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주명취의 옆을 지나가며 그녀의 표정을 한 번 보았다. 주명취는 천사 같은 얼굴로 원경릉을 보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얼굴이 섬뜩하고 차가웠다. 우문호는 주명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경릉의 손을 이끌어 손왕을 보러 갔다. 손왕은 푸른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금으로 된 허리띠가 둥근 배를 졸라매는 듯해보였다. 정좌로 앉아 손왕비의 말을 경청하는 손왕의 눈이 반짝였다.손왕비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반면에 손왕에게는 가련하고 무고한 뚱보의 느낌이 풍겼다.손왕은 우문호와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가리켰다.“이제 그만 말해! 손님이 들어오잖아!”손왕비는 몸을 돌려 초왕 내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걸어와 원경릉의 손을 당겼다.“왜 이제야 오십니까! 일찍 올 줄 알았는데!”손왕비는 원경릉을 한쪽으로 끌고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제왕비는 왜 저러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저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경릉이 웃으며 답했다.“난 제왕비가 올 줄도 모르고 공주부에 제왕부는 원후궁만 올 거라고 말해놨는데…… 그래서 제왕부 자리는 하나밖에 없단 말입니다!”“사람을 시켜서 자리를 하나 더 배치하라고 하시면 되잖아요?”원경릉이 물었다. “지금 원후궁도 왔단 말입니다! 그 둘을 나란히 앉힙니까?”원경릉은 원용의와 주명취가 나란히 앉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됐습니다. 둘째 아주버님 생신이신데, 그 둘이 싸우기라고 하겠습니까?” 원경릉이 손왕비를 다독였다.손왕비는 눈을 부라리며 “손왕 생일이라고 제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 잔치를 망치는 사람은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설마…… 자기 잔치도 아닌데 소란을 피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일단 저는 손왕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원경릉이 다시 손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같이 갑시다. 좋은 생각만 하자고요. 초왕비 말대로 별일 있겠습니까? 잊어버립시다.”원경릉은 손왕
“괜찮아, 사식이랑 같이 가면 돼. 둘째 아주버님과 하던 얘기마저 나눠.”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말했다.손왕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채 “됐습니다. 본왕도 조용히 있고 싶네요.”라고 말하며 소매 속에 감춰 둔 제비집으로 만든 간식을 만지작거렸다. 우문호는 원경릉의 뒤에 바짝 붙어 그녀를 엄호했다. 두 사람이 문 앞에 가까워지자 그곳에 공주들과 주명취가 둘의 앞을 막고는 인사를 했다. 원경릉은 그제야 주명취의 행색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그녀는 장미꽃무늬가 수놓인 저고리와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곱게 땋은 머리에 고급스러운 비녀가 황실의 여인의 품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반면에 원경릉은 헐렁한 주름치마에 솜이불처럼 두껍고 무거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망토가 따듯하긴 하지만 투박해 보였으며 크기가 엄청 커서 마음만 먹으면 우문호 같은 장정도 망토 안에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문경 공주와 진평공주 그리고 낙평공주는 모두 부마를 데리고 왔다. 우문령은 낙평 공주의 뒤에 숨어 머리를 내밀고 주명취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훑어보며 빠른 걸음으로 우문호와 원경릉에게 다가왔다“다섯째 오라버니, 왕비!”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손 난로를 옆에 있던 궁녀에게 쥐어주며 “모비께서 춥다고 들고 가래서 가져왔더니 더워 죽겠어!”라고 말했다.그녀는 원경릉의 손을 잡고 기쁜 표정으로 방방 뛰었다.“초왕비! 드디어 뵙게 되었네요!”애교가 철철 흐르는 우문령의 얼굴을 보고 원경릉도 웃으며 “제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초왕부에 오세요.”라고 말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모비께서 못 가게 합니다! 근데 왕비께서는 왜 나오셨습니까? 용의를 찾으러 나왔습니까?”우문호는 옆에서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우문령과 원경릉을 번갈아 보았다.“내 시선이 닿는 곳에만 있거라.”“왜요? 다른 사람이 초왕비를 데리고 갈까 봐 걱정됩니까?” 우문령이 물었다. “그래! 네가 조잘거리는 입으로 내 부인을 홀려서 어디로 데리고 갈까 겁이 난다! 원용의를 찾으려면 혼자 찾거라.” 우문호가
우문호는 원용의가 한 말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그녀를 불러다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우문령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이 그쪽으로 쏠렸다.“세상에! 셋째 오라버니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어!”그 말을 듣고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청색 비단옷에 검은 장화를 신은 위왕은 늠름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화려한 색상의 저고리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망토를 두른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머리에 나비 무늬의 장신구를 달았으며, 귀에는 금붙이들이, 목에는 비취가 번쩍거렸다. 꾸민 것과는 반대로 용모는 평범했다. 네모난 얼굴형에 눈썹은 매우 짧았고 코도 납작하고 입술도 얇았다. 얼굴에서 가장 볼 만한 구석은 커다란 눈 정도였다. 큰 눈은 눈물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고 어딘가 몽롱하고 처량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위왕이 아직 명분도 정해지지 않은 여자를 손왕부에 데리고 오자 손왕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위왕 내외의 일은 이미 황족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그 누구도 오늘처럼 형식적인 자리에 위왕이 정비가 아닌 다른 여인을 데리고 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후궁으로 들이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러 온 건가…?’위왕은 주위 사람들이 곁눈질로 여인을 훑어보는 것을 보고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황족들은 수군거릴 뿐 아무도 위왕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우문호와 원경릉은 싸늘한 분위기에 위왕이 민망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형님!” 위왕은 살짝 턱을 들고 “자네들도 왔습니까.”라고 말했다.그는 옆에 있던 여자에게 “인사해. 여기는 다섯째 그 옆에는 다섯째의 부인이네.”라고 소개했다..위왕의 말을 듣고 우문호와 원경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후궁으로 점찍어둔 사람이라고 해도 초왕과 초왕비라고 소개하지 않고, 다섯째와 다섯째 부인이라고 하다니? 더구나 지금은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인데……’우문
손왕비는 뒤를 돌아보며 “초왕비, 셋째를 좀 말려 보세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위왕하고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나보고 말리라고?’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맑은 눈동자를 드리우며 위왕을 보았다.“제가 돌아가서 왕비를 불러올 테니, 왕야께서는 화내지 마십시오.”위왕은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강렬한 눈빛으로 손왕을 노려보았다.“본왕이 이 여인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사람이 본왕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정비는 아니지만 장차 후궁이 될 사람이니 이 여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저와도 연을 끊을 준비 하세요.”위왕의 모비는 첫 번째 현비였으며 위왕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왕의 친 모비가 죽자 위왕은 손왕의 모비인 정비(靜妃)에게 맡겨졌다. 그때부터 손왕과 위왕은 친형제처럼 돈독한 우애를 나누며 컸다.“너……”손왕이 화가 나서 볼살이 덜덜 떨며“모비께서 성질나 죽는 꼴 보고 싶어?”라고 물었다.“모비께는 본왕이 설명드리지요.” 위왕은 입을 삐죽거리며 “모비께서는 오히려 손자를 안아볼 생각에 좋아하실걸요? 매번 현모비를 부러워하셨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손왕과 위왕 사이에 서있는 원경릉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원경릉은 그녀를 위왕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어색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조용히 위왕 옆에 서있었다.손왕비는 위왕을 위로하며 “오늘 둘째 형님 생신이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여인을 데리고 가세요. 본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비인 위왕비를 폐비시킨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그 말은 사실입니다.” 위왕이 말했다.원경릉은 뻔뻔한 위왕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셋째 아주버님, 부부관계는 칼로 물 베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위왕비 체면도 있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원경릉은 접객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우문호의 귀를 잡아당겼다.“그럼 당시에 어땠는지 그때의 일들을 말해줘.”“둘만의 사정이 있겠지. 이리 와봐. 어이고 녹주 이 멍청한 계집.”우문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묻은 연지를 닦았다.“이거 내가 혼자 화장한 거야.” 원경릉은 다른 여인들을 보고 오늘따라 배가 잔뜩 나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문호는 책상다리를 하고 옆에 놓인 견과류를 집어 호두 알만 꺼내 원경릉에게 주었다.“당시에는 셋째 형님이 셋째 형수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 형수 집안이 굉장한 명문가잖아. 그때 형님이 형수와 혼인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 원래 셋째 형수의 약혼자가 안군왕부(安郡王府) 사람이었거든? 이미 약혼을 했는데 그걸 어떻게 무를 수 있겠어. 그때 셋째 형님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무술도 연마했어 나는 그때처럼 셋째 형님이 열심히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안군왕세자도 형수랑 혼인하겠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양가에서도 반대했기에 결론은 잘 안 됐어.”“그럼 그 후에 어떻게 혼인을 하게 된 거야?”우문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때부터 셋째 형님이 5일 동안 단식을 했어. 하지만 부황이 얼마나 단호한 분인지 알지? 그것도 먹히지 않았지. 그때 셋째 형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어떻게 했는데?”“형님이 최씨 집안에 가서 셋째 형수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원경릉은 이 시대의 여인이 저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위왕비가 사랑의 도피를 동의했다고?”“거기까지는 몰라. 아무튼 나중에 귀영위에게 잡혀와서 형님이 곤장 서른 대를 맞았지.”“그럼 안군왕세자는 동의했어?”“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셋째 형님이랑 형수가 보름 동안 숨어 지냈는데, 여자가 남자랑 보름을 밖에서 같이 지내다가 들어왔으니, 다들 몸이 더럽혀졌다며 셋째 형님에게 보내라고 해버린 거지.”“그럼 그게 언제야?”“4~5년쯤?”“그것밖에 안 된 거야? 서로 없으면 죽을 것
우문호는 뛰쳐나가 손왕을 찾았다.손왕은 제왕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보고 자신의 생일잔치라는 것도 망각하고 왕부에 있던 남자들을 모두 한 자리로 모아서 제왕부로 향했다.제왕부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원용의는 다급히 제왕부로 향했다.손왕부도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친왕, 부마, 관원, 남성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싹 들고 갔다. 남은 시녀들은 손왕부가 비자 불안하여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자리를 지켜야 하나 고민했다.손왕비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접객실에 사람을 모아 앉혔다.주명취는 향로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여기 있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거겠죠.”라고 말했다.손왕비는 어차피 이혼할 사람이니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인데 어쩜 저렇게 무정할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사람들은 안채에 앉히고 차와 간식을 대접했다. 위왕이 간 후에도 그가 데리고 온 여인은 손왕부에 남아있었지만 들어와 앉지 않고 밖에 서있었다.주명취는 원경릉 옆에 천천히 앉아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보았다.“너 지금 무섭지?”“뭐가 무서워?”주명취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불! 불은 싹 다 태워버리잖아. 검은 재만 남기고 싹.” 원경릉은 그녀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우문령은 주명취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왜 초왕비를 괴롭혀요? 그 입 다무세요.”“하하하하! 초왕비? 그거 알아? 원래는 내가 초.왕.비였어야 해!”경박스러운 주명취를 보고 문경공주는 크게 화를 냈다.“주명취. 말조심하세요. 비록 당신이 곧 황실을 떠날 테지만 주씨 집안에서도 당신이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주명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공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고귀하신 공주님들. 호호호”손왕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초왕비.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으세요.”원경릉도 주명취가 옆에 앉아 있는 게 불안했다. ‘혹시 알아? 저러다가 눈 돌아서 비녀로 날 찌를지
“사식아 네가 저 여자를 따라가거라. 진짜 불이라도 지르면 어떡해!”손왕비가 주명취가 대청을 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식이에게 소리쳤다.사식이는 우문호의 당부대로 손왕부에 남아서 원경릉을 지키려고 했으나 만약 주명취가 손왕부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원경릉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기에 주명취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손왕부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 제왕부에 불을 끄러 갔고, 부중의 다른 하인들은 사식이만큼 무공을 할 줄 몰랐다. 만약 주명취가 돌발행동을 한다면 남아있는 부녀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원경릉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식아 나가면서 대문을 닫아줘! 그리고 주명취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거든 꼭 막아야 해!”“예! 알겠습니다.”사식이는 원경릉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명취를 쫓아가며 대문을 닫았다.손왕비가 벌떡 일어나 원경릉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지금 여러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귀가 밝은 원경릉은 밖에서 들리는 예사롭지 않은 발소리에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손왕비를 보았다.공주와 그 자리에 있던 황족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뭐라고요?”“여러분 제가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손왕비는 손님들에게 침착하게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사식이가 대문을 닫으면서 손왕부의 하인들에게 뒷문과 측문까지 닫으라고 분부해놓았기에 손왕부로 들어오는 길은 모두 막혀있었다.손왕비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왜 이런 일이 하필 손왕의 생일에 일어났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났다. 만약 손왕부 행사에 초대되어 온 손님에게 사고라도 난다면 손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왕부 책임 집사를 불러 모든 하인들을 대청으로 모으라고 명령했다.생일잔치에 초대된 손님은 황족 또는 황족의 친척, 관원들의 가족이었고 저녁에 오기로 한 일부 손님들은 손왕부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현재로서는 어린아이 다섯 명을 포함해서 총 서른
사식이는 주명취를 발견하고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사식, 너는 내가 정말 불을 지를까 무섭니?”라고 물었다.“당신은 불 못 지를걸요?”“그럼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이유가 뭐야?” 주명취는 고개를 돌려 사식이를 보았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광기가 서려있었다.“당신을 따라온 게 아니라 여기 경치가 좋아서 온 겁니다.”지금 손왕부의 모든 출입문이 닫혀있기에 손왕부 내에 위험인물은 주명취 뿐이었다.주명취는 정원 한 귀퉁이에 노랗게 시든 나무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나무가 시들어서 좋아. 다 시들어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주명취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사식이를 보았다.“여기 앉아. 서있으면 얼마나 힘드니?”사식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사식이를 보았다.“너는 사람이 절망의 끝에 다다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사식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명취를 보았다.주명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귀 옆으로 흘러나온 머리를 쓸어 넘겼다.“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1년 전만 해도 난 주씨 집안에서 가장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지. 내가 초왕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적자인 제왕을 택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지 뭐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왕이 태자가 될 줄 알았어. 난 그럼 태자비가 되었을 것이고, 그럼 난 이 나라에 국모가 되었을 텐데……”“그럴 그릇이 안 되는데 야심만 커서 뭐 합니까?” 사식이가 차갑게 말했다.“네 말이 맞아. 야심만 컸지.” 주명취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식이를 보았다.“근데 이건 사실 야심의 문제가 아니야. 누구나 마음속에 원하는 게 있어. 사식이 너는 야심이 없니? 원하는 게 없어? 원경릉이라고 부처일 것 같아? 걔도 야심이 없을까?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속에 야심 하나쯤 다 있단 말이야. 어쩌겠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그것 또한 당신의 선택이니 누굴 탓할 수 없죠.”주명취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