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왕비가 한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추니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고지는 담담한 위왕비의 행동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왕야 저를 빨리 구해주세요!”고지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 한 마리가 성문으로 달려들어왔다. 위왕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빠르게 고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최씨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목에 핏대가 서있었다. 고지는 위왕을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울기 시작했다. “왕야! 저를…… 구해주세요!”“고지야!” 위왕은 매달려있는 고지를 보고 고개를 휙 돌려 성난 눈으로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치마를 툭툭 내리며 천천히 일어나 날뛰는 위왕을 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만약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저 여자 몸에 바로 불을 붙일 겁니다.”“최씨, 고지를 건들기만 해 봐! 본왕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자 성벽을 이루는 돌 사이 구멍으로 바람이 나왔다.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들이 울부짖는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날 죽이든 살리든 전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위왕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씨, 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고지는 임신을 했다고!”위왕은 위왕비에게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녀의 비녀가 고지의 목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위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왕비, 저를 풀어주세요. 제가 꼴 보기 싫으시다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제가 왕야 옆에 있는 게 싫으시다면 제가 왕야도 떠나겠습니다!”고지가 소리쳤다.위왕비는 고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지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바로 대답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불을 붙여버릴 것이니까……”“예, 왕비님 물어보세요.”“위왕이 내 아이를 유산하게 했던거 혹시 너는 알고 있었느냐?”고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
“무슨 환술? 환술에 누가 능하다고?”위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환술…… 참 웃기죠? 저도 환술에 걸려봤지만, 그때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위왕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람에 일렁였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위왕이 소리를 질렀다. 위왕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고지를 바라보았다.“고지야. 혹시 나한테 환술을 쓴 적이 있느냐?”고지는 눈물을 흘리며 “왕비, 없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남의 남자를 넘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너는 멍청해서 내 남자를 넘본것이 아니다. 그리고 난 너와 위왕이 같이 살든 뭘 하든 상관없어…… 네가 멍청하다고? 너는 머리가 좋아. 처음에 내가 널 봤을 때 난 네가 그런 여우 같은 여자인 줄은 몰랐지, 내가 너에게 환술에 대해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나니?”위왕은 눈물을 흘리는 고지의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주머니에 있던 은 덩어리를 들어 위왕비에게 던졌고, 위왕비는 속수무책으로 위왕이 던진 은 덩어리에 맞아서 이마에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은덩어리가 땅에 떨어지자 밑에 있던 백성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것을 줍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위왕비의 비녀가 고지의 손등을 찔렀다. 뾰족한 것이 피부를 관통하자 피가 튀었고 고지는 비명을 지르며 위왕비를 노려보았다. 위왕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까만 눈으로 고지의 눈을 응시했다.고지의 손목에서 난 피가 위왕비의 얼굴에 튀었는데도 위왕비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위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위왕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최씨, 네가 이렇게 악독한 사람인 줄 내가 꿈에도 몰랐구나! 본왕은 네가 인자하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어!”위왕의 말에 위왕비가 조소를 띄었다. “인자하고 덕이 있다고? 지난 몇 년간 전 그런 사람이었죠.”“쓸데없는 소리 말고 고지를 풀어주거라!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야!”위왕은
“최씨, 자기 손으로 닭 하나 못 잡을 것 같은 연약한 여인네들이 네 편이라 좋겠네?”위왕이 원경릉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원경릉이 빠른 걸음으로 위왕에게 다가가자 원경릉을 부축하던 만아가 “왕비,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위왕! 고지가 당신에게 환술을 썼다는 거, 위왕비가 다른 남자와 내통했다고 환술을 썼다는 거! 그걸 알고도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고지의 환술에 홀려서 자기 새끼를 죽이다니! 아비가 되어서 그게 할 짓입니까? 피해자인 척은 그만하세요!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저 벼랑 끝에 앉아있는 위왕비라고요!”“무슨 헛소리를 짓거리는 게야! 순진무구한 고지가 환술을 써서 본왕을 홀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지가 환술을 쓰지 않았다면, 위왕이 한순간에 이렇게 돌변했겠습니까? 당초 고지는 위왕비에게도 환술을 썼고, 미리 물색해 둔 남자를 그녀에게 붙였지만, 위왕비는 위왕에 대한 사랑이 강해서 그 환술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고지의 환술에 홀려 위왕비가 다른 사람과 내통했다고 믿어버렸고, 위왕비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아이를 죽이고 지금은 위왕비까지 죽이려 하잖아요!”“……”“우문위! 당신은 사람도 아닙니다!”“헛소리 그만해! 본왕은 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을 것이야!”위왕과 말이 통하지 않자 원경릉은 고개를 돌려 위왕비를 보았다. “위왕비! 거기서 내려오세요! 일단 내려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초왕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어 정말 고마워요……”원경릉은 그녀의 절망적인 미소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 여린 몸으로 얼마나 아팠을까. 혼자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이런 버러지 만도 못한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가족들과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하라고요!
백성들은 떨어지는 위왕비를 보고 재빨리 피했다.그 순간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그녀가 바닥에 닿기 전에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몸으로 위왕비를 받았다. 잠시 후 누구 몸에서 나온 피인지 모를 검붉은 선혈이 땅 위에 퍼졌다.원경릉은 바닥에 퍼진 피를 보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소매에서 태상황이 하사한 어장을 꺼내 위왕에게 달려들었다. 위왕은 어장에 맞으면서도 떨어진 위왕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원경릉은 온 힘을 다해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위왕은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왕야!” 고지가 깜짝 놀라 원경릉을 노려보았다.원경릉은 멈추지 않고 어장을 휘둘러 고지를 때렸다. 사실 원경릉은 그녀가 때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는 위왕비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살을 했다는 충격에 혼란스러워 어장을 꺼내 휘두른 것이다. 만아가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를 옮기고서야 원경릉은 바닥에 앉아 숨을 헐떡이며 터질듯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처음 겪는 일에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위왕비가 잘못한 게 뭐지?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원경릉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왕비께서 아직 숨이 붙어 있으십니다!” 아래에서 사식이의 외침이 들렸다. 원경릉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임산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뛰어가려고 했다. 만아는 놀라서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내려갔다. 원경릉은 백성들이 보지 않게 성벽을 내려가며 몰래 약상자를 꺼냈다. 약상자가 순식간에 커지는 것을 본 만아는 하마터면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위왕비의 몸은 사식이의 품에 안겨 있었고, 위왕비의 아래에 깔려있던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온몸이 피로 물든 채 위왕비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남자는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위왕비를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내려놓고 재빨리 지혈침을 놓고 흰옷을 입
“우문위, 너는 이 여인과 혼인을 했으면 끝까지 소중하게 여겼어야지! 이 여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를 선택했다고! 네가 감히 이 여인을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려?”“안청양(安青陽)!”위왕이 청양군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두 사람은 엎치락 뒤치락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싸웠다.흰 옷을 입은 남자가 위왕의 방해를 막자 원경릉은 사내들과 함께 들것으로 위왕비를 데리고 정후부로 갔다. 위왕비는 원경릉이 초기 대처를 잘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청양군의 도움으로 원경릉은 안전하게 위왕비를 옮기고 원경릉은 위왕비의 옷을 벗기고 자세하게 진찰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원경릉이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위왕비는 정신을 잃었고 그 옆에 원경릉은 지쳐서 손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손왕비가 위왕비와 원경릉을 보러 문안을 왔다가 조용히 위왕비를 상황을 살피고 원경릉에게 몇 마디를 했다. “위왕비가 살아있어 천만다행입니다.”손왕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위왕비는 살고 싶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위왕비가 연약하다고 생각할 텐데, 저는 그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녀는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압니다. 위왕비가 고생했을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손왕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원경릉은 만약 우문호가 위왕처럼 원경릉을 오해하고 다른 여자에게 미혹되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자신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씨네 집안사람들도 정후부로 찾아왔다. 집안 어른과 최대인도 들어와 원경릉에게 무릎을 꿇고 위왕비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원경릉은 키가 190cm정도 되는 중년 남자가 슬픈 얼굴로 원경릉에게 절을 하자 그녀는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위왕의 죄가 크다……’최대인께서 무릎을 꿇자 최씨 집안사람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고,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까지도 원경릉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최씨 집안 사람들 틈으로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 나왔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모셔오거라!”원경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잠시 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들어왔다. 원경릉은 들어오는 그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풍채도 좋고 외모도 위왕보다 뛰어난 청양군을 놓치다니…… 위왕비도 참……’그의 눈동자가 깊고 풍겨오는 아우라가 어마어마한 남자였다. 원경릉은 청양군의 평판이 좋다는 서일의 말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초왕비를 뵙습니다!” 청양군이 말했다.“들어오세요. 청양군.” 원경릉이 고개를 숙이고 그를 맞이했다.청양군은 손을 저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입궁도 해야 해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전 그저 위왕비의 상태를 묻고자 한 겁니다. 위왕비는 괜찮으십니까?”“위왕비께서는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어쩌면 금방 좋아질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들어가서 보시겠습니까?”청양군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괜찮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저렇게 생각이 깊은 남자를 놓치다니…… 복을 제대로 걷어찼구나.’사식이가 원경릉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위왕비께서 청양군과 혼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원경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세상에 여자는 시집가면 끝이구나. 이 시대에 좋은 신랑감을 만나서 혼인을 하는 게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딱 맞아.”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위왕비가 성벽에 앉아 있을 때, 위왕은 왜 그녀를 자극했을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비록 오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위왕비는 위왕이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이잖아요.”라고 말했다.“왕비, 고지의 환술법은 팔찌 방울이 아니라 눈에 있었습니다. 위왕비가 뛰어내리기 전에 고지가 눈으로 환술을 쓴 것이지요.”만아가 말했다.“눈? 어떻게 눈으로 환술을 쓴 거지?”원경릉은 의아한 표정으로 만아를 보았다.만아는 환술이 자신이 알고있던 신장 최면술과 같다고 여겼으나 지금 보니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어난 고지만아가 고개를 흔들며, “몰라요.”사식이가 원경릉에게, “원언니 생각은요?” 원경릉이 추측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만 알겠지.”사식이가 한숨을 쉬고 매정하게: “위왕비가 고지에게 독을 써서 조지가 죽은 건 조금도 안타깝지 않네요 뭐, 고지가 와서 심지어 환술로 위왕비를 해치려 했잖아요.”위왕부.고지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의원이 와서 무슨 독인지 몰라 해독할 수 없고 침을 놔서 독이 퍼지는 걸 늦추고 있다고 했다.위왕도 의원이 지혈과 상처 치료를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있다.지금 성루 위에서의 그 순간을 회상해보니 성루에서 떨어져 내릴 때 위왕의 심장이 하마터면 순간 멈춰버릴 것 같았다.위왕이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떠올려봤지만 모르겠다.원경릉의 말이 위왕의 귀에 맴돌며 머릿속엔 온통 환술이란 두 글자가 가득하다.최씨의 몸종 야야(雅雅)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꿇어 앉았는데 손에 약병이 들려 있다. 야야는 울었는지 눈이 심하게 부었다.야야가: “왕비마마께서 만약 그녀가 살아나거든 이 해독약을 왕야께 드리라고 했습니다.”“무슨 뜻이지?” 위왕이 차갑게 야야를 바라봤다.야야가 말했다. “왕비마마의 심리상태가 줄곧 안 좋으셔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살기위해 노력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결국 죽을 경우, 고지는 왕비마마께서 구해주신 목숨이니 그 목숨은 돌려받아 가져 가는 걸로. 만약 살아 나실 경우, 모든 건 다 지난 일로 하시겠다고.”야야가 엎드려 절하고 약을 바닥에 놓고: “쇤네 왕야께 작별인사 올립니다. 돌아가서 아가씨를 위해 물건을 정리해야 해서요.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어떻게 되든 다시는 여기 돌아오시지 않겠다고요.”“그래서 처음부터 죽으려는 생각이 없었던 거였군.” 위왕이 쓴 웃음을 지으며, “연극을 했을 뿐이야.”야야가 답답하다는 듯이, “하지만 뛰어내리셨어요,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했죠. 왕야의 마지막 말씀
손왕의 질책과 고지의 유혹고지의 눈알이 산채로 굴러 떨어졌다.고지는 고통으로 침대를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위왕은 천천히 물러나 손에 피를 닦았다.하인이 달려 와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보고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위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지 아가씨가 실수로 눈을 다쳤으니 지혈해 주고 의원을 불러 주어라.”말을 마치고 위왕이 천천히 걸어 나가는데 귓가에 고지의 처참한 통곡소리가 들렸다. 위왕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쓴 웃음을 짓는데 눈이 얼음처럼 차갑다.위왕은 위왕부 본관에 앉아 최씨 집안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하지만 날이 저물도록 기다려도 최씨 집안 사람이 오지 않고,손왕만 왔다.손왕이 궁에서 나오자마자 손왕부로 돌아가는 길에 이 일을 듣고 바로 말을 달려 위왕부로 온 것이다.문으로 들어와 뚱뚱한 주먹을 위왕 얼굴에 날리고, 연속으로 몇 대를 때리는데 위왕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고 손왕 자신이 먼저 지쳐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혀를 빼물고 헥헥 숨을 몰아 쉬는 손왕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한다고, “이 놈의 새끼야!” 욕은 잊지 않았다.위왕이 피를 닦고 떨떠름하게 묻길: “아직 살아있어요?”“당연히 살아 있지, 너는 설마 그녀가 죽었는 줄 알았어?” 손왕이 화를 냈다.위왕의 얼굴이 잿빛으로 썩어 들어 갔다.손왕이 일어나서 위왕의 멱살을 움켜쥐고 손바닥으로 당수를 내리치며, “어쩌자고 이런 병신 같은 짓을 저질렀어? 너 귀신 들렸냐?”위왕이 고집스럽게: “난 틀리지 않았어, 그녀가 먼저 나한테 잘못 했어.”“아직도 고집을 부려?” 손왕이 반대쪽 손으로 한 대 더 때리고, “고집 부려서 쓸데가 있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난 틀리지 않았어!” 위왕이 고개를 들자 편집증에 사로잡힌 미치광이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 “난 틀리지 않았어.”손왕이 위왕의 이 모습을 보고 그를 놓아주며 고개를 젓더니: “네가 틀리지 않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셋째야, 잘못을 인정해. 그녀는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들을 자격이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