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겉으로는 점잔 떨면서 사실 이런 사람이었어요?”내가 칸막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옆 칸에서 민규가 나오더니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그 순간 마치 똥이라도 씹은 뜻 구역질이 났다.하필이면 방금 전 남주 누나와 함 대화를 이 자식이 다 들어버린 거다.나는 부끄럽고 난감한 동시에 화가 났다.“엿듣는 게 취미예요?”나는 다가가 민규의 멱살을 잡았다.그러자 민규는 빙그레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워워, 진정해요. 여기 녹음 있으니까. 나 건드리면 수호 씨한테 좋을 거 없어요.”그 말에 나는 더 화가 났다.남의 대화를 몰래 듣는 것도 모자라 녹음까지 하다니 인성이야 뻔하다.하지만 상대가 내 약점을 잡고 있기에 난 민규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결국 손을 확 풀어 잡고 있던 멱살을 놔주었다.그러자 민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밤 그 여자가 수호 씨한테 사진 보내주면 나한테도 보내요. 이건 내 연락처니까 친구 추가하고.”민규가 나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는 틈에 나는 놈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아 변기 안으로 던져버리고 문을 닫아버렸다.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민규의 바보 같은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민규는 필사적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정수호, 문 열어!”‘내가 바보도 아니고 왜 얼어?’나는 곧바로 물을 내려 민규의 핸드폰을 내려버리고 나서야 천천히 문을 열었다.“미안해서 어쩌죠? 핸드폰 변기 안으로 내려갔어요.”민규는 살점이라도 떨어져 내려간 것처럼 매우 마음 아파하며 아예 변기 안에 손을 넣고 꺼낼 것처럼 굴었다.하지만 이미 떠내려간 핸드폰을 그런다고 다시 회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러다 결국 폭발해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놨다.“정수호, 물어내. 저거 내 여자 친구가 사준 거야. 몇 년 동안 꾸준히 사용한 거라고.”“꼴에 여자 친구도 있었어?”이제 증거도 없겠다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가뜩이나 얄밉던 민규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
몰래 슬쩍 봤더니 모두 여자 사진이었다. ‘늙은 변태. 나이도 있으면서 이렇게 밝히다니.’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동석 쪽으로 다가가 홍보 책자를 챙겨 로비에서 계속 책자를 나눴다.그게 효과가 있든 말든 나는 노력했다. 마동국처럼 아무것도 안 하거나 민규처럼 놀고먹으며 돈 벌어가는 게 싫었으니까.얼마 남지 않은 책자는 오후 3시쯤이 되니 모두 나눠주었다.결국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다시 진료실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진료를 보러 찾아오는 환자가 없었다.결국 나는 의학 서적을 하나 챙겨 구석에서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그렇게 보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겨우 퇴근 시간이네. 자네도 이만 가 봐.”마동국이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말에 나는 그제야 퇴근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나는 의학서적을 책꽂이에 꽂고 대충 준비하고 퇴근했다.하지만 내가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민규가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을 막았다.“정수호, 너 아무 데도 못 가. 내 핸드폰 물어내기 전에 갈 생각하지 마!”“핸드폰을 물어내라니?”내가 일부러 모른 척 물었더니 민규는 버럭 소리쳤다.“핸드폰 물어내라고! 네가 내 핸드폰 변기로 내려보냈잖아. 그러면 배상해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언제 민규 씨 핸드폰을 변기에 내려보냈다고 그래요? 증거 있어요? 증거 없으면서 남을 함부로 모함하지 마요.”나는 말하면서 민규를 밀치고 지나갔다.“야, 너 설마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경찰에 신고한다?”“마음대로 해요.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으면 언제든 신고해요.”“안 돼, 못 가!”끝까지 내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민규 때문에 나는 귀찮아 미칠 지경이었다.“그만하시죠? 계속 이러면 나도 안 봐줍니다.”“그딴 거 상관없어. 내 핸드폰이나 물어내.”민규는 말발도 없어 고작 몇 마디만 반복했다.그때 마동국이 진료실에서 나왔다.“왜들 이래? 두 사람 왜 실랑이를 벌이고 있나?”민규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급히 달려가 고자질했다.“마 교수님, 마침 잘
민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끝내 떠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젠장. 정수호, 내가 널 여기서 쫓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이름을 바꾼다!”퇴근한 뒤 나는 곧바로 형수의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남주 누나를 한시라도 빨리 보길 기대했다.이건 다 그 요물 같은 여자가 사람을 너무 잘 유혹하는 것 때문이다.나는 길에서 남주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남주 누나, 저 곧 도착하니까 기다려요.]남주 누나는 내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하지만 사람이 매 순간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고 있는 건 아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저 남주 누나가 너무 바빠 내 문자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보면 반드시 답장할 거라고 생각했다.동네에 도착하자 나는 차를 세우고 잔뜩 신이 나서 위층으로 올라갔다.심지어 형수의 의심을 피하려고 먼저 형수 집에 들르기까지 했다.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형수는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혹시 집에 없나?’형수에게 전화했더니 통화는 이내 연결되었다.“여보세요? 수호 씨.”“형수님, 지금 어디 있어요? 문 두드렸는데 왜 아무 반응도 없어요?”형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수호 씨 형 교통사고 났어요.”“네? 상태는 어때요? 지금 어디 있는데요?”나는 말하면서 곧바로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그래도 형이 다쳤다는데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심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라 지금 교통경찰과 상대방과 합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니 올 필요 없어요. 정말 심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여전히 형이 걱정되었다.형수는 나더러 걱정하지 말라면서 집에 바로 들어올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애교 누나 집에 있으라고 했다.“형수, 그럼 형 잘 돌봐줘요.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고요.”나는 형수와 통화를 끝내고 애교 누나 집으로 향했다.내 손에는 애교 누나 집 열쇠가 있었지만 그거로 문을 열지는 못했다.아직 애교 누나 집에 나주 누나도
“왕정민이 쓰레기인데, 내가 그런 사람과 똑같게 굴 수는 없잖아요.”“수호 씨, 난 우선 왕정민과 이혼하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 제대로 사귀고, 내 몸도 내어줄게요. 네?”애교 누나의 말에 나는 너무 어이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날 좋은 분위기를 깨고 콘돔 사러 갔던 것도 후회됐다.만약 콘돔 사러 가지 않았다면 그날 바로 애교 누나를 안을 수 있었는데.물론 그 방면의 느낌을 이미 경험해 봤지만 윗집 여자와는 원나잇을 뿐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애교 누나다.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몸을 섞고 싶은 건 모든 남자의 본능이다.게다가 나는 이제 고작 23살이고 한창 형기왕성할 나이기에 애교 누나 같은 매일 보기만 하고 만지지 못하는 게 너무 괴롭다.하지만 그렇다고 애교 누나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누나의 결정을 존중해요. 누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전 항상 지지해요. 하지만 지금 너무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나요?”내 말에 애교 누나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안, 안 돼요. 이러다 남주가 오리가도 하면 어떡하려고.”애교 누나는 또 예전처럼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요구했다.“문 잠그면 되잖아요. 그러면 들어오기 전 문 두드리겠죠.”나는 말하면서 애교 누나에게 다가가 애교부렸다.“부탁이에요, 누나.”“그, 그럼 한 번만 도와줄게요. 앞으로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요.”애교 누나의 얼굴을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그래요, 그렇게 할게요.”나는 애교 누나를 데리고 소파에 앉히고는 누나의 손을 내 옷 속으로 쑥 들이밀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깊은 모순에 빠졌다.한편으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를 보고 있으니 몸이 달아올랐다.“나, 이래도 돼요?”애교 누나는 아무리 고민해도 끝내 답을 차지 못했다.“애교 누나, 뭘 멍하니 있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갑자기 손
“수호 씨, 미안해요.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너무 무서워서. 왕정민한테 복수하려다가 나조차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버릴까 봐, 와정민이 수호 씨를 시켜 나를 꼬셔라고 한 건 분명 꿍꿍이를 품고 꾸민 일일 텐데 나 때문에 수호 씨가 다칠까 봐 그것도 무서워요. 난 수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애교 누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상심해하고 무서워했다.나도 순간 애교 누나가 뭘 걱정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전에는 정말 왕정민이 바람피운 것 때문에 자극을 받아 복수하려고 했겠지만, 오늘 갑자기 자기가 본인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발견하고 무서웠을 거다.게다가 나한테 진짜 흔들려 보호해 주고 싶은데, 내가 왕정민한테 이용당하고 아무것도 모를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 테고.”그걸 알고 나니 나는 마음이 아파 애교 누나를 꼭 끌어안았다.“알아요. 다 아니까 무서워하지 마요.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누나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릴게요”애교 누나는 고개를 들어 글썽한 눈망울로 나를 봤다.“정말 기다릴 거예요? 내가 수호 씨보다 나이도 많고 결혼도 했었는데.”나는 애교 누나의 이마에 힘껏 입 맞추고 진지하게 대답했다.“내가 사랑하는 건 애교 누나 자체예요. 신분도, 나이도 상관없어요. 앞으로 내 앞에서 본인 나이가 많다는 둥, 결혼했던 사람이라는 둥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런 걸 신경 썼으면 애초부터 누나한테 마음 흔들리지 않았을 거예요.”내 말에 애교 누나는 더 세게 울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 아파 애교 누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애교 누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수호 씨가 한의원에서 인턴 하는 게 혹시 왕정민이 배정해 준 거예요?”“네, 하지만 그런 거 조금도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거절하면 형과 형수가 난감해할까 봐 순응한 거예요.”내 말에 애교 누나가 귀띔해 줬다.“왕정민은 절대 손해 볼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수호 씨더러 나를
“나 걱정하지 마요. 상대할 수 있으니까.”나는 가슴을 팡팡 치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이 순간 나는 애교 누나 앞에서 더는 동생이 아닌 남자니까.남자가 돼서 사랑하는 여자를 걱정하게 할 수는 없다.오히려 내 여자를 보호해야 하지.애교 누나는 내 말에 또 피식 웃었다.“수호 씨 나빴어요. 또 눈물 나잖아요.”“절대 울지 마요. 눈 부으면 어떡하려고요? 게다가 이따가 친구가 오면 내가 그런 줄 알 거 아니에요.”내 말에 애교 누나는 얼른 눈물을 참았다.우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애교야, 문 열어. 나야, 남주.”‘참 귀신 같다니까.’‘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 귀신같이 딱 맞춰 오네.’애교 누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나 운 것 같아 보여?”“너무 선명해요. 눈시울이 다 붉어졌어요.”내 솔직한 대답에 애교 누나는 당황했다.“어? 그럼 어떡하지?”“이따 제가 문 열 게요. 남주 누나가 물어보면 제가 화나게 했다고 해요.”“어떻게 그래요? 남주라면 분명 수호 씨가 나한테 나쁜 짓하려고 했다고 생각할 텐데.”“저에게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까 제가 말한 대로만 해요.”“그래요, 그럼 수호 씨 말 대로 할게요.”나는 애교 누나와 상의가 끝난 뒤 문 열러 갔다.그랬더니 남주 누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수호 씨가 왜 문 열어요? 여긴 무슨 일이에요?”나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형이 교통사고가 나서 형수가 형 보러 갔거든요. 잠시 집에 갈 수 없어 여기 왔어요.”남주 누나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고 가죽옷과 가죽 신발 차림이었는데 아주 카리스마 있어 보였다.심지어 내 말에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하지만 시뻘겋게 물든 애교 누나의 눈시울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애교야, 왜 이래? 눈이 왜 이렇게 부었어?”애교 누나는 눈을 들어 나를 흘끗 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말한 대로 말하라는 사인을 보내자 입술을 짓 씹으며 대답했다.“수호
애교 누나는 역시나 똑똑한지라 곧바로 눈치채고 내 연기에 맞춰 주었다.심지어 더 슬프게 흐느끼기까지 했다.“나 올해로 31살이란 말이야. 이렇게 젊은 나이에 폐경이라니, 그럼 앞으로 아이는 어떻게 낳으라고? 남주야, 나 어떡해?”애교 누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완벽한 연기를 해대니 좀처럼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나도 사전에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거다.그때 남주 누나가 깔깔 웃어댔다.“고작 이 일 때문에 그래? 어려운 거 아니네. 앞으로 남편더러 매일 집에 오라고 해. 남자 손을 타면 호르몬도 정상으로 돌아올 거고, 생리 주기도 점점 맞을 거야.”그 말에 애교 누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그런데 정민 씨가 반년 동안 집에 안 들어와 얼마 전에도 반년 만에 얼굴 처음 봤어.”“헐, 정말이야? 그렇다면 반년 동안 독수공방했다는 거야?”남주 누나는 믿기지 않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그 말에 애교 누나는 얼굴만 붉힐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어쩐지 갑자기 호르몬 이상 증세가 나타나고 생리 주기가 들쑥날쑥하다 했더니, 우리 나이대 여자는 남자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데. 네 남편이란 인간은 전시품처럼 쓸모를 발휘하지 못했으니. 난 네 남편이 밖에 다른 여자도 있다고 봐.”애교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펄쩍 뛰었다.“그럴 리 없어. 정민 씨 그런 사람 아니야.”“애교야, 넌 남자를 너무 몰라. 이 세상에 바람 안 피우는 남자는 없어. 아무리 정직하고 점잖은 남자라도 똑같이 뒤에서 그 짓거리 하고 다닌다고.”남주 누나는 말하면서 나를 흘긋 바라봤다.이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따지고 보면 난 바람에 속하지도 않는다.내가 애교 누나와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니, 이게 어떻게 바람이란 말인가?하지만 애교 누나는 여전히 왕정민을 무척 믿는 듯 연기했다.“난 증거 없는 일은 함부로 넘겨 집지 않아. 너도 그러지 마.”“그래, 알았어. 그럼 네 남편 말고 네 얘기할게. 이제 병의 근원도 찾아냈는데 제대로 된 처방
“애교야, 너도 잘 생각해 봐.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는 혼인 때문에 평생 독수공방할 건지, 아니면 네 인생 즐기며 살 건지.”솔직히 남주 누나의 생각은 너무 개방적이고 혁신적이다.물론 남주 누나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도 그럴 게, 남자든 여자든 결혼에 위기가 생기거나 껍데기일 뿐이라면 도덕을 지켜야 한다고 본인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그럴 거면 차라리 본인을 위해 살고 말지.인생은 원래 짧은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챙기다 보면 자신을 위해 살날이 남지 않게 된다.게다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나도 마침 남주 누나가 한 말을 하고 싶었기에 옆에서 맞장구쳤다.“애교 누나, 저도 남주 누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봐요. 우선 남편과 상의해서 상대가 매일 집에 오겠다고 하는지 물어봐요. 만약 상대가 원하면 당연히 좋은 거고, 대충 얼버무리면 누나도 생각해 봐요.”“올해 고작 31살이잖아요. 이렇게 말기 폐경이 오면 노쇠만 빨라져요.”애교 누나는 내가 이 핑계로 저를 설득한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결국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두 사람 호의 알겠어. 이따가 바로 남편한테 전화해 볼게.”그때 남주 누나가 애교 누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너무 큰 기대는 품지 마. 내 경험으로 봤을 때, 네 남편 밖에 여자 있어.”“넌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애교 누나가 쓸쓸한 듯 말하자 남주 누나가 대답했다.“나도 네가 잘됐으면 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왕정민의 어디가 좋길래 애초에 결혼했던 거야? 네 얼굴과 몸매면 수호 씨 같은 젊은 남자도 언제든지 구할 수 있어.”애교 누나는 이를 악물었다.“왕정민이 정말 나한테 잘못했다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얼씨구? 난 그저 말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 치는 거야?”애교 누나는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참, 오후에 뭐 하러 갔길래 지금 돌아와?”“말도 마. 일 때문에 다녀왔어. 난 분명
시종일관 담담했던 전승빈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웠다.“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협박이 아니라 귀띔입니다. 회장님이 손에 왕정민이 바람피운 증거를 갖고 있는데도 왕정민은 쓰게 보지 않고 계속 밖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닙니다.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따님분이 아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전승빈은 화가 난 듯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왕정민, 그 개 같은 자식. 그놈은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아야 말을 들을 모양이군.”“전 회장님, 왕정민은 회장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왕정민 다리 몽둥이를 분지른다면 당분간은 겁을 먹겠지만 나중에는요? 만약 나중에도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회장님께 살의라도 품는다면 어떡하실 생각이죠? 그러면 따님은 또 어떡하고요?”“왕정민을 죽이는 건 회장님께 식은 죽 먹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따님은 어떡하고 따님 뱃속의 아기는 또 어떡하나요?”전승빈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놨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나는 전승빈에게 다가가 한 글자 한 글자 침착하게 말했다.“왕정민 같은 부류를 상대하려면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요구를 들어주는 척 구슬리기도 해야 합니다. 회장님이 왕정민을 찍어 누르려 할수록 왕정민은 불만을 품고 회장님께 반기를 들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마비시키고 천천히 공제하는 겁니다.”전승빈은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았는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너무 번거로워. 차라리 이 세상에서 치워버리면 그만이지.”“물론 회장님 능력이라면 한 사람을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겠죠. 하지만 이런 일을 평생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따님분이 남편 어디 갔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실 건데요? 손자가 아빠 어디 갔냐고 물으면 그때는 또 어떻게 대답하실 거고요?”“백번 양보해서 따님분이 만약 회장님이 자기 남편을 죽였다는 걸 알면 고마워할까요? 미워할까요?”전승빈은
“안녕하세요. 저는 타노스 탐정 사무소 정수호라고 합니다. 한번 만나 뵀으면 해서요.”[나를 말인가? 나는 왜 보려는 거지? 일 얘기라면 자네 사장더러 찾아오라고 하게.]전승빈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으려 했다.“잠깐만요. 전 회장님 사위 왕정민에 관한 일인데 정말 듣고 싶지 않나요?”[난 시간 없네.]전승빈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왕정민의 일이라고 했는데도 전승빈이 이런 태도를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괜찮았다. 이왕 이렇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었으니까.나는 아예 운전을 해서 전승빈의 회사로 찾아갔다.전에 윤미화가 전승빈을 조사하라는 의뢰를 나한테 맡긴 터라 나도 전승빈에 관한 일을 많이 알아냈다. 그걸 마침 이렇게 써먹게 되었다.나는 전승빈의 회사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때 BMW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차가 바로 전승빈의 차라고 확신했다.회사 앞에서 한참 동안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비싼 외제차는 처음 봤으니까.나는 다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전승빈이 차에서 내렸다.전에 전승빈의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사진을 본 적은 있다.나는 전승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급히 붙잡았다.“전 회장님. 10분만 시간 내 주실 수 있나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전승빈의 기사는 거칠게 나를 밀어냈다.“저리 비켜요!”“왕정민이 탐정 사무소에 전 회장님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제가 현재 어떤 증거를 확보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나는 전승빈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전승빈은 내 말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따라오게.”나는 전승빈을 따라 회장 사무실로 향했다.나는 사무실이 큰지 작은지 전승빈의 기세가 강한지 약한지 관찰할 겨를도 없이 온통 전승빈과 손잡을 생각뿐이었다.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왕정민과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어 전 회장님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전승빈은
나는 우연히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진동성이 형수에게 미약을 써서 형수를 왕정민에게 데려가려 했다니.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라는 거다.나는 급발진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동시에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켰다.나는 이 둘의 파렴치한 짓을 똑똑히 찍을 생각이었다.왕정민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언짢은 듯 말했다.“이제 사람이 저 지경이 됐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젠장. 내가 저 고태연을 보며 입맛 다신 게 몇 년인데. 하필 이 지경이 될 건 뭐야?”진동성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동영상 많이 보내줬잖아. 그 영상으로 먼저 해결해. 나중에 고태연 상태가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너한테 데려갈게. 어쨌든 내 마누라잖아. 내가 보살피는 건 당연해. 그때가 되면 네 마음대로 놀아도 돼. 고태연은 어차피 식물인간이라 움직이지 못해서 반항도 못하잖아.”왕정민은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했다.“네가 나보다 저 변태였네. 식물인간도 안 놔준다니.”진동성은 담배 연기를 동그랗게 말아 뱉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나한테는 고작 도구일 뿐이야. 가치가 있으면 쓰고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거지. 고태연도 그걸 영광으로 여겨야 해.”영상을 모두 녹화한 뒤 나는 침착한 얼굴로 나갔다.“맞아. 참 영광이지. 네 놈이 식물인간이 되면 나도 너를 그렇게 대해도 돼?”나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마음이 너무 평온하다 못해 나조차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이런 상황에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왠지 화가 나지 않았다.화가 극에 달해 오히려 차분해진 것일 수도 있고, 진동성 같은 인간 때문에 화낼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다.어쨌든 나는 이 순간 무서우리만치 냉정했다.진동성과 왕정민은 나를 본 순간 흠칫 놀라더니 이내 비릿한 미솔르 지었다.특히 진동성은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네가 사실을 알면 어쩔 건데? 고태연은 아직도 내 와이프야. 앞으로도
나는 이 모든 게 위로의 말이라는 걸 알지만 누나들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머릿속으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만약 형수가 평생 깨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평상 형수를 돌봐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절대 형수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나는 온 신경이 형수한테 쏠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날 저녁 남주 누나의 전남편 고정훈도 병원에 왔다.남주 누나는 놀란 듯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야?”중산이 말했다.“자기 친구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에 와 봤어.”“우리 이미 이혼했어...”“자기도 알잖아. 난 처음부터 이혼은 원하지 않았어. 자기는 내 마음속에 영원한 아내야.”고정훈은 그윽한 눈빛으로 남주 누나를 바라봤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마음이 불편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이러지 마. 그럴수록 난 죄책감만 커져 가.”“그래. 아무 말 하지 않을게. 난 자기 협박하려는 거 아니야. 외압을 강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앞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해. 난 언제든 나타날 거야.”남주 누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남주 누나가 이혼을 한 이유는 여한 없이 자기 삶을 살면서 고정훈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고정훈이 너무 잘해주는 바람에 자꾸만 스스로 쓰레기 같아 보이곤 한다.결국 남주 누나는 마음이 편해지려고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그날 저녁 나는 여전히 형수 옆을 지켰고 애교 누나는 나와 함께 병원에 남아 주었다.고수연은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에 집으로 돌아갔고 고아연도 바쁜 일이 있는지 어느새 사라졌다.남주 누나도 결국에는 고정훈과 함께 떠났다.애교 누나는 먹을 걸 사 와서 내 앞에 내밀었다.“수호 씨, 뭐 좀 먹어요.”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음식을 받아 깨끗이 먹었다.아무리 슬프더라도 절대 내 몸으로 장난쳐서는 안 된다. 나는 왠지 폭풍우가 아주 무서운 방식으로 닥치고 있다는 게 은연중에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 그러려면 강해져
나는 집중 치료실 밖에 도착해 안에 있는 형수를 빤히 바라봤다.얼마 뒤, 애교 누나와 고수연도 도착했다.우리는 모두 형수가 하루빨리 위기를 넘기고 쾌차하기를 바랐다.심지어 고수연은 나를 의심했다.“정수호,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언니가 당신과 함께 나갔다가 이렇게 됐잖아. 대체 언니를 어떻게 돌보면 이렇게 돼?”나는 온몸에 힘이 빠진 데다 기분이 다운되어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대신 내서서 설명했다.“수연아, 이건 수호 씨 탓 아니야.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언니는 저 인간 여자 친구라 당연히 편들겠죠. 정수호, 우리 언니한테 무슨 일 있으면 당신 절대 가만 안 둬.”고수연은 경고를 내뱉은 뒤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으니까.나는 그저 형수가 하루빨리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다.형수가 혼수상태에 빠진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너무 괴로웠다.애교 누나는 내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수호 씨, 걱정하지 마요. 윤지은 씨한테 물어봤는데 태연이 깨어나려면 적어도 5시간은 걸릴 거래요. 수술이 금방 끝나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뿐이니 수호 씨는 가서 쉬어요. 여기는 내가 지키고 있을게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안 갈래요. 어디도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릴 거예요.”형수가 깨어나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나는 마음 놓을 수 없다.애교 누나는 이 상황에서 나를 위로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오후 4, 5시쯤, 남주 누나도 병원으로 달려왔다. 누나는 조급한 말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교통사고라니?”애교 누나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남주 누나에게 말해주었다.자초지종을 들은 후의 남주 누나는 나와 생각이 똑같았다.“진동성, 그 개자식이 분명 무슨 짓 했을 거야. 그럼 태연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애교 누나는 다급히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
“진동성은 지금 어디 있어요? 만나봐야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절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그딴 쓰레기는 감옥에나 가야 하니까요.”“외과 병동에 있으니 같이 가.”“됐어요. 여기서 저 대신 형수 좀 돌봐줘요. 그 인간은 나 혼자 만나고 올게요.”나는 윤지은이 따라오려는 걸 극구 말렸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확실히 형수가 걱정되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윤지은이 있으면 내가 마음껏 움직이기 불편했으니까. 외과 병동에 도착한 나는 한 병실 안에 누워 있는 진동성을 바로 발견했다.의료진이 옆에서 각종 검사를 하고 있었고 진동성은 비명 지르며 엄살을 피워댔다.“아, 아파요. 의사 선생님, 좀 살살할 수 없어요?”그 꼴을 본 순간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형수는 그렇게 많이 다쳐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진동성은 고작 외상 몇 군데 난 거로 비명을 질러대며 엄살을 부리고 있단.나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묵히 옆에 서 있다가 의사가 떠난 뒤 진동성 앞으로 다가갔다.“형수는 왜 만났어?”진동성은 나를 차갑게 흘긋거렸다.“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수호, 잊었나 본데 고태연은 아직 내 와이프야. 내가 내 와이프랑 뭘 하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나는 두말없이 진동성의 멱살을 잡았다.“넌 왜 고작 찰과상인데 형수는 의식까지 잃어야 해?”“뭐 하는 거야? 나 지금 환자야. 이거 단장 놔.”“대답해!”나는 버럭 소리쳤다.진동성은 내 모습에 살짝 쭈그러들었다. 눈이 시뻘게진 나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덮치려는 맹수 같았다.진동성은 내 심기를 거슬렀다가 본전도 못 찾을까 봐 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이혼 예기하려고 만났어.”“그것뿐이야? 고작 그것뿐이면 교통사고는 왜 나는데?”나는 진동성의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진동성도 끝내 화가 났는지 버럭 소리쳤다.“교통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야. 누구는 뭐 사고 나고 싶어 난 줄 알아? 선 넘지 마. 나 지금 환자야.”‘그게 정말 단순 사고라고?’나는 절대 믿을 수 없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윤지은은 얼른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정수호, 절대 무너지면 안 돼. 형수가 깨어나면 돌봐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해. 옆에서 최선을 다해 케어해 줄 사람도 있어야지.”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맞아요. 난 넘어질 수 없어요. 형수가 꼭 위기를 넘길 거라고 믿어요.”나와 윤지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나는 그 동안 벽에 걸린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런 경험을 해 본 건 처음이다.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고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기분 좋게 가셨다.가족들은 모두 할아버지가 갈 때가 돼서 갔다며 좋은 일이니 슬퍼할 필요 없다고 했었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둘여워하기는커녕 저승에 가면 분명 재밌을 거라는 농담까지 잊지 않으셨다.할아버지 손에 키워져 옆에서 할아버지를 따라 배워온 터라 내 성격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때문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만 해도 나는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다른 세상으로 갔고 그 세상에서도 잘 지내실 거라고 믿으면서. 우리 집은 친척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니라 나는 그 뒤로도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하지만 이번 처음 죽음의 공포가 뭔지 제대로 느꼈다.의사라서 그동안 생로병사는 순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내가 직접 이런 일을 경험하니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특히 현재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이 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서 더더욱, ‘형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난 어떡하지?’나는 형수만큼은 절대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진동성한테 생겨야지. 진동성이 아니었다면 형수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쓸데없는 생각들이 고개를 내밀어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지옥 같았다.나는 시간이 이토록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1분이 1
“그딴 허울 좋은 소리는 집어치워. 너도 회사를 위해 나를 왕정민한테 팔아넘기려 했잖아. 진동성, 네가 얼마나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인지 인정해. 한 일도 인정하지 못하는 게 어떻게 남자야?”형수는 온 힘을 다해 핸들을 꺾었다.깜짝 놀란 진동성은 버럭 소리쳤다.“미쳤어? 나 운전하잖아.”“난 죽더라도 네가 원하는 대로 되게 두지 않아.”형수는 말하면서 있는 힘껏 핸들을 흔들었다.워낙 차 속도가 빠른 데다 핸들이 움직이니 차는 도로 가운데서 이리저리 부딪혔다.진동성은 무서웠는지 애원하듯 말했다.“알았어. 안 그럴게. 이거 놔.”형수는 진동성의 거짓말을 믿을 리 없었다. 세상 남자는 다 거짓말쟁이라 믿을 수 없다.형수는 죽을 각오로 말했다.“늦었어. 네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차라리 이대로 같이 죽자. 그럼 너도 다른 사람한테 더 이상 피해주지 않을 거잖아.”그 말에 지동성은 형수가 저를 끌고 같이 죽으려 한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고태연, 넌 정말 미쳤어!”진동성은 형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옆으로 세게 밀쳐냈다. 하지만 형수도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형수도 곧장 진동성의 머리를 움켜잡고 차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쾅!차는 끝내 굉음을 내며 도로 위를 굴렀다.차 안은 난장판이 된 채 비명이 난무했다.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른 데다 한번 부딪힌 뒤 멈춰 선 게 아니라 그대로 몇 바퀴 굴러 육교에서 떨어졌다....한편 형수가 떠난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중간 휴식 시간이 되어서야 형수가 도관에 없다는 걸 발견했다.형수가 떠나기 전 잠깐 나간다는 문자를 남긴 터라 나는 당연히 형수가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나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얼마 뒤 윤지은이 전화를 걸어와 형수가 교통사고로 응급수술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나는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갑자기 왜 사고가 난 거예요?”[네 형수가 웬 남자랑 같이 있었어. 내가 사진 보낼 테니까 남편이 맞는지 확인해 봐.]윤
“내가 그렇게 싫은 거야”진동성은 형수가 너무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형수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역겨운 정도가 아니야. 치가 떨리도록 싫어. 너랑 빨리 이혼하려는 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오자도 않았어.”진동성은 몰래 이를 갈았다.형수는 말을 이었다.“이혼 합의서는 내가 다 준비했어. 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형수는 말하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혼 합의서를 진동성 앞에 내놓았다.진동성은 문득 자기가 너무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수의 공격적인 모습이 그는 매우 싫었다. 그가 아내를 버리더라도 아내는 절대 저를 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하지만 진동성은 워낙 마음을 잘 숨기는 사람이기에 화가 나더라도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했다.“좋아. 이번에 마지막이니까 같이 산책 좀 하자. 괜찮지?”형수는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진동성을 바라봤다.“나 시간 없어.”“그냥 산책 좀 하자는 거잖아. 내가 뭐 다른 걸 한대? 길거리에 사람도 많은데 내가 뭔 짓 할까 봐 겁나? 그것만 들어주면 바로 이혼 합의서에 사인할게. 그래도 우리 부부인데 마지막까지 싸우는 건 싫어. 넘 안 좋게 끝내는 것도 싫고.”형수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진동성의 부탁을 들어주었다.“30분 밖에 없어.”형수는 30분을 할애해 이혼 도장을 받아내는 게 밑지지 않는 처사라고 생각했다.형수는 현재 한시 빨리 이혼하여 눈앞의 쓰레기를 멀리하려는 생각뿐이었다.진동성은 곧바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형수를 도와 문을 열어주더니 어디로 갈지 묻기까지 했다.형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마음대로 해. 아무 데나 다 돼. 하지만 난 30분 밖에 없어.”“그럼 쇼핑몰 좀 도는 건 어때? 너한테 선물 좀 사주고 싶거든.”“마음대로 하던가.”형수는 시종일관 싸늘한 태도로 대답했다.진동성은 겉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형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한번 결혼하면 분명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터인데, 진동성은 그게 무엇보다도 싫었다.‘고태연, 이건 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