지만 이런 여준재 앞에서 유라는 가슴이 뜨끔했다.하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여준재의 눈빛에 맞섰다.“뭘 봐?”“네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이는가 해서!”여준재는 비꼬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만 똑똑하고 다른 사람은 다 바보인 줄 알아? 네가 억울하면 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네!”유라는 그의 비난에 표정이 굳어졌다.그녀가 어떻게 변명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여준재는 그녀 옆에 있는 폴을 힐끗 쳐다보았다.“너 외출할 때 항상 디카프리도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어? 왜 다른 애로 바뀌었지?”“... 디카프리도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유라는 대답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여준재가 아직도 나를 의심하는 모양인데, 이대로는 안 되겠어. 방법을 강구해 의심을 풀어야겠어.”이걸 모르는 여준재가 유라의 말이 의심되어 한마디 캐물었다.
여준재 일행이 유람선 범위를 벗어난 직후 재차 폭격 소리가 들렸다.거대한 유람선이 쾅 하고 붕괴되고, 허공에서 끊임없이 유람선 잔해들이 떨어졌다.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떨어지는 잔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빨간 핏물이 주변으로 번졌다.이 상황을 보고 구남준과 여준재가 다급히 소리쳤다.“유람선에서 멀리 떨어져서 해안으로 헤엄쳐.”허둥지둥하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방향을 찾은 듯 잇달아 여준재를 따라 육지로 헤엄쳐 갔다.그들이 상륙할 때쯤 유라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도착했다.“어서, 어서 사람을 구조해.”여준재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유라는 황급히 옆에 있는 부하에게 구조 명령을 내렸다.30분 후 바다에 빠졌던 모든 사람이 구조됐다.유라는 몸이 흠뻑 젖은 여준재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준재,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 부하한테 말해서 호텔에 데려다줄까?”“필요 없어.”준재는 쌀쌀하게 거절한 후, 돌아서서 구남준에게 물었다.“어때? 몇 사람이 없어졌어?”이 말을 들은 구남준이 사실대로 보고했다.“23명이 실종됐는데, 그중 임초연 씨도 있습니다. 성시원 어르신은 다행히 잠시 일이 있어서 유람선에 없었습니다.”그는 말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여준재의 표정을 살폈다.그 시각 여준재의 표정은 음산하고 무서웠다.이는 사람을 죽여 입막음하는 행동인 게 분명하다.심지어 배후 인물은 그들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중무기까지 사용했다.“조사해!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분노가 극에 달한 여준재가 울부짖었다.옆에 서서 분노하는 여준재를 지켜보던 유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쥐고 있는 단서가 어쩌면 조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이 말을 들은 여준재와 구남준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무슨 단서?”“디카프리도가 조사한 바로는, 임초연이 H국에 있을 때 익명의 브로커를 만났고 그 뒤 스위스 은행에서 그녀의 은행 계좌에 600억이라는 거금이 송금됐대. 온갖
성시원은 여준재의 작은 행동들은 보지 못한 채 신경은 온통 그의 말에 집중되었다.“죽이겠다면 누구를?”“임초연.”여준재가 차갑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성시원은 듣자마자 낯빛이 변하더니 금세 여준재와 똑같이 어두워졌다. “설마 단서가 또 끊긴 거야?”하지만 여준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유라는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리고 애써 불안함을 감추며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계획이라도 있어?”“네 입으로 방금 이 일은 아마 독수리파 짓인 것 같다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할 수밖에.”여준재는 비웃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성시원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훑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유라는 여준재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가 빠르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확인해 보는 것도 좋지. 그때 나도 같이 갈게.”그녀는 당연히 따라가야 했다. 예상 밖의 일이 터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이쪽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해 고다정은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녀가 안심하고 태교에 전념한 뒤로부터 몸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하지만 구영진은 고다정의 태도 변화가 많이 불안했다.요 며칠 너무 조용하고 예전처럼 밖에 나가겠다고 소란도 피우지 않으니 너무 이상했다.집에 너무 오래 갇혀있어서 멍청해진 건 아니겠지?결국 구영진은 참지 못하고 고다정 앞에 다가와 물었다.“저기, 수경아, 어디 나가서 바람 좀 씌우지 않을래?” “제가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요?”고다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물었다.구영진은 침을 한번 삼키더니 다급히 해명했다.“그건 예전의 일이고, 지금은 몸도 많이 좋아졌고 얼굴도 핏기가 돌아 보이는데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좋아요. 사실 저도 밖에 놀러 나가고 싶었거든요.”고다정은 말을 마친 뒤 책을 내려놓고 외출 준비하려고 일어섰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뒤늦게 두 사람은 쇼핑몰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뒤 구영진은 고다정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까 봐 한껏 긴장한 채 그녀의 곁에 서있었다.고다정은 그의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저 느긋하게 쇼핑하고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장소는 그녀에게 어떠한 기억도 되살리지 못했다. 그녀는 실망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아기용품 샵에 시선이 끌렸다.“수경아, 왜 그래?” 고다정이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구영진이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이 여자가 설마 뭔가 낯익은 걸 보고 기억이 되살아났나?고다정은 애써 정신을 차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구영진에게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저기도 한번 가봐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그 아기용품 샵으로 향했다.구영진도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가게에 들어선 구영진은 주위가 온통 임산부들로 가득해 너무 어색했다.그는 처음으로 이런 가게에 들어와 봤다.그는 고다정이 아기 옷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다.“배 속의 아이가 아직 두 달도 채 안 됐는데 벌써 아기용품을 사기엔 너무 이른 것 같지 않아?”“아니에요. 지금부터 천천히 사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물건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지 아니면 그때 가서 허둥지둥 아무거나 사게 되잖아요.”옆에서 웃으며 안내하던 점원은 구영진을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가 아이한테 물건을 사주는 게 아까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구영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채고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기요. 왜 저를 그런 눈길로 봐요? 제가 설마 저까짓 돈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점원은 깜짝 놀랐다. 구영진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큰 소리로 비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고객님, 오해에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그런 뜻이 아니긴요. 방금 분명 저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봤잖아요!”‘나 구영진이 설마 여자한테 이까짓 물건도 사주기 아까워하는 좀생이로 보였나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