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저는 밖에서 모비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왕비가 기왕을 쳐다보지도 않고 휙- 밖으로 나갔다. 기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가라고 했다고 진짜 간다고?’눈물을 흘리던 진비도 기왕비의 매몰찬 태도에 기왕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저거 제정신이 아닌 게지?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쌩 나가버린다고?”기왕은 주명양과 짜고 기왕비를 폐비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진비에게 말하지 못했다.“명양이가 입궁한 이후로 기왕비가 좀 이상합니다.”“너는 후궁 주명양은 애지중지 여기면서 정비는 왜 푸대접을 한 거야? 그건 왕부가 망하는 길이다. 절대 그러면 안 돼. 넌 지금 동씨 집안의 힘이 필요하다고!” 진비는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다.“언제 적 동가(佟家)입니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습니다. 동씨 집안도 부황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요?” 기왕이 말했다.“넌 참 근시안적이구나! 동씨 집안사람들이 궁 안에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동씨 집안은 태생부터 돈이 많다고! 넌 기왕비를 잘 달래 보거라. 그리고 기왕비의 큰 오빠인 동안(佟安)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부황께서 시국이 이러니 동안을 냉대하겠지만 그의 능력은 높게 사고 계셔.”진비의 말을 들은 기왕이 창백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그럼 모비께서 기왕비를 좀 설득해 주세요. 동씨 집안사람들 중에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상소문을 써달라고 해주세요.”“이래서 집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니까? 후궁이 들어오자마자 그 계집에게 눈이 돌아서 정비를 홀대하다니…… 옥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봐. 네가 온전히 네 힘으로 기왕부를 이끌었는지 말이야. 기왕비가 없었으면 넌 그저 황제의 큰 아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야.”모비의 말을 듣기 싫었던 기왕은 인상을 썼다. “모비께서는 소자를 참 우습게 보십니다. 그럼 제가 여자 치마폭에 쌓여있기라도
기왕비는 진비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모비,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라버니께서 기왕부의 일은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그게 무슨 뜻이냐? 기왕부의 일을 관여하지 않겠다니? 혹시 네 오빠가 조정에서 줄을 갈아탄 것이냐? 설마 새로 줄을 탄 것이야?” 진비의 눈빛이 싸늘했다.“모비, 그 말씀은 좀 이상하네요. 오라버니는 줄곧 황상을 모셨습니다. 모비의 뜻은 제 오라버니가 조정을 배반하고 외세와 결탁했다는 뜻입니까?”“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네 남편이 감옥에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를 빼내!” 진비가 분노했다.기왕비는 마차 밖을 보며 “며느리가 최선은 다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 말을 듣고 진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은 해보겠으나 기왕을 빼줄 수 있을 만한 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요.’진비는 기왕비의 속내를 모른 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너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기왕의 억울함을 모를 리 없지 않느냐. 이 일은 우문호가 기왕을 모함하려고 판을 짠 거야. 사람을 시켜 우문호가 했다는 증거만 찾는다면 기왕은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거야.” “모함을 당했건, 정말 기왕이 저질렀건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잡은 두 자객 모두 기왕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고, 그들이 쓴 휘어진 칼도 기왕부 것이 맞습니다. 만일 자객의 진정한 배후가 기왕을 모함하려고 했다면,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선 기왕이 결백을 주장해도 믿어줄 사람 하나 없을 겁니다.”“그럼 어떻게 하냐고! 설마 황상께서 기왕을 처리해 버리기 위해 일부러 이런다는 거야?”“음…… 폐하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 중이실 겁니다. 이때 누구든 이 이야기를 꺼내면 판단하는 데 해가 될 겁니다.”“어째서 해가 된다는 거야?”기왕비는 진비를 비웃었다.“모비께서는 제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범인이 기왕이라는 증거가 확실한데 그가 어찌 빠져나오겠습니까?”“……”기왕비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진비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들을 낳을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북당을 빼앗기게 될 텐데.’진비는 기왕비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기왕비는 전부터 누군가에게 기왕의 오랜 비밀을 발설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치부를 발설하고 나니 예상과 반대로 마음에 돌덩이라 들어앉은 듯 무거웠다. 하지만 기왕비는 기왕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지 오래이기에 돌덩이 같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딸이었다. 만약 기왕이 중죄인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딸마저도 죄인의 딸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기왕이 죽든 살든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딸 때문이라도 처벌은 막아야 했다. *제왕의 상태는 점점 나아졌지만 상처 부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보름 넘게 밖에 나가지 못했다.원용의는 제왕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제왕은 그런 원용의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제왕은 수차례 어의의 진료를 받았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아프다고 거짓말한 것을 혹시 원용의가 알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실 원용의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모른척했다. 날이 갈수록 제왕은 더 불안해졌다. 결국 제왕은 용기를 내어 원용의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용의야, 본왕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여기 앉아서 내 말을 듣거라.”제왕은 그녀가 준비해 온 약을 마시며 원용의를 바라보았다.원용의는 침상 옆에 앉아 의아한 표정으로 제왕을 보았다.제왕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본왕이 병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건 너를 속이기 위한 것이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저를 속이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설마…… 내가 널 속인 거 몰랐니?” 제왕은 깜짝 놀랐다.“몰랐는데……” 원용의가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제왕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이래서 주수보가 하루 만에 백발이 되었구나……’늘 있던 사람이 곁에 없자 제왕의 마음은 괴로웠다.*다음날 아침. 잠깐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제왕이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눈을 뜨자 어떤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밤새 잠을 잘 못 잔 그는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정신이 몽롱하니 제왕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깨달았다. “잘 잤습니까?”그녀의 한 마디에 그의 코끝은 시큰해졌고, 눈물이 터질 뻔했다.원용의는 따끈따끈한 죽을 침상 옆 탁자에 놓고 “왜 울려고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라고 물었다.“왜 여기 있어? 친정에 갔다고 하던데……”그의 목소리는 하루사이에 많이 쉬어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조모님 생신이라 어제 오후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나저나 이것 보십시오! 조모께서 저랑 제왕에게 선물을 준비해 주셨다니까요? 이게 당신 겁니다!”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며 소매주머니에서 복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손을 넣어 기다란 금괴를 꺼냈다.“조모님의 생신이라고? 그걸 내가 왜 몰랐지?” 제왕은 눈을 비볐다.“다치고 경황이 없었잖아요. 저도 깜빡했다가 어제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죽만 준비하고는 금방 또 가봐야 합니다.”원용의는 죽을 후후 불어서 제왕에게 줬다. “참, 방금 상궁이 그러던데, 어젯밤에 탕약도 안 마셨다면서요? 왜 그랬어요?”“그건…… 상궁이 약과를 준비해주지 않아서 안 마셨어.”“은근히 까다롭다니까?” 원용의가 웃으며 그에게 죽을 먹였다. 제왕은 두어 술 먹고는 그녀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난 네가 친정으로 갔다길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왜 그렇게 생각했죠? 제 물건들이 아직 여기 있는데 제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전에 나를 떠나서 여기저기 여행하며 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
제왕의 시간은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서 멈춘 것 같았다. 기왕이 범인이라는 모든 증거물을 제출하였으나 그는 아직 처벌받지 않았고 명원제 쪽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수사에는 진전이 없는 듯했고, 자객 검거에 힘을 쓰지 못했다며 우문호는 또 면직을 당했다. 두 번의 면직에 우문호는 조정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짓궂은 사람들은 우문호를 보고 복직 후 최단 면직 기록을 세웠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임신한 부인도 지키지 못하고 안왕에게 구박을 받다 못해 두 번째 면직이라는 수치를 겪다니.그런 말들은 쉬이 당사자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우문호는 하도 욕을 먹어서 자신이 장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그의 실직은 원경릉에게 행복이었다. 원경릉은 속으로 명원제가 우문호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를 면직시킨 게 아닌가 생각했다. 출산까지 두세 달 남은 순간 매일 우문호와 붙어있을 생각에 그녀는 너무나도 행복했다.*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벌써 2월 중순이 되었다. 조어의는 원경릉에게 누워만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고, 그 때문에 원경릉은 방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최대인이 소개해준 산파는 이미 경중에 도착했고, 그들은 왕비 뱃속의 아이가 셋이라는 말을 듣고 기함을 토했다. 탕양은 산파들에게 궁중에서 대기하라고 했으며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각종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대응방법을 가르쳤다.원경릉은 우문호를 불러 왕부 안에 수술실을 만들어놓았다.수술실 안에 밤에도 빛을 낼 수 있는 야광주(夜光珠)를 4개 박아 두고, 외부 공기가 쉽게 통하지 못하도록 공기가 통하는 구멍은 4개만 뚫었다. 원경릉은 수술실이 완성되는 동안 수술침대, 들것, 휠체어, 아기 침대, 유모차 등 직접 도면을 그려 기술 관리에게 만들도록 했다.모든 것이 순리대로 준비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원경릉은 최악의 상황을 그렸다. 아이가 달을 다 못 채우고 나올 경우. 그녀는 첫 출산이고, 세 쌍둥이이기에 조산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태어난 아이들이 저체중일 가능성이 높은데, 산파들이 아이를
다시 말해서 그날 제왕과 원경릉의 암살 작전은 소규모 집단의 행동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행동이었다.만약 금군과 부병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왕과 원경릉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이를 알고 있음에도 명원제는 여전히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친왕들도 조정의 신하들도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기왕은 옥중에서 만언서를 써서 명원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그 만언서(萬言書)는 명원제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만언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개소리를 열심히도 적어놨네.”라고 말했다.진비는 그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떨었고 그 길로 곧장 기왕비를 보러 갔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무슨 생각으로 만언서를 쓰라고 해서 황상을 분노하게 만든 게냐!”기왕은 한 달 동안 옥에 갇혀있었고, 만언서를 쓰기에는 돌아가는 정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부황께서 화가 나셨나요? 제가 의도하던 바입니다.”기왕비가 대답했다.“의도했다고? 황상을 실망시킨 게 네 의도였다고? 넌 기왕을 사지로 몰아넣을 셈이야?”“모비, 부황께서 기왕에게 실망을 해야 기왕이 풀려날 수 있습니다. 만언서 내용을 보고 부황께서는 기왕의 머리로는 절대 제왕과 초왕비를 해칠 계획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겠죠.”기왕비의 말을 듣고 진비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비는 진비를 안심시킨 후 초왕부로 가서 원경릉을 만났다.*초왕부.우문호는 아침 일찍부터 주지스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갔다. 그는 원경릉이 왜 주지스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리 않으려고 그녀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내가 아이를 낳아봤어야 알지…… 내가 모르는 일이니 경릉이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우문호는 원경릉의 안정을 위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그래서 기왕비가 때가 되면 원경릉을 찾아와 바깥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초왕부에 도착한 기왕비는 원경릉에게 인사 몇 마디를 건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
손왕비도 요즘따라 초왕부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날 손왕비는 정화군주가 만든 옷 3벌을 가지고 왔다. 정화군주는 예쁘게 수를 놓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피부는 민감하기에 순면 그대로 깔끔하게 만들었다. “군주가 말하길 아이들은 피부가 연해서 본연 그대로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데는 수를 못 놓고, 옷자락에 자그마한 꽃 한 송이를 수놓았답니다.”손왕비가 말했다.원경릉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정화군주의 실력에 감탄했다. 옷감도 매우 부드러웠고, 가벼웠다.“정화군주께서 고생이 많았네요. 왕비님께서는 정화군주를 뵙고 오신 겁니까?”“예, 정화군주가 초왕비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초왕비는 참 마음 따듯한 사람입니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정화군주를 초왕비께서 보호해 주신 겁니다.”“사실, 태상황 님께서 군주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하신 겁니다.”“태상황님이요? 태상황께서 그녀를 기억하십니까? 군주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좋아할 겁니다.”손왕비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정화군주께서는 기력은 많이 회복했습니까?” 원경릉이 물었다.손왕비는 두루마기를 접어서 한쪽으로 놓았다.“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초왕비가 보내준 약을 먹고 나서는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이 된 것 같아요. 근데 약에 너무 의존을 한 탓인지 약을 먹으면 자는데,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온대요.”“지금은 그럴 수 있어요. 상태가 많이 좋아지면 약을 천천히 줄이면 됩니다.”손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 맞다! 셋째에게 서신이 왔어요.”라고 말했다.“서신에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원경릉은 손왕비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았다.“별 말 없었습니다. 뭐 정화군주는 어떻게 지내는지, 건강은 어떤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답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둘째는 정화군주의 일을 그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제 생각엔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원경릉은 손왕비의 말을 듣고
냉정언이 나오고 그 뒤에 원경릉이 만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먼저 나와있던 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았고, 세 사람은 초왕부의 문으로 들어오는 강녕후 내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강녕후는 마흔 살쯤으로 보였으며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검은 비단옷을 입고 대나무가 수 놓인 망토를 입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정갈했다.그의 곁에는 강녕후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담해보이는 강녕후의 부인 주패가 서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이를 낳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탱탱하고 탄력이 있었다. 주패부인은 연지곤지를 바르고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쪽을 지었다. 그녀는 옷도 장신구도 많이 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이 참 검소해 보였다. 그는 흰색 치마를 입고 강녕후와 같은 검은 망토에 대나무가 수놓아져 있었다. 두 사람이 대문을 걸어오는 데 주변 분위기가 청량해질 만큼 걸음걸이가 시원시원했다.“왕비를 뵙습니다!” 강녕후 내외가 앞으로 나와 원경릉에게 인사를 했다. 원경릉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후작, 부인. 예를 거두시고 어서 들어가 앉으세요!”라고 말했다.주패부인은 원경릉의 배를 보고 웃으며 “왕비님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 아홉 달이 넘었죠?”라고 물었다.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우문호가 “아니요. 아직 그것보다 더 남았어요.”라고 말했다.“예? 아직 더 남았다고요? 어떻게……” 강녕후 내외는 줄곧 경중에 있지 않았기에 원경릉이 세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우문호는 놀란 주패부인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아, 배가 크지요? 이 안에 세 아이가 들어있어서 그래요.”“세 아이요? 정말 경사네요!” 주패부인이 말했다.강녕후는 우문호의 말을 듣고 원경릉을 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주패부인은 빠르게 강녕후의 눈빛을 읽고 남들이 안 보는 사이에 조용히 강녕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들은 자연히 난각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께서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