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가 지나자 여자는 겨우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그제야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집에 돌아온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그도 그럴 게, 너무 피곤했으니까.하지만 내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내 침대 위에 기어 올라왔다.여기는 형수의 집이고 형이 없으니 상대가 형수인 건 뻔했다.‘설마 술에 취해서 방을 잘못 찾았나?’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더니 상대는 아니나 다를까 형수였다.형수는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입으로 계속 형의 이름을 중얼거렸다.“여보, 나 하고 싶어.”형수는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나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이에 나는 다급히 형수를 밀어냈다.“형수, 정신 차려요. 저 형이 아니에요, 정수호라고요.”하지만 형수는 여전히 아무런 의식이 없는지 나를 안고 입을 맞춰 댔다.그나마 다행인 건 내 욕구가 강한 게 아니라 참을 수 있다는 거였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품에 안긴 사람은 형수다.형수가 말짱한 상태였다면 우리는 절대 선을 넘을 일이 없다.그런데 술에 취해 이렇게 강제로 욕한다면 내 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그때 형수가 입을 맞추다 말고 내 옷을 벗겼다.형수의 기술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낯선 여자보다 몇 배 더 좋은지 모를 지경이었다.물론 오늘밤 욕구를 여러 번 풀었지만 형수의 유혹 때문에 나는 그곳이 또 불편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인터넷에서 하룻밤 7, 8 번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이제껏 거짓인 줄 알았는데 모두 진짜였단.‘젊으니까 좋긴 좋네.’나는 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고 눈을 감으며 한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며 형수의 복무를 즐겼다.‘이래서 사람들이 젊은 유부녀를 좋아하는 거구나.’“여보, 왜 키스 안 해줘?”형수는 내 얼굴을 잡고 반쯤 풀린 눈으로 말했다.형수의 유혹적인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갖다 댔다.형수와 키스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
“안 믿기면 세탁기 확인해 봐요. 형수가 저를 형으로 착각해서 그런 짓 하려고 했는데, 하도 제가 의지가 강했으니 실수 안 한 거예요.”내가 득의양양해서 말하자 형수는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어젯밤 그렇게 암시했는데 아무 짓도 안 하다니. 겁쟁이.’“흥, 그럼 애교와 남주한테는 무슨 짓 했어요?”형수가 심문하듯 묻자 나는 다급히 대답했다.“나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어제 다들 그렇게 취했는데 제가 뭔 짓하면 그게 사람이에요?”“얼씨구, 아주 군자 납셨네요.”형수는 조롱하듯 말했다.“제가 군자는 아니지만 남의 위기를 이용하는 비겁한 사람은 아니거든요.”“아주 자화자찬이 따로 없네요. 얼른 씻고 밥 먹어요.”형수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내 그곳을 흘깃거렸다.‘젊은 게 좋긴 좋네, 아침부터 이렇게 팔팔하다니.’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 형수는 나에게 당부했다.“오늘 출근하는 첫 번째 날인데 동료들과 관계 처사 잘해요. 인턴은 고작 첫걸음이에요. 중요한 건 나중에 잘해서 승진하는 거예요.”“한의과는 약국 쌤들까지 해서 고작 5명 정도밖에 없는데, 처사 잘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내가 시큰둥해서 건성으로 대답하자 형수는 숟가락으로 내 머리를 쳤다.“5명은 사람 아니에요? 5명이라도 관계 처사는 잘해야죠. 설마 평생 인턴만 할 거예요? 레지던트, 펠로우, 주임 교수 그 위까지 갈 생각 없어요?”나는 자신감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형수, 제가 승진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금 병원 상태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요.”“이 병원만 이런 줄 알아요? 다른 병원도 똑같아요. 수호 씨가 바꿀 수 없다면 우선 바꿀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죠.”“게다가 주임 교수 자리까지 올라가면 한의과 전체가 수호 씨 거예요. 그때가 되면 수호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요.”형수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나는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형수 말이 맞아요. 정신 차릴게요.”“역시 수호 씨는 착하네요. 자, 내 우유 마셔요.”“고마워요.”
솔직히 말하면 도둑이 제 발등 저린 거나 마찬가지였다.저 여자와 같은 한의원에서 출근하다 보면 만나기 싫어도 만날 텐데, 만약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면 난처할 게 뻔하니까.게다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병원에서 나한테 매달리기라도 할까 봐 정체를 숨기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물론 어젯밤 꽁꽁 싸매긴 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어 점점 하나씩 벗다 보니 마지막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머리에 썼던 모자도 어디 갔는지 사라졌고 결국 얼굴에 꼈던 마스크 하나만 남게 되었다.그 셜록 홈즈 같은 여자가 나에 관한 단서를 발견했는지 모르기에 더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여자가 떠난 뒤에야 나는 시동을 걸고 약 20분 뒤에 중의원에 도착했다.하지만 하필이면 주차장에서 마동국과 마주쳤다.마동국은 웃으며 나와 인사했다.“수호 씨, 출근했군.”나는 눈앞의 이 늙은이가 무척 싫었지만 아침에 형수가 당부했던 말이 생각나 애써 미소 지었다.“네.”“우선 가서 인사과에서 수속 밟고 바로 나 찾아오게. 자네는 진 부원장님이 추천한 사람이니 내가 절대 푸대접하는 일은 없을 거네.”“네.”나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마동국은 허허 웃으며 먼저 병원으로 들어갔다.나는 기분을 추스르고 곧바로 인사팀으로 향했다.인사팀 직원의 요구대로 제출해야 할 자료를 모두 제출하니 의사 사원증은 오후쯤 나오니 그때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먼저 과로 가서 출근하라고 했다.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팀을 빠져나왔다.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또 그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여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다행히 여자도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지 어제처럼 내 옆으로 지나가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 여자를 ‘윤 쌤’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솔직히 말하면 그 여자야말로 나에게 성에 대해 가르쳐준 선생이나 다름없다.게다가 지난 이틀간 나를 도와 큰 문제를 해
“하지만 그 전에 말해 둬야 할 게 있는데, 한의과가 거의 망해가는 추세라 일주일에 환자가 고작 몇 명뿐이라니. 여기서 대단한 걸 배우려 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네. 게다가 환자는 대부분 연세 있는 분들뿐이라 기껏해야 그 몇 가지 증상이 다네.”“그럼 스스로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정 그러고 싶으면 홍보라도 해서 환자를 끌어들이던가. 예전에 인턴들이 이 방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어느 정도 효과는 있어, 물론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 낫지 않나.”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럼 홍보할게요. 할 일 없을 바에 뭐라도 하는 게 좋으니.”“자, 홍보 책자는 이미 있으니까 나눠줄 테면 나눠줘.”나는 먼저 홍보 책자를 대충 훑어봤다. 의외로 홍보 책자는 한의학과 일상생활을 결합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데 큰 역할을 했다.‘이걸 만든 사람이 꽤 공들였나 보네.’나는 궁금해서 물었다.“이 인턴은 여기 계속 남아 있나요?”“아니.”“왜요?”나는 너무 아쉬웠다.그때 마동국이 대답했다.“그 총각이 재벌 2세의 심기를 거슬렀거든. 그러니 인턴 기회도 날아가고 강성에서도 아예 쫓겨났어.”“너무 아쉽네요. 그 재벌 2세는 왜 그런대요?”인턴십 기회가 한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한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재벌 2세는 상대의 기회를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강성에서 쫓아냈다니 이건 퇴로마저 완전히 끊어놓겠다는 뜻이다.내 말에 마동국은 허허 웃었다.“얼른 가서 홍보 책자나 나눠주게.”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마동국이 건네주는 홍보 책자를 받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나는 주요하게 중년과 노년을 대상으로 책자를 나눠주었다. 중장년층이 그나마 이런 걸 쉽게 받아들이니까.그렇게 한창 나눠주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이봐요, 젊은 총각. 여기 책자에 말한 것대로 먹으면 고혈압과 심혈관 및 뇌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거 맞아요?”나는 할머니를 보며 열심히 설명해 줬다.“네, 맞아
“어르신, 이미 고혈압이면 제가 말한 처방대로 드시면 안 돼요. 책자에 있는 처방은 예방하는 것이지 치료용이 아니에요. 어르신 같은 경우에는 혈압 낮추는 약을 드셔야 해요.”“아, 그럼 한약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한약은 효과가 엄청 느려요.”“아, 그럼 가서 혈압 낮추는 약 사야겠네요.”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떠나는 걸 도와드리고 또 책자를 나눠주었다.그사이 마동국은 계속 핸드폰에만 정신이 팔려 나는 도와주지도 않았다.하지만 나는 뭐라 말하기 귀찮아 그저 무시했다.오전 내내 책자를 돌리다 보니 몇몇 어르신이 질문해 왔지만 상태를 확인하니 병세가 악화하어 한약으로 천천히 치료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결국 그분들을 모두 서의학 쪽으로 추천했다.그 때문에 반나절 동안 일한 결과 별 소득이 없이 끝났다.그날 점심 우리는 병원 식당에서 식사했는데, 민규가 내 곁에 앉았다.“이봐요, 오전 내내 홍보 책자 돌렸다면서요?”이토록 예의 없는 사람에게 대꾸하기조차 싫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민규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듣기로 노인 몇 명 와서 진료받았는데 결국 다 서의과 쪽으로 쫓아냈다면서요? 대체 왜 그랬어요?”그 말에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민규 씨도 의대 졸업생이면서 어떤 환자를 받아야 하는지 몰라요? 그분들 그런 증상이 오래 지속되어 심각한 상태였어요. 한약으로 천천히 치료하기는 이미 늦었어요.”민규는 내 말에 일순 언짢은 듯 말했다.“지금 날 탓하는 거예요? 나도 다 우리 한의과를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요. 할 거면 제대로 된 일 좀 하던가, 허튼짓 좀 하지 마요. 남에게 보여주기식도 아니고.”‘내가 보여주기식이라고?’내 딴에 열심히 한의과를 홍보하고 있는데, 민규한테는 보여주기식이라니 한 마디라도 더 섞으면 토할 것 같아 나는 아예 무시한 채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하지만 민규는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흥, 부원장 소개로 들어왔다고 본인이 대
지난 이틀간 연속으로 이 낯선 여자와 배를 맞춘 걸 생각하니 나는 갑자기 또 설렜다.게다가 여자는 외모와 몸매 모두 끝내주는 데다 무엇보다 나에게 좋은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나는 테이블 밑에 핸드폰을 숨기고 얼른 대답했다.[필요하면 얼마든지요.][그럼 오늘 저녁은 다른 곳에서 해요.][어디요?][그쪽 집이요.]풉!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밥을 모두 뿜어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뻘쭘한 상황에 나는 다급히 국을 들어 그릇째로 마시면서 사레가 들린 척 연기했다.이 여자가 이런 요구를 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게다가 나는 지금 형수 집에서 얹혀사는 입장이라 절대 안 될 말이었다.잠깐 생각한 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집은 안 돼요. 그쪽 집에서 해요.][아내 있어요? 혹은 여친인가? 발각될까 봐 그래요?][없어요. 나 솔로예요.][그런데 왜 집에 못 가게 해요?]나는 여자가 왜 꼭 내 집에 오겠다고 고집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설마 무슨 목적이 있나?’도저히 알 수 없어 나는 아예 답장하지 않았다.하지만 식당에서 떠나려고 할 때 의외로 그 여자도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여자는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똥머리를 매고 있어 귀엽기까지 했다.그때 웬 간호사가 반갑게 그 여자에게 인사했다.“윤 쌤, 오늘 또 혼자예요? 저랑 같이 드실래요?”“필요 없어요.”여자의 싸늘한 거절에 간호사는 할 수 없이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여자가 참 이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도 그럴 게, 저녁에는 미친 여자처럼 낯선 남자를 찾아 원나잇을 즐기며 낮에는 의사 가운을 입고 귀여운 모습으로 차도녀처럼 행동하고 있으니까.나는 순간 이 여자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떠났다.아직 퇴근까지 한참이 남았기에 나는 애교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애교 누나, 깼어요?]애교 누나는 곧바로 나에게 답장했다.[진작 깼죠.][그럼 점심은 먹었어요?][아
‘여주 아니고 남주’님이 수호님을 친구로 추가했습니다.심지어 비고는 ‘최남주’ 본명이었다.요물 같은 남주 누나를 떠올리자 나는 너무 설레 곧바로 친구 수락을 눌렀다.그러자 남주 누나가 바로 나한테 [나쁜 놈, 누나 안 그리웠어?]라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왔다.어쩜 남주 누나 같은 요물이 세상에 있는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래가 반응했다.[남주 누나, 지금 나랑 장난해요? 아니면 진심이에요?]남주 누나한테 놀림당할까 봐 나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남주 누나와 대화하면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인지 알기 어려우니까.그때 남주 누나가 셀카 한 장을 보내왔다.그것도 이제 막 샤워하고 나온 사진이었다.물론 어깨까지만 나온 사진이었지만 나는 바로 흥분했다.[왜 전신사진을 안 보내요?][누나 몸이 보고 싶어? 그럼 저녁에 와, 내가 마음껏 보여줄게.][정말요? 애교 누나가 뭐라 하는 게 두렵지도 않나 봐요?][두려울 거 뭐 있다고. 나중에 수호가 애교 꼬시면 되잖아. 어제 우리 다 취했을 때 뭔 짓 하지 않았어?][절대 안 했어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그럼 짐승만도 못한 놈이네. 우리가 그렇게 됐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니, 그동안 몸만 자라넸네.]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아무 짓도 안 한 게 오히려 내 잘못이라는 건가?’[전 남의 위기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누나들이 취한 사이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몸만 노린 거잖아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아이고, 우리 수호 기특하네. 역시 이런 점잖고 착한 모습이 좋다니까. 나한테도 셀카 하나 보내 봐.][시커먼 남자 놈이 뭐가 보기 좋다고 셀카를 요구해요?][누가 널 찍으랬어? 네 아래 말이야.]‘헐, 누가 요물 아니랄까 봐.’이제 알고 지낸 지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요구까지 해오는지.하지만 솔직히 나도 너무나 짜릿했다.결국 나는 화장실로 가 바지를 벗고 사진 한 장을 찍고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삭제했다.그도 그럴 게
“좋아, 보여줄게. 기대해, 내 거 엄청 예뻐.”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곳을 자세히 본 적 없는 나인지라 남주 누나의 말에 흥분되고 기대됐다.하지만 한참 뒤 남주 누나는 카메라 렌즈를 돌려 웬 바비인형을 보여주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어때? 예쁘지?”“하 진짜 빡치네! 누나 지금 나 놀린 거예요?”나는 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그러자 남주 누나가 여전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나 치려고? 거친 거 좋아하는구나? 와, 기다리고 있을게. 누나가 얼마나 대단하지 보여줄게.”‘역시 요물이 따로 없네.’나는 남주 누나에게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문득 남주 누나도 애교 누나를 피하려고 화장실에 숨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에 나는 대담하게 말했다.“아직 기뻐하긴 일러요. 이따가 누나가 보내준 사진 우리 형수한테 보여줄 거예요. 우리 형수가 누나 가만둘 것 같아요?”남주 누나는 애교 누나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형수는 매우 무서워하는 듯했다.마치 형수가 남주 누나 천적이라도 되는 듯이.“그리고 누나가 나 꼬셨다는 것도 말하고, 애교 누나한테 누나가 나더러 애교 누나랑 자라고 설득했다는 것도 말할래요.”“너! 이 나쁜 놈! 그러기만 해 봐!”남주 누나가 당황해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 시원했다.“누나가 먼저 약속을 어겼잖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누가 날 속이라 했나? 난 누나 약점을 잡고 있다고.’내 말에 남주 누나는 불쌍함 표정을 지었다.“그러지 마, 누나가 잘못했어. 응?”‘헉, 이렇게 나오시겠다?’“안 돼요. 그런 건 안 통해요. 좋은 구경할 기회인데,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듣고 제가 포기할 것 같아요? 그럼 내가 너무 밑지잖아요.”내가 바보도 아니고.그러자 남주 누나는 계속 나한테 애교 부렸다.“수호야, 착한 수호. 누나 한 번만 봐줘.”남주 누나는 말하면서 나한테 윙크까지 날렸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