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결국 생각을 접었다.강세헌의 화가 풀리기만 하면 되니까.“그 의사가 찬이의 가정 의사로 되어주겠대요?”강세헌이 대답했다.“아니.”그가 돈을 얼마나 주든 의사는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의사에겐 꿈이 있으니까. 다만 찬이에게 무슨 일 생기면 가장 빨리 달려오겠다고 약속했다.심재경이 카일을 떠올린 건 카일이 국내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일의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 그녀를 위해 본인 사업을 포기했다. 단 카일 같은 능력자는 어딜 가나 큰 성과를 이룬다!카일이 가정의 제안을 거부한 것도 더 많은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이건 의사의 본업이니까.송연아가 생각했다.‘의사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다들 아픈 환자를 치료할 마음을 갖고 있나 봐.’하여 이 대답도 예외는 아니었다.우웅...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연아는 밖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이 원장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요.”“무슨 부탁?”“우리 시에서 댄스대회를 여는데 스포츠센터에서 하잖아요. 제가 심사위원으로 뽑혔는데 일이 있어 못 갈 것 같으니 연아 씨가 대신 가주실래요?”송연아가 단칼에 거절했다.“난 안 돼.”“왜죠?”송연아가 대답했다.“난 심사할 자격도 없고 또 그럴 시간도 없어.”“오래 걸리지 않아요. 오후면 충분할 거예요.”이 원장이 말했다.“꼭 좀 부탁드릴게요.”송연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찬이를 보더니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줄곧 찬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인제야 시간이 조금 났으니 말이다.“지금은 정말 시간이 안 돼...”“아이참,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임설 씨가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어요. 임설 씨는 연아 씨가 심사위원이 돼주길 바라고 있어요...”송연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뭐라고?”“연아 씨 저번에 저를 통해서 임설 씨를 찾으셨잖아요. 두 분 친하신가 봐요! 아니면 임설 씨가 왜 저를 통해 연아 씨를 심사위원으로 밀어줄 생각을 했겠어요?”어쨌거나 심사
그녀의 물음에 강세헌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으니까.왜 갑자기 비서 얘기가 나오지?화제가 너무 빨리 전환된 게 아닐까?“그냥 비서일 뿐이야.”강세헌은 비서의 행동을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다.“왜 그렇게 물어?”송연아는 비서가 그의 사무실에서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아까 회사에 세헌 씨 찾아갔을 때 비서가 사무실에 있었어요.”송연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비서는 가끔 그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가 있어 강세헌도 당연하게 생각했다.“그게 왜?”송연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하지만 아까 분명 세헌 씨 책상에 엎드려서 그런 자세로... 내가 잘못 본 걸까? 아닐 텐데, 나 그럴 리 없는데!’“연아야, 너 지금 질투해? 내 부하가 여자라서 마음이 안 놓이면 당장 바꿀게.”강세헌은 줄곧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다가 문득 입꼬리가 올라갔다.송연아는 두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질투하는 거로 보여요?”“그게 아니면?”강세헌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그 당시 비서의 그런 몸짓을 보았을 때 송연아도 충격을 받고 소름이 끼친 건 사실이다. 단 질투는 아니다. 강세헌이 사무실에 없었고 비서 홀로 쇼를 하고 있었으니까!“내가 왜 질투를 해요?”강세헌은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진짜 질투 안 해? 응?”그가 송연아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 대자 뜨거운 숨결이 귀에 닿아 너무 간지러웠다. 송연아는 목을 움츠리며 곧바로 인정했다.“질투해요, 한다고요. 인제 됐죠?”강세헌은 그녀의 볼에 입 맞추고는 또다시 귓불을 간지럽혔다.“질투해야 날 좋아한다는 걸 의미하지...”그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송연아는 바로 눈치채고 황급히 물었다.“아직 밥 안 먹었죠? 얼른 가서 밥할게요...”그녀는 말하면서 강세헌을 밀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오은화가 저택에 없으니 그들에게 밥해줄 도우미가 없었다.송연아는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안이 텅 비어 있었다.“우리 마트 다녀올래요?
강세헌은 그녀의 애교에 사르르 녹아내려 웃으며 답했다.“네 맘대로 해.”송연아는 신이 나서 미소 지었다.“그렇게 좋아?”강세헌이 눈썹을 들썩거렸다.“걔가 대체 무슨 짓을 꾸밀지 똑똑히 지켜보고 싶어서요.”송연아가 대답했다.강세헌은 고개 돌려 그녀를 힐긋 바라봤다. 호기심 넘치고 탐험을 좋아하는 건 약간의 승부욕이 있다는 걸 증명하지만, 강세헌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그는 너무 연약한 여자는 별로였다. 송연아는 조금 강한 면이 있고 머리가 똑똑한 편이다.그렇다고 전혀 연약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녀의 몸이 매우 나른하여 품에 안기니 좀처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송연아는 연약함과 강인함을 겸비한 여자였다.곧이어 마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후 송연아가 가방에서 동전을 꺼내 카트를 밀고 왔다. 강세헌은 의식주가 전부 세팅되어 있어 홀로 마트에 쇼핑하러 온 적이 없다.집에 있는 먹을 것들은 오은화가 마련해놓은 것이다.그는 자신이 익숙지 않는 일에 말을 아끼고 묵묵히 송연아를 따라다녔다. 길을 잃을까 봐서가 아니라 그녀와 좀 더 가까이하고 싶어서였다.송연아는 한 손을 내밀더니 그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마트 못 와봤죠?”강세헌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간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주 가끔 와.”송연아가 웃으며 말했다.“못 와봤으면 못 와봤다고 해요. 세헌 씨는 강씨 일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트에 못 와본 것도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숨길 필요 없어요.”강세헌은 도리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넌지시 물었다.“그렇게 웃겨?”“아니요... 전혀 안 웃겨요.”송연아는 바로 쫄았다.강세헌은 그런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이 여자가 정말, 내 앞에서 온갖 끼를 다 부려. 먼저 날 비웃고 이젠 겁먹은 거야? 널 어쩌면 좋아?’하필 그는 이런 송연아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쇼핑 구역으로 간 두 사람은 쭉 둘러보면서 물건을 골랐다.한 시간 남짓 지난 후에야 쇼핑을 마쳤는데
그녀는 임설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젠 임설이 뭘 할지 거의 짐작이 갔다.현장 스태프들이 계속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고 그녀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누군가가 다가오며 그녀에게 집적거렸다.“혹시 안무가예요?”송연아가 머리를 내저었다.“아니요.”“그럼 심사위원인가요?”그자가 물었다.상대는 남자 심사위원이었다. 보통 춤추는 남자들은 몸매가 날씬하고 길쭉한 편이다. 남자는 깔끔한 외모에 머리도 단정하게 세팅하여 전혀 느끼해 보이지 않고 굉장히 밝은 이미지였다!송연아가 대답하려 할 때 임설이 다가오자 곧바로 켕기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저 심사위원은 맞는데 누구 대신해서 온 거예요.”“어쩐지, 낯설더라니. 제가 매번 댄스대회 심사위원들을 다 봤고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그쪽이 유난히 낯설더라고요.”송연아는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제가 이런데 처음 와서 아직 잘 몰라요.”“괜찮아요. 이따가 제 옆에 앉아요.”남자가 열정적으로 말했다.송연아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또다시 연약하고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야 너무 고맙죠.”“많이 두려우신 것 같은데 그냥 사람들 춤 잘 추는지, 동작이 규범이 돼 있는지 보면 돼요.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모르는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봐요. 제가 가능한 다 도와드릴게요.”남자가 웃으며 말했다.임설은 가까운 곳에서 선반에 걸려있는 안무 복장을 체크하는 척하며 실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송연아도 그녀가 엿듣는 걸 진작 알고 있어 일부러 우물쭈물하며 남들에게 들킬까 봐 남자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도 정확하게 임설이 들을 수 있게끔 조절했다.“아까 말했잖아요, 난 지인 부탁으로 대신 온 거라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심사위원이 될 자격은 더 없고요. 그쪽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꼭 비밀 지켜야 해요. 실은 나 춤출 줄도 몰라요.”남자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아무것도 모르는데 심사위원이 될 수 있다고? 이건... 좀 아니지!’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가 술렁거렸다.학부모들은 썩 내키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열심히 해왔는데 최종 성적을 취소하다니!“왜죠? 우리 아이들이 오후 내내 고생했고 저희도 여기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는데 왜 성적을 취소하는 거죠?”“그러게요. 아이 때문에 일부러 반차까지 냈단 말이에요.”“성적 취소라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희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관중석의 학부모들이 흥분하며 뿔뿔이 내려와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참가 학생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다들 진정하세요. 실은 방금 누군가가 심사위원으로 사칭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부득이하게 대회 결과를 취소하게 되었습니다.”아래의 원성이 더욱 거세졌다.“대체 어떻게 된 거죠? 사칭이라니요!”“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장내에 온갖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방금 송연아와 얘기를 나누던 남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연아 씨 일이 발각된 거 아니에요?”송연아는 이 모든 게 자신을 겨냥한 일이란 걸 너무 잘 알았다.지금쯤 임설은 아마도 어딘가에 숨어서 그녀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볼 게 뻔하다.송연아는 두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럼 어떡해요?”남자가 제안했다.“먼저 나가실래요?”송연아는 못 나간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의 말에 찬성했다.“좋은 방법이네요.”말을 마친 그녀가 이제 막 나가려 하자 임설이 어느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는지 그녀를 덥석 잡더니 불만을 표출하는 학부모들에게 말했다.“바로 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사칭했어요. 춤출 줄은 아예 모르고 심사위원이 될 자격은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이번 대회 결과를 취소하기로 했어요. 다들 불만 있으면 이 사람한테 따지세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모든 화살이 송연아를 향했다.송연아는 머리를 숙이고 진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저 멀리에서 이제 막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강세헌만이 그녀의 눈가에 스친 냉랭함을 보아냈다.
임설은 무슨 큰 꼬투리를 잡은 듯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내가 장담하건대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심사위원으로 사칭하고 있어. 참가 학생들의 노력을 허비했고 학부모님들의 시간도 지체했지. 진짜 너무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넌 도대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야?”“뭘 어떻게 올라와. 저 가냘픈 꼴 좀 봐, 몸 팔아서 올라온 게 뻔하지...”그 사람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송연아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더니 순간 쫄아버렸다.줄곧 그녀를 편들던 남자 심사위원마저 송연아의 눈빛에 화들짝 놀랐다.마냥 연약해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변하다니, 좀 전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내가 춤을 못 춘다고? 만약 추면 어쩔 건데?”송연아가 물었다.임설은 여전히 안 믿는 눈치였다.“그럴 리 없어. 만약 네가 춤출 줄 알면 내가 맨손으로 스포츠센터를 청소할게.”송연아가 나지막이 되물었다.“약속 지키는 거지?”임설은 이런 송연아의 모습에 아직도 그녀가 켕기는 거라 여기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당연하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증인이 돼줄 거야.”아래에서 누군가가 맞장구를 쳐주었다.“그래요, 우리가 증인이 돼줄게요.”사실 다들 기적을 바랐다. 송연아가 춤을 잘 춰야만 참가 학생들도 다시 겨룰 필요가 없으니까.물론 일부 잘하지 못한 학생들의 학부모는 다시 겨룰 기회를 원했다.하지만 대부분 학부모들은 다시 겨루길 바라지 않았다!“어떤 곡으로 하실래요?”남자 심사위원은 송연아가 전에 연약한 척했다는 걸 다 알아챘다!그녀가 감히 이렇게 말한다는 건 충분히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안 그러면 쉽게 이런 말을 내뱉지 못할 테니까.송연아는 가장 자신 있는 곡으로 선택했다.임설은 문득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네가 감히 춤을 춰?”“못할 게 뭐야?”송연아는 코트 단추를 풀어헤쳤다. 그녀는 안에 춤추기 딱 좋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이를 본 임설은 입이 쩍 벌어졌다.‘진작 준비를 해왔어?! 완전 잘 어울리는 원피스까지 입고 왔잖아!’“아니,
임설은 치가 떨려 목소리까지 떨었다.“네가 일부러 그런 거니까 난 동의할 수 없어.”이 큰 스포츠센터를 그녀 홀로 청소하려면 두 날도 더 걸릴 것이다. 게다가 맨손으로 청소하다니, 이 굴욕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그녀는 앞으로 직장에 다닐 엄두조차 안 났다.남들이 그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송연아를 해치려 했던 건 그녀에게 먼저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임설은 그녀를 너무 쉽게 믿어버려 강세욱을 해쳤다. 이 수모를 견딜 수가 없어 송연아를 난처하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했는데 정작...임설은 몇 번이고 송연아에게 덮쳐들어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송연아가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스포츠센터를 다 청소할 필요 없어. 내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면 돼.”“그게 뭔데?”임설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 줄 몰랐다.“네가 송예걸에게 문자 보냈지? 백수연도 네가 감방에서 빼내서 어딘가에 숨겼지?”송연아는 드디어 원하던 바를 물었다.임설은 어안이 벙벙했다.“송예걸은 뭐고 백수연은 또 누구야?”송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거짓말하는지 세심하게 관찰했다.“아닌 척하지 마.”“내가 왜 아닌 척해야 하는 건데?”임설은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송예걸, 백수연 그게 다 누구냐고? 내가 왜 그들을 잡아가?”임설이 부정했고 송연아는 그녀의 표정에서 전혀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순간 송연아도 어쩔 바를 몰랐다.“인정하지 않으면 네가 한 약속 지켜. 스포츠센터를 깨끗이 청소해. 다들 지켜보고 있으니 약속 어기지 마.”말을 마친 송연아는 무대 아래에 내려와 스태프에게 말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더는 지체하지 말고 얼른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해요.”이젠 바보 멍청이라 해도 누구의 계략인지 눈치챘을 것이다.임설이 송연아를 해치려다가 도리어 제 발등 찍힌 격이 되었다!임설은 멘탈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겉으론 어쩔 수 없이 버텨내야 했다.그녀는 이번 사건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빨개진 그녀의 얼굴은 곧 터질
다가온 남자는 좀 전의 심사위원이었다. 송연아가 까먹고 옷을 챙기지 않아 옷을 주러 왔는데 마침 그때 임설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남자가 재빨리 나서서 도와주려고 할 때 누군가가 한발 앞섰다.“여기 코트요.”남자 심사위원이 옷을 건넸다.송연아가 받으려 했지만 강세헌이 먼저 가로채 갔다. 그는 고마운 뜻이 전혀 없고 도리어 차가운 눈길로 심사위원을 째려봤다.송연아가 춤출 때 그는 이 남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송연아를 쳐다보는 걸 주의 깊게 지켜봤다.지금 설마 코트를 돌려주는 빌미로 집적대려는 걸까?송연아는 그런 강세헌이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옷을 까먹고 못 챙긴 건 사실이니까. 송연아는 웃으며 남자 심사위원에게 말했다.“고마워요, 오늘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아니에요.”남자 심사위원이 쑥스럽게 웃으며 물었다.“이분은...”“제 남편이에요.”송연아가 대답했다.오늘 강세헌은 옷에 힘을 좀 뺐다. 남자 심사위원은 그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저도 몰래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나보다 키 좀 크고, 살짝 잘생긴 거 말고는 별 볼 거 없는데? 게다가 나처럼 자상하지도 않잖아.’그는 강세헌의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며 그의 성격이 난폭하다는 걸 알아챘다.“연아 씨...”남자 심사위원이 이제 막 말하려 할 때 강세헌이 아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우리 이만 가자.”그는 남자 심사위원의 말을 잘랐다.송연아는 그런 강세헌을 힐긋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라갔다.그녀는 차에 타서야 입을 열었다.“기분 나빠 보이는데 혹시 방금 심사위원을 경계하는 거예요?”강세헌은 침묵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송연아는 그를 너무 잘 알아 아무 대답 없으니 더 캐묻지도 않았다.그의 성격은 이렇듯 난폭할 따름이니 송연아가 화제를 돌렸다.“내 생각에 이번에 찬이를 해친 사람이 바로 임설인 것 같아요. 어쩌면 배후에 조력자가 있을지도 몰라요.”이건 단지 그녀의 추측일 뿐이다.임설에게 그럴만한 동기가 있으니까.“임설은 백수연을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