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왕비의 말을 들은 태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 고지를 명월암으로 보내거라! 명월암에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를 받고, 고지는 자유롭게 해 주거라! 그리고 위왕을 당장 입궁하라고 해라!”태후의 명령을 들은 손왕비는 위왕과 마주치기 싫어서 재빠르게 태후에게 인사를 하고 궁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바로 정후부로 가서 태후의 결정을 원경릉에게 알렸다. 원경릉은 그 말을 듣고도 안도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시종일관 불길함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고지가 집을 나가면 자연스레 위왕도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갈 테니 그 두 사람이 또다시 위왕비를 자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행으로 여겼다.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원경릉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당시 위왕비가 슬펐을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원경릉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일평생 세상에서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내 뱃속의 아이라는 것을……위왕비는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아이를 잃은 엄마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죽을 만큼 아팠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아이를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이 죽인 것이라니……지금 위왕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원경릉은 손왕비를 보았다.“손왕비님, 지금 가서 위왕비를 만나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요. 안 그래도 한 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위왕도 입궁해서 위왕부에 없을 테니 지금 가면 딱 좋을 겁니다.”그들이 정후부를 나서려고 하자 우문호가 도착했다. 진북후는 아직 경도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마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손왕비와 원경릉이 위왕부로 간다고 하자 우문호도 그들과 동행했다. 방에 들어가자 침상에 돌아누운 위왕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들어가 헛기침 소리를 내자 위왕비가 고개를 돌리고
원경릉은 위왕비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우리에게 얘기해도 됩니다. 손왕비님과 둘이 얘기하고 싶다면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원경릉의 말을 듣고 위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초왕비, 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아뇨.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따듯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위왕비가 한숨을 내쉬며 원경릉의 손을 꼭 잡고는 “이제부터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 인생에 바닥을 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올라오는 것 뿐입니다. 전 괜찮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안심은커녕 걱정이 더 됐다. 하지만 위왕비의 얼굴을 보니 휴식이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손왕비와 함께 위왕부에서 나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정후부로 돌아온 원경릉이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자 우문호는 그녀에게 “내가 나중에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을 불러다가 얘기를 좀 해봐야겠어. 셋째 형님이 뭐 때문에 위왕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게.”라고 말했다.“오해를 하면 뭐 하고 해명을 하면 뭐 해? 이미 막장까지 갔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해도 뱃속에 아이를 유산시킨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우문호는 처음보는 원경릉의 진지한 표정에 깜짝 놀랐다.“나는 셋째랑 달라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절대 너와 아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듣고 평소 같았으면 너의 볼에 뽀뽀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네. 지금 위왕비가 걱정돼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너무 걱정하지 마. 태후께서 셋째 형님을 부르셨으니, 태후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위왕도 궁에서 나올 때는 새 사람이 되어있을 거야. 셋째는 어릴 적부터 정모비의 말을 잘 들었으니까 말이야.”“내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위왕이 그녀를 어떻게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위왕비가 아무렇지 않은
“고지랑 초왕비가 어떻게 같은 급이라는 말이야?” 태후는 화가 나서 손바닥으로 위왕의 뺨을 때리고 위왕을 죽일 듯 노려보며“그 계집의 몸에 들어있는 아이와 초왕비의 아이가 어찌 같은 급이라는 것이야! 신원 확인이 된 초왕비와 정체불명의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가 어찌 같을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결론은 황조모께서 고지의 출신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죠?”“출신?”태후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위왕을 보며 “전에 정비 최씨가 그 계집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지? 그 은혜를 이 따위로 갚는 것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 계집이 아이를 낳는 순간 내쫓아 버릴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왕부에 들일 꿈도 꾸지 마!”라고 말했다.위왕은 태후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한 입으로 두 말하는 황조모가 아니기에 내심 두려웠다. 하지만 황조모가 손주를 바라왔기에, 아이만 태어나면 황조모도 고지를 아이의 어미로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 했다. 그는 최씨가 바람을 핀 사실을 황조모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지금 그가 최씨에 대해 뭐라고 말해도 황조모가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출궁 한 후, 그는 위왕부에 공급되는 은사탄(銀絲炭)을 끊고, 음식도 입에 풀칠할 정도만 제공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위왕비를 감싸고도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위왕비를 싸고돌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반감이 들었다. 위왕은 위왕부에 가서 오씨 어멈에게 차갑게 말했다. “이 정도면 먹고 살만 하잖아. 추우면 이불 더 꺼내서 덮으면 되고, 명이 길다면 죽지는 않겠지.”오씨 어멈은 냉혈한 위왕의 태도에 화가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왕야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난 이제 저 사람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위왕이 말했다.*다음날 손왕비가 위왕부로 왔다. “태후께서 며칠 후에 고지를 명월암으로 보내라고 명을 내렸답니다!”손왕비의 말에 위왕비가 멍하니 그녀를 보며 “왜 명월암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라고 물었다.
위왕부에 다녀온 이후 원경릉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며칠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진북후가 드디어 경도에 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번에도 황제는 친왕과 백관들로 하여금 성문으로 진북후를 마중하라고 명령했다. 진북후의 방문으로 친왕들이 분주하자 위왕은 고지를 명월암으로 데려다줄 수 없었다. 고지가 명월암으로 가는 것이 하루 늦춰지자 위왕은 은근히 기뻤다. 원경릉도 친왕과 백관들이 성문으로 가서 진북후를 마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진북후는 마치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름을 현실세계에서 보게 되다니, 원경릉은 긴장이 된 나머지 한동안 위왕비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각 위왕부.잠에서 일찍 깬 고지는 위왕이 나간 후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고지는 속으로는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져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잠깐 정신이 든 그녀는 귓가에 들리는 소음 때문에 자신이 마차 안에 누워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기는 눈꺼풀 때문에 점점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지는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깼다.찬바람에 뼈가 시렸고 귓가에는 윙윙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고지, 정신이 드는 게냐?”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지는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살폈다. “위왕비……?”고지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떨렸다.순간 그녀는 자신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성벽에 묶여 있었고 발아래에는 군중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으며 멀리 서는 진북후를 영접하는 무리가 성안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상황을 파악한 고지는 비명을 질렀다. “고지,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왕야에게 이 소식을 전했으니 그가 금방 너를 구하러 올 것이야.”위왕비의 손에는 부
위왕비가 한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추니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고지는 담담한 위왕비의 행동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왕야 저를 빨리 구해주세요!”고지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 한 마리가 성문으로 달려들어왔다. 위왕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빠르게 고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최씨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목에 핏대가 서있었다. 고지는 위왕을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울기 시작했다. “왕야! 저를…… 구해주세요!”“고지야!” 위왕은 매달려있는 고지를 보고 고개를 휙 돌려 성난 눈으로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치마를 툭툭 내리며 천천히 일어나 날뛰는 위왕을 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만약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저 여자 몸에 바로 불을 붙일 겁니다.”“최씨, 고지를 건들기만 해 봐! 본왕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자 성벽을 이루는 돌 사이 구멍으로 바람이 나왔다.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들이 울부짖는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날 죽이든 살리든 전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위왕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씨, 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고지는 임신을 했다고!”위왕은 위왕비에게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녀의 비녀가 고지의 목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위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왕비, 저를 풀어주세요. 제가 꼴 보기 싫으시다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제가 왕야 옆에 있는 게 싫으시다면 제가 왕야도 떠나겠습니다!”고지가 소리쳤다.위왕비는 고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지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바로 대답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불을 붙여버릴 것이니까……”“예, 왕비님 물어보세요.”“위왕이 내 아이를 유산하게 했던거 혹시 너는 알고 있었느냐?”고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
“무슨 환술? 환술에 누가 능하다고?”위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환술…… 참 웃기죠? 저도 환술에 걸려봤지만, 그때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위왕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람에 일렁였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위왕이 소리를 질렀다. 위왕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고지를 바라보았다.“고지야. 혹시 나한테 환술을 쓴 적이 있느냐?”고지는 눈물을 흘리며 “왕비, 없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남의 남자를 넘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너는 멍청해서 내 남자를 넘본것이 아니다. 그리고 난 너와 위왕이 같이 살든 뭘 하든 상관없어…… 네가 멍청하다고? 너는 머리가 좋아. 처음에 내가 널 봤을 때 난 네가 그런 여우 같은 여자인 줄은 몰랐지, 내가 너에게 환술에 대해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나니?”위왕은 눈물을 흘리는 고지의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주머니에 있던 은 덩어리를 들어 위왕비에게 던졌고, 위왕비는 속수무책으로 위왕이 던진 은 덩어리에 맞아서 이마에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은덩어리가 땅에 떨어지자 밑에 있던 백성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것을 줍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위왕비의 비녀가 고지의 손등을 찔렀다. 뾰족한 것이 피부를 관통하자 피가 튀었고 고지는 비명을 지르며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까만 눈으로 고지의 눈을 응시했다.고지의 손목에서 난 피가 위왕비의 얼굴에 튀었는데도 위왕비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위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위왕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최씨, 네가 이렇게 악독한 사람인 줄 내가 꿈에도 몰랐구나! 본왕은 네가 인자하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어!”위왕의 말에 위왕비가 조소를 띄었다. “인자하고 덕이 있다고? 지난 몇 년간 전 그런 사람이었죠.”“쓸데없는 소리 말고 고지를 풀어주거라!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야!”위왕은
“최씨, 자기 손으로 닭 하나 못 잡을 것 같은 연약한 여인네들이 네 편이라 좋겠네?”위왕이 원경릉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원경릉이 빠른 걸음으로 위왕에게 다가가자 원경릉을 부축하던 만아가 “왕비,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위왕! 고지가 당신에게 환술을 썼다는 거, 위왕비가 다른 남자와 내통했다고 환술을 썼다는 거! 그걸 알고도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고지의 환술에 홀려서 자기 새끼를 죽이다니! 아비가 되어서 그게 할 짓입니까? 피해자인 척은 그만하세요!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저 벼랑 끝에 앉아있는 위왕비라고요!”“무슨 헛소리를 짓거리는 게야! 순진무구한 고지가 환술을 써서 본왕을 홀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지가 환술을 쓰지 않았다면, 위왕이 한순간에 이렇게 돌변했겠습니까? 당초 고지는 위왕비에게도 환술을 썼고, 미리 물색해 둔 남자를 그녀에게 붙였지만, 위왕비는 위왕에 대한 사랑이 강해서 그 환술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고지의 환술에 홀려 위왕비가 다른 사람과 내통했다고 믿어버렸고, 위왕비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아이를 죽이고 지금은 위왕비까지 죽이려 하잖아요!”“……”“우문위! 당신은 사람도 아닙니다!”“헛소리 그만해! 본왕은 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을 것이야!”위왕과 말이 통하지 않자 원경릉은 고개를 돌려 위왕비를 보았다. “위왕비! 거기서 내려오세요! 일단 내려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초왕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어 정말 고마워요……”원경릉은 그녀의 절망적인 미소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 여린 몸으로 얼마나 아팠을까. 혼자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이런 버러지 만도 못한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가족들과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하라고요!
백성들은 떨어지는 위왕비를 보고 재빨리 피했다.그 순간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그녀가 바닥에 닿기 전에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몸으로 위왕비를 받았다. 잠시 후 누구 몸에서 나온 피인지 모를 검붉은 선혈이 땅 위에 퍼졌다.원경릉은 바닥에 퍼진 피를 보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소매에서 태상황이 하사한 어장을 꺼내 위왕에게 달려들었다. 위왕은 어장에 맞으면서도 떨어진 위왕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원경릉은 온 힘을 다해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위왕은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왕야!” 고지가 깜짝 놀라 원경릉을 노려보았다.원경릉은 멈추지 않고 어장을 휘둘러 고지를 때렸다. 사실 원경릉은 그녀가 때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는 위왕비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살을 했다는 충격에 혼란스러워 어장을 꺼내 휘두른 것이다. 만아가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를 옮기고서야 원경릉은 바닥에 앉아 숨을 헐떡이며 터질듯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처음 겪는 일에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위왕비가 잘못한 게 뭐지?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원경릉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왕비께서 아직 숨이 붙어 있으십니다!” 아래에서 사식이의 외침이 들렸다. 원경릉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임산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뛰어가려고 했다. 만아는 놀라서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내려갔다. 원경릉은 백성들이 보지 않게 성벽을 내려가며 몰래 약상자를 꺼냈다. 약상자가 순식간에 커지는 것을 본 만아는 하마터면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위왕비의 몸은 사식이의 품에 안겨 있었고, 위왕비의 아래에 깔려있던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온몸이 피로 물든 채 위왕비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남자는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위왕비를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내려놓고 재빨리 지혈침을 놓고 흰옷을 입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