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어르신, 빨리 나오세요. 준이랑 윤이가 아파요!”몇 번을 외친 끝에 드디어 안쪽에서 방문이 열리며 신발도 옷도 엉뚱하게 착용한 성시원이 보였다.하지만 성시원은 더 이상 이런 세세한 부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누가 아프다고?”성시원은 초조하게 여준재를 바라보며 캐물었다.여준재는 여유롭게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성시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준이랑 윤이요. 이마를 만져봤는데 열이 나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은 여준재가 끌어당길 필요도 없이 잔달음으로 뛰어갔다.2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아이들 방에 도착했다.성시원은 곧바로 두 아이를 확인했고, 여준재는 옆에 서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조용히 기다렸다.얼마 후 굳어졌던 성시원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큰 문제는 아니야. 요즘 아이들이 감정 기복도 심하고 많이 놀라서 몸이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는 거야. 약은 안 먹어도 되니까 가서 따뜻한 물 한 대야 떠와. 그걸로 아이들 열 좀 내려주게.”“알겠습니다.”여준재는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화장실로 향했다.30분이 지나자 두 아이의 체온이 확실히 떨어졌고 그제야 아이들도 깨어났다.“아빠, 할아버지, 왜 여기 있어요?”하준이 쉰 목소리로 말하면서 침대를 누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거의 없었다.하윤이도 옆에서 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운 듯 여준재에게 투정을 부렸다.“아빠, 윤이 너무 아파요. 왜 이런 거예요?”“너희들 아까 열 나면서 아팠어. 이제 막 열이 내려서 몸에 힘이 없을 수 있어. 괜찮아.”이렇게 말하던 여준재는 하윤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더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아프면 조금만 더 누워 있어. 준이도 더 누워 있어. 조금 있으면 아빠가 아침 차려줄게.”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바닥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아빠도 몸 다 나았어요?”여준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여준재는 구남준으로부터 고다정의 최근 소식을 들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다정 씨를 데려간 사람이 임초연이라고?”“네.”‘어쩌면 애꿎은 유라만 잡은 건지도 모릅니다.’구남준이 뒷말을 하진 않았지만 여준재는 알 수 있었다.그는 눈빛이 가라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고다정을 데려간 사람이 임초연이라면 임씨 가문의 능력으로는 그렇게까지 조용히 흔적도 없이 일을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임초연의 뒤에는 반드시 조력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 조력자는 유라일 가능성이 높았다.유라의 성격으로 봤을 때 임초연은 단지 책임을 떠넘기고 여준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방패인 것 같았다.그 생각에 여준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반나절 안에 임초연의 행방을 알아내,”“그럼 유라 쪽은 계속 밀어붙입니까?”구남준의 질문에 여준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여명호에게 잠시 멈추라고 하고, 어르신 쪽에도 알려드려.”“네.”구남준은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성시원도 이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달려왔다.서재에 들어선 그는 여준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방금 구남준한테 들었어. 유라 일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던데, 이유가 뭐지?”“잠깐일 뿐입니다. 그 여자가 방심했을 때 어떻게 꼬리를 드러낼지 지켜보려고요. 그리고 저희 쪽에서 정보를 입수한 결과, 다정 씨는 임초연에게 잡힌 거랍니다.”“임초연?”성시원은 의아한 눈빛이었다. ‘왜 갑자기 다른 사람이 튀어나오는 걸까.’하지만 왠지 익숙한 이름이었다.여준재 역시 그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설명했다.“임초연의 집안은 YS그룹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작년에 어떤 일로 두 집안이 인연을 끊고 운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간단한 설명에도 곧바로 임씨 가문이 어느 집안인지 생각해 낸 성시원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또 네놈 때문이야?”“...”여준재는 당황한 나머지
“정말 다정이 소식이 들려왔어? 다정이는 괜찮아? 지금 어디 있대, 나도 같이 가도 될까?”강말숙은 숱한 질문을 퍼부었다. 특히 그녀는 마지막 말을 하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강말숙은 손녀를 직접 만나고 싶었고, 손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안 그러면 집에 혼자 남아 소식만 기다리다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이를 본 여준재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반대했다.“그쪽 상황이 좀 복잡하고 위험할 수 있어요. 다정 씨 무사한지 할머니께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은 잘 알아요. 다정 씨 찾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고 두 사람 얘기 나눌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이 말을 들은 강말숙은 실망했지만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녀는 단지 손녀를 구하고 싶을 뿐 본인이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한편 심해영은 여준재의 표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꼭 아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다만 지금 당장 물어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30분 후, 여준재와 성시원은 헬기에 탑승해 M국 첼스 부두로 향했다.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 측에서 소식을 접하고 디카프리도에게 지시했다. “비행기 좀 준비해 줘. 우리도 거기로 가자.”디카프리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준비하러 갔다.다만 비행기 탑승이 임박할 때 유라가 그를 불러세웠다.“넌 가지 마. 임초연이 널 전에 본 적 있어. 가면 들킬 거니까 폴을 데려갈게.”“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디카프리도는 불안한 듯 당부했다.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비행기에 올라 출발했다.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이 지나 임초연이 여준재보다 먼저 첼스 부두에 도착했다.유라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을 데리고 임초연이 있는 유람선으로 뛰어들었다.임초연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포박당해 유라 앞으로 끌려갔다.그녀는 주변을 잔뜩 에워싼 외국인을 보며 당황했다.“당신들 누구야? 날 잡아서 뭐 하려고? 경고하
유라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빠르게 여준재의 말에서 함정을 알아차린 유라는 일부러 놀란 척 말했다.“당신도 나처럼 배후를 알아냈나 보네.”이 말을 들은 여준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유라는 정말 교활하기 그지없는 여자였다.여준재가 말하기도 전에 유라의 목소리가 다시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이미 정보를 알아냈다면 내가 알려줄 필요는 없겠네. 네가 여기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와서 얘기해.”그렇게 말한 뒤 유라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여준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옆에 있던 성시원은 좋지 않은 여준재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유라가 나한테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임초연을 잡았어요.”여준재는 고개를 들어 성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멈칫한 성시원은 상대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그럼 우리가 애꿎은 그 여자 탓을 한 거야?”말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뭐가 문제인지 콕 짚어낼 수는 없었기에 여준재를 돌아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여준재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단번에 상대의 생각을 잃었다. 이윽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임씨 가문과 관련된 상황을 알려주었다.“임씨 가문은 운산을 떠난 후 일류 가문에서 이류 가문으로 추락했고, 그나마 사돈을 만나서 도움을 받긴 했지만 능력에 한계가 있었죠. 그런데 임초연은 손건우와 시리우스에게서 고다정을 데려갔어요. 용병을 고용했다 해도 그 능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건 주변 용병뿐일 텐데, 애초에 진짜 용병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요.”“그 말은 유라가 이번 일을 배후에서 지시한 게 맞고, 임초연은 유라가 세운 방패라는 뜻이네.”성시원은 여준재의 말을 들으며 그 핵심을 빠르게 파악했다.여준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그 말에 성시원은 빤히 여준재를 바라보았다.“증거는?”“아직 없지만, 임초연을 만나면 생길 것 같네요.”여준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적어도 그가 아는
10여 분이 지나고 일행은 한 호텔에 내렸다.이곳은 YS 그룹 산하에 있는 호텔이었다.매니저는 진작 소식을 접하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여준재를 보자마자 잔뜩 아부 섞인 모습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말씀하신 방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이쪽으로 따라오세요.”말이 마친 그는 앞장서서 안내했다.여준재는 구남준에게 밀어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성시원이 그 뒤를 따랐다.성시원은 걸어가면서 임초연을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임초연 역시 위험한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따라가지 않으려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빨리 가!”화영은 짜증스럽게 그녀를 확 밀었다.몇 분 후 여준재 일행은 최상층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도착했다.구남준이 매니저를 보낸 후 임초연은 여준재 앞에 끌려왔다.“고다정 어딨어?”여준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초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임초연은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저도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 여자 혼자 도망쳤어요.”그런데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 무릎을 힘껏 걷어찼고, 거센 힘에 임초연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그 순간 여준재는 휠체어를 끌며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어 임초연의 목을 조르며 억지로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말했지. 감히 내 약혼녀에게 또다시 손을 대면 네 할아버지가 용서를 빌러 와도 절대 살려주지 않는다고.”임초연은 두 눈에 살기가 감도는 남자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지금 이 순간 임초연은 여준재가 자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진실을 말하든 말든 결과는 똑같이 최악일 것 같았다.그렇다면 차라리 여준재도 고통받게 하고 싶었다.“고다정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죠? 알려줄게요 내가.”그러면서 임초연은 여준재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드러냈다. “내가 죽였어요. 지금쯤 상어의 배설물이 됐으려나.”역시나 그 말에 화가 난 여준재는 다섯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임초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초연은 경호원들에게 끌려갔다.구남준은 여전히 분노하는 여준재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다가가 말렸다.“임초연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선 안 됩니다. 그쪽 사람들이 사모님을 찾지 못했다면, 사모님께서는 분명 도망갔을 겁니다.”“나도 그 말에 동의해.”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성시원도 입을 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아까 부두 근처에 있을 때 주변을 관찰했는데, 그곳은 평소에도 배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 상어가 다닐 수 없어. 오히려 다정이가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지.”이 말을 듣고 분노에 잠식되었던 여준재가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구남준, 가서 누구든 다정 씨에 관한 정보를 가져오는 사람은 상금 백만 달러를 준다고 공지해.”여준재는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을 여러 조로 나눠서 사고 장소를 중심으로 수색하라고 해.”구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고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자 성시원이 다가와 말했다.“하루 종일 고생하고 방금 기운도 많이 썼으니 침대에 누워. 내가 치료해 주고 사람 보내 다정이도 찾을 테니까.”“전 괜찮아요. 어르신께서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사람 보내서 다정 씨를 찾아주세요.”여준재는 1분1초라도 서둘러 고다정을 찾고 싶었다.그는 조금 전 임초연이 한 말을 잊지 않았다.고다정은 다쳤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여준재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던 성시원이 그의 속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나. 속으로 만족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차갑게 코웃음쳤다.“자네가 괜찮은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다정이 찾기 전에 자네가 먼저 망가지는 꼴 못 봐!”그 말과 함께 성시원은 손을 뻗어 여준재를 밀면서 침대에 눕혔다.한바탕 침을 꽂고 나서야 성시원은 치료를 끝냈다.여준재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성시원은 못 본 척 당부했다.“다정이 빨리 찾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서두를 거 없어. 내일은 뭘 하든 말
그 시각 저택에는 불빛이 환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에서 엔진 소리가 들리고 구영진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다가가 그를 맞이한 집사는 술 냄새에 섞인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를 맡으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도련님 왜 또 술 마시러 가신 겁니까. 어르신 귀에 들어가면 또 도련님을 질책할 게 분명합니다.”“괜찮아, 혼내라고 해. 내 살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뭘.”구영진은 무심하게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아까 전화했을 때 2층에 있는 그 여자가 깨어났다고 했지?”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 아가씨 깨어나긴 했는데 기억을 잃었습니다. 의사를 불러서 진찰을 해보니 충격과 외상이 겹쳐서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고 하더군요.”그 말에 구영진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기억을 잃었다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그는 여준재가 이 여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구영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대체 무슨 악역이기에 여준재 그 자식의 약혼녀를 구하고 그 여자가 기억까지 잃었는지. 이 기회에 여준재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하늘이 자신에게 준 기회를 저버리는 것 같았다.이런 도련님의 속내도 모른 채 집사가 물었다.“저 아가씨가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구영진과 함께 외국에서 몇 년을 살았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고다정의 정체를 몰랐다.그의 말을 들은 구영진은 황급히 말렸다. “하지 마. 내가 저 여자를 알아. 경찰 부를 필요 없어.”이 말에 오히려 집사가 깜짝 놀랐다.“도련님 아는 분이세요?”“그래!”구영진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집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계획이었다.이를 본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웃으며 물었다.“도련님께서 아는 분이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쯤 저 아가씨 가족분들께 데리러 오라고 알리실 거예요? 이틀만 더 지나면 도련님도 귀국하셔야 하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구영진이 방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영진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고다정이었다.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구영진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준수한 남자의 얼굴에 여자는 속으로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구영진도 고다정을 살펴보았다.눈앞에 있는 여자가 과거에 사귀었던 어떤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에 정교하게 박힌 이목구비, 특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게다가 이 여자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여준재가 좋아할 만하네.’하지만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여준재라는 남자를 만난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다.구영진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물었다.“방금 와서 들었는데, 장씨 아저씨 말이 기억을 잃으셨다고 하던데?”장씨 아저씨는 아래층에 있는 집사였다.고다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갈라진 목소리로 정정했다.“잠시 예전 일이 기억 안나는 것뿐이에요.”“그게 기억상실증과 뭐가 다르지?”구영진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다만 목소리가 작아서 그의 말소리만 들었을 뿐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고다정이 되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야. 바다에 빠진 것뿐인데 기억을 잃은 게 이상해서.”구영진은 일부러 의아한 척 말했다. 한쪽으로 연기를 하면서 고다정을 살폈다.고다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이 남자가 자신의 기억을 잃은 이유를 안다는 걸 의식했다.이윽고 그녀가 여러 질문을 던졌다.“방금 내가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했는데 내가 왜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난 누구고, 내 이름은 뭐예요?”말하는 동시에 고다정의 시선은 구영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 얼굴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구영진은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며, 상대도 자신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