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가서 다섯째 형님을 모시고 와라.”제왕이 원용의에게 말했다.“왜요?” 원용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주명취가 짠 판에 끌려다니는 것 보다는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그녀의 다음 수를 읽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원용의는 제왕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주명취가 짠 판에서 그녀의 놀음에 놀아나는 척하다가 그녀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치겠다는 겁니까?”“너는 머리가 좋구나.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여자의 다음 행보가 뭔지 궁금한 건 맞다. 내가 다섯째 형님과 사이가 틀어지면 그녀는 자신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이 일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아. 만약 그 여자를 내쫓지 않고 제왕부에 두면 분명 사달이 날 것이야.”“혹시 주명취를 볼때마다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건 아니고요?” 원용의는 제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원용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제가 초왕비에게 이 얘기를 전하고 초왕을 모시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아니. 초왕비가 아닌 다섯째 형님에게 직접 말씀을 드리거라.”“직접이요……?” 제왕의 말을 듣고 원용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넌 다섯째 형님이 그렇게 무서우냐?” “누가 무섭다고 그럽니까? 이런 일은 여자들끼리 얘기하는 게 편합니다.”말을 마치고 원용의가 밖으로 나갔다. *원경릉은 마음을 졸이며 초왕부에서 원용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왕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지만, 주명취가 벌인 일은 예측이 안되기에 또 다른 반전이 있을까 두려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우문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이 한순간에 원수가 될까 두려웠다. 그도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마음속이 초조했다. 때마침 원용의가 초왕부로 왔고 제왕의 뜻을 초왕부에 전했다. 원경릉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세 번이나 되물었다.“부황께서 이번에 정말 현명하십니다. 형제들이 입궁해 환난을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제왕의 마음이 지금 같지 않았을 거야.
원용의는 주명취가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걱정이 됐다.‘불안해…… 그 여자 속은 정말 알 수가 없어……’원용의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지며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주명취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음 날, 그녀는 초왕부에 가서 사식이를 불렀다. “왕비의 곁에 찰싹 붙어서 엄호하거라. 절대 방심하면 안 돼.”“왜요? 주명취가 초왕비를 죽이려고 합니까? 염치없어. 퉤퉤!”“주명취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큰 재앙이 올 것 같다…… 아무튼 내 말 명심하고 꼭 왕비 옆에서 왕비를 잘 지켜야 해.”“왕비님께 귀띔이라도 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원용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왕비 말고 왕야께 말씀드리거라. 이 얘기를 듣고 왕비께서 놀라실까 두렵구나.”“그렇죠. 왕비께서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시니까요. 왕비께서도 요즘 기분이 오락가락하십니다.”그 말을 듣고 원용의는 마음이 아팠다. “최근 제왕부의 일 때문에 초왕부에 불똥이 튀어서 그래.”“이 일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겨워 죽겠어요!” 사식이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사식이는 예전부터 주씨 집안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희상궁을 살뜰하게 보살피던 주수보를 보고 주씨 집안사람에 대한 인상이 바뀌려고 하던 찰나 주명취 때문에 또 주씨 집안이 싫어졌다.원용의는 제왕부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사식이를 한 번 보았다.“왕비에게서 눈을 떼면 안 돼. 난 이만 갈게.”말을 마친 원용의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사식이는 원용의가 우문호를 찾아가는 줄 알고 안심했다. 원용의가 그녀에게 초왕비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했지만, 사식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요즘 초왕비가 문밖을 나서는 일도 없었고, 외출을 한다고 해도 귀영위가 그녀를 엄호하고 있어서 왕비에게 접근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주수보의 뜻은 주명양이 기왕부로 시집을 간 후, 제왕비를 이혼시키겠다는 것이다. 만약 주씨 집안의 큰 딸인 주명취가 쫓
원경릉은 주명취의 옆을 지나가며 그녀의 표정을 한 번 보았다. 주명취는 천사 같은 얼굴로 원경릉을 보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얼굴이 섬뜩하고 차가웠다. 우문호는 주명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경릉의 손을 이끌어 손왕을 보러 갔다. 손왕은 푸른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금으로 된 허리띠가 둥근 배를 졸라매는 듯해보였다. 정좌로 앉아 손왕비의 말을 경청하는 손왕의 눈이 반짝였다.손왕비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반면에 손왕에게는 가련하고 무고한 뚱보의 느낌이 풍겼다.손왕은 우문호와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가리켰다.“이제 그만 말해! 손님이 들어오잖아!”손왕비는 몸을 돌려 초왕 내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걸어와 원경릉의 손을 당겼다.“왜 이제야 오십니까! 일찍 올 줄 알았는데!”손왕비는 원경릉을 한쪽으로 끌고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제왕비는 왜 저러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저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경릉이 웃으며 답했다.“난 제왕비가 올 줄도 모르고 공주부에 제왕부는 원후궁만 올 거라고 말해놨는데…… 그래서 제왕부 자리는 하나밖에 없단 말입니다!”“사람을 시켜서 자리를 하나 더 배치하라고 하시면 되잖아요?”원경릉이 물었다. “지금 원후궁도 왔단 말입니다! 그 둘을 나란히 앉힙니까?”원경릉은 원용의와 주명취가 나란히 앉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됐습니다. 둘째 아주버님 생신이신데, 그 둘이 싸우기라고 하겠습니까?” 원경릉이 손왕비를 다독였다.손왕비는 눈을 부라리며 “손왕 생일이라고 제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 잔치를 망치는 사람은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설마…… 자기 잔치도 아닌데 소란을 피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일단 저는 손왕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원경릉이 다시 손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같이 갑시다. 좋은 생각만 하자고요. 초왕비 말대로 별일 있겠습니까? 잊어버립시다.”원경릉은 손왕
“괜찮아, 사식이랑 같이 가면 돼. 둘째 아주버님과 하던 얘기마저 나눠.”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말했다.손왕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채 “됐습니다. 본왕도 조용히 있고 싶네요.”라고 말하며 소매 속에 감춰 둔 제비집으로 만든 간식을 만지작거렸다. 우문호는 원경릉의 뒤에 바짝 붙어 그녀를 엄호했다. 두 사람이 문 앞에 가까워지자 그곳에 공주들과 주명취가 둘의 앞을 막고는 인사를 했다. 원경릉은 그제야 주명취의 행색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그녀는 장미꽃무늬가 수놓인 저고리와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곱게 땋은 머리에 고급스러운 비녀가 황실의 여인의 품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반면에 원경릉은 헐렁한 주름치마에 솜이불처럼 두껍고 무거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망토가 따듯하긴 하지만 투박해 보였으며 크기가 엄청 커서 마음만 먹으면 우문호 같은 장정도 망토 안에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문경 공주와 진평공주 그리고 낙평공주는 모두 부마를 데리고 왔다. 우문령은 낙평 공주의 뒤에 숨어 머리를 내밀고 주명취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훑어보며 빠른 걸음으로 우문호와 원경릉에게 다가왔다“다섯째 오라버니, 왕비!”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손 난로를 옆에 있던 궁녀에게 쥐어주며 “모비께서 춥다고 들고 가래서 가져왔더니 더워 죽겠어!”라고 말했다.그녀는 원경릉의 손을 잡고 기쁜 표정으로 방방 뛰었다.“초왕비! 드디어 뵙게 되었네요!”애교가 철철 흐르는 우문령의 얼굴을 보고 원경릉도 웃으며 “제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초왕부에 오세요.”라고 말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모비께서 못 가게 합니다! 근데 왕비께서는 왜 나오셨습니까? 용의를 찾으러 나왔습니까?”우문호는 옆에서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우문령과 원경릉을 번갈아 보았다.“내 시선이 닿는 곳에만 있거라.”“왜요? 다른 사람이 초왕비를 데리고 갈까 봐 걱정됩니까?” 우문령이 물었다. “그래! 네가 조잘거리는 입으로 내 부인을 홀려서 어디로 데리고 갈까 겁이 난다! 원용의를 찾으려면 혼자 찾거라.” 우문호가
우문호는 원용의가 한 말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그녀를 불러다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우문령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이 그쪽으로 쏠렸다.“세상에! 셋째 오라버니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어!”그 말을 듣고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청색 비단옷에 검은 장화를 신은 위왕은 늠름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화려한 색상의 저고리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망토를 두른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머리에 나비 무늬의 장신구를 달았으며, 귀에는 금붙이들이, 목에는 비취가 번쩍거렸다. 꾸민 것과는 반대로 용모는 평범했다. 네모난 얼굴형에 눈썹은 매우 짧았고 코도 납작하고 입술도 얇았다. 얼굴에서 가장 볼 만한 구석은 커다란 눈 정도였다. 큰 눈은 눈물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고 어딘가 몽롱하고 처량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위왕이 아직 명분도 정해지지 않은 여자를 손왕부에 데리고 오자 손왕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위왕 내외의 일은 이미 황족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그 누구도 오늘처럼 형식적인 자리에 위왕이 정비가 아닌 다른 여인을 데리고 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후궁으로 들이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러 온 건가…?’위왕은 주위 사람들이 곁눈질로 여인을 훑어보는 것을 보고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황족들은 수군거릴 뿐 아무도 위왕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우문호와 원경릉은 싸늘한 분위기에 위왕이 민망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형님!” 위왕은 살짝 턱을 들고 “자네들도 왔습니까.”라고 말했다.그는 옆에 있던 여자에게 “인사해. 여기는 다섯째 그 옆에는 다섯째의 부인이네.”라고 소개했다..위왕의 말을 듣고 우문호와 원경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후궁으로 점찍어둔 사람이라고 해도 초왕과 초왕비라고 소개하지 않고, 다섯째와 다섯째 부인이라고 하다니? 더구나 지금은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인데……’우문
손왕비는 뒤를 돌아보며 “초왕비, 셋째를 좀 말려 보세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위왕하고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나보고 말리라고?’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맑은 눈동자를 드리우며 위왕을 보았다.“제가 돌아가서 왕비를 불러올 테니, 왕야께서는 화내지 마십시오.”위왕은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강렬한 눈빛으로 손왕을 노려보았다.“본왕이 이 여인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사람이 본왕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정비는 아니지만 장차 후궁이 될 사람이니 이 여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저와도 연을 끊을 준비 하세요.”위왕의 모비는 첫 번째 현비였으며 위왕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왕의 친 모비가 죽자 위왕은 손왕의 모비인 정비(靜妃)에게 맡겨졌다. 그때부터 손왕과 위왕은 친형제처럼 돈독한 우애를 나누며 컸다.“너……”손왕이 화가 나서 볼살이 덜덜 떨며“모비께서 성질나 죽는 꼴 보고 싶어?”라고 물었다.“모비께는 본왕이 설명드리지요.” 위왕은 입을 삐죽거리며 “모비께서는 오히려 손자를 안아볼 생각에 좋아하실걸요? 매번 현모비를 부러워하셨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손왕과 위왕 사이에 서있는 원경릉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원경릉은 그녀를 위왕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어색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조용히 위왕 옆에 서있었다.손왕비는 위왕을 위로하며 “오늘 둘째 형님 생신이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여인을 데리고 가세요. 본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비인 위왕비를 폐비시킨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그 말은 사실입니다.” 위왕이 말했다.원경릉은 뻔뻔한 위왕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셋째 아주버님, 부부관계는 칼로 물 베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위왕비 체면도 있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원경릉은 접객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우문호의 귀를 잡아당겼다.“그럼 당시에 어땠는지 그때의 일들을 말해줘.”“둘만의 사정이 있겠지. 이리 와봐. 어이고 녹주 이 멍청한 계집.”우문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묻은 연지를 닦았다.“이거 내가 혼자 화장한 거야.” 원경릉은 다른 여인들을 보고 오늘따라 배가 잔뜩 나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문호는 책상다리를 하고 옆에 놓인 견과류를 집어 호두 알만 꺼내 원경릉에게 주었다.“당시에는 셋째 형님이 셋째 형수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 형수 집안이 굉장한 명문가잖아. 그때 형님이 형수와 혼인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 원래 셋째 형수의 약혼자가 안군왕부(安郡王府) 사람이었거든? 이미 약혼을 했는데 그걸 어떻게 무를 수 있겠어. 그때 셋째 형님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무술도 연마했어 나는 그때처럼 셋째 형님이 열심히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안군왕세자도 형수랑 혼인하겠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양가에서도 반대했기에 결론은 잘 안 됐어.”“그럼 그 후에 어떻게 혼인을 하게 된 거야?”우문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때부터 셋째 형님이 5일 동안 단식을 했어. 하지만 부황이 얼마나 단호한 분인지 알지? 그것도 먹히지 않았지. 그때 셋째 형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어떻게 했는데?”“형님이 최씨 집안에 가서 셋째 형수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원경릉은 이 시대의 여인이 저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위왕비가 사랑의 도피를 동의했다고?”“거기까지는 몰라. 아무튼 나중에 귀영위에게 잡혀와서 형님이 곤장 서른 대를 맞았지.”“그럼 안군왕세자는 동의했어?”“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셋째 형님이랑 형수가 보름 동안 숨어 지냈는데, 여자가 남자랑 보름을 밖에서 같이 지내다가 들어왔으니, 다들 몸이 더럽혀졌다며 셋째 형님에게 보내라고 해버린 거지.”“그럼 그게 언제야?”“4~5년쯤?”“그것밖에 안 된 거야? 서로 없으면 죽을 것
우문호는 뛰쳐나가 손왕을 찾았다.손왕은 제왕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보고 자신의 생일잔치라는 것도 망각하고 왕부에 있던 남자들을 모두 한 자리로 모아서 제왕부로 향했다.제왕부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원용의는 다급히 제왕부로 향했다.손왕부도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친왕, 부마, 관원, 남성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싹 들고 갔다. 남은 시녀들은 손왕부가 비자 불안하여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자리를 지켜야 하나 고민했다.손왕비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접객실에 사람을 모아 앉혔다.주명취는 향로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여기 있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거겠죠.”라고 말했다.손왕비는 어차피 이혼할 사람이니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인데 어쩜 저렇게 무정할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사람들은 안채에 앉히고 차와 간식을 대접했다. 위왕이 간 후에도 그가 데리고 온 여인은 손왕부에 남아있었지만 들어와 앉지 않고 밖에 서있었다.주명취는 원경릉 옆에 천천히 앉아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보았다.“너 지금 무섭지?”“뭐가 무서워?”주명취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불! 불은 싹 다 태워버리잖아. 검은 재만 남기고 싹.” 원경릉은 그녀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우문령은 주명취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왜 초왕비를 괴롭혀요? 그 입 다무세요.”“하하하하! 초왕비? 그거 알아? 원래는 내가 초.왕.비였어야 해!”경박스러운 주명취를 보고 문경공주는 크게 화를 냈다.“주명취. 말조심하세요. 비록 당신이 곧 황실을 떠날 테지만 주씨 집안에서도 당신이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주명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공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고귀하신 공주님들. 호호호”손왕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초왕비.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으세요.”원경릉도 주명취가 옆에 앉아 있는 게 불안했다. ‘혹시 알아? 저러다가 눈 돌아서 비녀로 날 찌를지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