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아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이미 얘기했잖아요. 그만 물어봐요...”진원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한 척했다.“나에게 말해줘요.”진원우가 목소리를 낮췄다.송연아는 부은 두 눈을 감고 말했다.“사실 어느 정도 추측이 가지 않아요?”송연아의 팔을 잡았던 진원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풀렸다.구애린을 찾았을 때 그녀는 옷이 풀어 헤쳐진 채로 차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풀밭에 누워 있었다.“그러니까 묻지 마요.”송연아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많이 속상했지만 될수록 소리 낮춰 말했다.“한 시도 떠나지 않고 애린 씨를 지킬게요. 지금 애린 씨는 원우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애린 씨 앞에 나타나지 마요. 애린 씨가 더 자극받을까 봐 걱정돼요.”진원우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고 기분이 우울했다.속상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송연아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그럼 애린 씨 보러 들어갈게요. 옆에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죠.”말을 마친 송연아는 몸을 돌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구애린의 수술은 그녀가 직접 했다.그래서 구애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송연아는 그녀를 자극할까 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병실로 갈게요.”구애린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송연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송연아는 조용히 그녀를 병실로 옮기고는 침대를 고정시켰다.그리고 의자를 하나 옮겨 침대 옆에 앉았다.구애린은 몸을 돌려 누우며 그녀를 등졌다.송연아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 모든 위로의 말은 너무 무력하게 들릴 것이다. 말로는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절대 치료할 수 없었다...어두운 불빛, 조용한 밤.억눌릴 대로 억눌린 구애린의 울음소리는 너무 또렷하게 들려왔다.송연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울고 싶으면 울어요. 여기 다른 사람 없어요.”
강세헌은 사태가 심각할 것을 예상했지만 송연아에게서 직접 들으니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곧이어 얼굴색도 어두워졌다.그가 화난 건 단지 이 일의 원래 타깃이 송연아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작정하고 이 일을 꾸몄다는 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일 그만둘 수 있어?”강세헌이 물었다.송연아는 그가 지금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멈칫했다.“왜, 왜요?”송연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만약 후임 원장 자리를 물려받기로 약속하지 않았다면 난 너를 데리고 프랑스에 가서 살았을 거야. 거기에 우리가 가서 생활할 모든 것을 잘 준비해 뒀거든. 그러면 이 일이 안 생겼을 수도 있었잖아.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난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줄 수 있어...”“그러니까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예요?”송연아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네, 인정해요. 나 때문이에요. 내가 아니었으면 애린 씨도 이런 일을 겪지 않았겠죠. 내 탓이에요. 다 내 탓이에요...”그녀는 강세헌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니까 세헌 씨도 내 탓을 하는 거예요?”강세헌이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일단 진정해...”“내가 어떻게 진정해요?”송연아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는데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나도 속상해요. 그런데 세헌 씨가 지금 나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원인이 나라고 하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그럼 이 일이 만약 정말 당신에게 발생했다면 내가 어떤 기분일지 예상이 돼? 당신이 이 일에서 빠져나간 게 아니야, 다만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 당한 것이지. 그런데도 제멋대로 굴래?”강세헌이 두려운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고훈의 일은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송연아는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계속 침묵을 지켰는데 강세헌의 말에 일리가 있었지만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이 일에 그녀의 책임이 있다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송연아는 진원우의 생각을 몰랐기에 어떻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구애린은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원우 씨가 결혼해 준다고 해도 난 원우 씨를 볼 면목이 없어요.”송연아는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그녀는 구애린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내가 죄인이에요...”“아니에요, 어쩌면 이게 내 운명일 지도 모르죠. 언니 때문은 아니에요. 제가 전 반생을 너무 행복하게 살았나 봐요. 그래서 하느님도 그런 내가 마땅치 않아 이런 고난을 내려준 게 아닐까요?”구애린은 고아였지만 좋은 사람에게 입양되어 친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받으며 돈 걱정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왔다. 고아 중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아마 그녀의 행운은 전 반생에 다 쓴 모양이다.구애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부탁 하나 들어줘요.”송연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네, 뭐든지요.”“떠나고 싶어요.”“어디로요?”송연아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이럴 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안 돼요. 바보 같은 생각만 할 거예요.”그녀는 다급하게 구애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타이밍 맞지 않게 전화가 걸려 와 송연아는 미간을 구겼다.그녀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고, 전화기 너머로 정경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출근 시간인데 왜 아직도 오지 않았어요?”“먼저 일 보고 있어요. 오늘은 못 갈 것 같아요. 다들 해야 할 일도 많고, 어제 토론한 건 그대로 실험을 진행시켜요.”송연아가 말했다.정경봉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 그게, 괜찮은 거죠?”송연아가 대답했다.“괜찮으니까 전화 끊을게요.”정경봉이 알겠다고 했고, 송연아는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일이 바쁜데 괜히 나 때문에 못하고 있죠?”구애린의 물음에 송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에요, 중요
구애린을 괴롭힌 건달들은 모두 가면을 쓴 남자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이 도시에서 그들의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들은 이곳에서 법을 어긴 적인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았으니 ‘대단’ 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참나, 무슨 일이 있겠어요?”제일 앞에 선 얼굴에 칼 흉터가 난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이런 일은 아무도 소문내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거고요...”“당신들이 뭘 알아?”가면을 쓴 남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도망갈 수 있었던 건 요행이야. 이번에는 지독한 상대와 싸우는 거라고. 방심하면 당신들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거야. 잡히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어.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칼 흉터가 난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그렇게 심각해요?”가면을 쓴 남자가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얼굴에 칼 흉터가 난 키 크고 삐쩍 마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람 잡을 때 일곱 명이 한 사람을 상대했는데도 많이 다쳤잖아. 그런데도 방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얼굴에 칼 흉터가 난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상대는 한 사람이었지만 싸움 실력이 대단한 건 그들도 인정해야 했다.“상대는 전문 경호원이니까 당연히 싸움을 잘하겠죠.”“알면 상대를 얕잡아보지 말란 말이야.”남자가 경고했다.“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면 안 돼. 여기 인터넷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으니까 게임이나 하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 안전하면 내가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네, 그렇게 하죠. 다만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데요?”얼굴에 칼 흉터가 난 키 크고 삐쩍 마른 남자가 물었다.“구체적인 시간은 나도 몰라.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어차피 여기에 음식도 있으니 좀 오래 있으면 어때?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알겠어요.”목숨을 지키기
“그거 알아요? 다 큰 사내자식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울고 싶은지요?”송연아도 똑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당연히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진원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애린 씨를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요?”그는 송연아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자신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애린 씨에게 조금만 더 잘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그는 구애린과 연애하는 동안 계속 일하느라 바빠 두 사람이 함께 식사했던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녀가 매번 회사로 찾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더는 오지 말라고 했었다.구애린이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했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그녀가 자기 아이까지 임신했지만 결혼식 하나 해주기 싫었고, 그저 그녀가 묵묵히 자기를 따라다니기를 바랐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후회가 몰려왔다.그는 너무 이기적이고 구애린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했다. 지금 도대체 무엇으로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상처를 입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메울 수 있단 말인가?“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요. 하지만 애린 씨가 나를 보면 자극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애린 씨가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애린 씨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줘야죠. 내가 범인들을 찾으면 애린 씨를 위해 직접 복수할 거예요. 그리고 다시 애린 씨를 찾아가겠어요.”진원우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단기간 내에는 깨지 않는 거죠? 잠이 들었을 때 얼굴을 보고 싶은데.”송연아는 얼굴을 돌려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고는 말했다.“들어가요. 몇 시간 안에는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진원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병실로 다가갔다.문손잡이를 잡더니 흠칫하고는 송연아에게 말했다.“이 일은 연아 씨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미 일어난 일이니 더는 생각하지 말죠.”송연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고마워요.”진원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송연아는 복도 벤치에 앉아 넋을 놓고 기다리
“세헌이가 작은 회사 사장도 아니고, 내조할 아내가 있어야 하는 건 맞아. 그의 일을 돕고, 집안일을 신경 쓰는 아내 말이야. 세헌이가 가정을 챙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아. 전에 나에게도 찬이를 데리고 프랑스에 가야 할지 물었어. 거기에서 집을 사고 도우미도 준비했기에 프랑스로 가기만 하면 편안히 살 수 있대. 프랑스에 가면 일도 편하게 처리할 수 있고. 그런데 프랑스로 가려는 얘기를 더 꺼내지 않은 게 연아 너 때문이 아닐까?”송연아는 단 한 번도 강세헌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오늘 싸우면서 송연아는 강세헌이 프랑스에 가서 살림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그러니까...”“연아야, 세헌이가 돈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너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 돼.”한혜숙이 말했다.그녀는 송연아가 계속 일을 하는 것을 지지했고, 앞으로 계속 아이들도 돌볼 것이다.송연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한혜숙을 바라봤다.“지금이야 너를 아끼고 사랑하겠지. 하지만 넌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았잖아. 밖에 예쁘고 젊은 여자애들이 널리고 널렸어. 나는 네가 나처럼 물러설 곳도 없기를 바라지 않아. 알겠어?”배신을 겪어본 한혜숙은 진심으로 딸을 위해 생각했다.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미리 대비하는 것도 나쁠 것 없었다.한혜숙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내가 얘기를 잘해볼게.”“무슨 얘기를 할 거예요?”송연아는 갑자기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녀는 한혜숙이 두 사람 일에 끼어드는 걸 원하지 않았고, 이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한혜숙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 말할 테니까. 뭐 좀 먹어. 몸이 망가지면 정말로 집에 있어야 하니까.”송연아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엄마, 고마워요.”“고맙긴, 뭘. 나는 네 엄마야. 언제든지 네 생각을 가장 먼저 한다고.”한혜숙이 한숨을 길게 쉬며 말을 이어갔다.“만약 너랑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테이블 앞에 앉은 아들을 보니 강세헌의 차가운 얼굴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는 오로지 송연아와 아이들 앞에서 그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었다.강세헌이 찬이를 안아 올렸고, 찬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엄마는요?”강세헌은 잠깐 흠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엄마는 출근했어, 저녁에 돌아오실 거야.”찬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아빠, 저녁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나가 놀고 싶어요.”강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그는 찬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빠로서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으니 말이다.찬이는 잔뜩 신이 나 박수를 쳤다.웃고 있는 그의 밝은 두 눈은 초승달처럼 예뻤는데 송연아의 눈과 똑 닮았고, 다른 이목구비는 그를 닮았다.강세헌은 갑자기 찬이와 둘째가 태어날 때 송연아가 겪었던 시련을 떠올렸다.‘연아를 속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했었는데. 아무리 다급했어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강세헌은 이제 송연아가 돌아오면 그녀에게 먼저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똑똑.’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그가 들어오라고 하자 한혜숙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찬이야, 이제 낮잠 자야지.”강세헌은 이따가 할 일이 있었기에 찬이를 한혜숙에게 맡겼다.한혜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혹시 잠깐 얘기해도 돼?”강세헌은 찬이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저녁에 돌아와서 얘기해요.”아마도 찬이가 자리에 있어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한혜숙은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알겠어.”...병원에서.진원우는 구애린이 깨어나기 전에 병실을 나섰다.“그럼 애린 씨를 잘 부탁할게요.”송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애린 씨 옆을 잘 지키고 있을게요.”진원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앞에 선 채 다시 한번 구애린을 돌아보며 잠깐 망설이더니 끝내 성큼성큼 병실 밖으로 나갔다.송연아가 진원우를 불렀다.“비행기 티켓을 두 장 예약했어요. 제가 직접 애린 씨를 아버님에게
비행기가 기류를 만나 흔들렸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시차 때문에 미국에 도착했는데도 아직 낮이었다.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송연아는 미리 구진학에게 연락했었다.그들이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로 나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구진학을 발견했다.송연아는 구애린 몰래 모든 일을 솔직하게 구진학에게 말했다.그는 표정이 굳었지만 구애린이 부담을 느낄까 봐 두 사람을 본 순간 아무 일도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구진학이 웃으면서 말했다.“돌아왔어?”“아빠.”구애린도 구진학 앞에서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했다.차마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고, 다만 최대한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그녀의 두 눈과 피곤한 얼굴을 보면 그녀의 상태가 절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구진학은 여전히 모른 척하며 말했다.“가자, 집에 가자.”그는 딸을 꼭 안으며 말했다.“집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준비하라고 했어. 한국에 있는 동안 집밥이 그리웠지?”구애린이 말했다.“네, 엄청 먹고 싶었어요.”“그럴 줄 알았어. 너 어릴 때부터 먹는 거 좋아했잖아.”구진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구진학의 말을 들으면서 구애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빠.”구애린은 구진학을 와락 끌어안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구진학은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말했다.“다 큰 어른이 아직도 나한테 애교를 부리면 어떻게 해.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진원우가 괴롭혔어? 지금 당장 한국으로 가서 너를 위해 복수할까?”“아빠.”구애린이 다급히 설명했다.“아니요, 원우 씨가 저를 괴롭힌 거 아니에요.”“그럼 왜 울어?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얼른 집에 가요. 집이 그리워요.”송연아는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아무래도 구애린을 구진학 옆으로 보낸 건 맞는 선택인 듯했다. 적어도 구애린은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두 사람의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