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 누나는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아 젊을 때 조금만 깨어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고 우아한 생활을 했을 거다. 적어도 지금처럼 엉망은 아닐 거다.이런 경험을 하면 그 어떤 여자라도 후회할 거다.나는 애교 누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마음 아팠다.매일 베개를 베고 자는 남편한테 모함당하다니.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을 거다.“애교야, 슬퍼하지 마. 우리 이제 저 쓰레기 자식이 바람피운 증거도 모았으니까 이혼하면 그만이야.”남주 누나가 냉정하게 애교 누나를 위로했다.그때 왕정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씩씩거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다들, 다들 나를 속였다 이거야? 진동성, 고태연, 내가 두 사람 얼마나 믿었는데, 감히 이렇게 날 배신해?”그 말에 형이 다급히 일어나 해명했다.“정민아, 나 너 속인 적 없어. 이 일은 나도 모르는 거야. 수호야, 형 대신 말 좀 해줘.”하지만 나는 형을 도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형과 왕정민이 내 눈앞에서 꺼졌으면 좋겠으니까.그때 형수가 나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동성 씨는 정민 씨 안 속였어요. 내가 속였지.”“젠장! 뭐라고? 나를 속였다고?”왕정민은 형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나는 형수가 이러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형수가 화를 낼 때 이토록 무서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때 형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정민 씨가 한 짓이 너무 비겁해서요. 한 여자가 자기 청춘을 바쳤는데 정민 씨는 뭘 했죠? 미색을 취하고 뽑아 먹을 대로 다 뽑아 먹고는 뻥 차버렸잖아요. 정민 씨는 진짜 인간도 아니에요.”형수의 말에 왕정민은 끝내 폭발했다.“고태연, 너 뭐라고 했어?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살고 싶지 않나 봐?”솔직히 지금의 왕정민은 무척 무서웠다. 심지어 남자인 나조차도 겁이 나는데 형수는 오히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심지어 왕정민의 뺨까지 후려갈기는 바람에 왕정민은 순간 넋을 잃었다.왕정민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고 한참
“진동성, 너 대단하네. 내일 너희 회사 부도날 줄 알아.”왕정민의 말에 형은 심장이 철렁했다.“정민아, 난 정말 몰랐어. 나 좀 믿어줘. 우리 회사 네 도움 없으면 안 돼. 우리 몇 년지기 친구잖아, 나 좀 도와주라.”형은 마치 방향을 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심지어 무릎이라도 꿇고 빌려고 했지만 형수가 마침 막아 나섰다.“무릎 꿇을 필요 없어. 계약서는 내 손에 있으니까. 계약을 어기면 몇억에 달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해.”“뭐? 자기 계약서 손에 넣었어?”그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형은 형수의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형수는 핸드폰을 켜 형에게 계약서를 보여주었다.그걸 본 형은 울다 웃다 마치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처럼 굴었고,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왕정민은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애초에 형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계약서를 미리 줬는데, 형수가 그걸 손에 넣은 뒤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그때 형수가 형에게 말했다.“진동성, 당신도 알고 있지? 왕정민은 한 번도 당신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그저 자기를 떠받들어주는 걸 즐기는 것뿐이야. 그동안 왕정민을 도와준 게 회사 때문이라는 거 알아. 이제 계약서도 손에 넣었으니 당분간 회사도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 왕정민과 관계 끊고 영원히 왕래하지 마. 할 수 있겠어?”형수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형은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없었다.게다가 일이 이 지경으로 발전할 걸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형수는 형을 몰아붙이는 대신 덤덤하게 말했다.“생각할 시간 줄게.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알아둬. 앞으로 절대 왕정민과 왕래하지 마.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당신도 언젠가 나쁜 물 드니까. 내가 애초에 당신과 결혼한 건 당신이 정직하고 착해서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야.”“그런데 지금 너무 변했어. 내가 못 알아볼 만큼. 그렇다면 우리 결혼생활을 더 이어 나가야 할지도 고민해 볼 거야.”형수의 말에 놀란 건
이번 식사가 끝날 때 형수가 상황을 완전히 장악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그리고 나도 형수에게서 카리스마 있는 면을 보았다.예전에 나는 줄곧 형수가 가정주부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야 형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형수가 왕정민을 바라보며 계속 차갑게 말했다.“애교와 이혼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애교에게 줘야 할 것은 한 푼도 차이 나서는 안 돼요.”애교 누나는 형수가 저를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눈시울을 붉힌 채 형수를 바라봤다.그러자 남주 누나도 맞장구치며 일어서서 말했다.“맞아요, 이혼은 해야 하지만 회사 주식의 절반을 애교에게 나눠줘야 해요.”“애교 누나, 뭘 망설이고 있어요? 얼른 계약서 꺼내지 않고요?”나도 얼른 애교 누나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서둘러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 왕정민 앞에 내놓았다.“이건 집 명의변경 계약서이고, 이건 회사 주식 양도 계약서야. 지분은 50대 50.”왕정민은 눈이 빨개져서 쳐다보지도 않고 계약서를 모두 찢어버렸다.“이애교! 꿈도 꾸지 마! 회사는 내가 힘들게 일궈낸 것이고, 내가 직접 경영한 것인데 무슨 이유로 너에게 반을 나눠주겠어?”애교 누나는 순간 너무 역겨워 참다 못하고 왕정민의 뺨을 때렸다.“사람 참 뻔뻔해. 어떻게 그런 말을 수 있어?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회사 차릴 수나 있었어?”왕정민은 워낙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공은 깡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이기적으로 말했다.“맞아, 회사의 창업 자금은 당신이 방법을 생각해 주었지만, 이후의 모든 일은 모두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거야. 힘들게 회사를 여기까지 성장시켰고, 나로 인해 지금 좋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거잖아. 당신이 다른 사람과 결탁해서 나를 속일 줄은 정말 몰랐어!”왕정민처럼 이기적이고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든 완전히 어불성설이었다.애교 누나는 이제야 자신이 여태껏 어떤 남자와 살았는지 깊이 깨달았다.심지어 너무 억울해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난 젊고 힘이 세기에 뚱뚱한 중년 남자인 왕정민은 전혀 내 상대가 아니다.왕정민이 덤벼들었을 때 나는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자 곧이어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제야 형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수가 방금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곧이어 왕정민에게 삿대질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냥 빨리 가지 그래요. 여기에 그쪽 반기는 사람이 없어요. 만약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운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내 말에 왕정민은 피가 멈추지 않는 코를 틀어막으며 떠났고 소민도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 도망쳤다.좀 벌레 같은 사람이 사라지자 방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다들 기진맥진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특히 애교 누나는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져 있었고 두 눈은 빛을 잃은 듯 텅 비었다. “애교야, 너 괜찮아?”남주 누나가 걱정하며 물었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의 상태가 너무 이상했으니.“괜찮아, 조금 쉬면 돼.”“그럼 내가 부축해 줄까?”“응.”남주 누나는 애교 누나를 부축해 자리를 떴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애교 누나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으니까. 애교 누나는 사실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방금 싸운 상태라 마치 온몸의 에너지가 방전된 듯했다. 심지어 기진맥진해서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것도 어느 정도 이해됐다.어떤 부부든 이혼할 지경에 이르면 모두 비슷할 거다.그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 친절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사이가 틀어지기만 하면 결국 사람들은 자신만 생각하니까. “애교 누나, 저는 오히려 지금이 좋은 것 같아요. 누나도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고 왕정민한테 연기를 할 필요도 없잖아요. 이제 드디어 진짜 누나의 삶을 살 수 있잖아요.”이것은 내 진심이었다. 애교 누나가 힘없이 말했다. “말은 그렇지만 실패한 결혼은 여자에게 불공평한 일이에요.
형은 형수의 눈을 피하며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형수는 물러서지 않고 형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 일은 정말 나와 상관없어. 자기는 내 아내야. 내가 어떻게 왕정민더러 자기를 다치게 하는 일을 시킬 수 있겠어?”곰곰이 생각한 형은 끝내 인정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도 그럴 게,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니까. 형의 집, 차, 등 모든 재산은 형수가 쥐고 있기에 만약 형수가 형을 빈털터리로 내쫓는다면 형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혼인 관계를 만류할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다. 거대한 이익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한다. 형수는 형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 전에 형수는 줄곧 형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형의 허락 없이는 왕정민이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하지 못했을 거니까. 하지만 형이 무릎 꿇고 눈물 콧물 흘리며 절대 그런 적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형수의 마음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일은 정말 동성과 아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하지만 형수의 마음속에는 또 한 가지 의혹이 있었다. 왜 형이 평소 혼자 해결할지언정 저를 건드리지 않는지.“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대로라면 우리 애는 어떻게 가지겠어? 아이가 없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안정될 수가 있을까? 오래 갈 수 있을까?”“진동성! 난 한 번도 당신 싫어한 적 없어. 설마 당신은 내가 싫어졌어?”형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형이 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그때 형이 급히 설명했다. “내가 자기를 만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난 지금 자기를 마주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 반드시 다른 여자를 상상해야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이렇게 한다고 해도 느낌이 강렬한 것도 아닌 데다 자기가 자꾸 욕해서 상처받았어. 이럴수록 힘이 달리는 느낌이야. 나도 무심코 발견했는데 스스로 영상을 볼 때는 아무런 문제도
그러자 형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내일 같이 가보자.”나는 열 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 형과 형수는 이미 자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나는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이것은 형수가 이미 형을 용서했고, 형과 형수이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사실 나도 형과 형수가 이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오히려 형이 잘못을 뉘우치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이날 밤, 나는 전과 달리 잠을 푹 잤다. 그러나 왕정민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온 왕정민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감정을 토로할 곳이 없어 소민에게 화를 냈다. 심지어 하룻밤에 소민을 일곱, 여덟 번이나 괴롭히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소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순순히 협조할 뿐이었다. “수호! 진동성! 고태연! 이애교! 최남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너희가 나를 가만두지 않으면 나도 너희들을 못살게 괴롭힐 거야!”“감히 편을 먹어 나한테 엿을 먹여?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거야!”왕정민이 가장 먼저 겨냥한 사람은 바로 나다. 다음 날.사직서를 제출하려고 출근한 나는 진료실에서 부민규를 마주쳤다. 나를 보자마자 민규는 깨 고소해하며 비아냥거렸다.“정수호, 넌 잘렸어. 빨리 짐 챙겨서 꺼져버려.”생각할 필요도 없이 왕정민이 한 짓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나간다고 해도 진료실 자리는 너한테 차려지지 않아, 애송이야!”민규의 안색이 급히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실력이 너보다 못하니 평생 진료를 보지 못한다 이거야?”“맞아, 그 말이야.”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러자 민규는 화가 나서 반박했다.“내 의술이 너보다 못하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 어쩌면 내가 너보다 잘할 수도 있어!”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삼류 지잡대 출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쪽팔리지 않아?”“원래 네 약점을 들추고 싶지 않았는데 굳
마동국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소년이라는 말 못 들어봤나? 남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미녀를 보기 좋아해.”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적당히 봐요. 어쨌든 마 교수님이 한의과의 탑인데 교수님이 근무 중에 이런 영상을 보는 것을 환자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미지에 안 좋아요.”나의 말을 들은 마동국이 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오기 전에 한의과에는 일주일에 환자가 몇 명 오지도 않았었네.”“자네가 온 후에 한의과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자네마저 떠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그래서 내가 영상을 보든 말든 상관할 사람이 없다네.”“사실 한의사가 완전히 답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인터넷을 보면 현재 일부 지역의 한의사가 인기가 있잖아요?”“직접 나서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주면 다시 한의사의 시대가 올 거라고 믿어요.”마동국이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수호 씨, 자네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좋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이제 늙어서 할 수가 없어. 아참, 그러고 보니 여기서 떠나면 갈 곳은 있나?”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그럼 내가 소개해 줄까?”나는 믿기지 않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요? 전 항상 교수님께 맞섰는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동국이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맞섰다고? 나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젊은이가 어느 정도 성격이 있는 건 정상이야. 전제는 반드시 실력이 뒷받침해 줘야지. 만약 자네가 민규와 같았다면 난 자네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네.”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예전의 자신이 망나니였다고 느껴졌다. 마동국은 지금까지 나를 겨냥한 적이 없었는데 난 줄곧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걸 인지하니 후회가 밀려왔다.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왜 이제서야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까?’어쩌면 이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원래 어느 정도의 아쉬움은 남아야 하는 거니까.
분명 왕정민이 손을 쓴 게 틀림없다.병원에서 나를 해고하게 한 것도 모자라 비방하기까지 하다니.‘비겁하긴.’“마음대로 생각해요. 그림자가 비뚤었다고 사람도 비뚠 건 아니니까.”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말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려 할 때, 지은이 먼저 떠나버렸다.하지만 인사팀에서 수속을 마치고 떠나려 할 때 하필이면 또 지은을 만나버렸다.이번에 지은은 혼자가 아니라 웬 낯선 남자한테 몰려 구석에 서 있었다.“지은아,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상대가 지은의 남자 친구 여준휘라는 걸 알았다.예전에 지은이 남자 친구가 집에 다른 여자를 들였다가 현장을 잡혔다고 했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그렇다면 두 사람이 헤어지는 건 당연한 건데, 여기까지 달려와서 용서해달라고 하는 걸 보니 참으로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 싫어 뒤돌아 다른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이제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 때, 갑자기 지은이 버럭 소리치는 게 들렸다.“여준휘,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이거 놔.”“싫어. 나 용서해주지 않으면 손 안 놓을 거야.”남자는 뻔뻔하게 말하면서 지은을 안고 입까지 맞추려 했다.그러자 지은이 상대의 뺨을 때리며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그런 짓을 했으면서 용서해달라고?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해?”“그래! 아가씨 좀 데려다 놓았다. 세상 남자들 중에 여자 밝히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어? 그런데 그건 그저 논 것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라니까.”여준휘는 펄쩍 뛰며 소리쳤다.그 말을 들으니 너무 놀라웠다.사람이 얼마나 뻔뻔하면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나 생각이 들었다.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 또 다른 여자한테 사랑을 속삭이다니.아니나 다를까 지은도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다.“그 더러운 손 치워. 역겨우니까. 지금은 너만 봐도 역겨워. 당장 꺼져!”“왜? 설마 너도 딴 남자 생겼어? 안 그러면 이렇게 단호할 리 없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진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는 거지?”주해진이 오늘 이 사달을 벌이느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썼을 텐데, 나한테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까지 배상하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됐다.“이 전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댔는데, 두 사람 실력을 보니 승복했거든. 두 사람 말대로 나도 젊을 때는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한 번도 두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을 못 봤거든.”사실 주해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가장 두려운 건 우리의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 아니라 궁지에 몰렸으면서 상황을 역전한 거였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으니까.주해진은 우리를 맹수라고 느꼈다. 그것도 싸울수록 더 미쳐 날뛰는 맹수. 심지어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피에 굶주린 모습을 드러냈다.주해진은 제 체면을 회복하고 싶어 그동안 승복하지 않은 거였는데, 우리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이제는 그저 장사를 하며 지내기에 어렵게 얻은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민우는 나더러 먼저 돈을 받으라고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나도 민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중에 우리의 사업 자금에 보태자는 뜻이었다.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보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동해 결국은 말없이 받았다. 주해진은 김진호와 안명훈더러 우리에게 사과하게 했고, 두 사람은 찍소리 못하고 순순히 사과했다.떠나갈 때 주해진은 제 차를 나에게 주면서 몰고 가라고 했다.그 순간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곤두섰다.“돈도 배상했으면서 차는 왜 주는 거야? 설마 또 해코지하려고?”주해진은 호탕하게 웃었다.“경계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친구 삼고 싶어서 주는 거야.”“그런데 난 그쪽이랑 친구하기 싫은데.”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주해진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친
김진호는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다. 특히 일이 터지면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난다.그런데 주해진이 자기를 내밀자 안명훈보다 더 겁을 먹었다.“싫어요... 안 돼요... 해진 형, 저 자식 차를 망가뜨리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저더러 형 대신 뒤집어쓰게 하면 안 되죠.”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김진호는 제가 한 짓에 책임지지 못하고 주해진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았다.주해진은 너무 쪽팔려서 김진호의 뺨을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쳤다.“사과하라면 해. 어디서 말이 그렇게 많아? 젠장. 내가 널 돕지 않았다면 수호 동생한테 미움 살 일이 있었겠어?”한창 화를 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수호 동생? 지금 나를 말하나?’‘젠장, 내가 언제 제 동생이 됐다는 거야?’“어디서 친한 척이야? 너희 셋 다 내려와.”나는 차를 또다시 쾅쾅 내리쳤다.민우 역시 차 위에서 나를 협조해 주었다.승합차가 우리 때문에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 되자 주해진은 우리와 연맹을 맺으려는 듯 은근슬쩍 나를 회유했다.“수호 동생, 그만해. 내려갈게.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잖아. 수호 동생이랑 원한 있는 건 김진호잖아. 그리고 안명훈 저 자식도 자기 여자 친구더러 동생 친구 꼬시라고 했어. 저 둘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이 두 놈 내려 보내겠으니까 마음대로 처리해.”주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김진호와 안명훈을 끌어내 앞에 내팽개쳤다.내 분노는 사실 김진호와 안명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원인은 내 차가 박살 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범은 바로 주해진이다.때문에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주해진을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이 자식들 빚은 내가 천천히 받을 거야. 하지만 내 차를 망가뜨린 건 어쩔 건데?”주해진은 고개를 돌려 내 차를 흘긋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차라 안도한 듯했다.“수호 동생, 저 차는 1600만 정도 하지? 내가 나중에 새 차 하나 뽑아줄게.”주해진이
사실 오늘 안명훈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해진이 기어코 자기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불러냈다.그런데 주해진의 위엄은 못 보고 오히려 나와 민우의 미친 모습만 보게 된 거다. 그러니 혼비백산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안명훈은 필사적으로 차 문을 흔들었다.“나 내릴래. 내려줘...”주해진은 안명훈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사내자식이 내리긴 어딜 내려? 네가 문을 내리면 저놈들이 올라올 거잖아. 문 열면 안 돼. 얌전히 앉아 있어. 설마 저 자식이 문을 부수겠어?”펑!나는 승합차를 향해 쇠 파이프를 세게 휘둘렀다.그러면서 속으로는 방금 전의 울분을 토해냈다.‘내 자식 같은 새 차, 아직 할부도 안 끝나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네놈들 때문에 고물이 됐잖아.’나는 승합차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나와. 차 안에 숨어 있는 게 겁쟁이랑 뭐가 달라?”차 안 세 사람 눈에 나는 충혈되어 시뻘게진 눈을 가진 분노한 맹수나 다름없었을 거다.안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나한테 끊임없이 간청했다.“오늘 밤 일은 나랑 상관없어... 제발 살려줘. 제발...”주해진도 솔직히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안명훈이 저 하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 걸 보자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렸다.안명훈은 그 힘에 못 이겨 옆으로 벌러덩 굴러 넘어졌다.그때, 마침 유리창을 깨뜨린 나는 쇠 파이프로 주해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셋 셀게, 당장 내려. 안 그러면 죽이는 수가 있어.”주해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내가 사람을 불러 모으긴 했지만 무기는 안 들었잖아. 게다가 저놈들은 겁을 먹고 이미 도망쳤어. 너희 둘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먼서 꼭 미친 짐승처럼 나를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나는 이를 악물었다.“난 짐승처럼 네 놈을 물고 늘어지는 거로 안 끝나. 아주 뼈도 안 남기고 씹어 먹을 거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산 차인데, 평소 아까워서 조심조심 다뤘는데, 네 놈 때문에 폐차하게 생겼잖아. 내 차 물어
나는 여전히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분명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수도 없었다.민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한참 싸우다 보니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놈들 인원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인체에는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을 자극하는 혈 자리가 있는데, 그 혈 자리가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이 폭발했다가 나중에 한동안은 몸이 나른해진다.하지만 이 상화에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혈 자리를 눌렀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솟아나면서 내가 마치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야! 다 죽었어!”나는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달려갔다.나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내가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는 걸 보고 모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놈들의 코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심지어 손이 무척 매웠다.나는 피가 들끓어 끊임없는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파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한방에 놈들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만약 동준 형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싸울수록 피가 끓고 힘이 솟아났다. 놈들은 심지어 나를 보자 연신 뒷걸음쳤다.옆에 있던 민우마저 나를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수호야,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나는 혈 자리를 가리켰다.그러자 민우는 바로 눈치챘다.민우 역시 의학을 전공한 지라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민우 역시 스스로 한 대 치더니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흥분했다.“하하하, 나도 다시 회복했어. 너희들 죽었어.”우리는 서로 협조하면서 놈들한테 달려가 퍽퍽, 주먹을 날렸다.우리를 끝장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놈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