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이 우문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일단 차분하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중간에 말 끊지 말고.” 원경릉이 말했다.“너 설마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비밀을 지키고 싶었는데.” 우문호가 의아해했다.“무슨 비밀?”“응……? 몰랐어? 보아하니 몰랐구나?”“무슨 소리야? 먼저 말해.”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눈이 반달 모양이 됐다.“정정(靖廷)이 왔어.”“누가 왔다고?” 원경릉은 실눈이 된 우문호가 못마땅했다. “정정!” 우문호는 크게 대답했다. 그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마치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녀의 얼굴이랄까…… “정정? 그 사람이 왜 와?” 원경릉의 머릿속에는 종이 울렸다.‘대주(大周)의 진정정(陳靖廷)이 왜 온다는 거지?’우문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옷깃을 바로 세우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태자 책봉 축하 자리에 참석하러 오는 거지! 다른 사람은 오든 말든 필요 없고, 정정은 꼭 와야 해.”원경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문호를 보았다.“오든 말든 필요 없는 다른 사람이 설마 나야?”“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에 네가 왜 포함돼?” 우문호는 정정을 만날 생각에 흥분이 되는지 귀까지 빨개졌다.원경릉은 흥분한 우문호를 보고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저러는 걸 보니, 정정이 오면 잘 감시해야겠어. 혹시 알아? 정정이 대주로 가자고 하면 홀라당 따라가 버릴지?’ 지금 우문호의 꼴을 보니 틀림없이 만사 다 내팽겨두고 짐 싸서 정정을 따라 대주로 갈 판이었다.“근데 정정 부인이 임신을 했다고 했잖아? 부인은 두고 온 거야?” 원경릉이 물었다. “부인도 같이 와.” “부인도 온다고? 가만, 지금 개월 수로 따지면 7개월이 됐을 텐데, 그 몸을 이끌고 온다고?”“무슨 상관이야.” 우문호는 정정의 부인에게는 관심 없었다.원경릉은 순간 정정 부인도 자신과 같은 생각임에 틀림없다고 여겼다. 정정도 우문호를 만날 생각에 설레고 있을 것이다
원경릉은 우문호의 눈을 보았다.“내가 예전하고 많이 다르다고 하지 않았어? 너도 솔직히 느꼈잖아. 왜 그런지 알고 싶지 않아?” 원경릉이 말했다.“전하고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거고……” 우문호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이 얘기는 그만하고 나가서 산책이나 하자.”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똑똑한 우문호가 그녀의 변화에 대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우문호, 난 밖에 나가지 않을래. 하던 말을 마저 하고 싶어.” 원경릉이 말했다.“그럼 네 말을 듣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네가 할 말이 우리를 헤어지게 할 수도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해? 당연히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지!” 원경릉이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정말 그럴 리 없다는 거지?” “응! 당연하지. 우리가 왜 헤어져,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원경릉은 급 피곤해졌다. 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천천히 입을 뗐다.“사실 전에 탕양과 함께 너의 변화와 네 약상자에 대해 여러 번 논의를 했었어.”“그래?”“응, 논의 끝에 네가 요괴거나 도깨비라는 결론을 내렸다.”“뭐 요괴? 도깨비?” 원경릉은 손을 뻗어 우문호를 잡고는 “왜 선녀는 안 되는 거야?” 라고 물었다.우문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경릉아, 나도 눈이라는 게 있잖아. 선녀랑 너는…… 어울리지 않아.”“하, 그래. 알겠다고!” 원경릉이 화를 냈다.“하지만, 탕양이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말을 하고 나서 큰 화를 입을 수 있다고.”“큰 화를 입는다고? 말도 안 돼.”“나는 탕양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 네가 요괴건 도깨비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아니냐? 난 그냥 너와 함께 이렇게 재밌고 즐겁게 살면 그만이다. 난 진실을 알고 싶지도 않고 모험을 하고 싶지도 않아.”우문호는 원경릉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경릉아, 내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네가 약상자를 꺼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어. 내 생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
“죽은 시체에서 영혼만 빠져나온 거야?”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 보면 우문호의 말도 맞는 말이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맞지? 네 죽은 영혼이 남의 몸 안으로 들어간 거잖아. 어쩐지 그럼 네 원래 얼굴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는 거네? 어쩐지 생긴 게 영……”우문호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그는 속으로 원경릉이 요괴나 도깨비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만약 요괴나 도깨비였으면 언제든 그들의 세계로 도망갈 수 있었겠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면 도망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 우문호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아까 무슨 박사(博士)라고 했지? 차(茶) 박사? 술 박사? 차를 끓이는 솜씨를 보아하니 차 박사 맞지?”“박사는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 아니야?”“그건 그렇지만, 학문이 뛰어난 박사들은 다 남자인데…… 설마 너 혹시 남자야? 그래 이상하다 했어! 천문 지리를 알고, 태양의 흑점을 논하더니…… 원래 남자였구나!” 우문호가 기겁했다.“넌 내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 주는 거 아냐? 남자면 뭐 어쩔 건데?” 원경릉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거짓말하지 마. 하나도 안 웃겨.” 우문호가 정색하고 원경릉을 보았다. “치, 아쉽게도 난 남자가 아니야. 나는 원래부터 여자였고, 현대에서는 의사이면서도 천문학도 잘 알았어.”“휴,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네.” 우문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내가 정말로 남자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원경릉이 물었다.“상상하기도 싫어.”“왜 한 번 생각해 봐.”우문호는 눈을 감으며 “너를 들어다가 벽에 던져버렸을 수도?” 라고 말했다.“너무해.”“네가 남자인 게 더 너무한 일 아니야?” 우문호가 놀란 가슴을 쓸었다.“치, 말이라도 예쁘게 하지!”우문호는 원경릉을 보며 “근데 삼둥이에게 뭔가 이상한 게 있다며, 정확히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라고 물었다.“지금은 나도
“그럼 우리 삼둥이들이 모두 천부적인 마법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거네? 마법은 네 영혼에서 나온 것이고, 넌 그럼…… 삼둥이들의 영혼의 대장이라는 건가?”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깜짝 놀라 그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문득 이 몸이 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삼둥이들에게 유전이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내 영혼이 이 몸으로 들어오면서, 내가 약상자를 조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주 원경릉의 원래 뇌에도 영향을 줬다는 건가? 아니면 내 원래 뇌파가 원경릉의 뇌파와 연결되면서 원경릉 본체에 영향을 끼친 건가? 그래서 삼둥이들에게도 유전이 된 건가?” 원경릉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삼둥이들이 건강하게만 자라면 소원이 없겠다.” 원경릉은 태연한 우문호의 표정에 마음이 놓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답답한 느낌이 있었다. “내 얘기를 다 들었잖아. 뭐 또 궁금한 건 없어?”“궁금한 거?”“응,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가족은 몇 명인지 그런 거.”“너 가족이 있어?”“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어?” 원경릉이 웃었다.“그럼 네 가족은 북당의 어디에 살아? 무얼 하는 집안이야?”“우리는 대대손손 의사 집안이고, 모든 가족은 대주로 이사를 갔어. 기회가 되면 한 번 보러 가자.”원경릉은 진실 반, 거짓 반으로 아무 말이나 했다.“그래!” 우문호가 말했다. 두 사람은 진실을 모두 털어놓은 후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러나 원경릉의 마음속에는 삼키지 못할 정보가 하나 더 있었다. 만약 지금 우문호에게 말한다면 그는 정보 과부하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원경릉이 그에게 더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을 때, 그가 묻지 않았으니 원경릉이 나서서 자신의 얘기를 주절거릴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우문호가 갑자기 그녀를 보며 “나 궁금한 거 생겼어.” 라고 물었다.“응. 말해.”우문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정정이 오면, 그를 우리 왕부에서 지내게 하면 안 될까?
탕양은 우문호와 원경릉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밖에서 우문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태자, 혹시 태자비께 말씀드렸습니까? 태자비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우문호는 우울한 얼굴로 “말할 수 없어. 정정은 어디에 있어? 술집인가? 술집으로 가자.”라고 말했다.탕양은 급한 마음에 “태자, 왜 그러십니까? 말씀을 좀 해보세요.” 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걸음을 멈추고 탕양을 보았다.“그녀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태자비께서 말씀을 하시긴 한 모양이네요? 뭐라고 하셨습니까?”“휴, 태자비가 자기는 시체에서 나온 영혼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자기가 의학 박사라며, 인간의 힘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게 있다고 했어. 난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들었다. 중간에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도 참고 말이야. 근데 열심히 들은 결과가 이게 뭐야? 정정을 왕부에 데리고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나보고 꺼지래! 여자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탕양은 한숨을 내쉬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그럼 대장군을 모셔 술집으로 갈까요? 모처럼 오셨는데……”라고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우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정정을 왕부에 머물게 하기 위해 혼심의 힘을 다할 예정이었다.*명월암. 고지는 아침 일찍 배가 아팠다. 출산 예정일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기상궁과 정화군주는 그녀가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 점심때가 되자 자궁 수축 증상과 비슷한 통증이 나타났다. 조산이었다. 누구도 고지가 이렇게 빨리 아이를 낳을 줄을 몰랐기에 산파를 구하지도 않았다. 정화군주는 무우산을 들고 와 고지에게 먹이고는 기상궁에게 고지가 먹을 죽을 준비하라고 했다. 고지가 사는 방은 어둡고 습해서 곰팡이 냄새가 났는데,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 그 냄새가 말도 못 하게 심해졌다. 고지는 고개를 돌려 정화군주를 보았다. “내가 아이를 낳자마자 나를 죽일
“왜 태자비를 믿지 않지?” 정화군주가 고지를 노려보았다.“내가 미쳤다고 그 여자를 믿어? 나는 너와 태자비 둘 다 믿지 않아!”“그래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 정화군주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기상궁이 안으로 들어갔고, 정화군주는 밖에 앉아 고지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햇살을 따스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나뭇잎 하나가 그녀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이 세상에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다. 고지가 낳은 아이는 앞으로 많은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겪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축복이다. 잠시 후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가 뚝 끊어졌다. 안에 있던 기상궁은 “미쳤어! 그 아이는 네 딸이라고!” 라며 소리를 질렀다. 정화군주가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지가 피가 줄줄 흐르는 몸으로 갓 태어난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광기가 보였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것이야. 정화군주 이것 보라고! 내가 너 대신 복수를 했으니 내 목숨을 살려줘!”아기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정화군주는 바닥에 놓인 작은 의자를 들어 고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머리를 맞은 고지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그 틈에 기상궁이 아이를 안아들었다.“세상에, 저런 모진 어미가 어디 있습니까?” 기상궁이 분노했다. 기상궁은 재빨리 아이를 거꾸로 매달아 엉덩이를 두 번 두드렸다. 그제야 비로소 아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정화군주와 기상궁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그들은 미리 받아 둔 따듯한 물로 아이를 씻겼다. 여자아이의 몸집은 아주 작았으며 등에 푸른 반점이 있었다. 피부가 어찌나 얇은지 온몸의 혈관이 투명하게 보였다. 달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는 송충이처럼 정화군주의 품에 안겨있었다.정화군주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기상궁은 조용히 정화군주의 어깨를
기상궁은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초왕부로 향했다.“쇤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잔인하고 매정한 어미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고지가 한 번 안아보겠다고 해서 주었더니, 바로 아이 목을 조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화군주가 들어와 고지를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기상궁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원경릉은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안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화군주는 뭐라고 했습니까?” “군주께서는 명월암에는 젖을 줄 사람이 없으니 초왕부에 가서 부탁을 해보라고 했습니다.”마침 희상궁과 사식이가 들어왔다. 희상궁은 아이를 안고 있는 원경릉이 힘들까 봐 아이를 자신이 안아들었다.“세상에 아이가 매우 작아요.” 희상궁이 말했다.“기상궁, 왕부에는 예비 유모 상궁이 있으니 아이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보세요.” 원경릉이 말했다.원경릉은 사식이를 보며 “사식아, 너는 후부에가서 후작을 모시고 오거라.” 라고 말했다.사식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기상궁이 우물쭈물하더니 원경릉을 보며 “근데 누가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겁니까?” 라고 물었다. 원경릉이 가만히 아이를 보니, 아이가 쭈굴쭈굴하고 작아서 마치 송충이 같았다. “일단 충이라고 부르죠, 나중에 정식으로 이름을 지어주고요.” 원경릉이 말했다.전에 정화군주가 자신이 고지의 아이를 키울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만약 정화군주가 아이를 도맡아 키우게 된다면 그녀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 아이가 원팔룡의 아이가 맞다면, 아이는 정화군주가 아닌 원팔룡이 키워야 한다. ‘미치겠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사식이와 기상궁이 밖으로 나가자 희상궁이 원경릉에게 “아이가, 후작과 닮은 것 같습니까?” 라고 물었다. 원경릉은 아이가 너무 작아서 누굴 닮은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얼굴에서 원팔룡이 조금 보였다. 그 이유는 원팔룡의 눈과 아이의 눈이 똑같았기 때문이다.원경릉
“죽이겠다고 해도 막상 자기 자식이 태어난 것을 보면 고지처럼 모질지는 못할 겁니다.” 희상궁이 말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와 내 동생에게 한 짓을 보세요. 출세를 위해서 내 동생을 혜정후에게 보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죽음으로 내몰던 사람이라고요. 정후부의 여식에게도 이러는데, 혼외자에게서 온 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정후를 믿지 않습니다. 충이를 그런 아비에게 보내서는 안됩니다.” 원경릉은 차갑게 웃었다. 원경릉은 삼둥이를 낳은 후로 전하고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아이는 백지장 같아서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아이는 무고하다. 만약 아이가 부모를 택할 수 있다면 죄를 지은 부모나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려고 하겠는가?원경릉은 충이의 목에 찍힌 붉은 손자국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희상궁은 그런 원경릉을 보고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은 그저 정후가 왕부로 오기만을 기다렸다.만아가 이미 누가 왕부로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말했기에 정후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 있었다. 원래는 왕부로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만약 오지 않을 경우 태자비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만아가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사식이가 미리 정후를 시험하기 위해 만아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 정후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사식이는 예측 가능했다. 정후는 원경릉이 예전에 원경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그가 원경릉의 부름에 가지 않는다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도 어쩔 수 없이 왕부로 향했다.정후가 초왕부로 들어오자 하인이 그를 데리고 소월각 사랑채로 향해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그는 한참을 안절부절못했다. 그 순간 화가 잔뜩 난 원경릉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후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던 원경릉은 바닥만 보고 있는 정후를 보고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